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운룡 시 모음 3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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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을의 어휘
이운룡
가을이 감성의 밑바닥에 찰랑거리면
가슴은 늪
거기 궁창을 두고
긴 이야기를 결론지을 때
무엇이나 들판에 뿌리면
나의 어휘는 이삭이 되고
먼 스승에게 편지를 쓸 때
성숙한 그림자를 짓는다
무엇이나 죽은 가지에 달면
나의 어휘는 열매가 되어
그것들을 손에 넣을 때
알알이 익은 시가 된다
무엇이나 밤공기에 적시면
나의 어휘는 달빛이 되어
나뭇잎 벌레 먹은 자리를 채우고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속까지
분명히, 분명히 비칠 때
떠날 사람 모두 흩어진 밤
남은 단촐한 가족들처럼 태어난 살결을
부끄럼 없이 드러내고 서 있는
계절의 창 밖에서
시간은 번뜩이는 눈
그 안 가득히 가을이 찰랑거리면
남김없이 가르쳐 준다
내가 다 배우지 못한 어휘를.
Autumn vocabulary
Autumn lapping at the bottom of sensibility
The breast is a swamp
Where I put the blue sky on
And conclude the long story
Everything seeded in the field
My vocabulary comes into ears
Makes grown shadow
When I write the teacher letter from far away
Everything fixed on the dead blanches
My vocabulary bears fruits
All of them grow up to be ripe poems
When they are in my hands
Everything wetted with night air
My vocabulary becomes moonlight
That fills in wormy spots of leaves
And shines in even lover's heart
Manifestly, manifestly
The night all visitors scatter
Out of windows in the season
That exposes native skin openly
Like ones of small family
Time is brilliant eye
Autumn lapping fully in there
It teaches me all
The vocabulary I have lear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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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을의 향기
이운룡
가을 속에서 햇살의 뉘를 골라내었다.
햇살을 가슴속에 퍼 담고 보니 가을 맛, 햇살 맛이 상큼 달다.
천사의 하늘말도 붉게 익어 향기가 천지사방 촘촘히 번져 난다.
가을에는 슬픔도 향기롭다.
속빈 과일 상자를 접는 노파의 땀에서도 쓸쓸한 향내가 난다.
낙엽에서는 주검의 향내가 낯선 길을 묻는다.
눈먼 지팡이처럼 세상을 더듬어보는 다슬기의 눈 그늘에도 향내가 묻어 있다.
저녁 햇볕에 말라가는 바람의 속살이 향기롭고, 투명한 주홍을 쟁여 넣은
홍시와 새까만 단내를 톡톡 터뜨리는 포도의 속내도 향기롭다.
나의 손금에서는 사과 깎는 냄새가 배어난다. 얼굴에는 햇볕의 향기, 가슴에는 사랑의 향기, 오곡백과가 붉고 노랗게 타는 것은 가을이 방화했기 때문이다.
사랑은 눈짓만으로도 인화된다.
가을에는 해걸음 늦은 저녁연기도, 밥이 다 된 당신의 사랑 한 그릇도 모두, 모두가 배부르고 향기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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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거미줄과 떡갈나무
이운룡
산의 올가미가 내 목을 척 걸고 잡아당긴다
보이는 것은 없고
살이 차갑게, 가늘게 느낀다
손과 목 끈적거리고 싫다
내일 또 올가미를 놓겠다 싶어
양옆의 떡갈나무 몇 꺾어 길을 막는다
그 애면 나무,
꺾이지 않으려 힘주다 말고
아예 제 하얀 살 뽑아 찌를 양
바늘가시를 세우고 쓰러지는 떡갈나무
그 심정을 이제야 알겠다
보이지 않는 올가미 하나 성가신데
온몸 꺾인 살 어찌 가시뿐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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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자배기
이운룡
내 어릴 적 아궁이에는
눈물의 고자배기가 탄다
순이의 살 냄새가
둥그런 얼굴이
붉게 피어나는 웃음이 탄다
빈 골짜기
뿌리째 뽑아
한나절 뻐꾸기 울음이 탄다
내 마음은
가랑잎 같지는 않게
밤새도록 토실토실 살이 찌는
고자배기의 끈끈한 화력(火力)
불빛 속에
오천 년을 오르내리는
원목(原木)에의 그리움이 탄다.
