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월도 중순으로 가고 있습니다. 동네 뒤편 울타리에는 무궁화가 피어 있습니다. 이제는 두세 송이 피어있고 이미 피어있던 꽃봉오리는 시들시들 떨어지고 있습니다. 기억하기로는 지난 6월 말경부터 꽃을 피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3개월 반 정도 꽃을 보는 것입니다. 물론 열지 못한 꽃봉오리도 많습니다. 그대로 마르며 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맞으리라 생각합니다. 태어나지도 못하고 끝나는 것이지요. 우리네 생명도 그렇게 지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엄마의 자궁 안에서 끝나는 경우나, 태어난다 해도 얼마가지 못하여 떠나는 아이도 있습니다. 안타깝지요. 10개월 가까이 몸안에 품었던 엄마의 마음은 어떨까요? 여기저기 피어보지도 못한 봉오리들을 보며 비슷한 생각을 해봅니다.
유럽과 중동의 전쟁은 그냥 계속되고 있습니다. 특히 일반인들의 희생만 자꾸 늘어가고 있는 듯합니다. 피투성이 어린아이가 들것에 실려가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어져야 할까요? 우리나라는 전쟁의 위협은 있어도 전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니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이 좁은 땅에서 다시 그 때보다 더욱 성능이 좋은 포탄들이 오락가락한다면 같이 죽자는 이야기밖에 안 됩니다. 한 마디로 미친짓이지요. 저들도 잘 알 것입니다. 자기를 지키겠다고 휴전선을 콘크리트 벽으로 막을 모양입니다. 맞는 말이기는 한데 사실은 자기 측 주민들이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한 장벽일 것입니다. 그 돈으로 백성 먹여살릴 생각은 하지 않고 말입니다.
날씨는 확실하게 가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은 시끄러워도 하늘과 땅은 자기 때를 아름답게 그리고 있습니다. 돈 내는 것 아니니 맘껏 즐길 수 있습니다. 행복한 주말을 빕니다. ^)^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니라” (신명기 22 : 5)
<대도시의 사랑법>
처음에는 제목을 보며 한 동안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왜? 아니 나라가 다른 것도 아니고 인종이 다른 것도 아니고 문화가 다른 곳의 이야기도 아닐 텐데 뭐가 특별하다고 이런 제목을 붙이지? 도시와 시골의 사랑법이 다른가? 뭐가 다른데? 쉽게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일단 사랑 이야기니까 관심을 가져보았습니다. 도대체 뭐가 다른지 궁금하기도 했고요. 나 자신이 도시에서만 자라고 지냈기에 뭐가 특별한지도 생각해보고 싶었습니다. 시골생활이라고 해봐야 어려서 방학기간 외갓집 놀러가 일주일 보름 정도 지내다 오는 것이 다였으니 말입니다. 특별할 것도 없이 그냥 놀다 오는 정도지, 그 때 사랑 타령할 나이도 아니었습니다.
일단 이것을 생각해볼 수는 있겠다 싶습니다. 사람을 접할 기회가 많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시골보다야 주민들이 많으니까요. 물론 사람이 많다고 해도 정비례하여 교제 범위도 넓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사람마다 특징이 있으니 말입니다. 사람들과 사귀는 일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고 사람들과의 교통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이 많건 적건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스스로 쏘다니며 교제의 범위를 확대해나가기도 합니다. 다만 도시에는 보다 많은 기회가 생길 수 있습니다. 사람도 많고 그럴 만한 환경을 쉽게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일단 수가 많으니 마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교제를 만들 수 있습니다.
‘사랑’이라고 하면 일단 이성 간에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을 떠올립니다. 그게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관심있게 보던 이성이 동성과 키스하는 장면을 발견하게 되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요? 바로 그 점에서 남다르다 싶습니다. ‘재희’가 ‘흥수’의 바로 그 장면을 목격한 것입니다. 그런데 별 반응이 없습니다. 그런가? 하는 정도로 지나칩니다.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하는 태도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 두 사람이 한결 쉽게 동거생활로 들어갔는지도 모릅니다. 맞습니다. 서울에서의 집값은 고사하고 월세도 웬만큼 벌어서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두 살림보다는 하나로 묶어서 사는 것이 낫다는 말이지요. 개인의 부담을 서로 줄이는 것입니다.
