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애니타운쪽에서 이순신 장군에 대한 관심이 약간 증가한 것 같아서 이 글을 올렸고 제 주 활동 카페중 하나인 여기도 올려야겠다고 생각해서 여기도 올립니다.
물론 그래봐야 글이 너무 길어서 대부분 그냥 넘어가겠지만 말입니다.(정 못 보시겠으면 맨 아래 요약을 보시기 바랍니다)
뭐 어찌되었든 아래 글은 제목처럼 왜 판옥선은 평저선이 되었냐입니다. 혹시 몰라 말씀드리면 판옥선은 조선수군의 주력 함선으로 실제 이순신 장군의 전략이 가능했던 것도 바로 이 판옥선입니다. 심지어 거북선도 이 판옥선을 개량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즉 상당히 중요한 함선이고 조선 수군 승리의 원동력인 판옥선은 어떻게 그 모습이 된 것일까요?
일단 그에 대해서 필자는 (고)김재근 교수의 한선의 역사를 참고하여 올려보겠습니다. 사실 이 책을 베끼고 간추린 것인데다 책 자체도 상당히 오래전에 나온 것임(아마 70년대 나온거였나?) 하지만 이분의 전통 선박에 대한 주장은 지금도 받아들여질 정도로 상당히 탄탄하기 때문에 전통선박 연구할 많이 참고합니다. 그리고 이름 옆에 붙은 글자를 보면 알겠지만 지금은 돌아가셨습니다.
1)선용재(배를 만드는 재료 즉 나무)와 한선과의 관계
1.박달나무
산지:강원도 비중:0.946~1.127 굴곡강도(kg/cm3):1206~1663 굴곡탄성계수(kg/cm2):164930~187140
2.적송
산지:강원도 비중:0.548~0.728 굴곡강도(kg/cm3):526~977 굴곡탄성계수(kg/cm2):87760~136520
3.삼송
산지:평북 비중:0.415~0.433 굴곡강도(kg/cm3):313~384 굴곡탄성계수(kg/cm2):54140~77190
4.도토리
산지:영남 비중:0.735~0.766 굴곡강도(kg/cm3):672~866 굴곡탄성계수(kg/cm2):109100~135200
위 표는 그닥 자세히 볼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제대로 올리려면 일본, 미국, 중국 등 나무들도 같이 올린 표를 참고해야 하지만 제거 저걸 쓸 당시 상당히 귀찮았습니다. 각설하면 보통 선용재는 굳고 강한 참나무류등이나 무르고 가볍고 가공하기 쉬운 가벼운 나무들을 혼용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대부분의 경우 적송을 많이 쓰고 참나무류의 경우는 목정(나무못)이나 방패판에 쓰일뿐 많이 쓰이지 못합니다
그에 비해 일본에서는 소나무뿐만 아니라 삼나무나 양질의 느티나무등이 다량으로 나오고 중국에서는 삼,송,예장나무등을 다양하게 사용합니다
즉 우리나라의 선용재는 장난아니게 빈약합니다 왜 그럴까??
위에 나온 표는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대부분 나무의 기계적 성질을 잘 보여줍니다
일단 느티나무의 경우 일본은 곧고 바르게 자랍니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거목으로는 자라는데 형질이 좋지 못해서 각재와 판재로도 못씁니다 그리고 박달나무와 도토리나무의 경우 위 표를 보면 알겠지만 상당히 단단하지만 굴곡탄성계수가 너무 과대합니다 즉 굴곡을 요하는 각재와 판재등으로는 적당치 못하고 오직 목정으로 사용됩니다
게다가 추가적으로 곧은 재료를 찾기가 힘듭니다
그러면 자주 쓰이는 재료인 적송과 흑송은 어떨까??