Gojabaegies
At the fire hole in my childhood
Gojabaegies of tears burn
Suni's flesh smell
Her round face
Her red blooming smile burn
Pulling up empty valley
In half a day
The calls of cuckoos burn
My heart is
Gojabaegies' warm fire power
That makes plump all night long
Unlike dead leaves
In the fire light
Ones of about five thousands years
The longings for the native trees bu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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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관을 뚫다
이운룡
관을 뚫으니 썩은 어둠이 보인다
어둠의 끝자락에 매달린 생의 시간은 텅 비어서
가볍고 적막하다
하수구로 빠져나간 허드렛물은 이내
관개지를 지나 강으로 흘러갈 것이다
하룻밤 사이
물기 없는 집의 단단하고 무서운 적막
한 달 내내 앞뜰 감잎들을 두들겨 패던
빗방울 속도 적막하다
어린 상추 잎에 코딱지처럼 붙어 있던 달팽이도
몸만 빠져나와 맨살로 저를 밀고 다니는
집 없는 달팽이의 집 없는 집도
앞집 높은 시멘트벽만큼이나 적막할 것이다
장맛비 멀어져간 뒤
숨 끊어진 물소리가 아직 젖어 있는
수채 구멍은 더욱 무섭고 적막하다
제 소리의 행방을 찾지 못해
매운 지표를 핥아 맛을 보려는 듯
낮게 구름 떼가 몰려간다
소리는 남쪽에서 세상의 길을 찾는데
구름은 계속 북향이다
생이 버린 소리는 쌓일수록 시끄러우나
구름은 높이 떠서 적막을 넓혀간다
내 가는 길 좁아지고
자주 들러 길이 난 적막은 넓고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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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구름 흔적
이운룡
구름이 제 뿔에서 뻗어난 가지를
툭툭 쳐내면서
또는 제 삭신을 뭉턱뭉턱 떼어내 버리면서
하늘에다 흔적 없이 발자국을 찍고 간다
구름 발자국을 한참 밟아가다 보면
내가 구름이 되어 치솟은 뿔이 뽑혀나가고
삭신이 깎여 점점 작아지다가
나마저 보이지 않는다
구름 발자국 흔적을 찾는다, 아니
구름이 하늘을 샅샅이 뒤져 나를 찾는지도 모른다
물 속 하늘을 헤엄쳐 들어가 보면
거기, 내 몸이 가라앉아 있다
하늘이 바람을 밀어붙이자 금방
물이랑 그늘을 겹겹이 둘러치고는
나를 살래살래 흔들어 물살 속으로 깊이 감춘다
구름 발자국은 한 천년 뚝 시치미를 떼고,
나 혼자 어리석다
구름 발자국 어디 있느냐 물으면
동에 있다 서에 있다 말들이 섞이지만
물과 하늘이, 동서 고금이 한 순간의 텃세이므로
나는, 치받는 내 뿔의 뿌리를 뽑아
나에게서 나를 온전히 떼어내 버리고서야
하늘이 되고 물이 된다
흔적 없이 발자국을 찍고 가는 구름이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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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기다리다 떠난 것은 기다림 이 아니다
이운룡
기다림이란 만남이다
기다림이란 이쪽과 저쪽 두 사람이
가까워지고 있는 시간의 틈새다
만나기 위해 나는 기다리고
당신은 가까이, 좀더 가까이 다가온다
만나기 전에 마음을 바꾸거나
이미 다른 길로 몸을 돌려 발을 떼었다면
십 년이고 백 년이고 기다린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기다림도 만남도 없다
목마른 시간만 공허空虛를 꿈꿀 뿐이다
기다림이란 만나기 위해 참는 아픔이다
아픔이 없는 화살은 순간을 못 참아
순간을 뚫고 날아간다
가서 뉘 가슴 한복판에 꽂힌다, 하지만
부활의 시간은 영원을 참는다
당신을 기다린다
새로 만날 영원을 기다린다
나는 얼마나 많은 들숨을 더 소화해야 할까
죽어서 만날 동행의 그림자가
머지않아 숨을 멎게 한다, 해도
나의 기다림은 썩지 않는 빛이 되리니
당신을 기다린다
새로 만날 목숨의 후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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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기다림
이운룡
기다림이란 나와 당신이
가까워지고 있는 시간의 틈새에 있다
가까이, 좀 더 가까이를 외치며
만나기 위해 기다림의 너트nut를 조인다
이미 다른 길로 마음을 휘었다면
십 년 백 년을 기다렸다 해도 기다린 것이 아니다
목마른 시간만 허공으로 날렸을 뿐
기다림이란 참는 아픔이다.
아픔이 없는 화살은 순간을 못 참아
긴 시간을 뚫고 날아간다
하지만 부활의 시간은 영원을 참는다
당신을 기다린다
나는 얼마나 많은 목숨을 소화해야 할까
주검이 눈동자를 파낸다 해도
나의 기다림은 썩지 않을 빛일지니
당신을 기다린다
영원 그 후일까지.
Waiting
Waiting is fastened at the gap of time
That you and I are getting closer
Crowing “nearer and nearer”
I fix the nut of waiting to meet you
Already leaning your mind on other way
It isn't waiting, even the waiting of ten or
Hundred years
It was only thirsty time
Thrown away into the empty air
Waiting is the pain of patience
A painless arrow flows away through a long time
Not to bear a moment
But the time of resurrection endures an eternity
I am waiting for you
I wonder I would digest any part of my life
Even If death would dig out the pupil of eyes
My waiting is light that will never decay
I am waiting for you
For ever and 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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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길, 참 조용하다
이운룡
하늘로 오르는 길
땅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리고
마지막 세상을 밝히는 은행잎들이
깊이 떨어진 슬픔과 상흔을
침묵하고 있다.
제 운명을 보듬고 삭히면서
삶과 죽음을 한물로 섞어
작은 우주를 내려놓고는
한 생의 빛을 반짝인다.
