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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지천명쉼터(知天命) 원문보기 글쓴이: 두루뭉실
천왕봉 정상 성모사에 안치되어 잇던 성모석상이
왜구에 의해 박해를 받은 것이 첫 수난이었다
고려 말
전남 인월지역에 있던 왜구들을 토벌하면서
이성계에게 폐하여 도주하던 왜구가 이에 앙심을 품고
지리산 천왕봉에 모셔져 있던 선도성모석상을
칼로 내려처 코와 귀가 떨어져 나간 흔적이 있으며
도망치던 이 왜구는 내려오다가 저렴바위에서 피를
토하고 즉사 하였다고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그때부터 이 바위를 “피 바위”라고 부렸다
외국 선교사들의 황토병 치유를 위하여
1921년부터 지어진 총 56채의 수양관으로
이곳에서 한국어를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아
1936년 구약성서를 한국어로 번역하였다고 함
1965년 노고단 초막에 최초의 등산안내판 설치 함
지리산악회 전신인 연화반 구례 중 교사 우종수 외 다수가
1957년부터 착수하여 1962년에 완성한 후 1965에 보안 한
지리산 최초의 등산안내도로써 참으로 귀중한 자료입니다
초창기 노고단 탑의 모습
노고단에서 오중환, 황영자씨의 결혼식
1965년 노고단에서 비박하는 모습
노고단 곰 할아버지의 움막과 선교사들 수양관의 흔적
선교사들 수양관의 흔적
1972년에 건립 된 노고단대피소(1987년까지 함태식옹이 운영)
제 1회 노고단 산나리(원추리)잔치 때의 모습 1974년 05월
현 노고단대피소 신축현장과 함태식옹
반야봉에 있었던 옛 돌탑의 모습
반야봉에 있었던 돌탑의 무너진 흔적 2008년 06월
현 연하천대피소에서 비박하는 장면
현 벽소령대피소 신축현장
현 세석대피소에서 거림 쪽으로 약 2km 밑에 있었던 움막
구 세석대피소의 모습
구 세석대피소 철거현장
세석대피소에서 비박하는 모습
지난 날 산 중에서 쓰레기를 소각하는 장면
장터목에서 물물교환이 이루어지던 광경
1950년 02월 화마가 닥치기 전 제석봉의 울창한 산림
자유당정권 때
농림부장관의 삼촌이 제석봉 제석단에
제재소를 운영하면서 무단으로 벌목한 것이
문제가 되어 그 흔적을 감출려고 불을 질렸다
화마가 스처간 후의 제석봉 모습
지게를 이용하여 산 중의 쓰레기를 산 아래로 이동하는 모습
천왕봉의 성모사는
1489년 이곳을 오른 김일손의 "속두류록"에 의하면
성모사는 천왕봉 정상에
한 칸 정도의 돌담 벽이 있고 담 안의 너와집에
성모상이 안치돼 있었다고 전한다
천왕봉에 있었던 성모석상을 모신 성모사의 모습
이 사당은
예로부터 지리산 천왕봉에
성모사를 세워 성모신을 모시고 숭상해 왔다.
천 여년 전부터 세워저 있었다는 성모석상은
신라시대에는 박혁거세의 어머니로,
고려시대에는 태조 왕건의 어머니로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다르게 불리어왔다.
이 사당이 없어지게 된 사연은
“어우야담”에 의하면 천연(天然)이라는 승려가
미신적인 “음사”를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성모사를 불태웠다는 이야기가 있다
천왕봉에 있었던 성모사는
1489년 이곳을 오른 김일손의 "속두류록"에 의하면
성모사는 천왕봉 정상에
한 칸 정도의 돌담 벽이 있고 담 안의 너와집에
성모상이 안치돼 있었다고 전한다.
