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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역사 제45권 / 예문지(藝文志) 4 ○ 경적(經籍) 4
중국 서목(中國書目) 2 동국기사(東國記事)
등소경(鄧少卿)의 《봉사시초(奉使詩艸)》
○ ‘《봉사시초》의 서문’에,
“옛날에 장부라고 일컬어지는 자는 높은 데 올라가면 시를 읊고 산천에는 제사를 지내어서 모두 원대한 계략이 있음을 말하였다. 태사공(太史公)은 우혈(禹穴)을 찾아보고 오호(五湖)를 바라보아 문장이 드디어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필마(匹馬)로 외로이 가서 반표(班彪)는 유거감부(遊居堪賦)를 지었고, 수레를 타고 돌아와서 양수(楊修)는 편안히 쉴 누관(樓觀)을 지었다. 소자범(蕭子範)은 동정(東亭)을 바라보면서 다시는 가벼운 갖옷을 입고 살진 말을 탈 생각을 하지 않았고, 왕승유(王僧孺)는 지는 해를 전송하면서 명리(名利)에 대한 생각을 모두 잊었다. 그리고 마경(馬卿)은 격문(檄文)을 받들고 공작(卭筰)에서 군(郡)을 설치하려고 하였으며, 성사(星使)는 뗏목을 타고서 은하수에서 곧장 두우성(斗牛星)을 범하려고 하였다. 임연(任延)은 구진(九眞)에 법령을 세웠고, 장교(張喬)는 교지(交趾)에서 방략(方略)을 시행하였다. 위에서 말한 사람들은 모두 그들 지방에 사신으로 가서 우리의 위엄을 선포하여, 능히 황의(黃衣)로 하여금 치달리게 하고 청해(靑海)의 자취를 녹여 버린 것이니, 아, 성대하기도 하다.
내가 소경(少卿) 등 선생(鄧先生)의 시를 읽어 보고 선생께서 조선에 사신으로 가서 임금을 책봉하고 국교를 맺은 일을 살펴보니, 넘어간 곳은 험고한 마한(馬韓)과 낙랑(樂浪)의 지역이고, 통과한 곳은 멀고먼 구정(鉤町)과 누와(漏臥)의 지역이며, 지나간 곳은 염롱(冉隴)과 애뢰(哀牢)의 관문이고, 경과한 곳은 무덥고 독초(毒草)가 많은 곳이었다. 그런데도 선생은 필마를 타고 길을 떠나서 돌아올 때는 빈손으로 돌아왔는데, 먼 나라 사람에게 훈고(訓誥)를 말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실로 먼 이역 땅에 광채를 드날렸다.
그 웅대함으로 말하면 ‘중국과 오랑캐를 남두에서 구분하고, 수레바퀴와 문자를 온 천하가 같게 하였다.[夷夏分南斗 車書共一匡]’이고, 그 비장함으로 말하면 ‘원숭이가 슬피 울어 풍색이 어둡고, 돌들이 어지러워 물소리가 나뉜다.[猿哀風色暝 石亂水聲分]’이고, 그 맑고도 먼 것으로 말하면 ‘구름은 첩첩 산을 돌아 있어 길이 없는 듯하며, 경쇠 소리 긴 숲에서 솟아나 별유천지가 있다.[雲廻疊嶂疑無路 磬出長林別有天]’이고, 그 높고도 험준함으로 말하면 ‘버들 숲 밖의 누대는 허공 속에 솟아 있고, 술잔 앞의 해와 달은 푸른 바다로 달려간다.[柳外樓臺侵碧落 尊前日月競滄瀛]’이다. 이 시들은 모두 제주(題柱)하는 황급한 때에 지은 것으로, 아름다운 시구를 쏟아 낸 도량을 상상할 수가 있다. 선생이 사신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대개 그 시를 읽어 보면 알 수가 있다.
선생이 지은 요좌잡흥(遼左雜興)과 맹호행(猛虎行) 등 여러 편은 마치 가생(賈生)이 고질병을 통곡하는 듯한바, 지금에 이르러서도 그 말들을 모두 징험할 수가 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당시에 그의 시를 읽는 자들이 일찍이 이를 읽으면서도 그 뜻을 깊이 생각한 적이 없다.