흥수는 재희에게 이성으로 상대하지 않습니다. 그런 관심조차 없습니다. 재희 또한 그런 위험(?)을 전혀 느끼지 않고 동거할 수 있습니다. 서로 몸을 부딪치는 경우가 있다 해도 반응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성이지만 동성이 함께 살고 있는 것이나 진배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제삼자가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겠지요. 그래서 오해가 발생합니다. 어쩌겠습니까? 모르는 사람이라며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대로 판단할 수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그 때 오히려 당당하게 사실을 인정하고 대듭니다. 이 사람 게이예요. 함께 살아도 우리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뭐가 이상합니까? 서울에서 두 집 살림하느니 한 집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유리한데요.
흥수는 자신의 처지를 대놓고 살지 못합니다. 우리 사회가 아직은 이런 문화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아직도 이 문제로 찬반논쟁이 시끄럽기도 합니다. 그런 속에서 이 소수자들이 어려움을 감내하며 숨어지내는 것입니다. 과감하게 드러내놓고 사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많은 당사자들은 되도록 감추고 그늘에서 지내고 있는 줄 압니다. 그러니 흥수의 어머니도 아들의 그런 형편을 어쩌지 못합니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신앙에 열을 올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들을 위해서 나름 매달리는 것이지요. 아들 하나 바라고 키워왔을 텐데 얼마나 기막힌 현실이겠습니까? 피할 수도 없고 인정하기도 힘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엄마의 심정이랄까요.
흥수가 사회적 약자를 그리고 있다면 재희는 약자이면서 자신을 확실하게 드러내며 사는 사람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기야 요즘 여자라고 꼭 약자는 아닙니다. 여자도 남자 하는 일 대부분 다 합니다. 문제는 정신적 심리적 문제입니다. 그 점에서 매우 자유분방한 자세와 그런 생활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사실 흥수와의 동거도 쉽지 않은 일일 텐데 말입니다. 감히 누가 그런 생활에 도전할 수 있겠습니까? 재희였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두 사람은 분명 다르지만 다르지 않게 살아갑니다. 그런 점에서 서로 힘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결국은 훙수도 스스로 인정하고 과감히 자기를 드러냅니다. 한결 마음이 편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길을 갑니다.
결국 재희도 제멋대로의 삶을 정리하고 결혼으로 골인합니다. 그 자리에 흥수가 특별공연을 해줍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아마도 우정(?)을 이어가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 흔치 않습니다. 흥수와 비슷한 경우는 얼마든지 있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러나 재희의 경우 찾아내기 쉽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대단한 여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부러워할 수는 있어도 아무나 쉽게 따라할 삶이 아닙니다. 영화는 두 사람의 약자의 삶을 보여주면서 약하지 않게, 기죽지 말고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그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현실이 아직은 여기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Love in the Big City)을 보았습니다.
오늘 지켜야 할 절기는?
우리나라에서 지키는 명절이 몇 개나 됩니까? 잘 몰라도 두 개만은 확실하게 알고 있지요. 설날과 추석입니다. 정월대보름이나 단오 같은 것은 잘 모릅니다. 국가적인 절기에는 무엇이 있나요? 3대 국경일로 정한 것이 있지요? 알고 있습니까? 삼일절, 광복절 그리고 개천절입니다. 새해 되면 금년에 공휴일이 몇 개나 있나, 그건 관심이 있는데 절기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 안 쓰지요. 달력을 보면 무슨 날들이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관련하여 일하는 사람들이나 알까, 일반국민들은 그다지 관심도 없이 지낼 것입니다. 아무튼 세상에서 그렇다 치고 우리 하나님 백성이 지켜야 할 절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며 명하신 절기가 있지요. 명령입니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이란 뜻입니다. 신 16 : 16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절기 3 가지가 나옵니다.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 이 날에는 반드시 어디로 가야 합니까? 하나님 택하신 곳 성전으로 가야 합니다. 성전이 어디 있었습니까? 예루살렘. 거기 다 모여야 합니다. 우리가 설날이나 추석에 고향으로 집합하듯이 말이지요.
