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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7. 묵상글 들 ( 2022년 12월 17일. -인성 안에 갇혀 있는 우리의 신성을 .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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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7. 2022년 12월 17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2.12.17 06:33>
- 인성 안에 갇혀 있는 우리의 신성을.
잘 아시다시피 대림 시기는 둘로 나뉩니다.
17일 이전의 대림 제1시기와 이후의 대림 제2시기입니다.
그리고 성탄절 1주일을 앞둔 17일부터는 주님께서 오실 것을 준비한 사람들을,
멀리서부터 가까운 사람까지 얘기하는데 그 첫날인 오늘은 족보상의 인물들을
열거하며 멀리서부터 준비한 사람들을 전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기도는 이렇게 오늘 전례의 의미를 전합니다.
“인류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느님,
평생 동정녀의 태중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게 하셨으니,
인성을 받아들이신 외아드님을 통하여 저희도 그 신성에 참여하게 하소서.”
그러니까 오늘 복음과 본기도를 엮으면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시고 인간의 족보 안으로 들어오심으로
우리 인간도 그분의 신성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족보를 보면서 든 느낌은 족보의 인물들이 대부분 추하고 더럽다는,
그래서 주님께서 족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마치 똥물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뿐 아니라 이 세상이 하느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그 아름다운 세상이 아니라 악취가 풀풀 나는 더러운 세상이 되어버렸으니
세상에 오신 것 자체가 똥물 속으로 들어오신 거지요.
그런데 누가 똥물에 들어간다면 왜 들어가겠습니까?
사랑 아닌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사랑이 아니라면 똥물에 들어갈 사람도 없고 이유도 없겠지요.
그리고 똥물에 보석이 있을 때 들어가겠지요.
그 보석을 건지러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사람을 보석같이 소중히 여기시고 사랑하시어
우리 인간을 건지러 이 세상 한가운데로 들어오신 것인데,
이것은 마치 사창가에 팔린 딸을 찾으러 사창가에 들어가고,
조직 폭력배에 끌려간 아들을 찾으러 조폭들 가운데 들어가는 부모 같습니다.
부모에게 자녀는 아무리 더럽혀졌어도 소중하고,
자기가 낳은 아이를 자기가 깨끗하게 할 책임이 있듯이
하느님께서도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이 아무리 더러워도
그것을 다시 깨끗하게 해야 할 책임,
당신의 창조를 회복해야 할 책임이 있는데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창조의 회복이고,
그러니까 본래 보물인 우리 인간과 모든 피조물을
창조 때의 그 고귀함으로 되돌리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구하러 오신 주님의 손길을 우리는 뿌리치지만 않으면 됩니다.
뿌리치지 않고 마주 잡기만 하면 우리는 구출되고
인성 안에 갇혀 있는 우리의 신성이 회복됩니다.
오늘 본기도의 기도처럼 인성을 받아들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신성에 참여하려는 갈망을 가지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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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7. 2022년 12월 17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다윗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 1,1)
성탄이 임박해 옵니다. 대림 두 번째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때가 차면 그분은 분명 오시겠지만, 그분이 오신다고 해서 모두가 그분을 영접하는 기쁨을 차지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제 우리 마음 안에 구유를 준비해두고,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맞이할 채비를 차려야 할 때입니다. 마음의 간절함으로 “하늘은 이슬비처럼 의인을 내려다오.” 라고 마음을 모아 노래해야 할 때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본기도>에서 그 의미를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인성을 받아들이신 외아드님을 통하여 저희도 그 신성에 참여하게 하소서.”
이는 미사 중, <예물준비기도>를 바칠 때 사제가 성작에 포도주와 물을 부으며 혼자 드리는 기도문과 같습니다.
“이 물과 술이 하나가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오늘 <제1독서>에서는 인성을 받아들이신 외아드님의 강생을 예고하고, <복음>에서는 예고된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심을 알려줍니다. 사실, 그분은 영원의 관점에서 볼 때,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보여주듯이 시간보다 앞서시며 아버지와 한 본질이시지만, 동시에 육에 따라 본다면 이 족보가 알려주듯이 인간의 가계에 속한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족보는 그분 인성의 계보를 밝혀주는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참 인간이셨음을 알려줍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본성을 취하시고 인간의 방식으로 태어나셨음을 밝혀줌과 동시에 <본기도>에서 밝히듯이, 그분을 통하여 우리도 신성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밝혀줍니다.