천왕봉 정상 성모사에 안치되어 잇던 성모석상이
왜구에 의해 박해를 받은 것이 첫 수난이었다
고려 말
전남 인월지역에 있던 왜구들을 토벌하면서
이성계에게 폐하여 도주하던 왜구가 이에 앙심을 품고
지리산 천왕봉에 모셔져 있던 선도성모석상을
칼로 내려처 코와 귀가 떨어져 나간 흔적이 있으며
도망치던 이 왜구는 내려오다가 저렴바위에서 피를
토하고 즉사 하였다고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그때부터 이 바위를 “피 바위”라고 부렸다
그 뒤 복원 한 후
일본 강점기에도
민중들의 무속적 신앙의 지주가 되자
일제 당국자가 사당을 철거하고
성모석상을 벼랑 아래로 굴러버렸다
이에 산청의 한 처녀가 벼랑 아래에 있는 성모석상을
자기 집에 모셔 놓았는데 성모의 신통력을 입었는지
“무당”이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시멘트로 복원 한 후
원래에 있던 곳 천왕봉에 모셨는데
1945년 11월경
누군가에 의하여 성모석상이 도난 되어
이듬해부터 가뭄이 들어 지리산 마을마다
소동이 일어나서 수소문한 끝에
삼장면 내원리 어느 집에서 발견되었다
찾은 후 다시
천왕봉 성모사에 모실 때까지만 하여도
성모사 건물에는 숱한 기도객들의 염원을
들어주며 천왕봉을 지켯다
계속된 수난이
몰상식한 종교인들과 등산객들의 불소시게 감으로
해체되어 노천 돌담 안에 모셔저 있었는데 . . .
어느 날 또 함양의 한 농부에 의해
선도성모석상의 목에 동아줄을 묶어
산 아래로 끌고 내려오면서부터 수난이 . . .
또 다시
1972년 무식한 종교인들의 소행으로
마애불상과 성모석상을 훼손하여 버러진 후
혜범스님이라는 분의 끈질긴 노력 끝에(현몽 발견으로 유명)
1986년 1월 12일
진주 비봉산 아래 과수원에서 두상부분을 찾았고
같은 해 5월 9일에는
천왕봉 남쪽 500m 통신골에서
훼손되어 있던 몸통부분을 찾아내어 대수술을 거쳐
천왕봉 밑 중산리에 있는 천왕사에 모시고 있다
그러나 마애불상은 아직 흔적을 찾을 수 없다 . . .
아마도 최초의 천왕봉 표지석이 아닐는 지?
1982년 설치 한 현 표지석 앞전의 모습?
누구 왈 여수산악회 회원 2명이
경남인에서 영남인으로 바꾼 후
영남이라는 각자가 못맞땅하여 쇠망치로 훼손하였다 함
1982년에 세운 현 표지석의 영남인 각자를
한국인으로 고치기 직전의 표지석
영남인의 각자가 거슬린다고
한국인으로 각자를 바꾸는 작업 중
1955년 04월 구례 중 교사 우종수, 강기종, 안성문씨 등이 주도하여
전남 구례경찰서에서
지리산 입산 허가를 최초로 득 한 후 지리산를 등반 함
1955년 05월 천왕봉에서의 모습
(아래사진 맨 위 우종수 아래 좌로부터 황태식, 임현택, 김태준, 임재택교사들의 모습)
천왕봉의 웅장한 모습
바위에 각자 된 천주(天柱) 우리나라의 기둥이라는 뜻이라네요 . . .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곳 해발 1450m에 위치한 법계사 3층 석탑
우리나라 정기를 말살 할 려고
전국 각지에 수많은 쇠말뚝을 박았다던
일본 쪽 바리들의 만행이 현실로 밝혀졌다는
증거로 그중 일부분에 지나지 않은 쇠말뚝 중
이곳 법계사에서 발견되어 제거한 쇠말뚝입니다
칼바위부근 쯤 신선너들에 있었다고 함
1957년 지리산 천왕봉 산행기
2년전인 55년에 지리산 초등을 하고
이제 두번째 지리산을 가기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다.