일단 다른 나라와 비교해보면 한국산 적송의 굴곡강도는 일본 삼나무의 1.3~1.75배 미국 삼나무의 1~1.73배 굴곡탄성계수에서는 일본삼나무의 1.36~1.75배 미국삼나무의 1~1.59배입니다
일본의 느티나무와 비교해도 굴곡강도는 약간 떨어지지만 굴곡탄성계수는 오히려 높은 수치를 나타내죠
이는 즉 우리나라 선용재는 다른나라보다 강하기는 하지만 대신 굽히기가 무진장 힘듭니다 또한 이런 나무들마저 잘 곧게 뻗지 못하는경우도 많았고 더 나아가서 옹이도 매우 많다는 중대한 결함까지 있었죠(즉 구조상 강한데 잘 부러진다라고 하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배는 다른 나라처럼 판재를 엷게 가공하여 쓰기에는 곤란합니다 이는 결국 우리나라 배에 큰 영향을 줍니다
2)각국 배의 구조비교
동양의 목선은 사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비슷합니다
일단 첫째로 현대 목선이 방형용골을 밑에 두고 선저가 첨저선을 이루는데 비해서 동양선은 넓고 평탄한 저판을 밑에 깔고있는 평저선들이다 다만 중국 강남의 원양선은 서양선과 동일한 첨저선입니다
둘째로 현대 목선이 선수부(배 앞쪽)에 방형선수재를 두고 예리한 포인티드 스템을 이루고 있는 데 비하여 한선과 정크선은 선수부가 평면적으로 구조되어 있는 블룬티드 스템입니다
다만 일본의 화선만은 독특한 방형선수재입니다
셋째로 현대목선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늑골을 배치하고 거기에 외판을 고착하고 있는데 비하여 동양선은 늑골이 없습니다 대신 중국선에서는 필요 이상으로 격벽을 많이 설치하고 한선에서는 가룡목을 두고 일본선에서는 상하의 후나바리를 두어 횡강도를 부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가지 면에서도 구조가 많이 다른데 한선의 저판은 아주 두꺼운 판재를 조립해서 구조하고 외판과는 엄연히 구분이 되는데 대하여 정크선의 저판은 외판과 거의 동일한 두께의 형재일 뿐만 아니라 저판과 외판의 경계도 둥글게 연결되어 있어 그 구별이 잘 가지 않습니다
일본의 화선은 저판은 평탄하지만 선저외판이 무딘 v자형을 이루어 한선이나 정크선과는 모양이 다릅니다
한선은 두꺼운 판자를 모아서 만드므로 조립식 저판이라 할수있습니다
한선과 정크선은 선수재,선미재는 각형평면으로 이루어진 트란삼형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하지만 한선은 선수재인 이물비우를 구조하는데 있어서 판재를 가로로 붙이는 방식과 세로로 붙이는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중국에서는 세로로 붙이는 방식은 없습니다(물론 이것도 요새와서 뒤집혔을수도 있음)
한선의 경우는 군선에서만 판자를 세로로 붙이는데 이는 해전에서 충돌을 예상한 것으로 보입니다 외판의 경우는 한선은 턱붙이 클링커 이음방식이고 중국의 경우는 턱붙이 클링커 이음방식과 키벨이음 방식이 나타납니다
각 부재의 고착방법도 중국과 일본의 경우는 철정을 사용하는데 한선은 목정을 사용합니다 이는 한선의 경우 선용재의 사정과 개각시공을 통한 수명연장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생긴 것입니다 구획을 가로질르고 횡강도를 지탱하는 방법도 중국은 격벽을 다수 설치하는 것으로 해결했는데 처음에는 이 격벽이 수밀격벽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신안선의 발견으로 이 또한 의심되고 있습니다(조판마다 20cm의 직사각형 구멍이 뚫려있음)
한선의 경우는 격벽이 없고 가룡목을 설치했는데 이는 격벽에 비해서 매우 간편하게 만들수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보면 한선구조는 중국선의 구조보다 간략하게 되어있고 조잡합니다
3)한선의 개혁노력
고려시대 여몽연합군의 일본침공과 관련하여 고려가 배를 준비할때 고려가 원나라 황제에게 이런 부탁을 합니다
