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단상 70/박수근전展]봄을 기다리는 나목裸木
요즘은, 아니 오래 전부터이지만 ‘국민00’이란 용어의 인플레가 심해도 너무 심하다. 뻑하면 국민가수, 국민배우, 국민탤런트 …. ‘국민여동생’ ‘국민오빠’ ‘국민할배’는 또 무엇인가? 그런데 왜 ‘바보대통령’은 있어도 ‘국민대통령’은 없는 것일까? 그런데, 예술계를 보자. ‘국민화가’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국민화가가 있다면 누구를 지칭할 것인가? 여기에 정말로 적합한 화가, 박수근(1914-1965), 바로 그를 말한다. 이중섭, 장욱진, 김환기 등은 어쩐지 그 지칭에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그림에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도 <빨래터> <나목> <아기없는 소녀> <세 여인> 등의 작품을 보면서 ‘아, 박수근!’이라고 하면 ‘국민화가’임에 틀림 없지 않은가. 바로 그 「박수근전」이 <박수근: 봄을 기다리는 나목>이라는 제목으로 덕수궁 현대미술관(2021.11.11.-2022.3.1.)에서 열리고 있어 다녀왔다. 그분의 작품 174점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전시회를 놓쳐서야 될 말인가?
평일인데도 관람객들로 붐볐다. 코로나 탓일까? 그게 아니고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으면 좋겠다. 온라인 사전예약 등은 60대가 넘은 우리를 짜증나게 했지만 감수할 밖에 없는 일. 사진을 찍게 하려고 그랬는지 어둑컴컴한 실내에서 작품 제목조차 잘 읽히지 않지만, 한마디로 "좋았다". 일부러 오기를 얼마나 잘한 일인가. 50-60년대 가난하고 고달팠던 우리 현대사의 단면 단면(사회상, 서울의 풍경, 서민들의 삶, 정치, 단절된 한반도 등)을 가족과 일반 서민들을 배경으로 여실히 드러내주는 게 시인, 소설가 등 문학가와 화가, 음악인 등 예술인이 수행할 몫이 아니던가. 그 막중한 소임을 국민화가 박수근은 훌륭히 해냈다. 51세 병고病苦로 인한 별세가 너무나 안타깝다. 요즘 나이로 치면 요절夭節. 천재는 그렇게 꼭 요절을 시켜야 하나님은 흐뭇하실까. 모를 일이다.
그를, 그의 작품과 그 가치를 알아준 사람은 놀랍게도 국내인이 아닌 미국인이었다. 언제나 그렇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말은 늘 하면서도 바로 앞에 있는 ‘흙 속의 진주’를 몰라보는 ‘문화 몽매한蒙昧漢’들이 어디 한두 명이던가. 밀러 등은 가난한 화가에게 귀한 물감을 아낌없이 사보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지독하게 가난했던 화가가 작품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 우리는 그들에게 고맙다고 해야 한다. 밀레의 <만종>이라는 작품을 보고 감동을 받아 화가가 되기로 작정해 버린 12세 소년(The boy who loved Millet). 그는 가난하여 초등학교만 간신히 졸업하고 독학자습, 간난신고 끝에 이 땅에 화가로 우뚝 섰다. 오죽했으면 미군PX에서 초상화가로 일했을까? 그 옆에서 무명의 박완서가 경리 일을 봤다. 그 기록이 <나목裸木>이라는 제목으로 1970년 <여성동아> ‘여류 장편소설 공모전’에 당선되어 박완서를 이 땅에 아주 준수한 소설가로 등단시켰다. 그들의 만남은 축복받을 일이 아니다. <나목>은 화가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글쎄. 그럴 수도.