우리는 이 족보를 통하여, 보이는 인간의 역사 안에 흐르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를 봅니다. 곧 그들 모두가 자비의 사슬로 엮어졌음을 봅니다. 그리고 그 자비의 사슬 안에서 하느님의 감실을 봅니다. 곧 그들 모두는 예수님이 담겨 있는 성합들임을 봅니다.
우리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는 당신 자비의 얼굴이 새겨져 있습니다.
저는 이 족보를 들을 때면, 성모님의 찬가가 떠오릅니다.
“주님께서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루카 1,50).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으니,
약속하신대로 그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베푸실 것입니다.”(루카 1,54-55)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대대로 이어지고 영원합니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역사 안에 살아계시고 또한 제 안에 자비로 살아계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다윗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 1,1)
주님!
보이는 인간의 역사 안에 보이지 않는 당신의 역사를 보게 하소서.
세세대대로 베풀어진 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
그 자비의 사슬 안에서 당신의 감실을 보게 하소서.
그들 모두가 당신이 담겨 있는 성합임을 보게 하소서.
오늘, 제 심장의 고동소리와 제 말과 발걸음과 손짓 모두가
당신의 자비를 엮어내는 사슬이 되게 하소서.
오늘, 저 안에 새겨진 당신 자비의 얼굴을 뵙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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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7. 2022년 12월 17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집안에 있는 족보를 보면 여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출가외인’이라는 생각이 담겨있나 봅니다. 그리고는 나이에 상관없이 아저씨뻘이니 형님뻘이니 하며 ‘촌수’를 따지곤 했습니다. 누가 출세하면 그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며 호들갑을 떨고 먼 친척도 그때는 아주 가까운 것처럼 느끼며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미 그리스도의 족보에 여인이 등장했습니다. 그것도 훌륭한 사람이라고 여겨지지 않은 사람도 부끄럼 없이 올라 있습니다. 시아버지와 동침하여 자식을 낳은 다말, 창녀로써 적군과 내통한 라합, 그리고 젊은 과부로 보아즈를 유혹했던 이방인인 룻, 자기 남편을 죽인 다윗의 자식을 낳은 우리야의 아내 바쎄바 입니다. 감추고 싶은 죄인들이 등장함은 의미가 큽니다. 메시아의 가계가 끊어지지 않도록 기묘한 방법으로 대를 이어가셨다고 할 수 있고, 또한 의인과 죄인의 장벽이 무너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인인체 하는 죄인에게 용서와 자비가 함께합니다.
룻을 등장시킴으로써 유다인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이방인의 메시아도 된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결국, 주님은 모든 이에게 구원을 주시려 인간역사 안에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계속 이어지는 족보의 끝에 나의 이름도 기록될 것입니다. 기왕이면 내로라하는 인물이 아니더라도 죄인으로 기록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아니 회개한 죄인으로 기록되기를 기도합니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10,20).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역대 이스라엘 왕 가운데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 그분 마음에 드는 아들(마태3,17)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기 위해 기름부음 받은 자요, 주님의 영을 받은 이(루카4,18) 입니다. 이제 그분의 자녀가 그분의 일을 해야 할 때입니다. 그분의 족보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기에 앞서 그분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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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7. 2022년 12월 17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부터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야기가 아닌, 2000년 전에 오셨던 예수님의 탄생을 묵상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에게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기 위해서 ‘깨어 있음’을 묵상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기 위해서 ‘회개’를 묵상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다시 오실 예수님은 우리를 심판하시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시니 ‘기쁨’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다시 오실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오셨음을 오늘부터 전례는 말씀을 통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감사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모든 예언자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미리 알려 주었고 동정 성모님께서는 극진한 사랑으로 그분을 품어 주셨으며 요한은 오실 분을 미리 알려 주고 이미 와 계신 그분을 가리켜 주었나이다.” 그렇습니다. 나침판은 언제나 같은 방향을 알려주듯이, 예언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자로 오실 것을 미리 알려주었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순명했던 동정 성모님께서는 극진한 사랑으로 예수님을 품어 주셨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였던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이미 오셨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우리들 역시 예언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예언자는 위선과 가식을 버려야 합니다. 예언자는 허위와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위선과 가식을 가지고 있다면, 허위와 욕심을 가지고 있다면 거짓 예언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불의와 거짓에 맞서야 합니다. 예언자는 탐욕과 욕망에 맞서야 합니다. 