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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숙 작가님 외에 또 다른 문우 한 분이 나에게 말하기를 자신은 두번이나 봤다면서 꼭 보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본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뜻으로 들려 노트와 펜을 들고 영화관으로 갔습니다. 기억의 회상이란 늘 부정확한 것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의지할 곳은 기억뿐이니 어둠속에서 나만의 필기로 남긴 기억에 의지해서 영화를 보고난 필자의 감상문을 적습니다. 다 담아 내지 못한 부분들이 엄청 많이 있음을 고백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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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영웅을 만든 적이 없다(마지막 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를 관람하고 나서->
수필가 정임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는 오래 전에 내가 처음 보았던 영화보다 상당히 수필스러웠다는 생각을 합니다.
원작 자체가 지닌 방대한 스케일, 트로이 전쟁이라는 역사적·신화적 배경, 수많은 괴물과 신들의 방해 등의 전개는 전형적인 대서사시(Epic)이자 모험 소설의 틀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놀란 감독은 100% IMAX 필름 카메라 촬영과 압도적인 스케일을 통해,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 후 이타카(Ithaca) 왕궁으로 돌아가는 "오디세우스 귀향의 서사"를 단순한 모험담으로 그려내는 대신, 그 위에다가 오디세우스라는 개인이 겪는 고독한 정체성의 혼란, 그리고 인간 본성에 대한 실존적 질문들을 잘게 쪼개어 영화 속에 담아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는 오디세우스가 님프 칼립소의 섬에 머물며 과거를 잊은 채 고통받는 시점에서 시작됩니다. 여기서 칼립소의 유혹과 기억을 흐리게 하는 로투스(망각의 꽃)의 설정이 초반부 분위기를 형성합니다. 칼립소가 오디세우스에게 기억을 되찾으라고 독려하면서, 그가 고향으로 돌아오며 겪었던 과거의 모험들이 본격적인 회상 형태로 펼쳐집니다. 로투스(망각의 꽃)는 우리 인간이 결코 잊어서는 아니된다는 반어법적 상징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영어권에서는 이 에피소드에서 유래해, 현실의 문제나 책임을 외면한 체 쾌락과 무관심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로토스를 먹는 사람들(Lotus-eaters)'이라고 부르며, 실용적인 문제에 대처하지 못하고 몽상이나 사치에 빠져 시간을 허비하는 태도를 비유할 때도 종종 쓰인다고 합니다.
트로이 전쟁 이후 귀향의 바다로 나선 오디세우스의 함선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거센 저주와 풍랑을 당하면서 본격적인 신화적 재난 속으로 빠져듭니다. 부하들과 함께 포세이돈의 아들인 거인 폴리페무스의 동굴에 갇히고 지혜로 탈출하는 과정이 긴장감 있게 그려집니다. 키르케 (Circe) 마법의 섬에서 부하들이 돼지로 변하는 환상과 마주하며, 인간 본성의 원초적 욕망과 마법적 위기를 겪게 됩니다. 귀환 도중 선원들을 유혹하는 매혹적이면서도 치명적인 세이렌의 노랫소리와 마주합니다. 여기다가 인간 내면의 수호자인 아테나 (Athena)가 영화 전반에 걸쳐 오디세우스가 극한의 죄책감과 정체성 혼란에 흔들릴 때, 혹은 지혜로운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마다 그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자 수호자적 존재의 환영으로 등장합니다. 이런 기법은 오를레앙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마녀로 낙인되어 감옥에 갇힌 쟌 다르크 앞에 수시로 신이 나타나서 대화를 주고 받는 TV 영화 <쟌다르크>의 기법과 흡사합니다.
영화는 이처럼 칼립소의 섬(현재) ➡ 포세이돈과 폴리페무스(식인괴물의 지배에서 탈출) ➡ 키르케(돼지로 상징되는 욕망의 유혹에서 탈출) ➡ 세이렌(소리의 유혹에서 탈출) ➡ 태양신 헬리오스의 소(진정한 자아의 파괴에서 탈출)들이 살고 있는 트리나키아(Thrinacia) 섬의 흐름을 오가며, 신화적 괴물들의 위협을 단순한 액션이 아니라 주인공의 깎여나간 기억과 죄의식을 증명하는 심리적 장치로 배치하고 있습니다. 특히 고난의 여정 마지막에 “헬리오스의 소를 절대 해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를 무시하고 그의 부하들 전원이 몰살당하는 장면에서는 불교의 심우도를 그대로 떠올리게 하였으며, 참 자아를 찾지 못하면 회복 불능의 자기파괴(죽음)로 직행하게 된다는 의미로 필자는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대단원에서 전쟁에서 패하는 트로이의 참상을 정복자가 아닌 관찰자의 시선에서 그려냅니다. 세 시간 동안 지속되는 거시적 서사이지만 지루하지 않은 것은 이 신화소가 각각의 단편처럼 그려져 있고, 그 속 행간에 주인공이 맞닥트리는 순간순간의 감정과 내면의 파동에 깊게 밀착하는 모습을 잘 담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대접 받고자 하는 그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의 명언”이 여러번 나옵니다. 영웅을 그려내지 않겠다는 감독의 의지입니다.