사실 이 3대 절기보다 더 중요하고 대표적인 절기가 있습니다. 십계명에 명시된 절기입니다. 십계명에 대한 말씀이 출 20장과 신 5장에 나옵니다. 10가지 계명을 말씀하지요. 한절씩의 명령이 따르지만 우상에 대한 경고의 말씀은 3절에 걸쳐서 설명이 나옵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대한 말씀은 4절이 할애되고 있습니다. 어느 쪽에 무게가 있습니까? 안식일에 더 무게를 두신 것입니다. 한번 보겠습니다. 출 20 : 8 - 11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안식일은 십계명에 명시된 가장 기본적인 절기입니다. 모든 절기에 우선하여 지켜야 할 절기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이 절기 지킬 것을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공간 속에 나타난 것이 성전이고 시간 속에 나타난 것이 절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에서 절기를 지킴으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거룩함을 표현합니다. 그 절기 가운데 기본이 무엇이라고요? 안식일입니다. 레 23 : 1 - 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가 공포하여 성회를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니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라 너희는 무슨 일이든지 하지 말라 이는 너희 거하는 각처에서 지킬 여호와의 안식일이니라” 그리고 4절부터 다른 절기들이 설명되어 나옵니다. 그러므로 가장 기본적인 절기가 안식일이란 말이지요. 안식일에 대해서 하나님은 매우 엄격하십니다. 출 31 : 14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찌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찌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목숨을 걸고 안식일을 지켰던 것입니다. 유대전쟁사에 보면 안식일에 적이 쳐들어오자 맞서지 않고 그대로 다 죽은 기록도 있습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면 하나님 명령을 지키다 죽겠다는 믿음이지요.
그렇게 지킨 안식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날에 일을 하십니다. 용서가 될까요? 도무지 용납해줄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제자들이 어느 날 밀밭 사이로 지나다가 그만 이삭을 까먹었습니다. 아마도 식사할 틈도 없이 시장해서 그랬나봅니다. 따라가던 바리새인들이 꼬투리를 잡은 것이지요. 마 12 : 1 - 2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왜 이삭 잘라 먹은 것이 안식일을 범한 일일까요? 이삭을 잘랐다, 추수했다 그 말입니다. 안식일에 추수하는 노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 안식일 논쟁이 유대인들과 예수님이 대립한 사건 중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자기들은 목숨을 걸고 지켰는데 예수님은 그것을 우습게 여기는 것 같아 죽이고 싶도록 밉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하는 말에 대해서 반박할 근거가 약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더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두 가지 사건이 생깁니다. 하나는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은 사건이고 또 하나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준 사건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서 어떻게든 허물을 잡으려고 합니다. 보겠습니다. 마 12 : 9 - 10 “거기를 떠나 저희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일이 바로 안식일에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얘들아 너희는 안식일에 양 한 마리가 구덩이에 빠져서 허부적거리면 건져낼래, 말래? 죽게 내버려둘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어떻게든 살려내겠지요. 하물며 가축보다 귀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안식일이라고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할 말 있습니까, 없습니까? 대답은 할 수 없지만 밉다, 안 밉다? 미워 죽겠지요. 말은 맞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의 하는 짓은 밉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14절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바로 이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계명을 지키는 일은 중요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지요. 그야 하나님 백성으로서 당연하고 마땅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왜 말씀을 주셨습니까? 말씀대로 살라고 주셨지요. 나 몰라라 하고 살 것이면 말씀을 뭐하려 주십니까? 말씀을 듣고 배우고 알고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한 줄 압니다. 알고 행하지 않는다면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아무튼 행해야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문제는 문자에 매여서 행하는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이 이 말씀을 왜 하셨는지 그리고 이 말씀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고 이 시대에 원하시는 믿음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전에도 예를 들었지요. 신 25 : 4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찌니라” 하나님 백성이 이 말씀 가지고 얼마나 오랜 세월 마음을 졸이며 신앙하였을까 생각해봅니다. 망을 안 씌우면 소가 곡식 다 주워 먹을 판이고 그렇다고 망을 씌우면 율법을 어기는 일이 되니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됩니다. 어쩌지요? 씌워요, 말아요? 답은 고전 9 : 9 - 10절에 나옵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 하신 말씀은 전혀 일하지 말라 그 뜻입니까? 그게 아닌 줄 압니다. 예수님도 설명하십니다. 마 12 : 5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성전에서 뭐 합니까? 그야 제사 드리지요. 그건 제사장이 일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죄가 된다, 안 된다? 죄가 없다 하시지요. 무슨 일은 죄가 되고 무슨 일은 죄가 안 되는가, 생각해봐야 하겠지요.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12절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무엇이 옳다 하십니까?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다 하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선한 일일까 생각해봐야 하겠지요. 성경에서 선한 일과 악한 일은 어떻게 구분한다? 하나님 편에서 일하면 선한 일이고 마귀 편에서 일하면 악한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영광을 위하여 일한다면 하나님이 왜 마다 하시겠습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렇지요?
