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림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이다. 1345년(충목왕 1)에 창건했는데,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인 달마(達磨) 대사가 허난 성[河南城]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서 9년 동안 면벽좌선(面壁坐禪)을 했다는 고사(故事)에서 절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보광전(普光殿 : 보물 제825호)만 빼고 모두 소실되었는데 10년 뒤에 우화루(雨化樓)만 재건되었다. 그뒤 사적이 없이 내려오다가 1923년에 황성렬 주지가 나한전과 영원전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광전 우화루·영원전·나한전·요사채 등이 있다. 절 입구에는 부도군이 있다.
숭림사 입구 안내석
숭림사 일주문
숭림사 부도전
부도전은 일주문을 지나 세심교를 건너기 바로 전 오른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총 4기의 부도로서 모두 조선후기 및 말기에 조성된 것으로 기대와 지붕을 갖춘 보주형이며, 비석지붕을 올려놓은 것도 있고 제대로 짝을 갖춘 것이 드물어 주목할 만한 특징은 없다.
2기의 부도에는 명문과 조성연대가 새겨져 있는데, 하나는 무애당 선사 곧 황성렬스님의 부도이며, 또 하나는 유심당 일훈 대사의 부도이다. 명문이 없는 부도 2기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일명부도들로, 하나는 『강희이십삼년갑자입』이라는 절대연대가 새겨져 있어 1684년(숙종 10)에 세워진 것을 알 수 있다. 또 하나는 높은 대좌 위에 구형의 탑신과 사각당형의 옥개석을 올린 모습이며 1684년에 조성된 것과 흡사한 모습이다.
숭림사 전경
숭림사 범종각
숭림사 우화루
우화루는 보광전으로 진입하는 정문으로, 숭림사의 중심구역 전면에 위치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집으로 『우화루중수기』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 석덕 스님이 창건한 후, 1819, 1855, 1964, 1992년에 각각 중건되었다고 전한다.
건물은 밖에서 보면 짧은 동자주를 받친 이층의 누각형식이지만, 안쪽은 중정과 높이가 같은 단층으로 개방되어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이는 숭림사의 대지가 협소하고 경사가 완만한 편이어서 전면 누각을 높게 만들어 누하로 진입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전후면이 다른 누각형식과 진입방식은 조선중기에 중창된 대부분의 산지가람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방식으로, 누각형식이 갖는 외관의 장대함과 실질적인 쓰임새를 중시한 당시 건축미감을 느낄 수 있다.
숭림사 보광전
보물 제825호
지혜의 빛으로 세상을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보광전은 17세기 이전에 지은 건물로 추정하고 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건물 옆면에는 공포를 배치하지 않았다. 건물 안쪽은 보 끝에 용머리를 조각해 놓았고, 기둥 윗부분에 설치된 건축 부재들은 각각 연꽃, 용의 몸, 용 앞발이 여의주를 쥐고 있는 모양으로 장식하고 있다.
법식과 기법이 특징인 조선 후기 건축물로 건축 연구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자료로 주목받는 문화재이다.
숭림사 보광전 목조 석가여래상
숭림사 보광전에 모셔진 석가여래좌상으로, 1613~1614년에 만들어졌다. 전체높이 110㎝, 어깨폭 48㎝, 무릎폭 77㎝로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188호로 지정되어 있다.
『숭림사재산대장(崇林寺財産臺帳)』 「보광전석가모니불상복장기문(寶光殿釋迦牟尼佛像腹藏記文)」에 의하면 1613년(광해군 5) 겨울 초파일에 조성하기 시작하여 다음해인 1614년 봄 초파일에 완성했으며, 왕과 왕비, 왕세자의 만수무강을 위해 조성되었다고 전한다. 대장에는 박주질이 시주했으며, 당지 주지와 화주, 별좌 등 조성불사에 참여하였던 스님의 직급과 명칭이 나열되어 있다.
