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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이사악 조그(10.19) , 바오로(십자가의)(10.19) , 요한 드 브레뵈프(10.19) ,가롤로 가르니에(10.19)
이사악 조그(10.19)
성인명 이사악 조그 (Isaac Jogues)
축일 10월 1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선교사, 순교자
활동지역 캐나다(Canada)
활동연도 1607-1646년
같은이름 아이삭, 아이작, 이사꼬, 이사꾸스, 이사코, 이사쿠스, 이사크, 이삭, 이자크
성 이사악 조그는 1607년 1월 10일 프랑스 중부 오를레앙(Orleans)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향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는 1624년 17살의 나이로 예수회에 입회하여 루앙(Rouen)에서 수련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1626년 첫 서원을 한 후 라 플레슈(La Fleche) 왕립 대학에서 철학을 배웠고 1633년 신학 공부를 위해 파리(Paris)의 클레르몽(Clermont) 대학으로 보내졌다. 이어서 1636년 1월 클레르몽에서 사제품을 받고 2월 10일 첫 미사를 봉헌했다. 일찍부터 선교사를 소망했던 성 이사악 조그는 뉴프랑스로 불리는 캐나다의 퀘벡주(Quebec州)에서 선교하는 성 요한 드 브레뵈프(Joannes de Brebeuf) 신부의 이야기를 듣고 퀘벡의 휴런족(Hurons) 인디언 선교사로 자원했다. 그해 4월 8일 그는 성 가롤로 가르니에(Carolus Garnier) 신부를 포함한 5명의 예수회원과 함께 캐나다로 파견되었다. 6월 11일 퀘벡에 도착한 성 이사악 조그는 몇 달 뒤에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신부와 합류하기 위해 카누를 타고 먼 길을 떠났다. 9월 11일 휴런호(Lake Huron)의 아이호나티리아(Ihonatiria)에 있는 생조세프(Saint-Joseph) 정착 마을에 도착해 예수회 선교부 대표인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신부를 만났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성 이사악 조그 신부는 열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리고 1637년 퀘벡주에 천연두가 만연하면서 수천 명의 인디언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휴런족을 비롯한 인디언들은 유럽인에게서 전염된 천연두로 인해 엄청난 희생을 경험했고, 그 와중에 선교사들은 대재앙을 몰고 온 악마로 간주되어 인디언 주술사들로부터 큰 곤욕을 치르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다. 성 요한 드 브레뵈프는 휴런족의 거의 절반이 천연두로 사망하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그들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성 이사악 조그 신부도 6년 동안 생조세프 마을에 살면서 휴런족의 말과 생활 방식을 배우고 인디언들의 관습을 존중하며 삶을 공유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인디언 추장들의 모임에서 ‘검은 옷’을 입은 예수회원들을 죽여야 재난이 끝날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면서 순교의 위험이 점점 커졌다. 성 요한 드 브레뵈프는 생트마리(Sainte-Marie)라는 마을로 선교 본부를 옮겼고, 인근 인디언 마을 사람들에게 농사와 축산 방법 등을 전수했다.
생트마리 마을의 번영을 목격한 치페와족(Chippewas) 인디언들이 ‘검은 옷’의 선교사들을 요청하자 성 이사악 조그 신부는 1641년 9월 그들을 방문해 그들 또한 평화롭게 하느님을 섬기려 한다는 뜻을 선교부에 전했다. 치페와족은 슈피리어호(Lake Superior)에 사는 북미 최대의 원주민들이었다. 하지만 당시 예수회의 선교사가 부족해 그곳까지 가지는 못하고 휴런족의 복음화에 집중해야 했다. 1642년 휴런족이 기근과 질병에 시달릴 때 성 이사악 조그 신부는 동료들과 함께 보급품을 구하러 떠났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성 이사악 조그 신부와 성 르네 구필(Rene Goupil) 수사가 이로쿼이족(Iroquois)의 일파인 모호크족(Mohawks)에게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한 후 성 르네 구필 수사가 먼저 도끼에 맞아 9월 29일 순교하였다. 성 이사악 조그 신부는 1년 이상 감옥에 갇혀 손가락이 잘리는 등 잔인한 고문을 받고 노예로 살다가 다행히 어느 네덜란드 상인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오늘날 미국의 뉴욕시(New York City)에 해당하는 뉴암스테르담(New Amsterdam)에서 프랑스 예수회원들과 감격스러운 재회를 가졌다.
