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제 | 春宮曲(춘궁곡) -봄날 궁녀의 노래 ☞春宮(춘궁): '황태자(皇太子)’나 ‘왕세자(王世子)’를 달리 이르던 말. ‘태자궁(太子宮)’이나 ‘세자궁(世子宮)’을 달리 이르던 말. 태자나 세자가 거처하는 곳이 궁궐의 동쪽에 있던 데서 유래함. |
작가 | 王昌齡(왕창령) |
원 시
및
주 해 | 昨夜風開露井桃((작야풍개로정도) 어젯밤 바람 불어 우물가에 복사꽃 피고 露井(로정): 덮개(지붕)가 없는 우물.
未央前殿月輪高(미앙전전월륜고) 미앙궁 앞엔 둥근달 높이 떴구나. 未央(미앙): 미양궁을 말함. 산시성(陕西省, 섬서성) 시안시(西安市, 서안시) 장안성(長安城) 서남쪽에 위치한 한(漢)의 궁전(宮殿)으로 서궁(西宮)으로도 불리며 장락궁(長樂宮)과 함께 한(漢)의 2대 궁전중의 하나이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궁전중의 하나다. 미앙(未央)은 영원무궁함을 뜻하는 말로 장락미앙(長樂未央)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月輪(월륜): 둥근달
平陽歌舞新承寵(평양가무신승총) 평양의 춤과 노래로 새롭게 총애를 받으니 平陽(평양): 임금의 총애를 받는 여인. 궁인(宮人). 한 무제(漢武帝)가 평양공주(平陽公主) 이연년(李延年)의 집에 갔을 때, 가무를 잘 하는 이연년의 여동생을 매우 사랑하게 된 일에서 온 말임. 또는 평양공주의 가녀(歌女)였던 衛子夫(위자부; 한무제의 눈에 들어 후에 衛皇后(위황후)가 된 인물)라 한다. 承寵(승총): 임금의 총애(사랑)를 받다.
簾外春寒賜錦袍(렴외춘한사금포) 주렴 밖 봄추위에 비단 핫옷(안에 솜을 두어 만든 옷)을 내리시네. 錦袍(금포): 비단옷 ☞御賜錦袍(어사금포): 황제가 하사한 비단옷. |
작가 소개 | 王昌齡(왕창령)=盛唐(성당) 때 시인. 자 少伯(소백). 陝西省 長安(섬서성 장안) 또는 江蘇省 江寧縣(강소성 강녕현) 출생이라고 한다. 開元(개원) 15년(727)에 進士(진사)가 되고 校書郎(교서랑)을 지냈다. 다시 博學宏詞科(박학굉사과)에 급제하여 汜水縣尉(사수현위), 江寧副知事(강녕부지사)가 되었으나, ‘細行不謹(세행불근, 대수롭지 않은 예법을 삼가지 않음)’이라 하여 龍標縣尉(용표현위)로 좌천되었다. 安祿山(안록산)의 난이 지난 뒤 고향에 돌아와 刺史 閻丘曉(자사 염구효)에게 피살되었다. 李白(이백)과 함께 7언절구에 뛰어났고, 특히 이별이나 閨怨(규원) 같은 시를 잘 지어 ‘長信秋詞(장신추사)’ 같은 작품은 많이 알려졌고, 塞北(새북)의 정서를 노래한 ‘出塞(출새)’는 당 나라 절구 중의 걸작이라 일러 온다. 당시에 ‘詩家天子 王江寧(시가천자 왕강녕)’이라고까지 칭송했으며 ‘王昌齡詩集(왕창령시집, 5권)’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왕창령(王昌齡) (한시작가작품사전, 2007. 11. 15.) |
참고 | ☞ 平陽歌舞(평양가무) 위황후(衛皇后)는 어릴 적 이름을 자부(子夫)라 했고 미천한 출신이다. 대개 그 집을 위씨(衛氏)로 불렀고 평양후(平陽侯)의 봉지에서 자랐다. 위자부는 평양공주의 가녀(歌女)였다. 무제가 즉위한 다음 몇 해 동안 자식이 없었다. 평양공주는 양갓집 여자 10여 명을 구해 잘 꾸며서 집에다 두었다. 무제가 패상(覇上)에서 제사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평양공주의 집을 들렀다. 공주가 준비해둔 미인들을 보였으나 주상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술자리가 끝나고 가녀들이 들어왔는데 주상이 멀리서 보고는 유독 위자부만 마음에 들어 했다. 이날 무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측간을 가려 해서 위자부가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는 시중을 들다가 총애를 입었다. 주상이 자리로 돌아왔는데 기분이 너무 좋아 평양공주에게 금 1천 근을 내렸다. 공주는 이 틈에 자부를 입궁시키십사하는 글을 올렸다. 위자부가 수레에 오르자 평양공주는 자부의 등을 어루만지며 “잘 가거라. 그리고 잘 먹고 잘 지내거라! 귀하신 몸이 되더라도 서로 잊지 말자.”라고 했다. 입궁한 지 1년이 지나도록 황제의 은총을 입지 못 했다. 무제는 선택받지 못한 궁인들을 골라내서 궁에서 집으로 돌려보냈다. 위자부는 황제를 만나자 울면서 궁에서 나가길 청했다. 주상이 가엾게 여겨 다시 은총을 베푸니 마침내 임신을 했고 총애가 갈수록 더했다. 그 오라비 위장군(衛長君)과 동생 위청(衛靑)을 불러들여 시중이 되게 했다. 위자부는 그 후로도 큰 총애를 입어 딸 셋과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아들 이름은 거(據)였다. 처음 주상이 태자였을 때 장공주의 딸을 비로 삼았다. 황제로 즉위하자 비는 황후가 되었는데, 황후의 성은 진씨(陳氏)였고 아들이 없었다. 주상이 후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장공주의 힘이 컸다. 이 때문에 귀할 대로 귀해진 진황후는 교만했다. 위자부가 큰 은총을 입었다는 사실을 듣고는 크게 화를 냈는데, 이 때문에 죽을 뻔한 적이 몇 차례 있었다. 이 때문에 주상은 갈수록 (진황후에게) 화를 냈다. 진황후는 부인들을 시켜 저주를 하다가 일이 발각되었고, 이에 진황후는 폐위당하고 위자부가 황후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위황후(衛皇后) - 한글 번역문 (사기: 세가(번역문), 2013. 5. 1., 사마천, 김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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