"원종 15년 황제(원나라 세조)가 일본을 정토코자 고려에게 명하여 군함을 감독하여 만들도록 하였는데 만일 배를 남중국식에 따라 만들면 비용도 많이들고 기일내에 마치기도 어려울 것인즉 온 나라가 걱정하였다"
그후 결국 고려는 고려식으로 만들 것을 허러받고 서둘러 건조를 했는데 이후 이 배들에 대해서는 고려사에서는 "강남의 전선은 크기만했지만 부딪치면 깨져서 원정에 실패했은즉 고려로 하여금 다시 조선케하여 재정을 하면 가히 일본을 정복할수 있다"
중국의 범해소록에서 "대소함선이 파도에 밀려 접촉하여 많이 깨졌지만 오직 고려의 배만이 튼튼해서 온전할수 있었다"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첫째 고려시대에도 할수있다면 얼마든지 강남식으로 배를 만들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즉 이미 어느정도 건조기술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둘째 만들기 쉬운데 비해서 훨씬 단단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남중국에서 제대로 만들면은 그 배들이 일단 크기때문에 더 단단할수 있지만 짧은 기간내에 많은 배를 만들때는 오히려 고려의 배가 만들기 쉬워서 더 단단하다는 것입니다
그후 조선초기에는 이런 논의가 있었습니다
세종 12년
"중국강남, 류큐(지금의 오키나와), 일본등 여러나라배들은 모두 철정을 쓰고 여러날 걸려 건조하므로 빠르고 단단하고 물에 떠 있어도 물이 세지 않고 큰 바람을 만날지라도 20~30년동안 쓰는데 우리의 배는 목정을 쓰고 급속히 건조되므로 튼튼하고 빠를수가 없어 8~9년도 못가서 파손이되고 헐어지게됩니다 청컨대 이제부터 다른나라의 조선 예에 따라 모두 철정을 쓰게 하옵소서"
또 다른 기록은
"각포의 군선은 모두 마르지 않은 송판으로 목정을 써서 만들어 풍랑을 만나면 이은 자리가 쉽게 해이되므로 틈새가 많이 생기고 물이 새어 습해지므로 얼마견디지 못하고 중국배는 오래 쓰므로 중국선처럼 철정을 쓰고 판자에 석회를 바르고 괴목을 쓰고 판자를 겹붙여 배를 만들어 시험하자"입니다
이런 논란이 있으지 4년후인 세종 16년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의정부와 6조가 모두 전함이 빠르고 느린데 대하여 왕에게 상주하기를 세종 13년 경강에서 만든 동자갑선이 중정도로 빠른데 하체에는 철정과 목정을 절반씩 그리고 상장에는 모두 철정을 써서 철이 모두 1800근 들었습니다 우의정이 아뢰기를 채택할만 합니다 금년 가을 경강에서 가수색이 만든 왕자갑선이 가장 빠른데 하체에 철정과 목정을 절반씩 그리고 상장에 모두 철정을 써 철이 1900근 1량이 들었습니다 의정부와 6조가 아뢰기를 채택할만합니다
금년봄 류큐(지금의 오키나와)선장이 만든 월자 갑선이 제일 빠르지 못한데 상장과 하체에 모두 철정을 썼고 철이 3352근1량이 들었습니다 왕이 병조에 명하기를 금후 각도 각포의 전선은 동자와 왕자 시험선을 본받아 만들도록하고 류큐선장이 만든 월자선이 비록 그 상장이 전함에 맞지 않아도 그 하체가 견실하여 그 법을 취할 만한즉 그것 역시 본받도록 각도에 이첩하라고 했다"
사실 이것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은 일본의 배를 배껴서 만들어봐 실험을해보았고(신숙주의 보고에 의하면 일본배는 성능을 만족시키지 못해 받아들이지 않았음)이를 본받아 세종시기에는 중국과 류큐의 우수한 조선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실제로 실험까지 마치고 각포에 만들도록 시킵니다
하지만 결국 이 개혁은 문종때 취소됩니다
"의정부가 병조가 제공한 바에 따라 왕에게 아뢰기를 지금 사람을 경기,충청,전라의 3도에 파견하여 군선을 중국식으로 건조하였는데 중국식 배는 선제에 따라 정교하게 만들면 물안의 벌레가 나무를 먹을수 없고 선체가 깨지지 않아 정말 유익합니다 그런데 15년이 되어서 썩고 공은 두배에 이르므로 도리어 이득에 미치지 못하지만 우리배는 물자가 많이 들지 않고 또한 깨진다하더라도 보수를 가하면 수십년을 견디어내며 얼마든지 조운에 쓸수 있으므로 무궁한 이득이 있습니다"
왜 갑자기 이렇게 변할 것일까??
