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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의 정체성 가운데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신앙과 신학의 중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검은 넥타이로 고난주간을 정해서 추모하고
계란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유사 기독교의 모습에서
성경적인 구원의 능력이 은혜로 임하는 참된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 신앙을 찾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애도하여 추모하는 신앙.......
그리스도의 부활을 구약적인 의식으로 기념하여 절기로 지키는 신앙......
이러한 일반화 되고 보편화 된 기독교의 모습에서
성경적인 구원과 영생의 부활을 경험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여태까지는 믿음과 신념이라는 관점에서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많이 살펴 보았지만......
실존과 실체적 진실이란는 관점에서
기독교 신앙의 허와 실을 바울의 부활 신앙으로 살펴볼려고 합니다.
역사적 예수에 관한 연구를 하는 신학자와
실존적 예수를 연구하는 신학자는 예수를 다르게 이해합니다.
역사적 예수의 부활을 믿는 사람과
실존적 예수의 부활을 믿는 사람, 역시 예수의 부활에 대한 다른 정체성을 가집니다.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신학자는 그리스도의 역사적 부활을 믿지 않고....
실존적 예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역사적 예수의 존재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캐리그마에 갇힌 예수의 탈출을 시도하고......
실존적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역사적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모순과 혼란한 기독교 부활 신앙의 정체성에 대해서
일반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보는 것만 보고, 듣는 것만 듣는
아주 맹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냥.... 고난주간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애도하여 추모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죽은 계란으로 기념하여 종려주일과 부활절을 절대 신념으로 지킵니다.
크리스마스 다음날.....
그리스도의 탄생을 감탄하고 탄성하는 크리스챤이 아무도 없듯이
부활절 다음날....부활의 생명으로 약동하는 성도는 아무도 없습니다.
실제로 넌 크리스챤입니다.
성탄절과 부활절을 초대 교회와 신약 성경의 저자들이......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않는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역사적 예수를 찾았던 슈바이쳐는
사랑과 봉사로 자칭 예수의 삶을 살았지만 역사적 부활의 예수를 만나지 못하고
다빈치 코드 의식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실존적 예수의 부활을 강조하였던 볼트만의 영향은
신정통주의와 자유주의를 혼합한 이상한 한국의 장로교를 캐리그마로 가졌습니다.
칼뱅의 개혁 신앙을 따르는 개혁주의가 장로교의 전통이자만
볼트만과 바르트의 실존 신앙을 추구하는 장로교는 한국 교회의 또다른 실존 신앙이 되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분들은
이처럼 혼란한 신앙의 정체성을 막연히 신봉하는 크리스챤의 넌크리스챤입니다.
오직 시스템화된 인본주의 복음으로
번영과 성공의 기복과 무속 신앙으로 신적 능력을 종교적 이상으로 추구하고 성취할려는
울트라 모던 시대의 다원주의 종교적 노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구원의 말씀, 진리의 복음을 바로 알지 못하고
사탄의 거짓 미혹에 영혼을 판 종교적 광신자들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부활 신앙은
실존적 부활을 믿는 의식적 관념의 신앙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부활을 통전적인 믿음을 통하여 현재적 구원으로 영원한 영생을 얻게 하는 신앙입니다.
역사적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실존적 의미를 철학적 관념으로 신앙하는 것은
성경적인 부활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산 자의 하나님에 대한 참된 부활 신앙으로 예수님은
부활이 없다는 사두개인과 구약에 대한 잘못된 부활 신앙을 가졌던 바리새인들을 올바로 가르쳤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서 보고 들은 것을 순종으로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영원한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날 것을 말씀하였던 역사적 예수는
역사적 그리스도의 부활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완전히 증거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부활은
영생의 부활이라는 속성으로 십자가 고난으로 이룬 구속을 영원히 완성하여 이루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그 부활의 증거를 복음으로 믿는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이룬 구속을 하나님의 나라로 영원히 누립니다.
역사적 예수의 부활을 실존적 의미로 찾아
캐리그마로 선포된 신앙공동체를 기독교의 정체성으로 확립하는 것은 볼트만의 실존 신앙입니다.
캐리그마의 계시로 선포된 말씀에서 실존 신앙을 찾았던 바르트의 신학은
20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천적이었지만 신정통주의와 자유주의가 혼합되는 기형적인
한국의 장로교를 낳았습니다.