길, 참 조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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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꿈 아닌 꿈속에서
이운룡
아, 그 사람이 눈에 번쩍 띄었다
맨 뒷자리,
가물가물 먼 불빛 같다
내 팔은 둘을 잇대어도
너무나 짧다
마음을 늘여 힘껏 던지면 그에게로 가서
출렁,
걸칠 것만 같지만
실은 코앞에 맥없이 떨어지고 말았다
아, 그 사람이 지금
꿈이 아닌 내 꿈속에
잠깐 들어온 것이다
사랑을 땅에 떨어진 밥 티라고 생각했는지
희미한 지문 하나 남기지 않았다
얼굴과 얼굴들 사이
빈 흑점이 확대되었다
밤의 검은 장막에서만이 아니라
정녕 꿈길에서 마주친 허상이 아니라
떠나버린 별자리가, 허공이
그렇게 무섭고 깊은 상흔이었음을 미처 몰랐다
눈을 크게 뜨고 꿈속을 엿보았더니
그 사람 흰 날개 밑에
내가
한 점 불티처럼 묻어 있었다.
꿈 또는 생시에
무한시간의 한 점에서 나는 헤매었네.
시간과 점이 팽창하니 우주이고
그 기운이 빠져나가니 순간이고 점이었네
순간과 점 하나가 핀에 꽂혀
생의 똥줄을 늘이는 동안 나는
미주알 빠진 희로애락을 밀어 넣으려 강압하였네.
어제와 오늘의 엉킴, 뒤틀림이
처음과 끝을 풀지 못하고 뒤죽박죽인
점 하나와 나는
오른발 왼발의 틈새를 아득히 벌려놓아
두 발은 허공 양안에 못처럼 박혀버렸네
삶의 순간만이 징검돌을 성큼성큼 건너뛰었네.
잠이 청한 세상은 코를 골고
감잎 엽록소를 토닥토닥 바수는 비,
녹즙을 짜 마른 땅에 붓는 빗소리가
시원하게 깨지네.
물을 말려 소금이 된 눈물을 사람들은
슬픔의 꽃이 짜낸 진액이라고 말하지만
실은 쓰리고 짠
내 작은 삶의 엉킴일 뿐이네
이제 시간은 오래오래 나를 깨워줄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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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날마다 새로 짓는 개미집
이운룡
맨땅바닥에 아주 작은, 소복소복 쌓여 있는
개미집들이 위태롭다
오백 원짜리 은전만한 분화구
그보다 조금은 큰 반월성半月成이
보기도 좋은 개미집이다
고 작은 이빨로 아삭아삭 땅을 갉아 쌓은 노동의 성곽이
탱크처럼 위풍당당한 구둣발로 밟히면 어쩌나?
그러면 그렇지!
콩고물처럼 성은 납작 눌러져버렸고
다음, 그 다음 날에도 새벽마다
성은 생겨나고 또 무너져버리고
하루걸러 거듭되는 개미들의 대역사
날마다의 축성은 개미의 업 또는
운명적인 희생인가
개미는 말하리라, 전혀 힘들지 않다고
힘드는 것은 사람의 일이고 사람 생각이라고
사람은 행불행, 희비를 가릴 뿐
집은 짓고 허무는 것
성은 쌓고 무너지는 것
그래도, 해는 동에서 뜬다고
개미는 입이 더 째지게 웃어넘긴다.
땡볕 목욕
지렁이가 맨땅에서 땡볕목욕을 한다.
말라가는 육신을 굴리면서 죽음의 만용을 부린다
땡볕의 맨땅에 저를 온전히 드러내고는
앗 뜨겁다, 뜨겁다고 몸을 비틀어
열탕의 맨몸을 빼내려 해도
허튼 손발 하나 없다
지렁이가 왜 땅속의 문을 닫고
선선한 안온을 버리고
지상으로 나와 땡볕목욕을 할까
생각하면
결코 길을 잘못 든 탓은 아닐 터
길 아닌 길도 환히 알고 눈감고 가다
에라, 세상 목욕도 하고 뜨겁게 살자
하여, 숨은 허방을 모르고는
이 세상에 속아
마지막 마른 죽음을 견디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
지렁이는 아무것도 지닌 것 없다
가질 마음도 없다
오직 저 자신 하나, 밟으면 꿈틀거릴 뿐
단단한 어둠도 깊이 파헤칠 뿐
흙을 잘게 부스러뜨려 거름을 만들 뿐
그리고는 뜨겁게 죽음을 맞이할 뿐.
더딘 걸음
개미가 검불 사이를 황급히 빠져나간다.
무슨 일 생겼나, 가을이 지나가다 머뭇거린다.
발 여럿이 수백 번 자박거렸지만
내 걸음 폭 하나보다 못하다
짝 째진 언청이 입으로 가위질하듯
하늘을 재단해 가는 개미,
머리에 안테나 둘을 꽂고도 연신 더듬거린다.
드디어 가시거리에 들어온 정체불명의 물체,
단단하게 뭉쳐놓은, 요상하게 생긴
바위의 침묵 같은
죽은 듯 정지된, 생각하는 철학자?
개미는 접근이 두려운 모양이다
분명한 것은 그게 먹이라는 사실,
저걸 잡아먹으려고 더딘 걸음을 재촉했나
먹이는 크고 향기롭다
안테나를 접고 발 하나 턱, 걸치는 순간
파르르 날아가 버리는 송장메뚜기,
단 한 번 날갯짓 아래 수만 걸음 자박거림은 제로섬이 되고
개미는 다시 안테나를 꽂는다, 하지만
허공만 깊을 뿐 감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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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낯선 시간 속으로
이운룡
나는 항상 내가 낯설다
깨어 있으면 낯선 세상이 내 머릿속에 주사된다.