그리고 영국을 거쳐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렌(Rennes)의 예수회 거주지에 잠시 머물렀다가 1644년 4월 고향 오를레앙에서 어머니는 만났다. 순교의 열정에 불탔던 그는 6월에 다시 캐나다로 돌아와 몬트리올(Montreal)에서 먼저 활동하며 휴런족에게 돌아갈 길을 찾았다. 퀘벡으로 돌아온 그는 1646년 9월 24일 예수회의 평신도 보조자인 성 요한 드 라랑드(Joannes de Lalande)와 함께 모호크족이 속한 이로쿼이족과 프랑스 사이의 평화 조약을 확고히 하기 위해 프랑스 대사 자격으로 대표단을 이끌고 이로쿼이족 영토로 들어갔다. 어렵게 목적지인 오세르네논(Ossernenon, 오늘날 미국 뉴욕주의 오리스빌[Auriesville])에 10월 17일에 도착했다. 하지만 여전히 일부 모호크족은 수많은 인디언을 희생시킨 천연두 전염병의 원인이 ‘검은 옷’을 입은 예수회 선교사들 때문이라고 비난했고, 그 분노의 화살을 막 도착한 성 이사악 조그와 성 요한 드 라랑드에게 돌렸다. 결국 성 이사악 조그 신부는 또다시 모호크족에게 붙잡혀 칼로 난자당한 후 마지막으로 토마호크 도끼로 머리를 쳐 죽이는 잔인한 형벌을 받고 도착 다음 날인 10월 18일 순교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성 이사악 조그의 시신을 수습하려던 성 요한 드 라랑드마저 도끼에 맞아 순교하였다. 모호크족은 이들 순교자의 시신을 모호크강(Mohawk R.)에 버리고 그들의 머리는 마을 방어벽에 매달았다.
성 이사악 조그 신부는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슈피리어호 동쪽 입구까지 개척했던 선교사였다. 성 요한 드 브레뵈프와 성 이사악 조그 사제와 6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1925년 6월 21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30년 6월 29일 로마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캐나다의 순교자’(수호성인) 또는 ‘북미의 첫 순교자들’로서 성인품에 올랐다. 그들의 기념일은 로마 보편 전례력의 9월 26일에 추가되었으나 1969년 전례력 개정 이후부터 성 이사악 조그가 순교한 다음 날인 10월 19일(10월 18일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과 중복을 피하고자)로 변경해 기념하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0월 18일 목록에서 성 이사악 조그 신부가 캐나다의 오세르네논에서 순교했는데, 그는 이전에 이교도의 노예가 되어 손가락이 잘리는 고문을 당했고, 나중에 도끼에 머리를 맞아 순교했다고 전하며 다음 날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기념한다고 기록하였다. 성 이사악 조그는 성 이사쿠스 조그(Isaacus Jogues, 또는 이사코 조그)로도 불린다. 한편 여덟 명의 캐나다 순교자 중에서 모호크족에 의해 오세르네논에서 순교한 성 르네 구필과 성 이사악 조그와 성 요한 드 라랑드는 북미의 첫 순교자들(protomartyrs for North America)로 불리기도 한다.♣
바오로(십자가의)(10.19)
성인명 바오로(십자가의) (Paul of the Cross)
축일 10월 1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설립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694-1775년
같은이름 바울로, 바울루스, 빠울로, 빠울루스, 파울로, 파울루스, 폴
십자가의 성 파울루스(Paulus a Cruce, 또는 십자가의 성 바오로)는 1694년 1월 3일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Piemonte) 지방의 오바다(Ovada)에서 가난한 귀족으로 잡화점을 운영하던 부모의 16남매 중 장남(또는 둘째)으로 태어나 파올로 프란체스코 다네이(Paolo Francesco Danei)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제노바(Genova) 근처 크레몰리노(Cremolino)에서 소년을 위한 학교를 운영하는 사제로부터 초등 교육을 받았다. 15살 때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카스텔라초 보르미다(Castellazzo Bormida)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어려서부터 부모로부터 훌륭한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은 그는 집에 돌아와서도 엄격한 고행과 보속을 실천하며 금욕적인 생활을 이어갔다. 1713년에 그는 ‘첫 번째 회심’이라 부르는 영적인 체험을 했는데, 어느 날 한 사제의 강론을 들으면서 하느님께서 자신을 ‘참회의 생활’로 초대하심을 깨달았다. 성 바오로는 구체적인 참회의 실천으로 20살이 되던 1714년에 이슬람 군대와 맞서는 베네치아(Venezia) 공국의 군대에 입대하여 투르크군과 싸웠으나 군인은 자신의 길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1년 만에 제대한 후 그는 사제였던 삼촌에게 물려받은 유산과 결혼이라는 두 가지 기회를 모두 거절하고 몇 년 동안 카스텔라초에서 은수자로서 기도와 참회의 생활을 하며 삶의 방향을 모색했다.