무엇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인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일하지 말라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려면 하루 종일 누워있어야지요.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바라시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문자에 매이면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탄식하십니다. 그건 어릴 때의 신앙이지요. 벌써 시대도 바뀌었습니다. 모세 때 율법의 시대도 지나고 예수님 초림 때도 지났습니다. 자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4천 년 전이나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건 아니지요. 히 5 : 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그 때나 지금이나 달라지는 것이 없다, 그건 어디엔가 병이 들었다는 뜻 아닙니까?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말씀하실 때가 있고 그 말씀이 이루어질 때가 있는 줄 믿습니다. 말씀이 문자에 매어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 말씀이 현실로, 실제로 나타나는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자를 믿어야 합니까, 나타난 현실을 믿어야 합니까? 메시야가 온단다, 하는 말씀을 믿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셨다면 오신 그 메시야를 믿어야 참 믿음이지요.
안식일은 그림자입니다. 사실 안식일이 문자대로 한다면 주일입니까, 토요일입니까? 토요일입니다. 그런데 왜 주일로 바뀌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바꾸었지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꿈도 꾸지 못했을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부활을 기념하며 언제까지 신앙하렵니까? 벌써 2천 년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내다보았습니다. 골 2 : 16 - 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안식일도 뭐다? 그림자다. 예수님 다녀가시고 주일이 되었지만 역시 그림자다 이 말입니다. 절기, 그런 것 가지고 이러쿵저러쿵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게 다 뭐다? 그림자다. 몸은 누구의 것이다? 우리 주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자꾸 문자에 매여서 하나님이 이루실 일에 소망을 두지 못하게 하느냐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은 왜 정하셨을까요? 앞에서 보았습니다. 출 20 :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천지창조의 기념일입니다. 이는 이미 창세기에 말씀하신 바입니다. 창 2 :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그런데 사실 하나님이 안식하셨습니까? 그 때 이후 하나님이 안식하셨는가요? 이 수 천년 동안 하나님이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고 안식하셨습니까? 그냥 생각만 해도 이상하지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아들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증거하셨습니다. 요 5 : 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하나님이 일하신대요, 안식하고 계신대요? 일하고 계십니다. 안식하고 계실 수가 없습니다. 아직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니까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져야 안식하십니다. 자식 된 우리들의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어찌 아버지께서 안식하실 수 있겠습니까?