쌀 여섯되, 미싯가루 두되, 군용텐트, 시트겸 판쵸,
군용침낭, 김치독, 간장, 된장, 고추장 버무린 독,
마니라로프 20m, 카메라, 쌍안경, 삽, 톱, 야전도끼,
야전곡괭이, 간식, 부식, 세면구, 보온 주, 석유,
알코올 한되씩, 알콜깡통, 항고 등등..
산더미 같은 장비를 쌓아놓고 보니
륙색으로는 엄두가 나지 않아서
자갈치 시장에서 급히 군용 샌드백을 구입했다.
샌드백 한쪽 포켓에 항고가 두개쯤 들어갈 수 있는 크기로
양쪽을 붙이고 그보다 작은 포켓을 가운데 붙였다.
넣을 것이 많아서
위에도 세 개의 포켓을 달고 나니 아주 근사하다.
이 륙색을 만든 다음 너무도 좋아서 자다가도 깨어서
만져보고 얼마나 쓰다듬었는지 모른다.
1957년 6월 23일
06시 철마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열차가 삼랑진을 지날 무렵에
오직 나만 믿고 동행한 Y군과 L군의 얼굴을
쳐다보니 과연 길을 찾을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마산을 지나 터널을 지날 때마다
석탄가루가 얼굴에 달라붙고
더워서 질식 할 뻔 했다.
12시 40분
부산을 출발해서
6시간 40분 만에 진주에 도착했다.
진주역에는 같이 산행할
Y군의 친구 K가 마중 나와 있었다.
지리산을 잘 안다는 이 친구를 보니
천군마마를 얻은 기분이다.
팥죽 같은 땀을 흘리며
“진주역”에서 2키로 거리인 시외버스 정류소에 오니
하루에 한번 다니는 덕산가는 버스가 이미 떠나고 없다.
어차피 진주에서 중산리까지
걷기로 작정하고 나왔으니 하는 수 없다.
물어물어 산청방향으로 가다가 쉬고,
가다가 쉬고 하면서 행군을 계속했다.
진주에서 “원지”까지가 50리라
하지만 65kg 정도의 짐이 너무 부담스러워
“명석”에 도착하니 촌보도 움직일 수 가 없어
어느 과수원 귀퉁이에 텐트를 치고 첫 밤을 보냈다.
6월 24일
“명석”지서 순경이 운이 좋으면 고령토 트럭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해 줄터이니 기다려 보란다.
9시경 요행히 먼지 펄펄나는 트럭을 얻어 탓는데
한참을 가니(12키로 정도) 내리라 한다.
“시천(덕산)”을 향해 또다시 걷는다.
입은 옷이 소금에 절어 뻣뻣해질 때까지 걸었다.
긴 여름해가 어둠에 깔릴 때까지 걸어온 덕분에
8시경에 덕산장터에 닿아서
강둑에 텐트를 치고 고단한 몸을 뉘였다.
6월 25일
“덕산”에서 “곡점”까지 12키로 라고 한다.
시어서 못 먹게 된 김치 독 1개를
미련 없이 버리고 나니 한결 짐이 가볍다
“덕산”을 출벌한지 4시간 만에 “곡점”에 도착해서
“중산리”까지 갈려 했는데 날씨가 너무 더워 더 이상
걷기가 힘이 들어 오늘은 일찌감치 “곡점”에서 텐트를 친다.
“곡점” 마껄리 도가의 냄새에 이끌려
네 명이 두 말을 먹고 잠이 들었다.
6월 26일
오늘부터는 좀 힘차게 걸을려고 마음먹고
중산리를 향하는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빗물이 륙색 안으로 들어가서 꿀렁거려
더 이상 전진을 못하고 “동당리마을” 재실에 대피해서
아무리 기다려도 비가 그칠 기미가
없어 이곳에서 하루 밤을 잘 수 밖 에 없다.
시간이 많아서 간식으로 콩을 볶아 먹기도 했다.
콩을 먹으며 계속 물을 마셔대던 L군이
저녁에 결국 설사를 만나 고생을 하는 모습이 안쓰럽다.