아, 지금은 천자께서 여러 차례 치청(淄靑)의 조서(詔書)를 반포하여 사나운 호랑이로 하여금 발톱을 거두어들이게 하고 흉악한 올빼미로 하여금 울음소리를 바꾸게 하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동쪽으로 길이 통하지 않아 서쪽에서만 부질없이 탄식하고 있으니, 장차 탐인(撢人)이 실직하여 사신이 도달하기 어렵게 되지는 않을 것인가. 선생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평탄한 길을 가듯 가서 반드시 화락하고 아름다운 시를 읊을 것이다. 그러나 경월(卿月)이 이미 떨어져서 사성(使星)에 광채가 없으니, 비록 남긴 시가 찬란하다고는 하지만 덕스러운 음성이 없어진 것이다.
선생은 가학(家學)이 밝고 아름다워 봉황의 꼬리 같고 기린의 이마 같아 세상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뒷날에 용문(龍門)의 역사를 이어서 순열(荀悅)의 기록을 보탤 자가 있을 것인바, 나는 장차 선생이 노닐던 곳을 유람하면서 징험해 보고자 한다. 초소(楚騷)에 ‘곤륜산에 올라감이여, 사방을 바라보노라. 마음이 날아 올라감이여, 넓고 넓도다.[登崑崙兮四望 心飛揚兮浩蕩]’라고 이르지 않았던가. 이 시가 거의 선생과 더불어서 팔극(八極)의 밖에서 정신적으로 감응할 것이다.”
하였다. 《진함휘(陳函煇)의 소한산집(小寒山集)》
장정매(張廷枚)의 《봉사고려기사시(奉使高麗紀事詩)》
○ 참의(參議) 장정매는 삼한인(三韓人)으로, 시골(詩骨)이 부드럽고 화려하였는데, 그가 간행한 《춘휘당시초(春暉堂詩鈔)》의 서문을 내가 썼다. 그는 일찍이 고려(高麗)에 세 번이나 사신으로 가서 경물(景物)의 아름다움, 풍토(風土)의 기이함, 연향(宴饗)하고 영송(迎送)하는 절차에 대해 각각 기술하였다. 그 시서(詩序)에 이르기를, “고려 사람들은 남자는 두건을 쓰는데, 이름을 절풍건(折風巾)이라고 한다.” 하였으니, 《양서(梁書)》와 《위서(魏書)》 두 책의 고구려열전(高句麗列傳)과 딱 들어맞는다. 내가 그에게 준 시에 이르기를, “한 차례 장양궁의 사냥놀이 참가했고, 세 차례나 선화의 봉사도를 그리었네.[一參羽獵長楊乘 三繪宣和奉使圖]” 하였는데, 이는 대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용성시화(榕城詩話)》
[주-D042] 태사공(太史公)은 …… 되었다 :
태사공은 《사기(史記)》를 지은 사마천(司馬遷)을 가리킨다. 사마천은 천성이 유람하기를 좋아하여 일찍이 남쪽으로 강수(江水), 회수(淮水)를 유람하고 회계(會稽)로 올라가서 우혈(禹穴)을 보고 구의산(九疑山)을 보았으며, 북쪽으로는 문수(汶水)와 사수(泗水)를 건너 제로(齊魯) 지방을 거쳐 양(梁)과 초(楚) 지방까지 두루 유람하였다. 이때 얻은 산천에 대한 지식으로 인해 명문장가가 되었다고 한다.《史記 卷130 太史公自序》
[주-D043] 반표(班彪) :
동한(東漢) 때의 사람으로, 처음에는 외효(隗囂)를 따르다가 뜻이 맞지 않아 두융(竇融)을 따랐다. 역사 찬술에 뜻을 두어 《한서(漢書)》를 저술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죽었는데, 그의 아들인 반고(班固)가 이를 완성하였다.《後漢書 卷40 班彪列傳》
[주-D044] 양수(楊修) :
후한 때의 사람으로 학문을 좋아하고 재주가 뛰어났다. 조조(曹操)의 주부(主簿)로 있으면서 조조와 재주를 겨루고, 조조의 뜻을 미리 알아맞혔다가 조조의 시기를 받아 살해되었다.《三國志 魏書 卷21 王粲傳 楊修》