이 이유를 찾아볼라면 일단 당시 한선의 개량점을 찾아보면 알수있습니다
일단 당시 한선의 나쁜점은
1.군선의 종류가 잡다하고 동일 선종이라도 일정한 규격이 없다
2.선체가 크고 둔중하여 속력이 느리다
3.시공이 조잡하여 수명이 짧다
4.배의 유지 보수를 잘못하여 더욱 수명이 짧아진다
헌데 중국식 조선법을 들어오면서 이런 문제점이 어느정도 해결됩니다
일단 1번은 법에 따라 규제를 하면되고 3~4번은 개각시공이란느 것을 통해서 해결했습니다(2번은 결국 해결 못함)
즉 중국식 조선법이 들어오면서 수명부분에서 자신감을 얻고 그를 통해 다시 원래 조선법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4)개각시공
개각시공은 말그대로 다시 고치고 더한다는 것입니다 조선의 경우 이 개각시공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고 배의 개각시공 연수를 법으로도 정해놨을 정도입니다 이 개각시공을 통해서 얻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수명연장입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조선의 배는 목정을 썼기 때문인데 이런 목정은 빼더라도 철정에 비해서 목재에 큰 상처를 주지 않아서 배를 분해하고 약해진 부분을 쉽게 빼내고 새로운 판재를 끼어널수 있었습니다
또한 선용재 때문에 어차피 판재가 두껍기 때문에 상처가 조금 나더라도 그렇게 크게 튀나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개각시공은 결국 배를 쉽게 만들수 있으면서 수명까지 크게 연장시키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이는 상당히 중요한게 명량해전 이후 13척 정도였던(경기수영까지 합하면 더 많긴 했지만)조선 수군 판옥선이 겨우 몇 개월도 안되어 노량해전에는 65척이나 건조됩니다. 즉 생산성이 엄청났다는 것입니다.
5)판자의 두께와 평저선과의 관계
흔히들 한선이 평저선인 이유로 우리나라 해역의 지리적 조건을 많이듭니다 물론 틀린말은 아니지만 이것의 영향을 준 것은 지리적인 조건만 있는게 아닙니다 바로 위에서 언급했듯이 선용재의 특성과 판재의 두께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일단 우리나라 선용재는 굴곡강도와 굴곡탄성계수가 강한편이어서 휘게 만들기 힘듭니다 그리고 이런 것 때문에 결국 처음부터 두껍게 만드는데 이로 인하여 형질을 마음되로 변형시킬수 없었습니다
이로인하여 단순한 선형으로 꾸미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배는 첨저선이 아닌 평저선으로 갈수밖에 없었고 거기에 더하여 겉으로 보는 크기에 비해서 배가 많이 무거워질수밖에 없었습니다(물론 겉으로 보기보단 강도가 쎄지만
6).한선의 속도
이 글은 전에 속도와 관련된 논쟁이 있었기에 쓰는 글입니다
사실 한선의 속도에 대해서는 딱히 뭐라고 하기 힘든데 어디에서는 판옥선의 보통 속도가 4노트라고 하고 어디서는 14~20km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배와 비교해서 조선전기와 임진왜란때는 그들의 배에 비해서 느리다고 하지만 조선후기와 19세기 영국인 선장(해군장교 출신)은 조선배가 일본배보다 빠르다는 기록이 간혹 나타납니다
