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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올여름 휴가지를 정하지 못한 분들께 도움이 될까 싶어 4년전 기행문을 올립니다.
어느날 출퇴근 하는 차안에서 갑자기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로 인생 이렇게 살다 마감하는가 하는 서글픈 마음이 자주 일어나 이번 여름에는 남들 다 가는 여름휴가를 기어이 가보리라 다짐했다.
93년에 발간되어 밀레니엄셀러가 된 유홍준의 나의문화유산 답사기를 다시 꺼네 읽었다. 올해 처음해는 전라도로 방향을 정했다.
1차 목적지는 해남 땅끝과 보길도 그리고 변산반도로 잡았다. 땅끝가는 중간에 순천만 정원 낙안읍성 송광사 선암사 다산초당을,
변산반도 가는 중간에 담양에 있는 소쇄원 고창 선암사와 내소사를 들르고 채석강에서 돌아오기로 했다.
[순천만정원]
땅끝마을 까지는 거진 300km에 가깝고 중간에 들려야 할 곳이 여러곳이라 빨리 나서면 좋겠는데 난생 처음 휴가여행을 떠나는 우리 마눌의 꾸물거림으로 황금시간대를 두시간이나 허비하고 부랴부랴 10시 반이나 되어서 집을 나서니 장마가 채 끝나지 않은 하늘이 생큼히 맑아져 온다.섬진강 휴게소에서 맛없는 점심요기를 떼우고 순천만정원에 도착하니 뙤약볕은 아니라도 여름다운 날씨다.
그런데 이게 무슨 볼꺼리라고 그렇게 요란을 떨었는가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이걸 누가 기획하고 집행했는지 모르겠으나 이 수준으로 그 나라의 정원을 대표한답시고 조성되었는지 기가 찰 노릇이다.수박 겉 핥는다는 표현이 여기서 실감하고 있다.내 순박한 소원이 요양원 가기전에 유럽여행을 해보는 것인데 울 마눌은 퇴행성 관절염에 좌골신경통에 척추협착증에 어디 한곳 성한 곳이 없는 판에 페키지관광을 가면 유격훈련하듯이 강행군한다는데 그게 가능할지 심히 고민이다.
[낙안읍성과 뿌리깊은나무 박물관]
아이스크림 하나로 일어오르는 열기를 식히면서 30분만에 두번째 가볼 곳 낙안읍성에 당도 했다.보성군 벌교읍인지 모르겠다. 행정구역까지 내가 알 바 아니지만 벌교 벌교하는 지명이 색달라서 무슨 벌교인지 궁금한데 筏橋란다. 큰배 또는 뗏목벌자다.
이곳 지형이 풍수용어로 행주형(行舟形)이기 때문에 筏橋라는 지명이 생기지 않았나 짐작해 본다.
풍수적으로 볼 때 주산인 조계산이 우람하고 백호가 잘 생겼는데 국세가 잘 짜여있기로 한 고을이 넉넉히 먹고 살만하고 보기드문 입지다.우리나라가 5.16이후 50여년 만에 어느정도 살게 되니까 이런 문화유산을 복원하고 유지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기로 이 넓은 땅과 가옥들을 나같이 지나는 과객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는게 참으로 가상하다.
읍성안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무슨 지원을 적절하게 받는지 모르겠으되, 돌담길에 골목길도 넓지막히 잘 틔여 있는데다 모두 초가집으로 보존되어 있다. 전기나 통신시설물이 모두 지중에 있어 옛스런 풍경을 그대로 보여주려한 점이 특이하다.할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싶다.
몇몇 집은 전통 인간문화재 소유자의 집이 있는 반면 민박집으로 운용되고 있으나, 아무래도 나같은 도회생활에 익숙할대로 익숙한 중늙은이에겐 별무소용일 듯 하다. 지붕은 초가라 외부열이야 차단된다 한들 낮으막한 처마에 비좁은 방 거기다 환기안되는 어둑한 방에서 하루밤을 유한다는 게 여간 고통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되리라 싶다.