[주-D045] 소자범(蕭子範) :
양(梁)나라 사람으로 자가 경칙(景則)이다. 매우 효성스러워서 거상(居喪)하면서 몸을 해치기까지 하였다. 대사마를 지냈으며, 문학(文學)에 뛰어났다.《梁書 卷35 蕭子範列傳》
[주-D046] 왕승유(王僧孺) :
원문에는 ‘王僧儒’로 되어 있는데, 《양서(梁書)》 권33에 의거하여 ‘王僧孺’로 바로잡았다. 왕승유는 양나라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글을 지을 줄 알았으며, 고서(古書)를 좋아해서 수만 권을 모았는데, 이들 대부분이 진본(珍本)이었다.《梁書 卷33 王僧孺列傳》
[주-D047] 마경(馬卿) :
한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를 가리킨다. 사마상여의 자가 장경(長卿)이므로 그렇게 칭하는 것이다.
[주-D048] 공작(卭筰) :
한나라 때 서남 오랑캐인 공도(卭都)와 작도(筰都)로, 대략 사천(四川)과 서창(西昌) 일대 지방을 가리킨다.
[주-D049] 성사(星使)는 …… 하였다 :
성사는 장건(張騫)을 가리킨다.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한나라 무제(武帝)가 장건을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보내 황하(黃河)의 근원을 찾게 하였는데, 장건이 뗏목을 타고 가다가 견우(牽牛)와 직녀(織女)를 만났다.” 하였다.
[주-D050] 임연(任延)은 …… 세웠고 :
임연은 한나라 때 사람으로 자가 장손(長孫)이다. 구진(九眞)은 남월(南越) 지방의 지명으로, 한나라 때 구진군(九眞郡)을 세웠던 곳인데, 지금의 안남(安南) 일대이다. 한나라 건무(建武) 초에 임연이 구진의 태수가 되었는데, 구진 지방은 본디 사냥을 생업으로 삼아 농사를 지을 줄 몰랐다. 이에 임연이 농기구를 만들어서 농사짓는 법을 알려 주었으며, 또 결혼하는 예법(禮法)이 없어서 부자간의 윤리나 부부의 도가 없었는데, 임연이 남녀를 각각 나이에 맞게 서로 맺어 주었다.《後漢書 卷76 循吏列傳 任延》
[주-D051] 장교(張喬)는 …… 시행하였다 :
장교는 한나라 순제(順帝) 때 사람으로, 만족(蠻族)이 중국을 쳐들어왔을 때 여러 주군(州郡)에서 그들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있었는데, 장교가 교주 자사(交州刺史)가 되어 이들을 진압하였다.《後漢書 卷86 南蠻西南夷列傳》
[주-D052] 황의(黃衣) :
누런 옷으로, 본디는 황제가 입는 옷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황제의 사신이 입는 옷을 말한다.
[주-D053] 청해(靑海) :
중국 중부의 서쪽에 있는 지명이다. 황하의 발원이 되는 호수인 청해(靑海)가 있어서 이렇게 이름하였으며, 서쪽 변경의 오랑캐족들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주-D054] 구정(鉤町)과 누와(漏臥) :
구정이 원문에는 ‘구가(鉤
)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았다. 구정은 중국의 서남쪽에 있었던 소국(小國)으로, 지금의 운남성(雲南省) 통해현(通海縣) 지역에 있었다. 누와는 운남성 나평현(羅平縣) 일대를 가리킨다.
[주-D055] 염롱(冉隴)과 애뢰(哀牢) :
염롱은 사천성(泗川省) 무현(茂縣) 지역에 있던 서이(西夷)인 염롱(冉䮾)의 잘못인 듯하다. 애뢰는 중국의 서남방에 있는 소수 민족의 이름이다.