옛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의 땅을 안식처로 주셨습니다. 잘 알고 있는 가나안 복지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을 누렸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멸망했습니다. 히 4 : 8 - 9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우리에게 안식할 날이 소망으로 남아있습니다. 그 백성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하나님도 안식하실 리가 없습니다. 히 4 : 1 - 2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말씀을 들었어도, 약속을 가지고 있다 해도 믿음을 합하지 않으면 무용하다는 말씀이지요. 유대인들이 말씀을 가지고 있다 해도 하나님의 뜻은 알지도 못하고 문자로만 가지고 있으니 하나님과 거리가 멀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말씀하십니다. 마 12 : 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호 6 : 6절에서 본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나타난 문자를 지키는 것보다 그 마음을 알아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여, 주여, 부르짖어도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행하는 것과 모르고 행하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는 문자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마음을 읽고 행하는 신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문자에 매이다보니 선짓국을 먹으면서도 갈등하고, 돼지고기를 먹으면서도 마음이 불편하고, 좋아하는 보신탕을 먹어도 되는지 말아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땅 이야기하십니까? 죄송하지만 땅 이야기는 구태여 해주지 않아도 우리가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땅을 빗대어 하늘을 이야기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리석은 신앙하지 맙시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탄식하십니다.
우리 예수님이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마 12 : 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이상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무슨 날에 주인이 있습니까? 월요일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화요일의 주인은 누구죠? 그게 아니라 안식일을 정하신 분이 우리 주님이신 줄 믿습니다. 그런 뜻이지요. 만물을 창조하시고 안식일을 정하셨습니다. 누가요? 하나님이. 그 안식은 아직 왔다 안 왔다?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히 4 : 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언제 이루어질까요? 주님 다시 오시는 날에.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때. 그 때까지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일하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도 그것을 위해서 지금도 함께 일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 뜻을 알지도 못하고 이것은 해서는 된다, 안 된다, 정죄하고 쫓아내고 그러면 안 된다 그 말입니다. 우리가 교회 올 때 뭐 타고 오지 않았습니까? 그건 일한 게 아닌가요? 그런 어리석은 폄론은 하지 맙시다.
정리해봅니다. 구약시대에는 율법에 지켜야 할 절기들이 명기되어 있습니다. 가장 기본되는 절기가 안식일을 비롯하여 유월절, 칠칠절 그리고 초막절입니다. 명칭이 다르게 불릴 수도 있습니다. 무교절, 맥추절, 수장절이라고도 말합니다. 아무튼 이 절기들을 지키라고 명하셨습니다. 물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있습니다. 신약시대를 살아오면서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절기들을 지키며 신앙하였습니까? 아는 것만도 성탄절, 부활절 그리고 추수감사절 등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교회절기 안에 맥추절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다리고 지켜야 할 더욱 중요한 절기가 하나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유월절입니다. 그런데 다른 절기들은 언급을 하면서 유월절을 말하는 교회는 거의 없는 듯싶습니다. 유월절 절기를 지키는데 가정 중요한 것이 바로 어린양의 피와 살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반만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새 언약을 잘 모르게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새 언약’이 말 그대로 물론 ‘신약’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단순히 다시 오신다는 것 곧 재림만 알고 있습니다. 그냥 오시면 끝입니까? 그게 아니지요. 오셔서 무엇을 하시겠다고요? 눅 22 : 14 - 18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이에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가라사대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지상에서의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고 계십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뒤에 보면 이 때 새 언약을 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0절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그렇다면 이 새 언약은 단순히 재림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내용을 잘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유월절을 새 것으로 먹겠다는 것입니다. 언제요?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하나님 나라에서 이룰 때입니다. 무엇이요? 유월절이. 그러니 하나님 나라가 임하여 이루어지면 온전한 유월절 양식을 먹게 된다는 말입니다. 유월절 양식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요? 어린양의 살과 피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살과 피(요 6장)이고 바로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말씀 곧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재림 때 곧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때 새 것으로 먹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 끝을 말씀하시며 마지막으로 찾는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은 바로 그 ‘때를 따른 양식을 나눠주는 종’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마 24 : 45) 예수님은 그 때가 되면 바로 그 종을 보내실 것이고 그 종은 유월절 새 양식을 줄 것입니다. 우리가 그 때를 살게된다면 그 때는 그 새 양식을 찾아 먹어야 합니다. 숙제가 하나 발생합니다. 그 종을 찾아야 한다는 숙제입니다. 분명 여태 먹었던 양식과는 다릅니다. 그러니 찾아내기 쉽지 않겠지요. 또한 여태 전해온 말씀과 다르니 분명 말들이 많으리라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