6월 27일
비는 계속해서 내린다.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할 수 없어 빗속을 걸어
“하중산리”에 닿으니 계곡의 물살이 엄청나서
칡넝쿨로 얽어 만든 통나무다리를 건널 때에는
눈이 뱅뱅 돌릴 지경이다.
“하중산리”에 있는 돌아가지 않는
물레 방아간에서 잠시 비를 피한 후
다시 빗속의 황토 길을 걸어서 “중중산리”에
오르니 점심 때 가 훨씬 지난 두시 10분 이었다.
쏟아지는 비 때문에 밥을 지을 수 없어
미싯가루로 허기만 면하고 급한 경사 길을 올라서
드디어 지리산 천왕봉 초입인 “상중산리”에 도착했다.
땅이 질퍽거려 텐트 칠 자리가 없어 “홍순표”씨라는
집에 민박을 했는데 얼마나 방에 불을 많이 땟는지
이틀 동안 비에 젖은 옷이며 장비가 밤새 바짝 말랐다.
6월 28일
오늘도 비는 안 그친다.
중산리 언덕에서 보니
계곡에 집채만한 돌들이 굴러 내려오고 있다.
마을에서 논이 있는 곳으로 가서 개울을 건너야 하는데
근 두 시간을 헤메었는 데도 논길을 찾을 수 가없다.
지리산을 잘 안다는 진주의 k군에게 의논을 하니
사실은 자기도 지리산이 오늘 처음이란다.
그러면 왜 잘 안다고 했냐고 힐책을 하니 안 그러면
동행 시켜주지 않을 것 같아서 거짓말을 했단다.
기가 막힌다.
할 수 없어 홍순표씨 집에 다시 가서
그를 데리고 와서 길을 안내 받긴 했는데
불어난 물 때문에 도저히 계곡을 건널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계곡의 물이 빠지는 것을 기다리는 수 밖 에
도리가 없다.
빗줄기는 차츰 약해지며 오후가 되니
그치긴 해도 계곡물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순두류 삼거리지점의 언덕을 깎아
젖어서 납덩이같은 텐트를 치고 시끄러운 물소리와 함께
또 하룻밤을 중산리에서 보낸다.(지금의 매표소 맞은편 언덕)
6월 29일 [도강작전]
물소리 때문인지 도강 걱정 때문인지 잠이 안 온다.
지리산의 아침은 우중에도 밝아 왔다.
도강 준비를 하는데 다른 방법이 없다.
마닐라 로프를 활용하기 5미터 전방에 있는 바위까지
나무다리를 만들기로 햇다.
허벅지만한 나무 세 개를
야전도끼로 찍어서 엮어 일단 간이 다리를 만들었다.
거기서 부터는 짐 없이 힘껏 다음 바위로 도약하고
또 도약하고 그래서 첫 번째 대원이 넘어갈 수 있었다.
무거운 로프를 강 저쪽으로 던져 나무에서 나무로 연결한 뒤
륙색은 먼저 보내고 대원들은 뛰어 건너 겨우 도강에 성공했다.
3시간 20분이 걸리는 대 역사 였다.
여기서 우측소로를 따르면 순두류가 나오고
왼쪽으로 가야 칼바위가 나온다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기 때문에 왼쪽 길로 접어드니
민가 두 채가 나타난다 물소리가 얼마나 장황했던지
그토록 고함을 지르고 했는데도 전혀 듣지 못했다 한다.
칼바위에 도착하니 3시30분경.
시계에 물이 들어갔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첫 번째 개울 두 째 개울을 건너고 우측으로 가라는
신신당부를 받았지만
우측에는 길이 없고 왼쪽에 길이 있어 륙색을 벗어 놓고
정찰에 나섰어나 100미터도 못 가서 길이 없어진다.
되돌아와 우측으로 길을 찾았으나 도저히 나갈 길이 없다.
일제 군용도로 잡목을 베면서 70미터 정도 전진을 하니
희미한 나무꾼 길이 나온다.