W.C.C와 실존 신앙으로 실천적 종교 다원주의를 열어가는 대부분 한국의 교회는
칼뱅의 개혁주의 산학과 신앙에서 아주 멀어지고 있습니다.
홍수가 나서 모든 것이 휩쓸려 가는 흙탕물 가운데서 맑은 물을 찾기 불가능한 모습이
지금 한국 교회의 실정이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아니라고 발버둥쳐도
거대한 홍수의 진흙탕 물결을 거슬러 맑은 샘물을 보존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올바른 성경적인 부활 신앙을 가진 한국 교회의 에덴 동산은
역사적 에덴 동산의 흔적을 찾기보다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 거리에서 의인 한 사람을 찾지 못해 하나님의 심판을 막지 못한 예레미야의 눈물은
창자가 흘러 땅에 쏟아져 내리는 아픔이었습니다.
역사적 예수를 찾아 캐리그마의 예수를 탈출시키려고 하였던 슈바이쳐는
위대한 신앙인으로 세계사가 사랑과 평화의 위인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슈바이쳐를 존경하는 실존신앙을 가진 한국 교회는
왜곡된 역사 이해라는 모순과 혼란을 사탄의 미혹아라는 유혹으로 타락의 늪을 가졌습니다.
신정통주의와 자유주의가 혼합되고......
역사적 예수와 실존적 예수가 혼합되고......
칼뱅의 개혁주의와 성공과 번영의 기복적 무속 신앙이 혼합된 한국 교회의 정체성은
검은 넥타이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추모하고
죽은 계란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의식을 공동으로 합의하여
성공과 번영을 종교적 이상으로 추구하는 다원주의적 바알 교회가 되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은 예레미야의 목마른 심정이 되어
바울의 부활 신앙을 통하여 진흙탕물을 생명의 샘으로 정수하고자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참된 부활 신앙은
바울 서신에 계시된 복음의 말씀으로 녹아져 있습니다.
핍박자와 박해자로 살기 등등하였던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빛의 광채로 경험하였습니다.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사울의 놀라운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를 해하는 핍박자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복음 전파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4차에 걸쳐 사도의 역활을 수행한 전도 여행을 누가의 사도행전에 기록되었고......
로마서 등 많은 서신을 성경의 복음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 편지인 서신서에 기록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은
4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이나 올바른 비유 풀이는 물론, 모세 율법이나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거나 해석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니엘에 대한 바울의 이해....
예레미야에 대한 바울의 이해.....
말라기에 대한 바울의 이해.....정말 전무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에 관해서는
인용은 물론 해석이나 언급조차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의 인치시는 사역에 관해서
복음서보다 더 복음적인 이해로 넘쳐납니다.
바울의 복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증거입니다.
그리스도 십자가 고난과 부활에 관한 바울의 이해는
완전한 복음, 그 자체로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선포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으로 구속을 이루었고....
그리스도의 부활로 구속을 영원히 완성하였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증거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복음입니다.
바울은 역사적 예수의 부활을 실재적 부활로 경험하였고....
그리스도의 부활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영원한 구속의 복음 진리로 정립하여 선포하였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부활 신앙은
역사적 예수를 실재적 부활로 경험하여 성령의 인치심으로 진리의 복음을 마음에 새겨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바울의 부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통전적인 믿음이었습니다.
"우리 주" 라는 바울의 신앙 고백은
역사적 예수를 실체적 그리스도의 부활로 경험하여
"나" 라는 바울의 개인적인 신앙 체험이 아니라 부활의 증거를 통하여
"우리"라는 교회 공동체적인 믿음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부활의 증거를 통하여
"우리"라는 에클레시아, 교회를 우주적 하나님의 나라를 세웠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실존적인 개인의 신앙 체험이 아니라
"우리 주"라는 교회 공동체의 신앙고백으로 그리스도를 만유의 주로 증거하고 선포하였습니다.
부활을 증거한 바울은
부활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온전히 전파하였습니다.
부활의 증거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둔 교회가 탄생하였고.....
교회는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 되어 통치하는 영원한 우주적 하나님 나라를
복음의 이상이 되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바울의 부활 신앙은
실존적 예수의 부활을 강조한 볼트만의 실존 신앙을 완전히 무너뜨립니다.
