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양조씨는 후삼국 시대인(時代人) 조맹(趙孟)을 도시조로 하고 인구 12만명(2015년)이다. 조맹은 풍양현(豐壤縣, 지금의 남양주시 진건읍 일대)에서 태어나 70세에 고려 왕건의 참모가 되어 삼한개국공신3등에 오르고 조맹이란 성명(姓名)을 하사받았다. 조맹이후의 세계(世系)를 실전하고 조선세종 무렵부터 조맹을 도시조로 하고 각자 확인되는 선조를 기세조로 하여 3개파(전직공파, 평장사공파, 상장군파)로 분할되었다. 조선시대 과거급제자 181명, 정승7명, 대제학4명을 배출하였고 안동김씨와 세도다툼을 하였다.
* 공빈김씨(1553~1577)는 선조의 후궁으로 임해군과 광해군을 낳고 광해군을 출산한지 2년만에 산후병으로 사망하였는데 임해군은 성격이 난폭 방탕한 탓으로 광해군이 왕이 되었다.
2. 두 묘의 명암
* 조맹의 묘는 남양주 진건읍 송능리산53-4에 있고 그 위로 약20미터 거리(송능리 318-2)에 공빈 김씨 묘(왕후로 추서되었을때는 성릉라 하고 후궁일때는 成墓라 한다)가 있다.
* 공빈이 죽자 왕실지관은 조맹의 묘위에 자리를 정하였고 이에따라 주변 묘는 이장해야되는데 후궁이라는 이유로 선조가 그냥 두어도 좋다고 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1608년) 능으로 격상시키게 되어 이장해야 될 처지이엇는데 조정에서 이장하지 않더라도 봉분을 없애고 나무를 심어라고 했다. 이에 조씨들은 봉분을 없앴는데 인조반정(1623년)으로 광해군이 쫓겨나고 성릉에서 성묘로 강등됨에 따라 후손들이 인조8년(1603년) 상소를 하여 봉분을 복원하였다.
3. 간산
* 다움지도로 보면 중국이 협소하고 너절하여 혈이 될 것 같지 않았으나 묘역에 올라가서 보니 높은 곳에 있는 덕택에 원경이 보이고 나무 틈새로 보이는 안산쪽이 좋았다. 성묘는 과룡에 얹쳐 있어 혈이 되지 않았다. 이조 왕실지관의 실력이 이정도 밖에 안되는가 실망스러웠다. 조맹의 묘는 월아 뒤에서 굼틀거리며 기를 응축하였다가 내려가는 기세가 대단했다. 조맹 묘는 이것이 장점이다. 사람들은 비룡승천형으로 조선8대혈이라 한다. 그러나 대혈이 되려면 기상이 깨끗하고 국세가 원국(垣局)으로 빙둘러 짜여야 된다. 중등중급이다(20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