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기억의 기술(The Art of Remembering)
정확히 오전 11시, 이스라엘은 멈춥니다.
자동차들은 고속도로 갓길로 차를 세웁니다. 보행자들은 발걸음을 멈춥니다. 일상의 소음을 뚫고 울려 퍼지는 2분간의 애도 울음소리에 온 나라가 제자리에 멈춰 섭니다. 이스라엘의 현충일인 ‘욤 하지카론(Yom HaZikaron)’에 우리는 단순히 애도를 위해 잠시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적극적으로, 의지의 표현으로서 기억합니다.
그 본능은 깊이 뿌리내려 있습니다. 토라는 기억을 우연에 맡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섯 가지를 기억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출애굽기 20:8).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섰던 날을 기억하라”(신명기 4:10). “길에서 하나님이 미리암에게 행하신 일을 기억하라”(신명기 24:9). “이집트에서 나올 때 길에서 아말렉이 너희에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신명기 25:17). “네가 이집트에서 종이었던 것을 기억하라”(신명기 16:3). 그리고 아마도 가장 겸손하게 만드는 명령일 것입니다. “ “너희가 광야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거슬러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기억하고 잊지 말라” (신명기 9:7) — 금송아지 죄를 기억하라는 명령입니다.
기억하라는 여섯 가지 명령. 그 중 네 가지는 우리를 은혜로 채워 줍니다 — 안식일, 토라 수여, 말을 조심하라는 교훈, 노예 생활에서의 해방. 그리고 다섯 번째는 짐입니다: 우리가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아말렉의 이유 없는 잔혹함. 그러나 여섯 번째는 무엇보다도 우리를 가장 겸손하게 만드는 것, 바로 금송아지를 기억하라는 명령입니다. 우리에게 가해진 일이 아니라, 우리가 저지른 일입니다. 시나이 산 기슭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지 40일 만에 우리는 우상을 만들었다. 토라는 우리가 이 사실 또한 결코 잊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모쉐는 유대 백성에게 전하는 마지막 노래에서 더 광범위한 명령을 내립니다:
זְכֹר יְמוֹת עוֹלָם בִּינוּ שְׁנוֹת דּוֹר־וָדוֹר שְׁאַל אָבִיךָ וְיַגֵּדְךָ זְקֵנֶיךָ וְיֹאמְרוּ לָךְ׃
“옛날을 기억하고, 지나간 세월을 되새겨 보라. 네 아버지께 물어보라, 그가 네게 알려 줄 것이며, 네 장로들에게 물어보라, 그들이 네게 말해 줄 것이다.” (신명기 32:7)
‘뒤를 돌아보라. 역사의 깊은 우물에서 지혜를 길어내라. 과거와 단절하지 말라.’
토라가 우리에게 기억하라고 명하는 것은, 우리 대부분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기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인간은 잊어버리기 마련이며, 그것이 전적으로 결함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정말로 모든 것—모든 모욕, 모든 고통, 모든 상실, 그리고 우리 삶의 매일매순간—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그 무게에 짓눌려 버릴 것입니다. 망각은 결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해방입니다. 과거에 쌓인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보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힘입니다.
18세기의 저명한 설교자 야아콥 크란쯔 랍비, 일명 두브노 마기드는 비유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망각이라는 선물을 주신 것은 바로 우리를 가로막는 고통과 시련을 떨쳐내고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망각은 신의 자비로운 행위입니다.
‘오르호스 짜디킴(Orchos Tzaddikim)’으로 알려진 중세 유대 윤리학의 고전 저작은 여기에 또 다른 차원을 더합니다. 이 책은 우리가 행한 모든 선행을 잊으라고 가르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의로움과 경건함에 도취되어, 그 선행들이 길러내려 했던 바로 그 겸손함을 자만이 밀어내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망각은 영적인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요셉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맏아들의 이름을 ‘무나쉐’(מְנַשֶּׁה)라고 지었는데, 이는 ‘나샤니(נַשַּׁנִי, nashani)’라는 어근에서 유래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고난과 아버지의 온 집안을 잊게 하셨다”라는 뜻입니다(창세기 41:51). 엘리야후 사프란 랍비는 요셉이 과거를 지워버린 것이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그는 과거에 얽매이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그는 이방 땅에서 무에서 새로운 것을 건설하기 위해, 과거의 비참함과 불안감을 내려놓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샤니(נַשַּׁנִי)’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기억상실이 아니라 해방입니다. 기억은 남아 있더라도 그 아픔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토라가 가장 날카로운 경고를 내립니다.
바로 그 노래에서, 우리에게 기억하라고 명령한 지 불과 11절 뒤에, 모쉐는 무엇이 잘못될지를 예언합니다. “너희는 너희를 낳으신 반석을 무시하고, 너희를 이끌어내신 하나님을 잊었도다”(신명기 32:18).
두브노 마기드(Dubno Maggid)는 이 비극을 정확히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가로막는 고통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너희에게 망각의 능력을 주셨다. 그런데 너희는 돌아서서 그 망각을 이용해 하나님 자신을 잊어버렸단 말인가? 그것은 선물로서의 망각이 아니다. 그것은 배신으로서의 망각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결코 기억할 것인가, 잊을 것인가가 아닙니다. 문제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을 것인가입니다.