그러나 보리고개 이후에 태어난 복받은 우리 2세 3세들은 한 여름철은 피하고 하루쯤은 이런 초가집에서 지내봄도 좋으리라 여긴다. 세상 귀천 모르는 신세대들에게 가난이 뭔지 문명이 뭔지를 실감나게 하려면 이 보다 더 좋은 체험이 있을까
고을 관아로 쓰였을 육중한 한옥을 보니 읍성안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使無堂이라는 당호가 붙여진 건물이 있어 들어서니 해괴한 광경이 나타난다. 관아의 고을 원님이 대청마루에 높이 앉아있고 죄를 지었는지 공물을 바치지 않아 잡혀왔는지 찰방이 망망이를 들고 있는 가운데 포승줄에 손을 뒤로 묶인 체 꿇어 앉아 무슨 억울한 사연을 변명하려하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TV 역사물에서 흔히 봐왔던 광경이다. 아랫단 한켠에는 아랫도리를 죄다 까내리고 볼기를 맞을 채비를 하는 불안에 가득 차있는 백성이 굵은 눈알을 굴리면서 고개를 쳐들고 있는데, 철없는 아이는 작대기를 들고 내리치는 시늉을 한다. 이게 무슨 교육적인 효과가 있으며 이곳을 와보는 외국인들에게 무슨 이미지를 각인시킬지 모를 일이다. 불뚝 욕이 나온다.
[다산초당에서 시대의 영웅 정약용을 만나다]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모습이 뇌리에 남은 상태로 읍성문을 나서니까 뿌리깊은나무 박물관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있다. 우리세대의 식자들이 익히 보았던 잡지가 뿌리깊은 나무인데 "한창기"라는 분이 발간한 것으로 , 내 일찌기 이 분을 여러 곳에서 흔적을 알고 있어 예정에 없던 이곳을 들리게 되는 기회를 맞았다.
장준하선생의 사상계를 뒤이은 뿌리깊은 나무가 우리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식자층의 의식을 주도하며 인기 절정에 이를 즈음 신군부세력의 눈밖에 나게 됨으로 인하여 강제폐간되고, 그 5년 후 샘이깊은 물이라는 여성상대의 잡지를 발간하며 우리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선생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것도 이번 여행의 기쁨 중에 하나이다.
땅끝까지 가려면 시간이 빡빡하여 서둘러 서쪽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네비게이션이 없었다면 엄청 애먹을 여행이다. 나는 어떻게 하다보니 전라도와는 인연이 없어 스쳐지나가는 경우야 몇차례 있었지만 이번이 처음이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유홍준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세상에 내놓자 전국에 답사붐을 일으켰지만 나는 그저 책으로만 보고 언젠가 한번 기회가 있겠지 했는데 20년만에 그 소원이 이루어져 네비게이션에 차를 의지하고 강진에 있는 다산초당을 가는 길이다.
나는 유씨의 답사기 책을 죄다 섭렵하며 한때는 메니아가 되었었다. 그런데 이 양반이 노무현시절 문화재청장을 지내면서 죽이 맞았는지 평양에 가서 공식만찬석상에서 인민군가를 불렀다 해서 내 눈밖에 나고서는 한동안 뇌리에서 지워버리려 했다.
이번 차에 다시 그책을 끄집어 내어 읽으면서 이데올로기까지야 아니겠지만 이념적인 차이는 내가 보수임을 진보쪽 인사가 이해하지 않으려 하듯이 내가 진보쪽 더우기 종북세력을 죽으라 미워하는 것도 나자신 교통정리 하기로 마음 먹었다.
남이 나와 같지 않다는 것이 절대절명의 진리라는 걸 깨닫자고.
다산초당은 쉽게 나타났다.유교수가 침을 튀기면서 극찬했던 선입감땜인지 담담히 입구에서 10여분 산길을 올랐다.
다산 정약용이 누군가. 나는 한 때 역사에 심취하여 조선시대의 그 처절한 당파싸움에 대해서 열공한 적이 있다. 이덕일의 事思史(사사사)을 독파하면서 나라도 아닌 나라 조선을 비판했고 죽고 죽임을 당하는 피비린내 나는 당파싸움에 끓어오르는 분을 삼켰다.왕권보다는 신권이 앞셨던 조선이 싫었고,사대부들의 무능하고 그들 위주의 정치에 나라는 뒷전이라 임진왜란으로 나라를 400백년전에 일본에 먹힐 뻔 했고 ,그 후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여 30년만에 만난 병자호란으로 소위 오량케라는 청나라에 항복하고,
,그래도 지들끼리 피터지는 싸움박질로 결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략하여 아직까지 구설에 휘말리게 한 단초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반문해 보고 싶다.문창극총리후보자의 틀리지 않은 바른 말이 거두절미되어 친일로 몰리는 어처구니 없는 작태가 지금도 횡행하니 오호 통재가 이 아니겠는가.