그러던 중 1720년 여름에, 성 바오로는 기도 중의 체험을 통해 하느님께서 자신을 복음적 삶으로 초대하며 예수님의 수난에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을 전파하는 공동체를 만들라는 소명을 주심을 깨달았다. 그리고 검은색 제의 위에 하얀 십자가가 위에 그려져 있고 가슴 부분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하얀색의 문장으로 그려져 있는 환시를 보았다. 특히 세 번째 환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고 설교하는 이들이 모인 수도회를 설립할 것이라는 성모 마리아의 말을 들었다. 그가 환시 중에 본 문장은 나중에 그가 설립한 예수 고난회의 문장이 되었다. 성 바오로는 자신이 속한 알레산드리아(Alessandria)의 주교에게 그동안 체험한 환시에 대해 알렸고, 주교는 모든 사실을 조사한 후 그의 환시가 옳음을 인정하고 수도회 설립을 허락하였다. 그해 11월 22일 그는 은수자의 검은 색 수도복을 입혀준 주교의 격려를 받은 후 40일간의 피정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의 수도 규칙 초안을 마련하였다. 이듬해에 그의 동생이자 평생의 동반자인 요한 세례자 다네이(Joannes Baptista Danei)가 수도복을 입고 공동체에 합류하였다.
피정 이후 10년 동안 성 바오로는 여러 교구에서 은수 생활과 평신도로서 선교와 봉사 활동을 하면서 수도회 설립을 위해 노력했으나 쉽지 않았다. 처음 마련한 규칙을 갖고 교황청의 허가를 신청하러 동생과 함께 로마(Roma)에 갔으나 거절당했다. 1725년에 다시 로마를 방문한 그는 교황 베네딕토 13세(Benedictus XIII)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수도회(Congregatio Passionis Jesu Christi, 예수 고난회) 설립에 대한 구두 승인과 함께 수련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성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서 기도와 활동의 일치점을 찾고자 했다. 그래서 예수회의 활동과 카르투지오회의 고독을 모범으로 삼았다. 그가 생각한 수도회는 엄격한 참회 생활과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열렬한 신심을 결합하고, 그 결과를 선교 활동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공동체였다. 그래서 그는 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기억을 전파하겠다는 네 번째 서원을 덧붙였다. 그러면서 그는 스스로를 ‘십자가의 바오로 형제’라고 불렀다. 성 바오로와 그의 동생 요한 세례자는 1727년 6월 7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베네딕토 13세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에 토스카나(Toscana) 남부 해안가에 있는 몬테 아르젠타리오(Monte Argentario)에서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몬테 아르젠타리오에서의 처음 10년 동안 성 바오로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새로운 수련자들이 점점 늘었지만, 한편으로는 규칙이 너무 엄격해서 많은 수련자가 떠나기도 했다. 성 바오로는 1737년에 몬테 아르젠타리오에 첫 수도원을 완공했고, 1741년에는 교황 베네딕토 14세로부터 개정 회칙을 인준받았다. 그리고 1747년에는 수도원이 세 곳으로 늘어났다. 성 바오로는 고독을 즐기는 한편 이탈리아 전역을 누비며 순회 설교가로서 활동했다. 그의 설교는 놀라운 힘을 발휘하여 만인의 심금을 울렸다. 그는 초자연적인 은혜로써 축복을 내렸고, 치유의 은사와 원거리에서 동시에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기적을 행하기도 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설교가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1765년에 평생의 동반자요 동생인 요한 세례자를 먼저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다. 그는 1769년에 예수 고난회에 대한 최종적 승인을 교황 클레멘스 14세(Clemens XIV)에게 받은 후 자기 뜻과는 달리 초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로마의 첼리오 언덕에 있는 성 요한과 바오로 대성당(Basilica dei Santi Giovanni e Paolo al Celio)으로 총원을 옮겼는데, 이는 1773년에 교황 클레멘스 14세로부터 받은 곳이다.