화가가 아내 김복순 여사에게 보낸 프로포즈 편지를 보면 ‘역시 그답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나에게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 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 주신다면 육신적(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될 겁니다. 그러나 나는 정신적으로는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주시지 않겠습니까?”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달라는 이런 손편지를 받고 거절할 ‘강심장’의 여인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겠는가? 화가 이중섭이 이남덕 여사에게 쓴 숱한 연애편지가 자꾸 오버랩된다. 화가들은 글을 잘 쓰는 게 아니라 오직 ‘진정성’ 밖에 없기 때문에, 그들을 품어주는 여인들이 있는 것이다. 사랑에만 진정성이 있으랴? 작품은 몽땅 진정성투성이이다. 아니, 진정성으로 넘친다. 그래서 작품의 생명력이 있는 게 아닐까. 그들은 무엇보다, 누구보다 훨씬 더 따뜻하다. 나의 표현으로는 그들이야말로 바로 ‘휴머니스트’들인 것이다. 휴머니스트들은 눈물을 달고 다닌다. 그리고 그 눈물들을 모아, 모아서 그림을 그리거나 작곡을 하고 글을 쓰거나 노래를 부른다. 눈물이 없으면 어찌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나오고, 최명희의 <혼불>, 박경리의 <토지>가 나왔겠는가. 눈물과 분노가 없으면 어찌 윤이상의 광주교향곡이 작곡되고, 박불똥이나 신학철의 민중화가 그려졌을 것이며, 정태춘이 노래를 불러댔겠는가? 그리고 또, 눈물과 분노가 없었다면 영원한 야인 백기완의 분노의 사자후獅子吼를 어디에서 들으며 열광할 수 있었겠는가?
가난한 가장家長이었지만, 식구(밥네)들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아들에게는 초상화를, 딸에게는 동생을 업은 장면을, 아내에게는 절구질하는 풍경을 그려 선물로 준다. 같이 눈물겹게 살아가는 동대문 창신동 주민들을 사랑했기에, 그들이 사는 판잣집을, 추운 겨울날 빨래하는 신산스런 장면을, 일용품을 파는 무심한 풍경을 말없이 그림으로 그려 웅변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그는 벌거벗은 나무가 되어 봄을 기다렸다. 추위를 엄청 못견뎌했다는 그는 이런 고백까지 해놓았다. “나는 워낙 추위를 타선지 겨울이 지긋지긋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겨울도 채 오기 전에 봄 꿈을 꾸는 적이 종종 있습니다. 이만하면 얼마나 추위를 두려워하는가 짐작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계절의 추위도 큰 걱정이려니와 그보다도 진짜 추위는 나 자신이 느끼는 정신적 추위입니다. 세월은 흘러가기 마련이고 그러면 사람도 늙어가는 것이려니 생각할 때 오늘까지 내가 이루어놓은 일이 무엇인가 더럭 겁도 납니다. 하지만 겨울을 껑충 뛰어넘어 봄을 생각하는 내 가슴에는 벌써 오월의 태양이 작열합니다.” 화가는 자신이 느끼는 ‘정신적 추위’가 더 걱정이라고 한다. 그는 쉰한 살에 졸지에 돌아갈 운명이었지만, ‘오늘까지 내가 이루어놓은 일이 무엇인가 더럭 겁이 나’는 사람이었다. 봄만 생각하면 벌써 오월의 태양이 가슴에 작열한다는 화가는 이루어놓은 게 없다고 역시 그답게 겸손해 한다.
아, 아, 아-, 그는 그런 순정純情의 사람이었다. 화가 이중섭과 시인 천상병도 행려병자처럼 고독하게, 이름도 없이 숨져 갔다. 그런 그들이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오래오래 우리의 삶에 많은 위로를 주고 위안이 될 것을 믿는다. 그래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을 것이다. 나도 이 아침 겁이 더럭 난다. ‘오늘까지 내가 이루어놓은 일’이 아무것도 겁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는다. 집에 돌아와 아내의 손에 가만히 <박수근전> 팸플렛을 쥐어주었다.
참고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만, 화가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빨래터>는 2007년 서울옥션 경매에서 45억원에 낙찰됐으며, <공기놀이하는 아이들>은 23억, <앉아있는 아낙과 항아리>는 11억, <노상>은 5억이 넘게 팔렸다고 한다. 화가가 살고 간 세상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지 않은가.
첫댓글 추가로 두 점 올립니다....
우천의 글을 읽으니 정신적 추위에 난로를 쬐는 감성이 살아나네.
역시 우천답네.
오월의 태양이 안 와도 좋다. 우천이 매일매일 느끼는 그 감성을 진정성 있게 쓰는 글이라면, 오케이 바리.
남자는 힘&감성!
그나저나, 우리 625세대는 참 고생을 많이 한 것 같아.
그 능력있는 박완서도 경리로 일할 정도이니 말이지.
오늘도 감성을 자극하는 글에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