다산은 그 시대의 개혁군주 정조를 만나 실학사상으로 무장하고,기둥을 고치면 썩가래가 내려앉고 벽을 고치면 지붕이 무너지는 나라를 바로 세우려는 진정한 선비이자 올곧은 정치가 이었건만 당쟁에 휩쓸려 정조 사후 버팀목이 사라지자 서인(노론)들에 의해 18년 귀양살이로 한 영웅의 기를 완전히 꺽어버리다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귀양살이를 오래함으로써 목민심서같은 불후의 명작을 저술하였음은 아이로니컬한 결과이리라.
쉽게 당도한 다산초당은 근세에 좋은 채목으로 모두 새로 지은 건물이라 그 시절 고달팠던 귀양살이의 모습을 연상하는데는 아쉬움이 있었다. 유씨는 이 곳을 설명하면서 온갖 미사여구를 있는대로 나열했는데 왜 이런 지적은 못했을까 전문가의 식견이 나보다 못한 것일까 잠시 생각해본다.
다산초당과 보정산방이라는 현판글씨도 추사가 쓴 당대의 친필이 아니고 집자한 것이고 동암에 있는 다산동암글씨도 다산글씨를 집자한 것이라면 모두가 가짜투성이인데 번듯한 건물로 남기지 말고 그 때 있었을 법 한 초가집으로 복원하는 것이 커가는 후세들에게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집에와서 안내문을 읽어보니 1957년에 기와로 복원된 초당을 당시모습대로 짚을 덮은 초가로 다시 복원할 계획이라 함)
[그렇게 그리워 했던 땅끝-해남 土末]
답사객이 뻔질나게 나다녀 이제는 20분이면 갈 수 있다는 백련사는 옆지기의 성화로 접어야 했다. 혜장스님과 차담을 나누며 적적한 심사를 달랬을 그 길을 길어보고 싶었는데 여의치 못하고 동암옆 강진만이 내다보이는 바위에서 그 심사를 잠시 대신해 보고 어둠이 내려와 깔리기 시작하는 시골길로 나와 바삐 땅끝마을에 도착했다.
40년도반 우리 옆지기 마눌은 이번 여름휴가를 처음 계획하면서 스트래스 만땅인 집구석을 탈출하여 목표없이 아무 곳이나 가다가 경치좋고 분위기 근사한 바닷가나 휴양지에서 멋진 여흥을 같이할 숙소가 나오면 거기서 하루밤을 유하며 찌든 마음을 힐링하는 것이 최대의 목적이었고, 나는 이왕지사 먼곳 전라도로 가는 김에 남들이 다 가 봤을 명승지나 문화유산이 있어 역사의 숨소리를 함께 느낄 수 있는 곳을 엄두에 두웠기로 내가 다산초당에서 뭔가를 있는대로 설명해대봤자 그건 소귀에 대고 경을 읽는 거나 진배없는 일이다. 그래서 여행 떠나기 수일 전부터 아는 것 만큼 느낀다면서 책을 집어주었지만 애시당초 언감생심이었다.
특히나 조선시대 그러니까 현대 이전의 옛적 생활상이나 역사 이런 나부랭이는 이번 여행에는 눈꼽만큼의 관심사항이 아니라 우리 부부 공통분모찾기가 여간 어러운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인생살이가 별것인가 부부생활이 별게던가 서로 조금씩 양보하여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면 2500년에 전에 죽은 공자도 가화만사성이라 하겠지. 우스개소리로 나이든 남자가 필요한 네가지가 첫째가 마누라, 둘째가 와이프,셋째가 집사람,넷째가 애들엄마라 하지 않나?