놀란 감독은 오디세우스를 운명을 극복한 무적의 영웅이나 승전국 지배자로 미화하지 않고, 트로이 전쟁의 참상 속에서 그가 저지른 폭력과 죄의식, 그리고 깎여나간 기억을 고통스럽게 회상하게 하는 입체적 인간으로 그려내어 우리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성정(사랑, 질투, 증오, 배신, 공포, 욕망, 믿음과 우정, 정의, 복수, 영웅에 대한 고대와 희생양 그리고 구원 등등)을 그대로 보여 준 것입니다. 여기서 "신화적 괴물들의 위협과 비선형적 시간 배치"는 주인공의 내면적 파동과 트라우마를 보여주는 심리적 장치로서의 기능을 합니다.
비선형적 시간 배치(Non-linear Time Arrangement)란, 이야기의 시간 순서(연대기적 순서)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과거, 현재, 미래를 교차하거나 뒤섞어 배치하는 스토리텔링 기법을 뜻합니다. 영화에서 이 기법이 가진 구체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칼립소의 섬(현재) ➡ 트로이 전쟁(과거) ➡ 여정(폴리페무스, 키르케, 세이렌 등) 순으로 흘러가야 하겠지만, 영화는 이를 뒤섞어 놓습니다.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마주하는 신화적 괴물들의 위협이나 모험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그가 겪은 과거의 트라우마가 현재의 의식 속으로 불쑥 불쑥 침투하는 것입니다. 이런 시간의 경계가 무너진 연출 기법을 통해 관객도 주인공의 혼란스러운 내면과 단절된 기억 속으로 동화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칼립소의 섬에서 안식을 누리는 듯 보이는 '현재'의 순간에도, 과거 트로이 전쟁에서 벌인 참상과 짓밟았던 이들의 모습이 교차 됩니다. 사건이 순차 로직으로 흐르지 않기 때문에, 오디세우스가 과거에 저지른 과오가 현재의 고통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그리고 그 기억에서 도망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 어떠한지에 대해서 입체적으로 드러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영화 속 비선형적 시간 배치는 단순히 이야기를 복잡하게 꼬아놓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주인공의 붕괴된 정신세계와 지워지지 않는 죄의식(무의식)을 시공간의 해체를 통해 직관적으로 전달하려는 놀란 감독의 연출 의도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과자처럼 식인하는 괴물 폴리페무스를 등장시킨것은 그런 식인행위는 징그러울 만큼 공포를 느끼면서도, 먹지도 않는 인간에 의한 인간을 사냥하는 전쟁은 예사로 여기고 쉽게 망각하고야 마는 우리 인간의 무지를 냉혹하게 비판하는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감독의 이러한 반전(反戰) 및 인간성 회복 의지를 대변하는 의도적 복선과 주요한 명문장들을 정리해 드립니다. 대표적인 문장이 "너희가 대접받고자 하는 그대로 남을 대접하라" (황금률의 모티브)입니다. 영화 초반 구혼자들을 대하는 페넬로페의 태도와, 오디세우스가 여정 속에서 만나는 타자(신화속의 인물과 이방인)를 대하는 선택지마다 이 구절 혹은 그에 준하는 윤리적 명제가 "제우스의 법"이라는 이름으로 수시로 등장합니다. 이는 승자독식의 트로이 전쟁에서 오디세우스가 짓밟았던 이들의 고통을 환기하며, "과거에 남을 어떻게 대접했는가"가 곧 괴물들과 마주하는 현재의 심판으로 되돌아온다는 인과율의 복선으로 작용합니다.
오디세우스는 거대한 목마라는 속임수로 트로이를 몰락시킵니다. 우리는 전쟁이라는 상황 탓으로 이러한 거대한 속임수에 늘 관대하고 쉽게 망각하고 마는 습성이 있습니다. 놀란 감독은 이걸 놓지지 않고 관객들이 "인간의 속임수(거짓말)"로 계속 자각해 나가도록 영화를 이끌어 갑니다.
거시적 서사 속에 과거 회상으로 삽입되는 트로이 전쟁의 마지막 날은, 영웅적 승전보가 아니라 철저하게 파괴당하는 트로이 백성들의 입장과 참상을 건조하고도 참혹하게 재조명합니다. 그리고 자기 궁전인 이타카의 왕궁의 참상에다 자기를 전쟁으로 내몬 아가멤논 왕궁의 몰락과 겹치게 만들어 모든 전쟁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고 오직 파멸만 있을 뿐이다는 복선을 깔아 갑니다. "영웅을 만들지 않겠다"는 놀란 감독의 의지가 가장 극적으로 발현되는 대목입니다. 화려한 승리의 기쁨 뒤에 감춰진 약탈자의 민낯을 고발함으로써, 오디세우스가 겪는 모든 고난이 스스로 품은 죄의식의 환영임을 암시하면서 욕망의 분출일 뿐인 전쟁광들에게 회개를 요구합니다.