주입된 생각은 깊고 긴 과거로 돌아가
이게 누구더라?
한참을 허둥거린다.
낯설음이란 만남의 첫인사다
태어나선 세상이 낯설어 울음 인사를 한다.
그렇게 한평생 낯익히다
눈 귀 입 코 철컥, 닫아 빗장 걸고는
숨죽이고
적막에 몸을 던져 낯선 죽음과 인사를 나눈다.
익은 시간은 떨어지기를 두려워하지 않듯
썩은 시간은 싹을 틔우고자 하듯
매달렸다 떨어지는 낯설음
썩어야 싹이 돋는 낯설음
그리고 오늘 만난
햇빛 알갱이 그 한 알, 한 알은
낯익은 어제의 햇빛이 아니다
물은 예대로 흐르나 그 물이 아니듯
순간, 순간 몸을 줄이면서 수억 광년을 날아와서는
나와 처음으로 만난 환희인 것이다
하루라는 삶은 더욱 긴 낯설음이다
나마저 낯설고 삶이란 더더욱 낯선 것이므로.
나를 순장殉葬하다
하루 반절은 나를 땅에 묻고 산다.
손톱으로 쓱- 문질러 죽인 벌레의 흔적처럼
얼룩이 된 하루, 하루란 그렇게
삶을 암매장하는 일이다
오늘도 무덤을 열어 제치고
생떼의 나를 순장한다.
무덤 속엔 흰 뼈의 말들만 살아서
시끄럽다
누가, 네 가슴에 빗장을 질렀나?
누가, 네 생을 통째로 훔쳐갔나?
왜 얼음을 채워 삶을 내던졌나?
저 원양의 뱃길에 침몰한 삶 한 척,
쇠줄을 팽팽히 감으면
끌려오는 나의 슬픔, 괴로움, 회한……
검은 바다는 백 년 동안 죽어서 살지만
끈끈한 기름 걷어내지 못해 나는
한 몸 천만근 수장하고 산다.
하루, 하루란 그렇게
손톱으로 쓱- 문질러 죽인 벌레의 흔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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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녹색 언어
이운룡
숲은 서로의 몸을 꼭 껴안고 천년을 살아
바람맞거나 빗소리에 굶주려도 늘
서로가 서로에게 관대하다
찬바람이 진군나팔을 불고 밀어닥치면
잎을 버리고 몸 오므려
길을 내준다
또 장맛비가 짓궂게 칭얼거려도
몸 부풀려 일제히
초록 우산을 받쳐 달랜다
눈 귀 어둡고
세상길이 막막할 때
시린 가슴에 찬물이 고일 때에도
숲은 서로에게 은밀한 사이가 된다
새들은 소리의 그물 망으로 서로의 마음을 엮지만
나뭇잎들은 초록의 그늘로 온 세상을 엮는다.
Green Words
Woods have hugged one another through thousand years
And broadminded so anytime
Even in storms or hungers for sounds of rains
Cold winds sounding the advance and flowing
Woods have abandoned leaves, made themselves small and cut paths
Heavy rains whimpering all the way
Woods have bulged bodies, opened green umbrellas altogether
And soothed them
When eyes and ears have been dark
The world been vast
Cold water gathered in the breast too
Woods have get on well in secret one another
Birds have knitted together in the heart
With sound networks
Leaves of trees have plaited all of the world
With green sha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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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도깨비도마뱀
이운룡
사막 모래 속에서 금방 알을 찢고 나온 도마뱀의
온몸에 날카로운 가시 뿔이 돋아나 있다
저 무시무시한,
으쓱한,
완전무장의 가시 뿔 세우고 번쩍 고개를 쳐든
당당한 암갈색 몰골이 냉혈 도깨비도마뱀?
나오자마자 개미 두 마리를 찍어 가는 순간동작은
단 한 번의 시행착오도 용납하지 않았다
죄와 음모를 아래턱에 담아 볼록해진 저것!
야망의 눈알을 멀뚱멀뚱 굴리며
좀처럼 헛된 입 벌리지 않을 것을 결심한 듯
존재 이유의 그늘을 찾아 모래언덕을 넘어갔다
―저, 가소로운 것!
그것은 도깨비라는 이름만큼이나
모반의 뒤에서 공작을 꿈꾸는 가시 뿔, 아니
내 생전 처음 본, 처음이 아니라
많고도 많이 보아온 모순의 뿔,
그런데 너무나 익숙한 저 야만의 시침떼기가
좀처럼 얼굴을 보여주지 않지만 사실은
내 가슴속에서 부화된 도깨비였다
몸에서 삐죽삐죽 가시소름이 돋아났다
대낮에도 흔해빠진 도깨비 천국에서
나는 열사의 언덕에 서 있는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도깨비도마뱀은 아무데나 있다
살아온 날의 세상이 도깨비 소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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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마른 땅
이운룡
물이 말라간다.
푸른 산과 들 목이 마르다.
나무와 풀이 죽고, 새와 짐승이 떠나고
신화 속에도 신이 살지 못한다.