1771년에 코르네토(Corneto)에 여성 수도자를 위해 예수 고난 관상 수녀회를 설립한 십자가의 성 바오로는 생애의 마지막을 주로 로마 총원에서 지냈는데, 마지막 3년 동안 병고로 고생하면서도 임종 직전까지 교황들의 영적 지도와 고해 신부로 활동하였다. 그는 1775년 10월 18일 선종하기에 앞서 수도회 형제들에게 “서로 사랑하고 십자가 아래 머물러 살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평화로이 숨을 거두었다. 그가 선종할 당시 예수 고난회에는 180명의 신부와 수사들이 있었다. 성 바오로는 몇 권의 중요한 저서를 남겼는데, 그중 하나가 “신비적 죽음”(Morte mistica)으로 1976년에 재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40일간의 피정 중에 기록한 “영적 일기”와 2천 통이 넘는 편지가 다섯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십자가의 성 바오로는 1853년 5월 1일 교황 복자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복자로 선포되었고, 1867년 6월 29일 같은 교황에 의해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시성식이 거행되었다. 그의 축일은 4월 28일로 정해졌다.
옛 “로마 순교록”은 10월 18일 목록에서 로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 수도회의 설립자인 십자가의 성 바오로의 천상 탄일을 기념하는데, 교황 비오 9세는 그의 탁월한 순수함과 참회 정신을 기려 그를 성인품에 올리고 4월 28일을 축일로 정했다고 전해주었다. 그리고 4월 28일 목록에서 십자가의 성 바오로는 순결한 삶과 참회 정신으로 뛰어난 사람으로, 예수 고난회의 설립자로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 대한 불타는 사랑으로 가득 차 천상 은총과 기적으로 빛나며, 완전한 덕행으로 살다가 주님 안에서 안식에 들었다고 적었다. 1969년 전례력 개정 이후에는 그의 축일을 선종 다음 날인 10월 19일에 기념하고 있다. 10월 18일은 이미 로마 보편 전례력 안에서 성 루카(Lucas) 복음사가의 축일로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0월 19일 목록에서 십자가의 성 바오로 신부가 젊은 시절부터 참회와 열정으로 빛났으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향한 특별한 사랑에 감동되어 가난하고 병든 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수난을 묵상하는 성직 수도회를 설립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로마에서 선종한 날은 10월 18일이지만 그다음 날 그의 축일을 기념한다고 기록하였다.♣
요한 드 브레뵈프(10.19)
성인명 요한 드 브레뵈프 (John de Brebeuf)
축일 10월 1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선교사, 순교자
활동지역 캐나다(Canada)
활동연도 1593-1649년
같은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성 요한네스 드 브레뵈프(Joannes de Brebeuf, 또는 요한 드 브레뵈프)는 1593년 3월 25일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Normandie)의 콩데쉬르비르(Conde-sur-Vire)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캉(Caen) 근처에 있는 대학에서 인문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1617년 11월 8일 24살의 나이로 루앙(Rouen)에서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1619년부터 1621년 사이에 루앙에 있는 예수회 대학에서 교사로 일했는데, 1620년에 결핵에 걸려 제대로 공부할 수도 가르칠 수도 없었고 사제직을 감당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다행히 회복되어 1622년 2월 퐁투아즈 대성당(Pontoise Cathedral)에서 사제품을 받고 루앙의 예수회 대학에서 재정 담당 소임을 맡았다.