불의와 거짓을 일삼는다면, 탐욕과 욕망에 젖어있다면 거짓 예언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해야 합니다. 예언자는 시련과 고통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래야 참된 예언자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우리는 동정 성모님의 ‘순명’을 배워야 합니다. 순명의 반대말은 불순명일 수도 있지만 교만입니다.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사람은 하느님께 순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원죄는 ‘교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담의 교만은 죄를 잉태하였지만, 동정 성모님의 순명은 구세주를 잉태하였습니다. 법대로 살았던 요셉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였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나자렛의 성가정은 모두 ‘순명’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들 또한 ‘순명’의 삶으로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미 와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았습니다. 우리는 ‘넷째 왕의 전설’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동방박사는 원래 4명이었다고 합니다. 4번째 동방박사는 굶주린 이들에게 가져간 먹을 것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가져간 보물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4번째 동방박사는 아기 예수님께 드릴 보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4번째 동방박사는 시간이 흘러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4번째 동방박사는 어쩌면 세례자 요한이라고 생각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미 와계신 구세주를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4번째 동방박사도 이미 와 계신 구세주를 알아보았습니다. 우리들 또한 이미 와 계신 구세주를 알아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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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7. 2022년 12월 17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무슨 짓을 해도 전기 충격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실험실의 개는 나중에는 고통스러운 전기 충격에도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다고 합니다. 전기 충격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상자로 옮겨줘도 도망갈 생각은 하지 않고 제자리에 가만히 웅크린 채 고통의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무기력한 상황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개만 그럴까요? 사람 역시 마찬가지로 무기력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힘들어하는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즉, 인간 역시 피하거나 극복할 수 없는 부정적 상황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어떤 시도나 노력도 결과를 바꿀 수 없다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학습된 무기력에 빠진다는 것을 미국의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이 주장했습니다.
셀리그만은 학습된 무기력 개념을 통해 지금의 무기력한 상황을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태도로 변화시킬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실제로 그는 전문직의 사람부터 평범한 일반 사람까지 많은 사람을 상담하면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했습니다.
무기력에 빠져서 포기하고 좌절에 빠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조금만 살펴보면 충분히 그 시간을 피하려 하는 나의 변화가 필요했음을 깨닫습니다. 그것도 커다란 목표가 아닌 지금 당장 자신이 시도할 수 있는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해야 했습니다.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무기력의 굴레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합니다.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서부터 예수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보면, 계속 안 좋은 상황의 연속이었습니다. 주변 국가 중 가장 힘이 없어 강대국으로부터 점령당하고, 유배 가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끝일까요? 이스라엘은 힘없고 고통과 시련의 삶만 살아야 하는 운명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손길을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고통과 시련의 연속으로 무기력의 상황에 부닥쳐질 수도 있었지만, 하느님을 보려 하고 함께했던 이스라엘의 조상 덕분에 지금까지 이르게 되었고, 이제 드디어 예수님의 탄생으로 구원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이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면서 포기하고 좌절하지만, 절대로 바뀌지 않는 상황이란 없습니다. 내가 바뀌려고 노력하고, 또 내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때 자기에게 주어지는 삶은 주님과 함께하는 구원의 삶이 될 수 있습니다.
결코 무기력의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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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한 자는 평생에 여러 번 죽지만, 용감한 자는 오직 한번 죽는다(김만술 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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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7. 2022년 12월 17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하느님은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영원한 순례자’이시다-
오늘 12월17일(토)은 주님 성탄에 앞서 저녁 성무일도시, 또 복음 환호송을 통해 장엄한 O후렴이 시작되는 첫날입니다. 예수님 탄생이 점차 가까워짐을 실감합니다.