모욕은 잊어라. 자신의 의로움은 잊어라. 내일을 건설하는 데 방해가 된다면 어제의 고통도 잊어라. 그러나 시나이 산은 잊지 마라. 안식일을 잊지 마라. 말의 힘이 얼마나 큰지 미리암이 받은 벌이 가르쳐 준 교훈을 잊지 마라. 이집트를 잊지 마라 — 노예로 살았던 것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그리고 자유를 얻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를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금송아지를 잊지 마십시오. 이 명령은 가장 불편한 명령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배신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의 능력을 기억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적이 항상 진영 밖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리고 아말렉을 — 결코 — 잊지 마십시오.
“아말렉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 토라는 우리에게 말합니다(신명기 25:18). 아말렉은 뒤처진 자들, 약한 자들, 후방에 있는 자들을 공격합니다. 하지만 아말렉은 결코 만족하지 않습니다. 마틴 니묄러 목사가 홀로코스트의 그림자 속에서 썼듯이, 처음에는 사회주의자들을, 그다음에는 노동조합원들을, 그다음에는 유대인들을 잡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머지 모든 사람을 잡아갈 때쯤에는, 목소리를 낼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아말렉은 결국 모든 사람을 찾아옵니다.
우리가 아말렉을 잊는 것은 우리 자신의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며, 성경은 그러한 망각이 실제로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는 참혹한 사례를 제시합니다. 닐 윙클러 랍비는 사울 왕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순간, 즉 하나님으로부터 아말렉에 대한 궁극적인 ‘자코르(זָכוֹר: 기억)’의 사명을 부여받았을 때 실패했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자신의 사명을 잊었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잊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왜 왕으로 임명되었는지를 잊었습니다. 이는 그 이전의 사사 시대 세대들을 괴롭혔던 바로 그 망각이었습니다. 랍비 삼손 라파엘 히르쉬가 묘사한 대로, 신실함과 배반, 배반과 신실함이 끝없이 반복되는 그 순환, 즉 “자신의 고유성, 사명과 운명의 특별함을 거듭거듭 잊어버린” 민족의 이야기였습니다. 사울은 그 시대를 끝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그 역사를 되풀이해 버렸습니다.
과거를 잊는 민족은 미래를 상실한다.(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forfeits its future.)
1942년, 나치가 유럽의 유대인들을 몰살시키고 있을 무렵, 저명한 히브리어 작가 하임 하자즈는 “설교”라는 단편 소설을 발표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키부츠 회원 유드카는 어느 날 저녁 일어나 이스라엘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연설 중 하나로 꼽히는 말을 합니다. 그는 유대인의 역사에 반대한다고 선언합니다. 그 역사는 억압과 박해, 순교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는 아이들에게 그 역사를 가르치는 것을 아예 금지하겠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1942년 당시에는 거의 용서받을 만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틀렸습니다. 유대의 역사는 1948년에, 혹은 헤르츨이나 탈무드에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창조 그 자체에서, 한 민족을 선택하고 그들에게 땅을 주며 사명을 맡기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이들을 그 이야기에서 단절시키는 것은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을 뿌리 없이, 무방비 상태로, 그리고 결국 길을 잃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지난 2년 반 동안 우리 자신의 삶을 통해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2023년 10월 7일, 아말렉은 가장 취약한 이들을 공격했습니다. 음악 축제에 모인 젊은이들, 키부츠 집에서 잠들어 있던 가족들,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가자 국경 인근의 주민들이 그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단 하루 아침에 1,2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학살당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싸우다 1,150명 이상의 군인, 경찰관, 보안 요원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말렉이 먼저 공격했고, 이스라엘은 이에 맞섰습니다.
오늘, 이스라엘 전역에 경보 사이렌이 울리는 이 순간, 우리는 단순히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선택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토라가 지난 3천 년 동안 우리에게 요구해 온 바로 그 선택입니다. 우리는 수동적인 망각 대신 능동적인 기억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사자들의 이름이 평범한 일상의 소음 속에 묻혀 사라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군인들과 테러 희생자들은 추상적인 대의를 위해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유대 민족이 자신의 땅에 당당히, 주권과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희생했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빚진 최소한의 의무는 바로 이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적극적으로, 의지의 행위로 기억하는 것입니다.
옛날의 날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결코 멈추지 마십시오.
By Shira Schechter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욤 하지카론을 맞아,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70 여년 전, 1950년 6.25 전쟁이 한반도를 휩쓸었을 때, 누구는 미군의 군복으로, 또 누구는 영국군의 군복을 입고, 혹은 다른 나라 군인의 신분으로 이 땅과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한국전에 참전하신 유대인 참전용사가 있습니다. 정확히 몇 분이 참전했는지 모릅니다. 특별한 자료도 기억할 만한 기록도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 분들은 이 곳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내년 욤 하지카론에 이 분들을 기리는 아주 작은 모임이라도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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