아마도 이는 상황에 따라서 속도가 많이 달라지기 때문인 것 아닌가 생각되는데 그 이유는 판옥선의 경우 보통때는 돛만을 이용해서 나가다가 전투시는 돛대자체를 아예 접고 노만을 이용해서 추진을 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참고로 동양식 노젖기 방식은 서양식 노젖기에 비해 효율이 훨씬 앞선걸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실제 일본에서 고지마씨 연구에서 동양식 노의 추진 효율이 일부 조건에선 0.75에 달해 스큐류 프로펠러의 추진 효율 0.5보다 뛰어난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물론 전진 속도는 Froude Number로 0.04~0.08에 달해 매우 낮지만 전제 조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효율의 수치 자체는 매우 경이적입니다. 서양식 노와 비교한 동양식 노의 장점에 대해서 말들이 많았지만 이처럼 수치화한 자료를 제시하는건 처음입니다. 다만 노젓기 주기, 물가름 각도, 몰입 각도의 조합 전제 조건에 따라 극단적으로 효율이 떨어질 때도 있다고 하므로 어디까지나 특정한 조건에서의 추진 효율이지, 무조건 스크류 프로펠러보다 동양식 노가 더 우월하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이 노젖기 관련 글 출처는 http://lyuen.egloos.com/4789133 )
결국 정리하면
1. 한국의 선용재 즉 판옥선을 만들 나무들은 중국, 일본에 비해 강도는 쎄지만 너무 잘 부러진다. 이것 때문에 서양과 같은 첨저선이나 일본과 같은 반첨저선보다는 어떤면에서는 원시적이고 속도가 느린 평저선으로 건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배의 강도자체는 상당했었고 화포를 장착하기에는 일본보다 유리했습니다. 게다가 첨언하면 평저선은 첨저선에 비해 화물을 싣는데는 유리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2. 한국의 배는 중국배와 비교하면 상당히 조잡한 느낌이 들정도로 단순한면이 많았습니다. 그런 문제로 인해 조선시대에는 중국, 류큐, 일본의 배를 각기 실험해보고 이중 중국 강남과 류큐의 조선술을 받아들여 건조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복잡한 구조로 인하여 배를 대량으로 건조하기 어렵자 결국 일부 중요 기술은 받아들이고 기존의 한선 기술로 회귀합니다. 허나 이는 기존 한선의 답습이 아닌 각기 장점을 받아들여 결국 문제는 해결했다고 봐도 됩니다.
3. 그리고 이렇게 기존 한선 제작 기술을 남긴 결과 배의 유지비를 줄이고 생산성도 유지했습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다 날려먹은 판옥선을 거의 몇달 안되는 사이에 60여척이 넘는 함대로 복구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4. 판옥선의 속도에 대해서는 조선시대에는 주로 일본이나 중국배에 비하면 느리다는게 대세입니다. 물론 조선인 기록으로는 말입니다. 헌데 서양인들 기록에는 간간히 조선배가 일본배보다 빠르다는 걸로 보아서는 상황에 따라 이도 달라지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첨언하면 동양식 노는 서양식 노에 비해 추친효율이 훨씬 좋습니다.
이외 추가하면
1. 판옥선은 처음 만들어진 것은 16세기 중반 명종 당시로 임진왜란 50년전의 일입니다. 그리고 이 판옥선이 만들어진데에는 무려 100년에 걸친 대함주의자와 소함주의자 그리고 절충주의자들의 토론에 걸쳐 전략적 견지에 분석하여 만들어졌습니다. 참고로 이때는 판옥선뿐 아니라 임진왜란 때 주로 쓰이는 2세대형 화포들이 대량으로 생산되던 시기입니다. 즉 맨날 조선은 200년 동안 평화로 전쟁 준비 안했니 어저니 레파토리 늘어놓는데...실상은 50년 전에 준비로 인해 훗날 승리의 원동력이됩니다.