마른 땅에서는
신성한 발자국이
없다.
물의 신은 죽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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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밀물
이운룡
그대 겁 많은 눈
겁(劫)으로 감고
무덤 속 침묵에 귀가 설어
낮이란 낮
밤이란 밤
쿵
쿵
쿵
내 빈 뜰을 울리면서
다가오느니
그대 발걸음
심장에 부싯돌을 치는가
천 길
만 길
밖
한 점
구름
그대 몸짓으로만
눈감고 보라는가.
The Flow
Your timid eyes
Are closed in an eon
Your ears are
Unfamiliar with silence in a grave
All of days
All of nights
Booming
Bang
Bang
Bang
Get nearer to my empty garden
Your steps
May light flints on my heart
Thousand fathoms
Ten thousand fathoms
Far away
A speck
Cloud
Do you mean
I see it only by gesture closed e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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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사각뿔 유리의 성
이운룡
주검이 깊은 골짜기를 덮었다.
누가 이 피안 영혼을 구해낼 수 있을까.
하늘의 갈빗대를 헤치고 손을 찔러 보아라.
땅의 사타구니에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려 보아라.
바다의 엉덩이를 지렛대로 들어 올려 보아라.
보이지 않고
터지지 않고
들리지 않는
은유의 깊은 숨김을 위해 태양의 중심이
피라미드 석관을 비추고 있다.
그 어떤 눈물의 들썩거림조차 없는
무거운 주검들만 빈손을 내밀고 있으리라.
신의 아들이 지은
신성한
사각뿔 유리의 성에 무도회가 벌어졌다.
목신牧神의 밤은 짧았고
가면의 밤은 길었다.
봄이 겨울 뒤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북극의 냉랭한 기류가 대지를 휩쓸었다.
풀잎들이 벌벌 떨자 잠룡들도 지구를 떠났다.
한 오백년 뒤
지구의 심장이 얼어붙고 여름의 허파가 불탄다면
하늘과 땅과 바다의 가슴은
피가 말라
돌이 되거나 재로 남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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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산새의 집에는 창이 없다
이운룡
산새들의 집에는 어떤 슬픈
비밀이 숨어 있는지
아무리 엿보려 해도 창이 없다
침 발라 구멍을 내고
눈알을 방안으로 밀어 넣으려 해도
누런 창호지 봉창이 없다
오직 방문 하나
빠끔히 열어놓고 사는 집이거나
하늘 전체가 門인 산새들의 집,
그래서 하늘 문을 활짝 열어놓고
새들은 깃을 쳐 하늘을 파랗게 쓸고는
저들끼리만 마음대로 들고난다
하늘의 마당은 넓기만 하다
그래도 아무나 발 들여놓지 못한다
몸을 줄이고 뼛속까지 비워서 가벼운 새,
그 중 뼈 몇 개 추리고 또 추려서
얽어맨 산새들만 들락거린다
호롱 호오롱 호오로롱……
먼 날의 아픔을 삼키다 가시에 찔린
죽음보다 더 슬픈 눈비의 노래가 되어
하늘의 집을 지키면서.
☆★☆★☆★☆★☆★☆★☆★☆★☆★☆★☆★☆★
《19》
산 위로 올라간 집
이운룡
산길이 앞마당인 달동네 꼭대기 볼록집은
적막에 눌린 코납작이다
산 위로 올라간 정적이
텃밭에서 수북수북 자라고
집안에 한 발 들여놓은 오토바이
시동을 끈 채
적막에 길들여져 무심하다
다알리아 칸나 부용화
앞뒤로 몰려와
발소리 잡는 날마다의 아침, 나는
그 집 꽃들만큼 자란 예쁜 짓 못 보았다
세상 하나
꽃들 손에 들려 활짝 피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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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새벽의 하산
이운룡
산이 하늘을 들어 올려 몸 부풀리다.
한쪽 어깨가 삐끗해 제 무게를 내려놓고
영영 깊은 도량에 푹 빠져 있다.
다른 꼬임에는 결코 넘어가지 않을 양
세차게 흔들어도 묵묵부답이다.
어쩔 도리 없이
나의 몸과 마음을 산에 내려놓고 왔다.
가볍다는 생각 뒤에 서 있는 산은
힘줄이 조금 땅겼을 뿐
뼈에 금이 갔다는 말은 못 들어보았다.
나의 투정을 다 받아주는 산,
곰팡이가 피어도 곰팡이가 안 되는
유심한 거울이 내겐 없다.
Downhill at Daybreak
The hill raised the sky and bulged his body.
But he sprained one shoulder
Set down his weight
And was mired in a deep generosty for good.
Shaking him violentry
He stood perfectly mute
As he would never be cheated in any trick.
Unavoidably
I put my body and mind down on the hill
And got off.
I felt slight
And I hav'nt heard the hill's bone be cracked,
Maybe his muscle have a strain lightly.