알고 보니 두 번째 개울 건너 다시 그 개울 상류를 건너
우측으로 한바퀴 도니까 길이 연결이 된다.
그 길을 찾고 나니 안심도 되고 피로가 겹쳐
칼바위 캠프에서 텐트를 친다.
6월 30일
언제 비가 왔느냐는 듯이
강렬한 태양이 아침부터 극성을 부린다.
엿새 동안의 노독과 도강 작전에 너무 지쳐서
오늘 하루는 여기서 푹 쉬기로 대원들이 의견일치를 한다.
산행 로를 확인하기도 하고
물이 줄어든 개울을 건너 다래 밭에서
새파란 다래를 서너 되나 따오기도 했다.
더위를 식히려 차가운 물속에 들기도 하며
한가한 하루를 보내고 내일을 위해항고 밥을 일찍 해먹었다.
어제 실수로 알콜 한 되를 쏟아 버렸기에
내일 아침 연료용으로 화력 좋아 보이는
솔방울을 따서 쌀자루에 담아두고 잠자리에 든다.
새벽 녁에 L군이 떠드는 소리에 잠이 깨어
무슨 일이냐고 물어 보니
쥐가 발바닥을 갉아 먹었다고 한다.
무슨 그런 일이 하면서
내 발바닥을 쓰다 듬어니 우둘투둘하다.
기역자 전등으로 비춰보니
쥐의 특유한 두 이빨자국이 선명하다.
다시 잠을 청하는데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전등을 비추니
엄지손가락만한 생쥐가 잠든 Y군의 배를 타고 넘어
달아나는 놈을 워커로 일격을 가해 잡는데 성공한다.
7월 1일
하루를 쉬었음 에도 새앙쥐 사건으로
잠을 설쳐 컨디션이 개운치가 않다.
그래도 육중한 륙색을 메엇다.
사람 길인지 짐승 길인지 분간이 어렵지만
간혹 길에 떨어진 담배꽁초로 길을 확인하곤 한다.
가파른 길을 헤매면서 올라가니 바위가 앞을 막는다.
바위를 탈수 없어 빽하여 길을 찾으니
국사봉으로 오르는 길 같은 것이 보인다.
계속 타고 오르니 이 길이야 말로
망 바위로 오르는 코스였다.
망 바위에 올라 성냥갑 같은 중산리를 내려다 보면서
여기까지 온 것만도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앞에 보이는 바위가 문창대라고 들었기 때문에
오늘은 문창대를 지나 법계사 까지는 가야한다.
확확 쏟는 지열을 감당하면서
문창대에 닿으니 평길이 나와 살만하다.
평길이 끝나고 자갈돌길이 나올 때는 죽었구나 했는데
바위 사이에서 쏟아지는 석간수로 위기를 모면한다.
(지금의 로타리산장 부근)
은은히 들리는 종소리에 법계사가 가까웠음을 느끼고
급하게 법계사로 향했다.
혹시 법계사가 아닌 건 아닐까 걱정을 하면서 . . .
무거운 짐과 더위에 지쳐 기다시피 하여 오르니
정자 같은 가옥이 나타난다.
큰 돌위에 석탑이 보여서 옳거니!
절집이 맞다고 확신하고 급경사를 급히 오르니
웬 부인이 반겨 맞는다.
부산에서 왔다고 인사를 청하니
자기는 법계사를 지키는 손보살이라고 한다.
절위로 보이는 산봉을 바로 오르고 싶어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어니 4키로라고 하면서
저봉우리는 일출이 장관이기 때문에 여기서 자고
내일 새벽에 오르라고 붙잡는다.
해는 한 발이 남았지만 혹서에 지친 몸이라
거부할 생각도 없이 머물기로 했다.
텐트를 치고 나니
산삼이라면서 재배한 인삼을 한 뿌리씩 준다.
또 여덟 가지의 약초로 직접 빚은 팔선주라는 술도
반주전자나 주어서 멋모르고 마시고
저녁도 굶은 채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
7월 2일
고맙게도 손보살이 깨워주어서 눈을 뜨니 새벽 세시였다.