다산초당에서 땅끝마을은 지척이었다. 우선 어둡기 전에 숙소부터 정해야 겠기에 집사람과 와이프, 마누라, 애들엄마는 차안에 있으라고 하고 운치있어 보이는 팬션 모텔을 찾아나셨다. 막 붐이 일어나고 있는 지역이라서 그런지 생각보다는 값이 비싸지 않다. 4층인 모텔에는 5만원, 방이 꾀나 많아 보이는 약간윗쪽의 팬션은 온돌 2만원, 침대 3만원이란다. 바다가 보일법한 가운데 있는 에덴모텔은 4만원이란다. 아직 본격휴가철이 아니라서 그런지 과당경쟁인지 우리는 4만원짜리 에덴모텔로 정했다.이름도 괜찮은 에덴모텔.
우리가 그다지도 학수고대하던 땅끝은 안개에 덮여 도무지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으려 한다. 볼꺼리라야 흔하디 흔한 바다와 점점히 떠있을 섬들과 노을에 물든 석양이겠지만 어느 것 하나 허락해 줄 것 같지 않다.간단히 요기하고 내일 가기로 한 보길도행 선착장에 나가보나 바다는 커녕 희뿌연 어둠만이 우리를 반긴다.
마눌은 세상모르게 골아떨어지고 변함없이 나는 6시에 일어났다.아직 안개가 자욱하다 해가 뜨면 안개가 도망가겠지 하면서 손바닥만한 시골마을을 샅샅이 둘러본다. 땅끝표지가 있는 곳은 걸어서 20분 남짓 걸렸다. 뭐 그다지 실감 나지 않는다.
여기가 우리나라 최남단이구나 하는 것 밖에 들지 않는다. 싱겁다. 사람들은 제마다 의미를 붙여 관심을 끌게 하고 시선을 모르려 한다. 어찌보면 세상만사가 죄다 그런 건지도 모른다.마눌이 8시에 일어나 골든타임을 모두 허비하고 보길도 행 배가 출항하기를 기다려도 영 가망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모노레일을 타고 해발 300m가량되는 전망대가 있는 꼭대기로 올랐지만 역시 보이는 건 망망대해와 다도해가 아니고 회백빛도 창연한 구름속이다.
[두륜산 케이블카와 승주 송광사 그리고 곡성]
10시가 지나도록 출항할 기미가 보이지 않아 계획을 대폭수정하여 숙소에서 봐두었던 두륜산 케이블를 타고 송광사를 보고 곡성으로 갔다가 변산반도에서 1박하는 것으로 쮜어잤다.보길도행 뱃편이야 몇시간 지나면 풀릴 것 같은데 곡성에 문상할 일이 발생된 것이다. 여기서 곡성이 어딘가 지리산 남원옆이 곡성인데 200km는 떨어져 있을 상 싶다.
이 불미스런 전주곡은 우리가 전라도 땅으로 접어들 때쯤 집사람 휴대폰으로 문자가 오는가 싶더니 혼자서 뭐라 중얼거리더니 그쪽하고 통화를 하는데 오늘을 넘기기 힘들다는 모양이다.
옆지기 심사를 그르쳤다가는 남은 휴가가 엉망이 될 것 같아 곡성에 5시에 만나기로 했으니 그에 맞게 일정을 짜야했다.
해남에는 볼것이 많은데 일테면 윤고산 생가 녹우당 미황사 대흥사도 가볼만 한 곳인데 일단 두륜산 케이블카를 타고 서해와 남해를 한꺼번에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곳으로 올랐다. 11개 시군을 한번에 조망할 수 있다는데 한개의 작은섬도 보이기를 허용하지 않아 허망한 마음으로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
초행길이라 문상시간에 늦을새라 바삐 차를 몰아 송광사에 도착하여 느긋한 마음으로 국사를 16분이나 배출한 승보사찰을 이곳저곳 유심히 돌아보는데 문상시간에 정신이 팔려 있는 마눌은 승보사찰이건 법보사찰이건 그건 자기하고 아무 상관없는 일인 양 나 여기 왔다갔다는 눈도장만 찍으려 한다. 나는 풍수공부를 하고 난 뒤부터 그 풍수설 자체는 믿을 게 못되지만 산세를 보는 눈은 열어있기에 좋은 산세를 보는 즐거움을 느낌도 재미가 솔솔한데 그게 아쉽기만 하다. 그래서 아는 만큼 느낀다 했을까.