The hill that hears all my grumbling,
I have not the mindfull mirror that smells no stench
In spite of gathering m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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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새의 주검
이운룡
산새가 날개도 없이 죽은 시간을 물고 떠났다. 자
유가 상처이고 아픔이었을까. 새는 살아생전 못 본
꿈을 만났으리라. 허공에 찍힌 발자국 찾아가면 목
쉰 노래 한 곡조쯤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발걸
음도 따라가기를 겁내는 그 먼 곳에서 무우화無憂華
꽃무늬처럼 펄럭펄럭 날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늘이 제집 마당이었을 산새가 호젓이 누워 있는 길바닥. 덮어줄
흙도 가랑잎도 거부한 채 침묵의 무게에 짓눌려 숨이 막힌 듯 소리
없이 울고 있다. 자유가 창살이었음을 알고 나서부터였을까, 맹금류
에 놀란 가슴을 아직도 쓸어내리겠지만 세상은 보이지 않는 그물이
라는 새의 항변이 두 발을 걷어찬다.
설령 곱지 않게 노래했을지라도 너는 한 마리 어린 새였다. 작은
눈 똥그랗게 뜨고 발가락 오므린 너는 어디에도 없는 너 하나였다.
죽어서 성자가 된 설법을 듣는다. 무죄한 죽음이 한 생의 끝에 멈춰
버렸지만 무한 세월 날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꿈속에서 지금 무우
수無憂樹에 앉아 너는 천연스럽게 놀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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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소리바다
이운룡
억울한 주검의 눈이 소리파도에 밀려 주름치마처럼 단단히 겹쳐
있다. 접고 접어서 다시는 펼 수 없나보다. 어떤 손이 저렇게 눈을
감겨놓았나? 소리소리 외쳤지만 하늘에 닫기도 전 돌아오지 못한 말
들이 소리바다가 된다.
주검은 모두 저 검푸른 바닥에 가라앉지도 못하여 떠다니고 있다.
목선이 풍랑과 싸움을 벌인 것일까. 아니 수십만 톤의 검은 욕망이
깔아뭉갠 잔해일까. 어둔 밤 소리바다는 긴급타전을 해도 응답이 없
자니 온몸을 출렁인다. 벌어진 저 캄캄한 소리의 입안을 들여다보라.
말의 지느러미가 물보라를 일으켜 빠져나오려 해도 목에 걸린 가시
가 되고 만다.
지난밤 무엇을 삼켰나? 주워온 병에 남아 있는 노숙의 갈증, 또는
빼앗긴 하루치의 양식? 소리는 삼켜도 배부르지 않다. 헛배를 채워
줄 뿐 목숨을 할딱거려도 허공만 깊어진다. 소리파도에 쓸려 한쪽
구석으로 침몰된 주검의 눈에서 벌레들이 굼실굼실 기어 나온다. 통
통해진 욕망의 첨병, 21세기 주검을 파먹고 살아가는 자본의 자식
들, 바로 그들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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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아름다운 상처
이운룡
풀 향기에 쏘인 상처는
아름답다.
살결엔 초록물이 들어 있지만
마음은 벌써 붉디붉은 가을이다.
더는 말을 못하고 나는
말더듬이가 된다
초록이 말라가는 사이
남의 밥이 되는 풀은
썩으면서도 향기를 내뿜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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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새벽의 하산
이운룡
산이 하늘을 들어 올려 몸 부풀리다.
한쪽 어깨가 삐끗해 제 무게를 내려놓고
영영 깊은 도량에 푹 빠져 있다.
다른 꼬임에는 결코 넘어가지 않을 양
세차게 흔들어도 묵묵부답이다.
어쩔 도리 없이
나의 몸과 마음을 산에 내려놓고 왔다.
가볍다는 생각 뒤에 서 있는 산은
힘줄이 조금 땅겼을 뿐
뼈에 금이 갔다는 말은 못 들어보았다.
나의 투정을 다 받아주는 산,
곰팡이가 피어도 곰팡이가 안 되는
유심한 거울이 내겐 없다.
Downhill at Daybreak
The hill raised the sky and bulged his body.
But he sprained one shoulder
Set down his weight
And was mired in a deep generosty for good.
Shaking him violentry
He stood perfectly mute
As he would never be cheated in any trick.
Unavoidably
I put my body and mind down on the hill
And got off.
I felt slight
And I hav'nt heard the hill's bone be cracked,
Maybe his muscle have a strain lightly.
The hill that hears all my grumbling,
I have not the mindfull mirror that smells no stench
In spite of gathering m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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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우주의 집
이운룡
나는 죽어서 살아갈 내 집 하나
둥그렇게 지었다
하늘의 문은 단 한 번 열렸다가 닫힌다
잠근 빗장을 풀 수는 있지만
한 번 닫히고 나면
다시는 햇빛을 볼 수 없는 집이다
새 옷 갈아입은 뒤
눈 코 입 귀 콱 막고, 손발 꼭꼭 묶고
저 깊은 침묵으로 이사할 날은 언제일까
내 적막강산은 오직 나 하나를 위해 지은
우주의 집,
지구의 한 평짜리 전세방이다
내 것이라곤 무엇 하나 아무것도 없다
나마저 내 것이 아니다
영원으로부터 잠깐 빌린 하늘의 몸이다
나는, 소유권이 전혀 없는
전세금도 한 푼 안 드는 거기서
오래오래 살 것이다
온전한 나이지만, 내 몫이 없는 몸을
반듯이 뉘인 채 해와 달, 별들과 함께
우주의 집,
지구의 한 평짜리 전세방에서
혼자 살다 땅속으로 깊이 스며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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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인동꽃
이운룡
외진 산기슭, 산촌 울타리에
인동넝쿨 인동꽃 피었다.