“오, 지혜 지극히 높으신 이의 말씀이여, 끝에서 끝까지 미치시며 권능과 자애로 다스리시는 이여, 오시어 우리에게 슬기의 길을 가르쳐 주소서.”
탄생 하실 지혜 자체이신 주님께 슬기의 길을 가르쳐 달라는 애절한 소망이 담긴 감동적 노래입니다. 저는 이미 8년전 산티아고 순례여정을 통해 이미 슬기의 길을 배웠습니다. 매일 강론을 쓴 후 4:00-4:30 까지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추우나 더위나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수도원 배밭을 돌아 정문에까지 걸어갔다 옵니다. 그대로 산티아고 순례 여정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지요. 아마 살아있는 날까지 계속될 순례여정입니다.
늘 강조합니다만 다시 각자 인생 여정을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로 요약하면 오후 몇시쯤, 일년사계一年四季로 요약하면 또 어느 계절 어느 시점時點에 있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저는 늘 말씀드리다시피 오후 4시, 초겨울 시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점검이 하루하루 날마다 오늘 지금 여기서 깨어 환상이 걷힌 투명한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어제 모처럼 내려 쌓인 흰눈길을 걸을 때 생각난 23년전 쓴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란 자작시가 생각났습니다.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
밤 하늘의
초롱초롱한 별빛 영혼으로 사는 이,
푸른 하늘
흰구름 되어 님의 품안에 노니는 이,
떠오르는 태양
황홀한 사랑 동녘향해 마냥 걷다가 사라진 이,
첫 눈 내리 하얀 길
마냥 걷다가 사라져 하얀 그리움이 된 이,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1999.2.28.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긴 족보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완성된 족보라기 보다는 영원히 현재진행형의 족보라 생각됩니다.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 역시 예수님 족보에 편입되기 때문이며 인류가, 교회가 지속하는 동안 계속될 예수님의 살아 있는 족보입니다.
흡사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은 “영원한 순례자”처럼 생각됩니다. 족보에 나오는 하나하나 사람마다 늘 함께 하시며 지금까지 순례 여정 중의 영원한 순례자로 살아 계신 하느님이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긴 족보가 굽이굽이 이어진 하느님의 발자취처럼 느껴집니다.
구원자 예수님 탄생하기 까지 얼마나 긴 인내의 기다림이 요구되었겠는지요! 인간의 눈높이에 맞춘 부단한 사랑의 인내, 사랑의 겸손의 하느님이십니다. 족보에 나오는 면면은 얼마나 다양한지요. 약속을 신실히 지키시는 하느님의 한결같은 모습도 감동입니다. 누구하나 배제시키거나 소외시킴이 없이 잘났는 못났든 믿음 하나만 있다면 당신 구원 역사의 일꾼으로 활용하십니다.
참으로 하느님 믿음이란 하나의 끈으로 연결된 족보같습니다. 이런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이 하나하나의 존재이유와 존재의미를 밝힙니다. 결코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하나 하느님의 구원 섭리의 도구라는 것, 바로 이게 한사람 한사람의 존재의미가 되며, 바로 우리도 여기에 속합니다. 바로 하나하나가 “신의 한 수”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하느님 믿음의 끈으로 연결된 족보를 볼 때마다 저는 하나의 끈에 연결된 묵주알을 연상합니다. 묵주끈에 하나로 연결되었을 때 뚜렷한 존재의미이지 만약 떨어져 나가 이리저리 뒹구는 고립단절의 혼자의 묵주알 같은 존재라면 완전히 존재의미의 상실이며 곧 이름없는 무명의 존재가 되어 사라질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 홀로 단절된 외롭고 쓸쓸하게 살다가 죽는 고독사의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예수님의 족보에 하나로 연결되어있기에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귀한 구원 섭리의 도구가 됩니다. 결코 우연적 존재가 아닙니다. 이미 제1독서 창세기에서 야곱의 축복을 통해 예언된 대로 유다의 구원 섭리중 역할이 참 대단합니다.