그 후 그는 선교사를 지원하여 1625년 4월 24일 동료들과 함께 디에프(Dieppe) 항구를 떠나 그해 6월 19일 캐나다의 퀘벡주(Quebec州)에 도착했다. 그는 주로 북미 인디언의 한 부족인 휴런족(Hurons)이 많이 거주하는 동부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처음 2년간은 휴런족의 말과 관습을 익히는 데 주력하며 선교활동을 펼쳤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게다가 1629년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해 퀘벡 지역을 영국이 점령하고 예수회원들을 쫓아낼 때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신부도 어쩔 수 없이 프랑스로 돌아와야 했다. 그는 루앙에서 지내다가 1630년 종신서원을 하고 이듬해부터 프랑스 북부 외(Eu)의 대학에서 근무하던 중 성 안토니오 다니엘(Antonius Daniel) 신부를 만나 다시 휴런족 선교에 대한 열의를 품게 되었다. 1632년 프랑스가 캐나다 식민지에 대한 권리를 회복한 후 성 요한 드 브레뵈프는 1633년에 캐나다로 다시 돌아와 이전과 같은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이 시기에 프랑스의 예수회원들이 대거 캐나다의 퀘벡 지역으로 들어왔다.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신부도 성 안토니오 다니엘 신부와 함께 학교를 개설하고 선교에 열정을 쏟았다. 하지만 전염병이라는 큰 난관에 봉착했는데, 1637년 천연두가 만연하면서 수천 명의 인디언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휴런족을 비롯한 인디언들은 유럽인에게서 전염된 천연두로 인해 엄청난 희생을 경험했고, 그 와중에 선교사들은 대재앙을 몰고 온 악마로 간주되어 인디언 주술사들로부터 큰 곤욕을 치르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다. 성 요한 드 브레뵈프는 휴런족의 거의 절반이 천연두로 사망하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그들 곁을 떠나지 않고 1640년까지 함께 거주하였다. 그러면서 무엇보다 먼저 휴런족의 말을 배우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휴런족의 말을 능통하게 하게 되면서 그는 그들의 언어로 교리서를 저술하고, 다른 선교사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프랑스어-휴런어(French-Huron) 사전’까지 만들었다. 1637년에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인디언 원주민들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선교활동을 펼치도록 권고하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위한 지침서를 발간하였다.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신부의 이러한 노력으로 개종하고 세례받는 인디언들이 조금씩 늘었다. 그는 1640년 빙판에서 넘어져 잠시 퀘벡으로 가서 휴양하고 나서 다시 휴런족 마을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즈음 프랑스에 적대적인 이로쿼이족(Iroquois)이 휴런족 마을을 습격해 큰 피해를 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예수회 회원들의 순교도 속출하였다. 1642년에 예수회의 성 이사악 조그(Isaac Jogues) 신부와 성 르네 구필(Rene Goupil) 수사가 이로쿼이족의 일파인 모호크족(Mohawks)에게 붙잡혀 그해 9월 29일 성 르네 구필 수사가 도끼에 맞아 순교하였다. 그리고 1년 이상 노예로 혹사당하다가 풀려난 성 이사악 조그 신부도 몇 년 후 다시 그들에게 붙잡혀 1646년 10월 18일 도끼에 맞아 순교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그의 보조자이자 동료인 성 요한 드 라랑드(Joannes de Lalande)도 순교하였다. 이러한 예수회원들의 순교는 휴런족의 개종으로 조금씩 그 열매를 맺어갔다. 1648년 7월 4일에는 성 안토니오 다니엘(Antonius Daniel) 신부도 순교하였다.