인동의 산하 삼십육 년,
작은 꽃들 고즈넉이
별처럼 피었다.
뒷동산 오이밭 오이꽃 넝쿨손 끌어 잡고
한평생 피눈물 꾹꾹 눌러 삼켰는데
농사꾼 소 모는 소리 산 고개 넘었는데
구름도 낯 붉어져 뒤따라 넘었는데
잎 사이 인동의 세월 죽지 못해 살았는데
아직도 산기슭 울타리에
한 깊은 인동꽃 피었다.
쓰르라미도 목이 메어 찌이이이 울어쌓고
그 때, 그 인동꽃은
시나브로 지고 말아
몇이나 남았는지
소녀상만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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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작은 집 한 채
이운룡
늙으면 갈 곳 있으리
만나는 사람도 큰집도 줄이고 줄여
혼자이면 어떠리
아내와 둘이면 사치스런 꿈일까
키 낮은 처마, 단간 방 앞에
찻상 하나 놓고 마주앉을 의자 둘
두 평 꽃밭이면 어떠리
그런 집에 살면 다시 사람들 그리워져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리
늙으면 그렇게 살아야 하리
낯선 외로움 서서히 익히면서
외로움끼리 모이면 금빛이 되리
그런 세상 하나쯤 가져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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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지문
이운룡
지구의 유전자 지문이 나왔다.
먼지 파편엔 구석기시대 돌칼의 지문이
핏자국 무늬처럼 얼룩져 있다.
내 마음속 유전자 지도에도
사랑과 미움, 행과 불행, 삶과 죽음의 지문이
희로애락과 숨바꼭질하고 있다.
배반하고 타협하면서
핵의 지문은 공포다.
적과 동지, 선과 악을 구별치 못하고
심장 두통의 원죄를 공격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소리 지문은 멜로디야만 한다.
새들은 새소리 지문으로
벌레들은 벌레소리 지문으로
마음결 따라 사랑을 연주케 해야 한다.
보아라, 돌을 던져 보아라.
강물에도 지문이 있지 않느냐.
하늘이 내린 지문은 바다에 와서 깊어진다.
성난 파도는 바람의 지문이
조용히 잠들게 한다.
아, 사랑의 지문이 별들로 반짝이고
지상의 평화가 은하계 손도장 찍어
하늘 꽃으로 피어난다면
그래,
어릿광대 지구가 투정을 부린다 해도
우주는 영원 속 깊이 껴안아 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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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흔들리는 나뭇잎
이운룡
나뭇잎이 저 혼자 흔들리고 있다
잎과 잎이 촘촘히 얽은 초록물 사이
바람 드나들 길은 넓고 환하다
말하자면
허공이랑 구름이랑 햇살이 빠져나갈 길은
얼마든지 열려 있는 것이다
나뭇잎이 남의 팔다리까지 움켜잡고 있다
바람은 넘어져
잎을 잡고 일어서려 안간힘이다
구름이랑 햇살의 몸짓 그대로
나뭇잎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것은 구름 햇살인지도 모른다.
잎은 그들 몸에 달라붙어
조금 몸을 떨었을 뿐
잎 사이, 사이
바람들이 죽은 듯 내다보고 있다
구름 햇살도 날아야 한다고
잎이 갈기를 세워 날개를 달아준다
세상 하나가 허공에서
구름 햇살의 길을 닦아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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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통풍구는 좁을수록 좋다
이운룡
검은 바람이 눈에 보인다. 불어오는 쪽은 멀지 않고 어두운 유혹
만 고양이 눈처럼 반짝거린다. 불어 가는 쪽에선 바람의 어깨 너머
로 가로수와 억새들, 휴지와 불빛들 모두가 허리 굽혀 몸을 날린다.
바람 저쪽에 무엇이 있나? 밑 빠진 혹은 뻥 뚫린 블랙홀이 있으리
라. 눈치와 쓰레기와 욕설 모두가 그 쪽으로 빨려들어 간다.
고층 빌딩들이 바람 따라 기울어져 있다. 균형은 인력의 법칙, 구
부리지 않으면 꺾이거나 뿌리를 드러낸다. 실패와 패배는 바람의 철
학이 아니다. 바람의 뒤통수를 쳐보면 퉁퉁 소리가 난다. 뒷구멍을
빠져나온 바람은 뒷구멍으로만 휩쓸린다는 소리, 조립 생산된 인간
이며 인격이 없다는 소리
바람을 퍼먹고 사는 하늘도 있다. 하늘은 쟁여 넣을 배짱이 끝없
어 바람을 퍼먹는다. 사람에겐 안 보이나 하늘눈에는 잘 보인다. 사
막에선 우왕좌왕 길을 잃지만 목구멍에선 쉽게 길을 내어 세차게 빨
아들인다. 그 바람에 눈알이 허파가 심장이 빠져나간다. 인조인간은
바람의 손을 잡고 당당하다. 무서운 세상이 안 무섭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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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풍경은 바람을 만나면 소리가 난다
이운룡
고요한 무욕의 밤이 밝고 참 맑다
이 세상 비워낸 바람 한 점
풍경 속으로 가볍게 몸 밀어 넣자
어깨를 툭 부딪치곤
슬픈 청상의 절개가 흔들리더니
무심을 깨우려는 듯 쨍그렁 쨍그렁……
저 눈부신 해탈의 풍경 소리가
산의 뿌리까지 흔들어 씻어 낸다
바람을 만나니 산이 마음이
소리만 남아서 흔들린다
절정의 손을 풀자
뜨끔, 어둠이 깨지는 수줍은 농월弄月
이 산사山寺
풍경은 바람을 만나면 소리가 난다.
