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하를거치면서 아우토반은 독일을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국가 대동맥의 역할을하고 있었다.
아우토반을 본 이후 고속도로 건설은 박 대통령의
꿈이 됐다. 지속적인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인프라 스트락처
(Infra-structure), 그중에서도서울과 부산을 잇는 국가대동맥의
건설이 시급하다고 굳게 믿었다.
1967년 재선에 도전한 박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선거
공약으로내놨다.이 공약에 환호성을 올린 사람은 아마도 한국
에서 정주영밖에는없었을 것이다. 결국, 유사 이래 최대 규모
가 될 역사(役事)는 박정희정주영의 합작품이 된다.언론과
학계는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무엇보다 공사에 들어갈 막대한 자금을 과연 조달할
수 있을지 의문을제기했다.설사 재원을 확보한다 해도
그로 인해 빚어질 인플레이션을 우려했다.마침 세계은행은
한국의 교통량이 경부고속도로를 뚫어야 할 만큼 충분하
지 않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언론과 학계는 이 보고서를 금과옥조처럼활용했다.
세계은행과 같은 권위 있는 기관이 부정적인 의견을 내자
여론도 부정적으로 돌았다. 당장 세계은행에서 차관을
얻어 쓰는 길도 끊길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주저앉을 박정희 정주영이 아니었다.
하루는 박 대통령이 정주영을 청와대로 불렀다.
단둘이 만나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박 대통령은 현대건설이 태국에서 고속도로를 건
설한 경험이 있다는 걸알고 있었다."정 사장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드는 최저 소요 경비를 좀
산출해 봐주시오."박 대통령은 도대체 돈이 얼마나
들어갈지조차 파악이 안 돼 답답하던 중이었다.
대통령의 말을 들은 정주영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드디어 2년 전 태국에서 익힌 공사 경험을 한국에서
써먹을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정주영은 즉시 5만분의 1 지도를 들고 한 달 가까이
서울과 부산 사이의강과 산, 들판을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주판을 두드려보니 380억 원이라는 계산이 나왔다.
건설부는 650억원, 서울시는 180억 원으로 추산했다.
박 대통령은 현대건설이 제시한금액에 가까운 400억 원에
예비비 30억 원을 추가해 총 430억 원으로공사비를 책정했다.
이 돈으로 서울과 부산을 잇는 총 428km의 고속도로를 3년
안에 완공하라는 게 현대건설을 비롯한 17개 건설회사에
맡긴지상과제였다.
마침내 1968년 2월1일, 흥분과 감동 속에 경부고속도로 기공식
이 열렸다.현대건설은 서울~오산, 대전~옥천 등 전 구간의
5분의 2가량을 맡았다.공사비 책정이 워낙 빠듯했던 만큼 애초
부터 큰돈을 벌기는 어려운 공사다. 그렇다고 기업인이 이익을
포기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기업가는 이익을 남겨 소득과 고용을 창출하는 것이지 국가를
위해또는 사회를 위해 거저 돈을 퍼 넣는 자선사업가는 아니다.
기업가들이사회에 주는 기업의 열매는 소득과 고용을 창출
하는 것이면 된다.어떤 경우에도 이익을 남겨야 하는 것이
기업가에는 번번이 절체절명의명제였다.
이익에 집착해 탈법 또는 부실공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방법은 한가지뿐이다. 공사기간을 최대한 단축해
이자와 노임을 최대한 절약해야 한다. 정주영, 아니 모든 건
설회사 경영자들에게 공기 단축은 곧 돈이었다.
정주영이 무작정 공기 단축에 나선 것은 아니다.
그는당시로써는 천문학적인 금액이랄 수 있는 800만 달러
어치의 중장비를 도입했다.낙동강 고령교 공사(1953년 착공)
때 20t짜리 크레인 한대만으로 무리하게 덤벼들었다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겪은뒤 장비확보는 정주영에게
최우선 과제였다.
그는 고속도로 공사를 위해 중장비 1천900여 대를 들여왔다.
당시 우리나라에 있는 중장비가 모두 1천400대 정도였으니
장비에 대한 정주영의 집착을 읽을 수 있다.'호랑이'정주영
은 현장에 간이침대를 갖다 놓고 작업을 독려했다! .
공기 단축이 부실 공사로 이어지지 않도록 꼼꼼하게 챙겼다.
잠잘 시간에는 일하고, 대신 덜컹거리는 44년형 지프를
타고 가면서잠깐씩 눈을 붙였다.차에서 자는 습관은 나중
에 울산 조선소 건설 때까지 이어져 결국 목 디스크의 원
인이 됐다. 심지어 어떤 때는 지프에서잠을 자면서 지프는
공사장을 빙빙 돌도록 했다.
직원들은 '호랑이'가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에 게으름을
피우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노동력을 착취한 가혹한 자본가라는 비판을 받
을 만도하다.
그러나 약 40년 전 정주영은 현장 노동자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또 한명의 노동자였을 뿐이다.
그는 노동자가 일할 때 자기만 편하게 쉬는전형적인 자본가
와는 거리가 멀었다.그는 평생을 두고 자신을 이렇게평가했다.
"나 자신은 나를자본가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그저
꽤부유한 노동자일 뿐이며,
노동으로 재화를 생산해 내는 사람일 뿐이다.
"경부고속도로를 개통하고 기반시설을 확보한 박 대통령 시대
의 자본주의 산업화는, 우리 사회를 오랜 농업사회에서 공업
사회로 단숨에 변화가 켰다고 볼 수 있다.1960년 64%이던
농어민은 80년에 31%로 감소했으며,
중화학공업화가진행된 70년대에는 2차 산업이 1차 산업을 능가
하고 중공업이 경공업의 비중을 추월하는 선진국형 산업구조
를 갖추었다.그 근간에는 월남전 참전용사들이 국내로 송금
한 달러가 기반이 되었음을 잊지 말아야한다.
첫댓글 저고속도로가 대동맥이 되어 지금의 우리나라가 있거늘...
산업근대화을 이루워 낸 고박정희 대통령의 큰 업적 이십니다.. 김대중의 출발이 웃기네요
미래를 미리 내다본 이시대의 영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