이렇게 예수회의 여러 동료가 포로가 되어 잔혹한 고문을 받고 순교하는 상황에서도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신부는 끝까지 용기를 잃지 않았다. 1648년 새로 파견 온 성 가브리엘 랄르망(Gabriel Lalemant) 신부와 함께 선교활동을 하던 중 1649년 3월 15일 휴런족의 생루이(Saint-Louis) 마을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다음날 생이니스(Saint-Ignace) 마을을 습격했던 이로쿼이족의 공격을 받아 생루이 마을도 초토화되고 많은 휴런족 인디언이 학살당하는 상황 속에서 선교사들도 체포되었다. 성 요한 드 브레뵈프와 성 가브리엘 랄르망 신부는 생이니스 마을로 끌려가 가장 잔혹한 고문을 받고 16일과 17일에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그해 12월 7일 성 가롤로 가르니에(Carolus Garnier) 신부도 순교했고, 8일에는 성 노엘 샤바넬(Noel Chabanel) 신부도 순교하였다. 성 요한 드 브레뵈프와 성 가브리엘 랄르망 신부의 시신은 동료 예수회원에 의해 발견되어 생트마리(Sainte-Marie)로 옮겨져 묻혔다가 이듬해 퀘벡으로 이장하였다.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이들 예수회원이 보여준 용기와 성덕은 수많은 인디언에게 감동을 주었고, 그들이 순교한 후 약 7천 명의 인디언들이 개종하는 열매를 맺었다.
그러나 1650년 휴런족이 멸망하면서 예수회원들의 선교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듯했지만, 퀘벡주에서 선교하며 순교한 그들의 업적은 17세기 프랑스 예수회의 높은 사도적 영성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신부와 7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1925년 6월 21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30년 6월 29일 로마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캐나다의 순교자’(수호성인) 또는 ‘북미의 첫 순교자들’로서 성인품에 올랐다. 그들의 기념일은 로마 보편 전례력의 9월 26일에 추가되었으나 1969년 전례력 개정 이후부터 성 이사악 조그가 순교한 다음 날인 10월 19일(10월 18일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과 중복을 피하고자)로 변경해 기념하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3월 16일 목록에서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신부의 순교에 대해 전해주면서 동료들과 함께 10월 19일에 기념한다고 적었다. 그리고 10월 19일 목록에서 성 요한 드 브레뵈프와 성 이사악 조그 신부와 동료 순교자들의 선교활동과 순교 사실을 전하며 그날 그들 여덟 명 모두를 함께 기념한다고 기록하였다.♣
가롤로 가르니에(10.19)
성인명 가롤로 가르니에 (Charles Garnier)
축일 10월 1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선교사, 순교자
활동지역 캐나다(Canada)
활동연도 1606-1649년
같은이름 가니엘, 가롤루스, 가를로, 까롤로, 까롤루스, 샤를, 샤를르, 찰스, 카롤로, 카롤루스, 카를로, 카를로스, 칼
성 카롤루스 가르니에(Carolus Garnier, 또는 가롤로 가르니에)는 1606년 5월 25일 프랑스 파리(Paris)에서 국왕 앙리 3세(Henri III)의 고문이었던 장 가르니에(Jean Garnier)와 안 드 가로(Anne de Garault)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훌륭한 교육을 받고 성장해 1624년 9월 5일 18살의 나이로 예수회에 입회해 파리 수련소에 들어갔다. 그리고 클레르몽(Clermont)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프랑스 북부 외(Eu)의 대학에서 3년 정도 교사 생활을 하다가 1635년 29살의 나이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즉시 뉴프랑스(캐나다) 선교를 자원했으나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로 인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듬해 다시 지원했고 결국은 아버지의 동의를 얻어 휴런족(Hurons) 인디언 선교부에 들어갔다. 그는 1636년 4월 8일 성 이사악 조그(Isaac Jogues) 신부를 포함한 5명의 예수회원과 함께 캐나다로 파견되었다.
1636년 6월 11일 퀘벡주(Quebec州)에 도착한 성 가롤로 가르니에는 즉시 예수회 동료인 피에르 샤스텔랭(Pierre Chastelllain) 신부와 함께 휴런족 선교지로 여행을 시작해 8월 13일 휴런호(Lake Huron)의 아이호나티리아(Ihonatiria)에 있는 생조세프(Saint-Joseph) 정착 마을에 도착해 예수회 선교부 대표를 맡고 있던 성 요한 드 브레뵈프(Joannes de Brebeuf) 신부를 만났다.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신부의 따뜻한 환영을 받은 성 가롤로 가르니에는 아버지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세상에서 내가 더 행복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라고 썼다. 9월 11일에 성 이사악 조그도 아이호나티리아에 도착했다.