일출 보기가 힘드니 어떻게 하든지 일출을 보고 오라고
당부를 하는 손보살의 배웅을 받으며 출발 햇다.
기역자 군용 후랫쉬를 비추며 한참을 오르니
날이 밝아오면서 앞에 보이는 산봉이 잡힐듯 하면서
접근하기가 점점 너무나 힘이 든다.
바위가 쫙 갈라진 채 입을 벌리고 있는 곳에 닿았다.
이정도 오르면 개선장군들 이라고 생각하고
이곳을 "개선문"이라고 명명했다.
집채만한 큰 바위가 길을 막아
네 사람이 륙색을 벗어놓고 길을 찾아 나섰다.
겨우겨우 바위뒤쪽으로 나 있는 짐승 길을 찾아서
오르는데 정말 힘이든다.
산딸기가 수 없이 널 부러져있어도 따 먹을 겨를도 없이 진행한다.
풀을 베고 나무를 찍어내고 나아가니
20미터 정도의 암벽이 또 길을 막는다.
마닐라 로프와 기술을 총동원 햇지만 도저히 오를 수 없어
나무를 베어가면서 왼쪽 능선으로 붙었다.
이제 길이 좀 나타날까 했는데
다시 움푹패인 암장 하나가 길을 막는다.
산봉은 잡힐듯 가까워 있고 급한 마음에
바위를 오르려고 몇번 시도를 하나 이끼 때문에 불가능 하여
1시간을 허비 한 다음 하는 수 없이 우측 계곡으로 들어가
흘러내린 바위를 타고 산봉으로 직등을 시도한다.
넝쿨이 발을 매섭게 감아쥐지만 단도로 짤라 가며
길을 만들어서 올라갔다.
법계사에서 지고 온 물독이 무색 할 정도로
바위틈으로 물이 흐르는 곳도 있다.
좌로 우로 비껴가면서 낙석지대를 오르니
마음은 산봉에 있고 몸은 한없이 지친다.
이제부터 길은 거의 기어서 오른다.
기어서 기어서 오봉 밑에 오르니 감로수가 철철 넘친다 .
마지막으로 목을 추기고 20미터 정도 남은 산봉을 향해
오르는 도중에"김순용"영감이 산봉 밑에 다지다가 둔
캠프장의 언저리에 삽과 곡괭이가 널려져 있다.
이제 앞으로 10미터 ! ! !
감격스런 산봉이 눈앞에 있다.
륙색을 풀어 던지고 가벼운 몸으로 뛰다시피 산봉에 올랐다.
여기가 천왕봉! 이 감격, 이 환희,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두 번째의 감격이다.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부르고 야호도 왜 쳤다.
안개가 심해서 일출을 못 보는 것이 안타깝기 짝이 없다.
이제 더 갈 때도 없다.
어떻게 해서 여기에 왔는가.
그 아쉬움 때문에 도저히 하산할 수 없어
우리는 천왕봉에 또 캠프를 차렸다.
* 위 글은 <성산>님의 산행기입니다.*
위 김순용 영감은
진주 분으로 빨치산들이 철수 한 뒤
제일 먼저 천왕봉에 올라 선점 한 후
빨치산들이 사용하던 움막에서 기거하면서
천왕봉 지킴이 역할을 하셨다고한다
움막에는 두 칸의 방이 있었는데
매점과 약 50여명이 이용 할 수 있었다고 하며
일반인은 50환, 학생은 30환을 받았다고 한다
천왕봉 성모사에 모셔져 있던 마애불과 선도성모석상을
바르게 알리면서 도난이나 수난을 예방하면서
우리나라의 자부심과 긍지를 같도록
천왕봉에 오른 등산객들에게
국기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 애국가를 제창하도록 하였으며
이것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건빵 한 봉지도 팔지 않았다고 한다
♡ 위의 자료와 사진은
대부분 산 선배이시며 개척자이신
구례 중 연하반 회원님들의 것이며
여러 곳의 카페에서 펴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