[주-D056] 가생(賈生) :
한나라 가의(賈誼)를 가리킨다. 가의는 글을 잘 지었는데, 문제(文帝) 때 박사(博士)가 되어 정삭(正朔)을 고치고, 복색(服色)을 바꾸고, 법도(法度)를 제정하고, 예악(禮樂)을 일으켰다. 그 뒤에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가 되어 나가면서 상수(湘水)를 건너다가 조굴원부(弔屈原賦)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대개 자신의 처지를 비유한 것이다. 다시 양회왕(梁懷王)의 태부로 옮겨졌는데, 양회왕이 낙마(落馬)하여 죽자, 가의 역시 상심하여 죽었는데, 그때 나이가 겨우 33세였다.《史記 卷84 賈生列傳》
[주-D057] 치청(淄靑) :
본디 당나라 때의 방진(方鎭) 이름으로, 치청평로(淄靑平盧)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열하성(熱河省) 남부와 하북성(河北省) 북부 일대를 가리킨다.
[주-D058] 탐인(撢人) :
《주관(周官)》 하관(夏官)에 나오는 관직명으로, 왕의 뜻을 서술하여 천하에 알리는 관직이다.
[주-D059] 경월(卿月) :
《서경》 홍범(洪範)에, “임금은 해를 살펴야 하고, 귀족과 관리들은 달을 살펴야 하며, 낮은 관리들은 날을 살펴야 합니다.[王省惟歲 卿士惟月 師尹惟日]” 한 데서 나온 말로, 뛰어난 재신(宰臣)을 가리킨다.
[주-D060] 사성(使星) :
사신(使臣)을 가리킨다.
[주-D061] 용문(龍門)의 역사 :
역사서(歷史書)를 가리킨다. 용문은 《사기》를 지은 사마천(司馬遷)이 태어난 곳으로, 사마천의 별호(別號)로 쓰인다.
[주-D062] 순열(荀悅)의 기록 :
역사가의 기록을 말한다. 순열은 후한 때의 사람으로, 저술하기를 좋아하여 《신감(申鑑)》, 《한기(漢紀)》 등을 저술하였다.
[주-D063] 초소(楚騷) :
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離騷)를 말한다.
[주-D064] 삼한인(三韓人) :
《국조기헌유징(國朝耆獻類徵)》 권170에는 ‘漢軍人’으로 되어 있다. 장정매는 청나라 사람이다.
[주-D065] 고려(高麗) :
여기서는 조선을 가리킨다.
[주-D066] 절풍건(折風巾) :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삼국의 각 지역에서 성행하던 가장 오래된 고깔형의 관모(冠帽)이다
중종실록 35권, 중종 13년 12월 25일 庚寅 2번째기사 1518년 명 정덕(正德) 13년
성절사 방유령을 인견하고 중원의 일을 묻다
국역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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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절사(聖節使) 방유령(方有寧)이 경사(京師)로부터 돌아왔다. 상이 인견(引見)하고 중원(中原)의 일을 물으니, 유령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 9월 12일에 북경(北京)에 도착했는데, 거기서 들으니 황제는 지난 7월 초 9일에 선부(宣府)로부터 대동(大同)으로 행차하셨고, 9월에는 대동으로부터 편두관(偏頭關)으로 들어갔으며 이어 섬서(陝西) 유림위(楡林衛)로 향했다 하는데, 경사로부터 약 1천 5백여 리나 된다 했습니다. 황제께서는 전렵(田獵)도 하시고 미행(微行)도 하시며 혹 민가에 투숙도 하시어 행동이 일반 사람과 구분할 수 없게 했다고 하였습니다. 또 소주(蘇州) 상숙현(常熟縣)에서는 금년 5월 15일에 백룡(白龍) 한 마리와 흑룡(黑龍) 두 마리가 구름을 타고 내려왔는데, 입에서는 불길을 토하고, 우레와 비바람이 크게 일어 민가 3백여 가구를 휩쓸었으며, 배 10여 척을 공중 높이 빨아올렸는데 조각이 나 땅에 떨어지자 50여 명의 남녀가 놀라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원에도 지진의 변고가 있었느냐?"