If A landscape meets the wind, It makes a sound
A silent night of selflessness is bright and pure
A dot of wind that cleares this world
Thrusting the body into the landscape
It is tapped on the shoulder
And shakes a sad young widow's chastity
Clang clang clang ...
As awakening absence of any desires
The tinkling of a wind-bell of that gorgeous nirvana
Washes away even the root of mountain
Meeting the wind
The mountain, his mind is shaken by only sound remained
Being loosened the hand of climax
Prickly, shy delight of moon breaking the darkness
In this temple
If a landscape meets the wind, it makes a s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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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하늘새
이운룡
나는 날개 없는 불멸의 하늘 새다.
모세혈관으로 하늘이 흐르고
구름이 떠다닌다.
하늘이 숨쉬고
하늘이 말하고
푸른 지상주의 시간은
나를 분해하여 날려버리고
그 이상은 영원이다.
나의 집은 우주,
나는
먼지의 입자이고 언제나 반짝이는 빛이다.
내가 날기 시작하면 온 세상이 환해지는
새 천국.
살아서 집 떠난 적 없으매
나는 하늘텃새다.
나 홀로 절대이고
절대의 나는 천국의 하늘 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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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헛발질
이운룡
문지기는 하나다, 골문 앞에서 나는
구석을 향해 나의 심장을
힘껏 차 넣었다
종료 1분전의 관중의 함성이
철렁,
그물에 걸려선
잠깐 몸을 떨었을 것이라고 믿었다
순간,
허공을구겨서만든관중의헛심새는소리가
‘에-’ 하고
운동장을 통째로 들어 내던져 버렸다
내 생애의 헛발질 한 번으로
앞이 캄캄해진 날
나는 나를 벗어 던지고야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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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혼자 가는 길
이운룡
외진 산길을 뛰었다
앞서 천천히 가던 사람은
쫓기듯 더욱 힘내어 뛰었다
얼마나 멀리, 앞을 다투어
뛰었을까?
그를 제치고 났을 때에
무서운 소리가 천둥쳤다
내장까지 다 토한 빈혈의 공포에서
터져 나온 소리에 놀라 뒤돌아봤다
혼불이 하나, 작별이듯
서쪽 하늘로 떠가고 있다
아, 거기
山도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한 생애를 눈 씻고 보니
삶, 죽음이 몸을 섞고는 한 곳에
폭삭 가라앉아 있다
사리를 찾느라 재를 뒤졌으나
남은 건 허공 한 자락뿐
재도 풀풀 날려 잡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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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운룡 시 모음 34편
감사히 잘 읽고 나갑니다.
오늘도 수고많으셨어요,
봄비도 촉촉히 대지를 적시고
이제 곧 나무마다 신비로운
생명의 싹을 틔우겠지요
만물이 소생하는 봄...
봄마중 잘하시고 기쁨충만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함께 해주심 감사합니다
작은 집 한 채 / 이운령
늙으면 갈 곳 있으리
만나는 사람도 큰집도 줄이고 줄여
혼자이면 어떠리
아내와 둘이면 사치스런 꿈일까
키 낮은 처마, 단간 방 앞에
찻상 하나 놓고 마주앉을 의자 둘
두 평 꽃밭이면 어떠리
그런 집에 살면 다시 사람들 그리워져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리
늙으면 그렇게 살아야 하리
낯선 외로움 서서히 익히면서
외로움끼리 모이면 금빛이 되리
그런 세상 하나쯤 가져야 하리.
우주의 집 / 이운령
나는 죽어서 살아갈 내 집 하나
둥그렇게 지었다
하늘의 문은 단 한 번 열렸다가 닫힌다
잠근 빗장을 풀 수는 있지만
한 번 닫히고 나면
다시는 햇빛을 볼 수 없는 집이다
새 옷 갈아입은 뒤
눈 코 입 귀 콱 막고, 손발 꼭꼭 묶고
저 깊은 침묵으로 이사할 날은 언제일까
내 적막강산은 오직 나 하나를 위해 지은
우주의 집,
지구의 한 평짜리 전세방이다
내 것이라곤 무엇 하나 아무것도 없다
나마저 내 것이 아니다
영원으로부터 잠깐 빌린 하늘의 몸이다
나는, 소유권이 전혀 없는
전세금도 한 푼 안 드는 거기서
오래오래 살 것이다
온전한 나이지만, 내 몫이 없는 몸을
반듯이 뉘인 채 해와 달, 별들과 함께
우주의 집,
지구의 한 평짜리 전세방에서
혼자 살다 땅속으로 깊이 스며들 것이다.
기다리다 떠난 것은 기다림 이 아니다
이 시가 필이 꽂히네요
늘 시모음 배달해주시느라 수고가 많으세요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