칼립소의 섬(현재 우리가 누리는 안식)은 영원한 안식처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시간순서를 해체한 비선형적 연출 속에서 기억을 유예 당한 체 죄의식으로부터 도피해 있는 감옥으로 묘사됩니다. 그래서 칼립소와의 대화 및 독백 행간에서는 "기억을 잃은 자에게 귀향이란 무슨 의미인가"라는 질문이 던져집니다. 인간의 욕망은 그저 기억 속에 존재하는 허상일 뿐이고 인간은 결국 자기 본향인 집(자아성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묘사법은 이 영화가 단순한 모험극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책임과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치인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놀란 감독의 이 영화는 객관적 사건을 발단 ➡전개➡ 갈등➡클라이막스➡대단원으로 펼쳐 나가는 소설형식이라기보다 주관적 단상과 사유를 풀어놓는 '수필(에세이)'적 결을 강하게 풍깁니다. 이 영화는 영웅의 거창한 무용담(소설)을 그려내는 것을 거부하고, 한 인간이 극한의 고독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삶의 의미를 더듬어 나가는 거대한 스크린 위의 사색록(수필)처럼 관객들에게 다가가려고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대단원이 좀 지루한 감이 들기도 하는데 그게 이 영화의 진정한 매력이기도 할 것입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대서사작 《오디세이》(2026)에서 관객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 주요 명대사들을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 작품은 수필식으로 그려낸 것인 만큼 극중의 대사 하나하나가 철학적 깊이를 더하기 때문입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이번 영화를 각색하는 과정에서 인간성 회복을 관통하는 핵심적 은유이자 대사로 차용한 “누구든지 대접받고 싶은 그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 말은 워낙 유명한 말이니 제외하고 다음과 같은 문장들입니다. 영화를 보러 가시는 분들은 필히 펜과 종이를 꼭 들고 가시길 바랍니다.
영화 《오디세이》 속 주요 명대사
"사람을 가장 명확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이다." — 오디세우스
"가장 간절히 원하는 것은 가장 가질 수 없는 것이고, 가장 가질 수 없는 것이란 이미 가졌다가 잃어버린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지." — 오디세우스
"어떤 사람에게서 신을 찾지 마라. 언제나 실망하게 될 것이다." — 오디세우스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 신성한 모든 것을 더럽혔고, 싸움을 사냥으로 만들었다. 트로이의 성벽을 불태우는 것은 우리의 세상 전체를 불태우는 것이었다." — 오디세우스
"싸움을 포기해. 통제를 포기해. 그러면 비로소 살기 시작하는 거야." — 칼립소의 섬 시퀀스 중 내면의 목소리
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전쟁을 거부해야 하며, 영웅들을 거부하고, 진짜 사람이 되기를 힘써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키르케 섬에서 게걸스럽게 먹는 것을 밝히다가 모조리 돼지가 되는 장면이 노골적으로 그걸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 서사시가 작성된 기원전에 비해서 지금 인간들의 정신 수준이 수백 배나 개명되었으니, 신화와 역사와 현실과 인간 내면을 구분해서 보는 안목이 크게 열린 것입니다.
신은 영웅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구원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며 그 불변의 진리는 “너희가 대접받고자 하는 그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법은 제우스의 법이자 불멸의 법이며 곧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최종적으로 성경에서 말한 “누구든지 자신을 구원하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이 영화를 통해서 모든 지구상의 모든 인간 종족들이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기를 기도 합니다. 지중해와 에게해를 끼고 번창한 고대 도시국가들은 무역과 상업교류로서 번영한 지역입니다. 이란과 미국의 전쟁,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그 전쟁을 두고 각자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오늘의 세계인들에게 전쟁이란 과연 무엇이며, 인간이란 또 어떤 동물인가, 현대판 아가멤논과 오디세이는 또 누구인가를 한번이라도 고민하게 만드는 영화라고 평합니다. 저는 세상의 모든 전쟁과 영웅을 거부 합니다.
(추서)
영화 속에는 검은 대지(저승 혹은 지하 세계)에서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수많은 영혼과 망자들이 우우우 일어나 오디세우스와 마주하며 참상의 기억을 환기하는 묵직한 시퀀스가 장엄하게 담겨 있습니다. "죽어 나는 거은 조조군사"이니 산자의 입장만 생각하지 말고 죽은자의 입장도 생각해 보라는 장면도 놓칠 수 없는 장면입니다. 제 감상문에서 많은 디테일한 부분이 빠져 있습니다. 무려 3시간을 상영하는 원체 대작이라 문우님 말씀처럼 두번 세번은 봐야 제대로 감상을 할 작품이라 평합니다.

첫댓글 정말 같은 영화를 보셨나 싶을 정도로 느낀 소감이 너무나 다르네요.
저는 조경숙 작가님께서 뭔가 다르다고 하셔서 미리 공부하고 가서 세밀하게 관찰한 덕분일 뿐입니다. 사실 인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그리고 르네상스를 이해해야 합니다. 차제에 이 전체 내용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정리 한번 해 볼까 생각하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조경숙 선생님 덕분에 제가 이런 글을 쓸 수 있음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