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남자들
오길순
전생에 얼마나 공덕이 깊었으면 엉덩이에 부채질해주는 남자를 만났을까?
추석 전날, 심신을 충전하고 싶었다. 뒷산에 올랐다. 숲속에서 웬 소음이지? 정자며 산길 낙엽을 샅샅이 쓸고 있는 전동청소기 소리였다. 특히 요즘 유행인 맨발로 걷는 이들에게는 사랑의 기도처럼 들릴 터였다. 전동기를 어깨에 멘 아저씨에게 절로 인사가 나왔다.
“아저씨, 감사합니다.”
저만큼 돌아보는 그의 미소가 온화하다. 밤길 걷는 비단옷 수행자인 양 평화롭다. 더불어 나뭇가지 새로 햇볕을 받은 내 운동화도 산향기 속에 눈부시다. 도란도란 떠나는 맨발들도 더욱 가벼워 보인다.
「어싱(earthing), 땅과의 접촉이 치유한다」라는 논문이 있다. 미국의 전기기술자 클린트 오버와 심장 전문의 스티븐 시나트라 박사 공저인 맨발 걷기 연구물이다. 제2의 심장이라는 발바닥에 대자연을 접지 접촉하면 지구의 음이온이 건강을 복원한다는 이치이다. 전문가들은 파상풍 등 감염에 특별히 유의하라고도 한다.
마침 앞선 맨발 노부부가 남달랐다. 아내는 여왕벌처럼 우아하게 걷는데, 남편은 아내 엉덩이에 바짝 부채질하며 일벌처럼 뒤따라간다. 아내 운동화가 선녀의 날개옷이라도 되는 양 고이 받쳐 들고는 바삐 부채질하는 사나이가 숲속의 나무꾼인 양 웃음이 나왔다.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아저씨, 아내가 그렇게 예쁘세요?“
노부부는 멈칫 돌아보았다. 풍경이 하도 고와서였는데, 놀라는 게 조금 미안했다.
“산모기가 많아서요.”
그의 주름진 얼굴에서 착.한. 나.무.꾼. 이렇게 읽혔다. 전생에 얼마나 공덕을 쌓았기에 엉덩이 모기 물릴까 걱정하는 착한 나무꾼을 만났을까? 아내도 선녀였겠지? 그러고 보니 여인의 맨발이 유난히 뽀얗고도 예쁘다.
저 맨발이 선녀의 원천이었을지도 몰라. 아내가 예쁘면 처가집 말뚝에도 절을 한다지. 속살은 더욱 박꽃 같을지도. 선녀가 달아날까 평생 부채질해주었겠지. 그 열심인 남편 뒷모습을 보며 쉬고 있는데, 한참 후 되돌아오는 그들, 여전히 부채질 그대로이다.
“저 엄마, 전생에 남자 엉덩이에 무한 부채질했겠지? 그래서 저런 남편을 만난 거겠지? 이승은 전생에서 뿌린 걸 거두는 거라쟎아? 부부도 공짜 없다쟎아?”
빙긋이 웃는 내 남편에게 곱씹고 있는데 친구 전화가 왔다. 차례 준비하러 시장가는 길이라고 한다. 바쁜 중에 전화라니, 더욱 고마웠다.
“그런데 얘! 우리 시동생은 제사 때마다 제수비랑 선물을 보내. 조상님과 부모님 제사를 평생 지켜준 형수님 고맙다고. 동서랑 와서 비싼 밥도 사주곤 해. 덕분에 제사도 덜 힘들어.”
“세상에! 그런 멋진 시동생이 다 있어? 네가 착하니까 시동생도 착하신가 봐.”
“응, 다들 착하셔. 오래전에는 자기 산을 울 아들에게 등기해 줬지 뭐니?”
“어머나! 정말 어머나!다 그런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가 어딨어? 네가 얼마나 공덕을 쌓았으면 그런 시동생을 두었겠어.”
“울 남편이 첫째인 셈이거든. 시동생들은 자기들 일을 내가 한다고 생각하나 봐. 감사하지. 형수를 존경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어.”
열다섯 살 소녀들이 어느새 ‘상할매’되었다며 시동생 이야기 재미있는 중인데, 부고가 왔다. 또 다른 친구의 남편. 천국 길 아직 이른 분, 애석하기 짝이 없다. 신혼여행 떠나는 그 친구를 배웅한 게 엊그제 같은 데 반세기가 찰나처럼 스쳤다. 삼십여 킬로. 부지런히 차를 몰고 장례식장에 갔다. 그동안 최선을 다해 간병했을 친구와 한바탕 또 눈물 바람을 했다.
“울 남편 일 년 삼백육십일, 거의 날마다 나를 마사지해 주었어. 젊을 때부터 죽어가던 내 몸이 이날까지 살아남은 건 순전히 남편 덕분이여. ‘어!’ 소리만 나도 자다가 어루만져서 낫게 해 주었어. 그러고는 저렇게 자기가 먼저 떠났어...“
“세상에! 그런 애처가가 어딨어? 너가 전생에 복을 많이도 지었나 보다.”
남편 이야기는 흉도 자랑이라는데, 친구의 남편추억이 슬픔 중에도 듣기 좋았다. 가신 이가 남긴 추억들은 두고두고 그립고 아쉬운 빈자리를 채워줄 것 같았다.
어떤 수필가 남편은 평생 아내에게 한정식을 차려준다. 그야말로 걸상이란다. 아내를 왕비처럼 섬기는 그 남편을 우리는 ‘아름다운 남자’라고 불렀다. 마사지? 왕비에게는 기본. 이 무슨 호강이람?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에 듣는이들은 늘 박장대소한다. 언제 찜질방에라도 가서 남편 자랑 더 듣고자 했는데 아직 미완이다. 하긴 아내에게 밥해주는 대통령 후보도 있었지. 달걀부침 실력은 몇십 년 주부도 흉내 내기 어려웠지.
아내 엉덩이에 부채질하는 남자, 밤마다 마사지해주는 서방님, 한정식 차려주는 남편...언감생심, 나는 남편 엉덩이에 부채질하는 게 차라리 빠르겠다.
『에세이스트』112. 2023.11-12
오길순(수필가, 시인, 시낭송가,동화지도및구연가)
1999년 7/8월호 <<책과인생>><삼베홑이불>당선 2000년12월호 <<한맥문학>>시<까치는 어디로 떠났을까> 당선 국제펜한국본부이사(전), 한국문협평생교육원위원회위원장, 서울중앙지방검찰청시민위원장및부의심의위원장(전) 한국산문문학회장및편집장(전),강남문협부회장(전)계간문예창작자문위원,설송문학상, 일붕문학상, GS문학상, 서울문예상, 길림신문주최세계문학수필대상,2011.에세이아카데미아주최네티즌선정수필1위.사임당 백일장 장원, 2017.한국문협작가상, 2020.검찰총장표창, 수필집:<<목동은 그후 어찌 살았을까>>2001.9.25.범우사 <<내 마음의 외양간>>2016.10.16 전자책 1. 목동은 그후 어찌 살았을까 2. 무지개 풍선의 징검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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