실존적 예수의 부활은 인식의 주체가 "자아"이기 때문에
실체적 부활을은 믿음의 주체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바울의 부활 신앙과 충돌됩니다.
실체적 부활의 체험을 증거함으로 교회 공동체의 부활 경험으로 승화시킨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부활 신앙은 실존적 부활이라는 인본주의 관념의 의식이 아니라
실재적 부활의 능력으로 우주적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갑니다.
볼트만의 실존적 부활의 의식은
물결 위에 비치는 달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빛을 인식하는 자아가 존재 하지 않아도 빛은 빛으로 존재하며
빛을 인식하기 떄문에 빛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빛은 시간을 만들어 내지만
낮과 밤을 만들어 내는 빛은 우주적 공간으로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시간의 연속인 인류의 역사 위에 존재하는
시공을 초월한 영원한 생명의 빛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실존적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바로 영원히 존재하는 실체적 믿음의 대상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실존적 부활의 달그림자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만들어 내는 빛처럼 실체적 우주의 영원한 생명의 빛으로 믿는 것입니다.
실존적 부활의 인식으로 실체적 부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적 부활은 이렇게 우주의 빛처럼 영원한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영원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실존적 부활로 인식하는 경험은 인본주의 신앙이요,
그리스도의 부활을 실체적 부활로 믿는 것은 신본주의 신앙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구원의 은혜로 받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적 부활은 개인의 실존 경험으로 갖는 인본주의 관념의 의식이 아니라
그리스도 부활의 영원한 생명을 빛으로 증거하여 믿음의 공동체적 고백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은 실존 신앙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과 실체적 부활의 증거를 믿음으로 그리스 부활의 생명과 빛을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실존적 부활 신앙은 인식의 자아 경험이지만
실체적 부활 신앙은 관념이 아니라 부활의 속성이 갖는 생명의 능력으로
영생을 이루는 변화를 은혜로 받습니다.
부활과 영생은 종교적 이상의 관념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성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부활을 그리스도 복음의 증거로 믿는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부활과 영생의 영원한 능력을 하나님의 은혜로
영원히 누리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구원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바울의 부활 신앙은
실존적 부활이라는 인본주의 의식의 관념이 아니라 사도들이 목격한 그리스도 부활의 증거를 믿음으로
에클레시아라는 부활 신앙의 교회 공동체를 하나님의 나라로 열어가는 진리의 복음입니다.
부활은 실존적 영성의 경험이 아니라
실체적 부활의 증거를 믿음으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고.....
영원한 부활의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복음의 본질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아들로 영원한 증거를 가진 만유의 주가 되어
우주적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를 통치하는 영원한 빛이요, 생명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생명의 그리스도 부활을 구원의 복음으로 증거하는데
오늘날 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부활의 설교는 실존 부활의 경험을 갖는 영성을 강조합니다.
실존적 부활의 영성은
결국 부처가 되고자 하는 불교의 인본주의 신앙의 영성과 본질을 같이하여
실존 신앙으로 종교 다원주의를 열어가는 동력으로 작용합니다.
실존적 신앙이란 불교적 신앙이며.......
사람이 신이 되는 경지를 추구하는 인본주의 종교의 이상입니다.
어떻게 절대적 신본주의 신앙의 결정체인 그리스도의 부활이
실존적 부활이라는 인본주의 신앙의 영성이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유명론과 신비주의가 득세하였던 중세 카톨릭 교회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믿음을 강조하였던 칼뱅과 루터는
바울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로 받은 개혁신앙의 선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바울의 부활 신앙은
만물을 그 뜻대로 지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과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실존적 자아 인식이 아니라
실체적 믿음의 대상입니다.
믿음의 주체가 자아인 신앙은 실존 신앙이요,
믿음의 주체가 대상인 신앙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얻는 참된 기독 신앙입니다.
실존 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개인주의를 낳았고,
개인 구원에 대한 반발로 민생을 위한 사회적 복음인 해방 신학과 민중 신학을 사생자를 낳았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부활 신앙은
그 부활의 증거, 곧 진리의 복음 선포를 통해서
개인의 구원은 물로 민생을 위한 사회적 복음을 초월하여
영원한 부활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를 받아
만유의 주로 우주적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왕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새생명을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새에덴 동산의 교회요,
예수의 하나님 나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