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오 마을로 가는 길
(눅24:13-43)

이 그림은 우리 교회당 로비에도 걸려있습니다. 주님 주시는 엠마오, 뜨거운 마음의 축복이 늘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눅24:28] 그들의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눅24: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눅24: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눅24: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특별한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전 세계만민을 구원하신 예수님께서 천사의 호령소리와 나팔소리로 부활하셨는데 전 세계를 호령하시면서 부활을 선언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울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요20: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이 예수님의 자상하신 마음이 너무나도 큰 은혜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지금 엠마오로 가는 마을로 걷고 있는 제자들과 함께 먼 길을 걷고 있는 예수님도 이 자상하신 마음으로 걷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을 열어주고 싶으셨던 것이었습니다.
엠마오를 예루살렘에서 25리길이라고 했는데 11-12km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걷기에는 긴 길입니다. 다리 아플만큼 그 긴 길을 예수님은 지금 절망에 빠진 제자들과 함께 걷고 계시는 것입니다.
참고로 지금 엠마오 Emmaus =이름뜻="Hot Spring, warm baths" 는 어느 장소인지 분명치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서 그 정도의 거리에서 눈에 띄는 지역이 많이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 곳이 그 엠마오라는 지명으로 거론되었습니다.
여러 곳이 엠마오라고 생각되어 훗날 기념 성전도 지어지곤했는데 이런 점에서 연구를 많이하는 카톨릭에서는 1901년에 엘쿠베베(예루살렘 북서쪽으로 약11km)에 글로바(글레오파)의 집터로 추정되는 곳에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에서 기념 성전을 지은 것을 확인함으로써 교회로부터 공인받은 엠마오 기념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 장소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엠마오는 사실 낙망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엠마오라는 헬라어 단어 자체의 뜻은 아람어 어원으로서 '뜨거운 온천' hot spring입니다. 또는 warm bath 따뜻한 욕조입니다.
절망에 빠져 있던 두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마음이 뜨거워지는 영적 만남의 세례를 받았던 곳, 그 순간, 그 곳이 엠마오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든지, 절망에 빠져있는 이들은 이 엠마오에서 다시 예수님을 만나 영적으로 마음이 뜨거워지고 또한 따스한 씻김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서 설명해주셨고 아마도 글로바의 집에 도착한 그들은 이 손님께 같이 들어가서 식사라도 하자고 말합니다.

여기에 이름이 나타난 글로바Cleopas는 누구입니까?
여러가지 견해가 교회사적으로 있어 왔는데 일단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을 끝까지 수발하고 십자가의 밑에 있었던 마리아의 남편이었습니다.
[요19: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그리고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 요셉의 남동생이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글로바의 아내는 십자가 밑에서 끝까지 있을만큼 믿음이 뜨거웠고 아마도 글로바는 아내를 예루살렘에서 슬퍼하는 여인들과 서로 위로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남겨두고 아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었던가 추측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더 가려는 것 같이 하셨습니다.
성경을 풀어서 설명하신 것으로 할 일을 다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간청하자 허락하시고 들어가서 식사까지 하시고 축복의 기도를 하십니다.
제자들의 간청을 들어주시고 식사하신 예수님의 다정다감 하심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후 어느 순간 예수님은 사라지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미 예수님은 부활 후에 입는 영화체를 입으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부활 후에 예수님께서 여러번 나타나셨는데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동산에서 울던 마리아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영화체를 입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설마 시체가 다시 살아나리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부활 영화체는 어딘가 우리의 육신과 다른 형태를 지님을 추측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사라지시고 문이 닫혔는데도 들어오셨고 그 영화체를 입으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영화체는 또 육신의 모습을 가졌기에 식사도 같이 하시고 살과 뼈가 있다고 만져보게도 하셨습니다. 만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점에서 제자들이 당황하지 않도록 인간의 육신의 특징을 지닌 몸으로 친히 나타나셔서 의심을 버리게 해주신 사랑의 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Caravaggio(1573–1610), Supper at Emmaus (Milan), 1606, 141cm x 175cm)
마음이 뜨거워졌다!
눈이 가리워졌던 그들의 눈이 열렸습니다.
[눅24: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다른 생각이 가득하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머리 속에 딴 생각이 가득하면 아무 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같이 있어도 못보고 같이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마음에 다른 것이 가득하면 실제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종종 나는 들었고 나는 보았는데 너는 못보고 못들었느냐는 오해도 생겨납니다.
그런데
이들은 마음이 열리기 시작한 식사 시간에 예수님을 비로소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들의 눈이 열렸다고!
무엇보다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엠마오라는 그 지명처럼, 마음에 뜨거운 감격이 솟구쳤습니다.
그리고 부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부활을 상징하는 나비는 30도가 되어야 비로소 날개짓을 하듯이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자 그들은 부활의 증언자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뜨거워져 부활의 증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눅24: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눅24: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눅24: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눅24: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그리고 그들은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열한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이 모여있었고 이미 그들도 부활의 신비에 대해 놀라운 고백을 쏟아내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두 사람도 엠마오 도상에서 만났던 예수님을 감격으로 간증합니다!
그런데 그때 그곳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샬롬!!
[눅24: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눅24:37]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눅24: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눅24: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눅24:4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눅24:41]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눅24: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눅24: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그 가운데 서셨다'고 했으니 부활 영화체의 몸으로 공간을 초월하여 움직이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더욱 놀랐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태연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리고 의심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의심이 일어날 때도 있습니다! 의심이 일어나지 않도록 믿음을 더욱 굳게 해야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배가 고프신지 먹을 것이 없냐고 물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참 따뜻하고 다정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급히 생선 한토막을 가져다 드립니다.
[눅24: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눅24: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먹고 사는 인생의 어려움에 함께 하신 예수님
그러고보면 예수님께서는 먹는 것을 참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엠마오의 집에서도 식사를 하셨습니다.
이곳에서도 생선 한토막을 드십니다.
그후에 갈릴리 바닷가에서 예수님은 밤새 그물질을 하는 제자들이 추울새라 숯불도 피워놓고 떡도 따뜻하게 구워주시고 생선이 있느냐 물으시고 식사를 같이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차려주신 식탁이었습니다.
밥을 먹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이 땅의 모든 문제가 '먹고 살려다보니' 생겨나는 비극임을 잘 이해하셨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생겨나는 그 수많은 인생의 사연들!
예수님께서는 그 인생의 가장 바닥이 되는 먹는 일에 관심을 가지시고 함께 동참하심으로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삶을 모르고 있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아마도 지금 예수님께서 계신다면 우리의 쌀독에 쌀이 떨어지지 않았는지 관심을 가지실 것입니다.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또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렇게 먹을 것에 관심을 가지시는 자상한 마음으로 우리를 돌보심이 감격입니다.
그리고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두려움과 의심과 염려를 가지고 살아가는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와 함께 계셔서 식탁의 교제를 나누시고 함께 잡수시고 그리고 위로하시고 용기를 주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밥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우리의 노고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그 자상하심과 배려를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곁에 계시매 우리는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곁에 계시매 우리는 좀더 멋지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위로와 은혜로 부활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