“너 유다야, 네 형제들이 너를 찬양하리라. 유다가 사자처럼, 암사자처럼 웅크려 엎드리니, 누가 감히 그를 건드리랴? 유다에게 조공을 바치고, 민족들이 그에게 순종할 때까지 왕홀이 유다에게서, 지휘봉이 그의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않으리라.”
탄생하실 예수님을 통해 유다에게 준 야곱의 축복은 실현될 것입니다. 참으로 신실하신 하느님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라 하지만 다윗은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흠이 많은 사람이며, 아브라함 역시 결점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이들의 하느님 사랑과 믿음은 참으로 탁월했습니다.
족보에 나오는 네 여인의 기구한 운명도 깊은 충격을 줍니다. 다말, 라합, 룻, 다윗의 아내이자 솔로몬의 어머니 바세바, 다 이방인들이었고 네 여인들 참 기구하고 불행한 여인들이었지만 눈밝은 하느님은 이들을 당신 구원의 도구로 활용하십니다. 사람 눈에는 불가사의이지만 하느님 눈에는 지극히 자연스런 일입니다.
누구도 차별하지도 버리지도 않으시고 적재적소에 위치시켜 그 몫과 역할을 다하게 하십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것은 신분이나 지위가 아니라 그의 진실하고 한결같은 믿음과 책임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마리아를 통한 구원자 예수님의 탄생에서 족보는 절정을 이룹니다. 여기서 하느님 구원 섭리에 결정적 도움 역할을 한 분이 바로 마리아와 요셉입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 나셨다.”
마침내 하느님의 소원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 장구한 세월 동안 하느님의 무한한 기다림의 인내의 사랑이 참 놀랍습니다. 새삼 구원의 길에는 요령이나 비약이나 도약은 불가함을 봅니다. 하나하나의 과정에 충실하며 서두르지 않고 사람 눈높이에 맞춰 끝까지 겸손히 인내하며 기다려온 하느님의 사랑이 영원한 감동입니다.
하느님은 일방적으로 일을 못합니다. 인간의 자발적 응답의 협조가 절대적입니다. 불림받은 이들이 각자의 제자리에서 믿음으로 응답했기에 마침내 구원자 예수님 탄생이 가능했음을 봅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우리 교회를 통해 영원한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됨을 믿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교회 공동체내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거룩한 역할에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 저 달이 다할 그날까지,
정의와 큰 평화가 그의 시대에 꽃피게 하소서.
그가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끝까지 디스리게 하소서.“(시편72,7-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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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7. 2022년 12월 17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름을 부르다>
마태오 1,1-17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았다.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 페레츠는 헤츠론을 낳았으며 헤츠론은 람을 낳았다.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암미나답은 나흐손을 낳았으며 나흐손은 살몬을 낳았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오벳은 이사이를 낳고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은 르하브암을 낳았으며 르하브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삽을 낳았다. 아삽은 여호사팟을 낳고 여호사팟은 여호람을 낳았으며 여호람은 우찌야를 낳았다. 우찌야는 요탐을 낳고 요탐은 아하즈를 낳았으며 아하즈는 히즈키야를 낳았다. 히즈키야는 므나쎄를 낳고 므나쎄는 아몬을 낳았으며 아몬은 요시야를 낳았다. 요시야는 바빌론 유배 때에 여호야킨과 그 동생들을 낳았다.
바빌론 유배 뒤에 여호야킨은 스알티엘을 낳고 스알티엘은 즈루빠벨을 낳았다. 즈루빠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야킴을 낳았으며 엘야킴은 아조르를 낳았다. 아조르는 차독을 낳고 차독은 아킴을 낳았으며 아킴은 엘리웃을 낳았다. 엘리웃은 엘아자르를 낳고 엘아자르는 마탄을 낳았으며 마탄은 야곱을 낳았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
<이름을 부르다>
너를
내 안에서
살리기 위하여
내가
네 이름을
정성껏 부르니
나를
네 안에서
살리기 위하여
네가
내 이름을
정성껏 부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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