하매, 유령이 아뢰기를,
"중원에도 지진이 있었는데 우리 나라와 같은 날이었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주청사(奏請使)의 기별은 어떻더냐?"
하매, 유령이 아뢰기를,
"주청사가 처음 상국에 도착해서 예부에 주본(奏本)을 올리니 낭중(郞中) 정원(鄭元)은 막연하게 대하였으며, 낭중 강용(姜龍)은 온화하게 대하였다 합니다. 다음날 예부에서는 객부조례(客部條例)를 민가(民家)에서 얻었는데 우리 나라의 일을 갖추 실었다 하며, 상서(尙書) 모징(毛澄)이 이 책은 비록 사삿집에서 나왔지만 믿을 만하다고 했다 합니다. 남곤(南袞) 등이 예부에 상서(上書)하자 예부에서는 보고 칭찬했다 합니다. 10월 초 10일에 태감(太監)이 부본(副本)을 가지고 행재소(行在所)로 향했는데, 만약 황제께서 유림에 계시고 더 깊이 들어가시지 않았다면 거의 쉽게 성지(聖旨)를 받들어 돌아올 수 있어, 이번 달 20일 사이에 출발하면 정월에는 들어올 수 있으나, 황제 행차의 원근을 기필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황제의 돌아오는 기일을 그곳 사람은 알더냐?"
하매, 유령이 아뢰기를,
"모르옵니다."
하였다.
>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2년 병오 > 9월 21일 > 최종정보
영조 2년 병오(1726) 9월 21일(경술) 맑음
02-09-21[23] 진수당(進修堂)에서 소대를 행하는 자리에 참찬관 조명신 등이 입시하여 《송감(宋鑑)》을 진강하고, 《절작통편(節酌通編)》을 진강하는 문제, 신하들의 시호(諡號)를 의정(議定)하는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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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酉時)에 상이 진수당(進修堂)에 나아갔다. 소대를 행하러 신하들이 입시한 자리이다. 참찬관 조명신(趙命臣), 시강관 권적(權𥛚), 검토관 김용경(金龍慶), 가주서 이봉명(李鳳鳴), 기사관 이흡(李潝)ㆍ민형수(閔亨洙)가 입시하였다. 권적이 《송감(宋鑑)》을 읽었는데 ‘효종황제융흥원년(孝宗皇帝隆興元年)’에서 ‘폄장준위추밀사(貶張浚爲樞密使)’까지였다. 상이 이르기를,
“하번(下番)이 읽으라.”
하니, 김용경이 ‘안치초토사이현충우균주(安置招討使李顯忠于筠州)’에서 ‘주자왈 남도이래 사대부창위화의(朱子曰南渡以來士大夫倡爲和議)’까지 읽었다. 상이 이르기를,
“승지가 읽으라.”
하니, 조명신이 ‘갑인삭 일유식지(甲寅朔日有食之)’부터 읽었다. 상이 이르기를,
“주서가 읽으라.”
하니, 이봉명이 ‘병술이년(丙戌二年)’에서 ‘하사월 이증적위안덕군(夏四月以曾覿爲安德軍)’까지 읽었다. 상이 이르기를,
“한림이 읽으라.”
하니, 이흡이 ‘오월 기복유공차자(五月起復劉珙箚子)’에서 ‘위침전조(爲寢前詔)’까지 읽었다. 상이 이르기를,
“하번이 읽으라.”
하니, 민형수가 ‘추칠월 가사천선무사(秋七月加泗川宣撫使)’에서 ‘위지책론진사(謂之策論進士)’까지 읽었다. 상이 이르기를,
“하교를 기다리지 말고 경연관은 먼저 문의(文義)를 아뢰라.”