원래 약사불과 아미타불이 함께 있는 삼세불이었으나 1986년 이후 도난당하여 현재는 석가불만 전한다. 석가불은 매우 큰 규모로 안정감 있고 중후한 느낌을 주며, 방형의 얼굴에 눈이 작고 미소를 머금은 인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나발 위에는 중앙계주와 정상계주를 두어 원만한 느낌을 준다. 비교적 갸름한 얼굴에 이목구비는 다소 안쪽으로 몰린 듯하지만, 두툼한 눈두덩이, 짧은 두 귀, 오뚝한 콧날 등 17세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숭림사 영원전
1697년(숙종 23)에 서립된 영원전은 숭림사 북쪽 화산기슭에 있던 성불암(成佛庵)의 칠성각을 1926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온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자연석 두벌대의 기단에 막돌초석을 얹고 원기둥을 사용하여 다포를 올린 모습이다. 건물의 어칸에는 서연민(徐延珉)이 쓴 ‘영원전’ 편액과 1960년대에 쓴 ‘‘영원전건축연대’ 현판이 걸려 있으며, 건물 외부에는 차분하고 단정한 황색, 청색의 단청이 장엄되어 있다.
영원전이라는 전각이름은 명부전, 지장전, 시왕전의 별칭이며, 조상의 천도를 위한 근본도량으로서 다른 사찰의 명부전과 같이 목조의 지장보살상을 주불로 봉안하고 있다.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뒷벽에 맞대어 'ㄷ'자형 불탁을 가설해 놓았다. 불탁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 보처에 무독귀왕과 도명존자를 모셨으며, 그 주위에 시왕과 판관, 녹사, 동자, 인왕상을 봉안하였다. 조각수법은 지장보살상과함께 모두 1634년(인조 12)에 조성된 것이며, 전하는 바에 의하면 나한전 나한상과 함께 옥구 보천사(普天寺)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목조 지상보살 외 25권속
도 유형문화재 189호
숭림사 영원전에 모셔져 있는 지장보살상과 시왕 및 그 권속들로, 중앙의 목조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 무독귀왕 및 시왕, 판관, 사자, 동자, 인왕 등 모두 25구의 상들이 배치되어 있다.
『숭림사재산목록대장(崇林寺財産目錄臺帳)』에 의하면 1634년(인조 12)에 조성되었으며, 모두 전북 옥구에 있던 보천사(普天寺)에서 1925년에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이 상들이 봉안된 영원전 역시 성불암의 칠성각으로 사용되던 것을 1926년에 이건한 것으로, 보천사의 불상들을 봉안하기 위해 옮겨온 것으로 추정된다. 재료는 중앙의 지장보살은 목조상이나 지장권속은 소조상으로 조선후기 불상 조성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숭림사 나한상
나한상은 1910년 옥구 보천사(普天寺) 성불암에서 모셔온 것으로, 일제강점기 때 일인들에 의해 일본으로 옮겨지다가 풍파로 인해 건너가지 못하고 이곳에 자리잡게 된 것이라 전한다. 1930년대에 개체, 개금되었으나, 조선후기 나한상의 부드러운 미소와 인자한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숭림사 나한전 보수공사
숭림사 정혜원
정혜원은 보광전 마당 서쪽에 위치한 요사채로, 『정혜원상량기문(定慧院上梁記文)』에 따르면 1591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644년(인조 22)에 중건한 것이라 한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건물로, 평면구성은 부엌 쪽에 한칸반을 덧붙여 퇴칸을 구성한 특이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숭림사 수조
숭림사 오층석탑
오층석탑은 보광전 앞마당인 중정 동쪽에 치우쳐 있다. 단층기단으로 기단부에 다양한 수인을 취한 사여래(四如來)가 시문되어 있으며, 그 위로 탑신과 옥개, 상륜부를 갖추고 있다.
숭림사 석조대좌
석조대좌는 보광전 서측의 정혜원 굴뚝 옆에 있다. 불상의 좌대로 짐작되는 연화문 좌대로, 중대석은 없어지고 상대석과 하대석만이 남아 있다. 사각형 복련과 앙련 등 연화문 조각이 섬세한 고려말기 이전의 양식을 보여준다.
숭림사 산신각
숭림사 산신 탱화
숭림사 찾아가는 길
1) 서해안 고속도로 군산I.C.→724 지방도→나포→웅포→숭림사
2) 호남고속도로 논산I.C.→강경→23번 국도→용안면→711번 지방도→성당리→맹산리→숭림
3) 호남고속도로 익산I.C.→ 미륵사지→함열읍→함열리 방향 724번 지방도→숭림사
첫댓글 숭림사! 아담한 사찰이 정감이 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