그리고 매번 조선 양반님들은 쓸데없는 논쟁만 일삼는다고 하지만 실상 위에 조선기술 도입부에서도 그렇고 이 부분에서도 그렇고...그 토론 때문에 최대한 시행착오 줄이게 되었습니다. 매번 토론이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제대로 된 토론 안하는 우리보다는 나은 것 같습니다.
2. 흔히 조선수군의 승리가 일본-조선 부산, 동래 사이의 해상루트를 끊은 것으로 착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당시 이 해상루트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일본은 이 부산부터 서해로 진입하지 못해 문제였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는 육상 교통의 한계로 인해 육상으로 보급품 호송하는 것보다는 배로 하는게 효율성이 훨씬 좋았습니다. 극단적인 예로 조선의 조운선은 5명 정도 인원으로 600~1000석의 쌀을 호남에서 서울로 수송할 수 있지만 부산에서 서울로 이 정도 쌀을 수송하려면 마소 수백마리가 있어야했고 게다가 이 마소를 먹일 식량과 이 마소를 다루는 인부들 식량도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주요 길목에서는 관군과 의병들이 점조직으로 게릴라전 펼치는 상황에서 이를 호위하는 부대가 늘어나야했습니다, 그래서 부산에서 서울까지 쌀을 수송한 부대는 단 한톨의 쌀도 가져오지 못하고 한다는 소리가 다시 돌아가게 먹을 식량 달라는 거였습니다.
이것만 봐도 조선수군이 전쟁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친지 알 수 있습니다.
첫댓글 무슨 논문 한 편을 읽는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긴 글이군요 ㅇㅅㅇ... 판옥선이 평평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군요. 그게 나무 문제일 줄이야 ㅇㅇ... 그리고 임진왜라네 큰 영향을 미쳤던 것 중 하나가 의병이라더군요. 그 때 당시의 왜놈들 상식으로는 대가도 없이 일반인들이 나라지킨다고 일어서는게 이해가 안됬다나 뭐라나...
사실 의병들은 직접적인 승리보다는(당연하지만 승리한 전투는 관군이 더 많습니다) 게릴라전을 통해 보급로 차단이 큰 역할이었습니다
요약한 것도 너무 기네요 ㅠㅠ 결국 이순신쨔응?
전에 비ㅅ한 거 올리셨던 것 같ㅇ데 아닌가. 생각해 보니 조선이 왕족부터가 무인 출신이고 문에 많이 치우치지 않겠ㄴ데 (더구나 고려 무신정변 전과 비교하면 별로 업신여기지도 않았고) 왜 문에 치우쳤단 오해가 생겼ㅇ까요. 전쟁에서 왜군에 많이 당한 것도 생각해 보면 선조가 왕권 강화한답시고 분위기 살벌하게 바꿔서 제대로 판단하고 준비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토론이 중요하다ㄴ데 공감.
전쟁준비는 하고 있었고 선조시기 분위기도 왕권강화하고는 거리가 있습니다. 오히려 전쟁 준비가 잘못된 부분도 있었고 더 나아가 당시 일본은 이미 수백년 내전으로 베테랑이 되어 있던 요인도 컸습니다. 실제 명군도 일본군과 야전에서 제대로 이긴적이 거의 없습니다
선조가 정철 시켜 벌인 피ㅇ 숙청 때문에 자유로운(?) 토론 분위기가 사라져서 전쟁 방비 제대로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어요.
실록을 보면 당시 선조가 대신들과 같이 일본이 침공하면 어디로 올 것인가 규모는 어느 정도일까 토론한 내용이 있죠(당시 루트는 전라도로 생각했고 규모는 1만 이상으로 봤습니다 그 이유는 그 전까지의 전훈이 그랬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