하니, 한원진(韓元震)이 나아와 아뢰기를,
“사호(史浩)가 섬서(陝西)를 포기하자고 논의하였는데, 이 일은 범범하게 본다면 그다지 해로울 것이 없는 듯하지만, 효종(孝宗)이 중원(中原)을 회복하지 못한 것은 실로 여기에서 연유합니다. 대체로 천하의 지형이 서북쪽은 높고 동남쪽은 낮기 때문에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석권(席卷)하기는 쉬워도 동남쪽에서 서북쪽으로 올려다보며 공격하기는 어렵습니다. 예로부터 제왕들은 모두 서북쪽에서 흥성하여 동남쪽에서 멸망하였습니다. 이것이 천하의 대세이니 이 점을 몰라서는 안 됩니다. 고종(高宗) 초기에는 섬서와 형초(荊楚) 지역이 아직 보전된 상태였고 하북(河北)의 군현들이 아직 다 함락되지는 않은 상태였으니, 이때가 바로 중원을 회복하기 쉬운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고종은 이 기회를 놓쳤습니다. 효종 초기에는 하북과 형초는 잃었지만 섬서 지역은 아직 보전하고 있었습니다. 섬서 지방이 북쪽으로는 중원과 통하고 남쪽으로는 오(吳)ㆍ월(越)과 연결되며 또 상류(上流)에 위치하였으니, 이곳이야말로 기필코 지켜 내야 할 지역이었습니다. 중원을 회복하는 일은 오직 이 한 지역이 의지할 만하였는데, 사호의 간사한 논의에 미혹되어 끝내 그 지역을 포기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양자강(揚子江)을 가운데 놓고 그 남쪽 지역이나 지킬 뿐 더 이상 중원을 제압할 형세가 없었으니, 또한 어떻게 출병하여 승패를 다투어 중원 회복을 꾀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러한 사기(事機)에 관련된 점에 대해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 【태백산사고본】 18책 35권 9장 A면【국편영인본】 15책 499면
· 【분류】
외교-명(明) / 과학-천기(天氣) / 과학-생물(生物) / 출판-서책(書冊)
○聖節使方有寧, 還自京師, 上引見, 問中原之事。 有寧曰: "臣去九月十二日, 到北京, 聞皇帝去七月初九日, 自宣府幸大同, 九月自大同, 入偏頭關, 因向陝西 楡林衛, 去京師約一千五百餘里。 皇帝或爲田獵, 或爲微行, 或投宿民家, 行止與凡人不分云。 又聞蘇州 常熟縣, 本年五月十五日, 有白龍一、黑龍二, 乘雲下降, 口吐火焰, 雷電風雨大作, 捲去民居三百餘家, 吸船十餘隻, 高上空中, 分碎墜地, 男女驚死者五十餘口云, 然未可信也。" 上曰: "中原亦有地震之變否。" 有寧曰: "中原亦有地震, 而其震與我國同日也。" 上曰: "奏請使之奇何如? 有寧曰: "奏請使初到上國, 呈奏本于禮部, 則郞中鄭元, 對之邈然, 郞中姜龍, 接之和裕。 翌日禮部得《客部條例》於人家, 具載我國之事, 尙書《毛澄》以爲此書, 雖出私藏, 頗有可信。 南袞等上書于禮部, 尙書見之稱善, 十月初十日, 太監齎副本, 向行在所。 若皇帝猶在楡林, 而不更深入, 則庶幾易得奉聖旨而還, 今月二十日間發程, 而正月可入來矣。 但皇帝行在遠近, 未可必也。" 上曰: "皇帝還期, 其處人知之乎?" 有寧曰: "亦不知。
성호사설 제2권 / 천지문(天地門
성조成祖 때에 와서는 중국과 오랑캐의 중간지점에 자리잡아 북쪽 왕국을 없애고 남으로 향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마치 높은 지붕 위에서 병의 물을 내려쏟는 것과 같이 생각하였으므로 모든 적을 숙청한 나머지의 위력을 가지고 먼저 장청새(長淸塞)의 남쪽을 뚫고 나가서 북두(北斗)를 보고야 말았으니 웅대하고 용감하다고 말할 수 있다.
至成祖則以為跨居華夷之交殄滅北庭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