그런데 예수회원과 그 협력자들 사이에서 천연두 전염병이 발생했다. 전염병은 곧 휴런족에게 퍼졌고 퀘벡주 전체에 천연두가 만연하면서 수천 명의 인디언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무렵 선교사들에게 세례를 받은 휴런족 대부분도 목숨을 잃었다. 그러면서 ‘검은 옷’을 입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대재앙을 몰고 온 악마로 간주되어 인디언 주술사들로부터 큰 곤욕을 치르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다. 선교사들은 생명의 위험 속에서도 인디언 곁을 떠나지 않고 그들 곁에 머물며 시련을 극복해갔다. 성 가롤로 가르니에는 성 요한 데 브레뵈프 신부에게 휴런어를 배우고 그들의 문화와 관습을 익히며 2년을 보냈다. 그러고 나서 1639년과 1640년에 페툰(Petun) 인디언 또는 토바코(Tobacco) 인디언 땅에서 겨울을 보냈고, 1641년부터 1646년까지는 생조세프 선교부 등에서 활동했다.
1642년 이후 프랑스에 적대적인 이로쿼이족(Iroquois)이 휴런족 마을을 습격해 큰 피해를 주고 있었다. 1642년 9월 29일에 성 르네 구필(Rene Goupil) 수사가 순교한 후 1646년 10월 18일에 성 이사악 조그 신부, 1648년에 7월 4일 성 안토니오 다니엘(Antonius Daniel) 신부가 순교하였다. 1649년 3월 16일에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신부가 그리고 다음 날일 17일 성 가브리엘 랄르망(Gabriel Lalemant) 신부도 순교하였다. 성 가롤로 가르니에는 자신도 곧 순교하게 될 것임을 알고 그해 가을 자신의 협력자로 페툰 인디언 마을로 파견 온 성 노엘 샤바넬(Noel Chabanel) 신부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해 그를 선교 본부로 피신하도록 했다.
12월 5일 성 노엘 샤바넬이 선교지를 떠난 후 12월 7일 이로쿼이족이 마을을 공격해 휴런족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성 가롤로 가르니에 신부는 마을 사람들에게 도망가라 하고 남아 있는 이들에게 고해성사를 주며, 병들어 누워 있는 이들에게 세례를 주기 위해 오두막에 들어가다가 이로쿼이족이 쏜 총에 맞았다. 이로쿼이족은 그의 사제복을 벗기고 추위 속에 얼어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 얼마 후 그가 의식을 차리자 이로쿼이족 전사가 나타나 토마호크 도끼로 그의 머리를 쳐서 죽이고 말았다. 이 사실을 모르고 숲길로 이동해 강을 건너려던 성 노엘 샤바넬 신부도 다음 날 한 휴런족 인디언 배교자에게 소유물을 모두 강탈당하고 도끼에 맞아 순교하였다. 몇몇 정찰병이 성 가롤로 가르니에의 시신을 발견해 인근에 매장했다가 이듬해인 1650년 퀘벡으로 옮겨 모셨다.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신부와 성 가롤로 가르니에 신부를 포함한 7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1925년 6월 21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30년 6월 29일 로마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캐나다의 순교자’(수호성인) 또는 ‘북미의 첫 순교자들’로서 성인품에 올랐다. 그들의 기념일은 로마 보편 전례력의 9월 26일에 추가되었으나 1969년 전례력 개정 이후부터 성 이사악 조그가 순교한 다음 날인 10월 19일(10월 18일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과 중복을 피하고자)로 변경해 기념하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2월 7일 목록에서 캐나다의 온타리오주(Ontario州)에서 예수회 신부인 성 가롤로 가르니에가 예비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던 중 이교도의 침입으로 중상을 입고 도끼에 맞아 순교했다고 전해주었다. 그리고 10월 19일 목록에서 성 요한 드 브레뵈프와 성 가롤로 가르니에 신부와 동료 순교자들의 선교활동과 순교 사실을 전하며 그날 그들 여덟 명 모두를 함께 기념한다고 기록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