근래의 큰 스님 효봉스님과 구산스님의 흔적도 더듬어 보고픈데 이 또한 여의치 못하다. 송광사에 가면 불일암을 가보리라 했는데 이 또한 허사다. 20분 보려고 2시간을 온 셈이다.2분 진찰 받으려고 2시간 기다린 거나 별반 다르지 않다.
대웅전 밖으로 나오니 16국사의 진영을 죽 배열해두고 도난 당하여 다시제작한다며 불사모금을 하고 있다. 어느 물욕 가득한 도서방이 이걸 훔쳐갔나 보다.훔칠 게 따로 있지 하, 참
[변산반도 와 채석강]
휴가여행은 오늘처럼 시간이 정해져 있으면 영 맛이 간다. 일주문을 나서니까 불일암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어 옆지기에게는 먼저 내려가라 일르고 다리를 건너 두리번 거리니 불일암은 어딘지 모르겠고 계곡너머로 육중한 화강암 자재로 지은 건물이 보인다.무슨 사내암자인지 아니면 이곳 주지스님이 직접 불교TV에 광고하던 무슨 장제시설인지 얼핏보고는 바삐 내려오고 말았다. 이제 불교사찰도 영리사업을 하지않으면 존재하기에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님을 스님들도 잘 알고 있을거다. 내가 그토록 가보고 싶어 하는 불일암은 여기서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하는 사내암자로 무소유를 실천했던 법정스남께서 주석했던 곳이란다
이제 우리 불교신도들도 스님들이 무소유를 실행하는 청청한 스님만 바라는 과욕은 어쩌면 버랴야 할 싯점인지도 모르겠다.
송광사에서 허둥대며 곧장 곡성으로 곡소리나게 차를 몰아 광주로 연결되는 남해고속도로를 올라 곡성 어느 시골에 있는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30분이나 일찍 도착하여 졌다.
7시가 다 된 시각에 상가빈소에서 겨우 나와서 얼런 서해안 고속도로로 진입하고 전속력으로 변산반도로 해달린다. 가야할 거리 150km를 전속력으로 달린다.멀리 서해안의 낙조가 보일라 치면 어둑해져서 환상적인 낙조 또한 문상일정으로 모두 망가졌다. 채석강이 있는 곳에 당도하니 9시가 거진 된 시간이다.
엘리베이터까지 있는 라벤더팬션에 여장을 풀고 마트에서 소주 한병을 사와 대작하고 골아떨어졌다.저녁은 상가집에서 먹었다 치고.
6시에 일어나 먼저 한바퀴 정찰을 하고 숙소에 들리니 어제와 달리 일찍 일어나 있는 마눌이 신기하다. 여행체질인지 늘 말썽이던 장도 여상스럽고 속도 불편한데가 없나 보다. 10분거리에 있는 변산반도 최고의 볼거리 채석강을 둘러본다. 켐브리아기에 퇴적층이 뭐 어쩨서 이런 지형을 만들었다나 그렿게 써놨다. 고성에 있는 상족암인가 공룡발자국있는 곳과 흡사하다. 왜 채석강인가 했더니 이태백이가 술을 먹고 달빛에 취해 빠진 곳의 중국에 있는 지명 이름이 채석강이란다. 그래서 채석강이라 이름 붙였다니 황당하다.
[다시 땅끝에서 보길도로]
아침식당에서 오늘 일정을 끄집어 내서 유홍준교수가 침이 마르도록 극찬했던 내소사와 선운사를 갈려고 하니 절은 가봐야 그게 그거고 언제 또 단체로 와 볼 일 있으니 선김에 다시 보길도로 가잔다. 나는 보길도 가야할 이유가 윤선도 유적을 보겠다는 것이고 집사람은 카페친구가 등산와서 별이 빛나는 밤에 여자들을 울릴 정도로 이바구 했다던 그 섬이 과연 무엇이관데 하는 호기심이 발동해서 였다.
이 점에 대해선 목적은 다르지만 오랫만에 의견일치를 보아 늦으면 어제처럼 배가 출항 못할지 모른다며 쾌속으로 서해안고속도로타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고창 영광 무안으로 이어지는 서해안고속도는 정말 시원하게 뚫려있다.
서해고속도로에서 목포 순천간 고속도로로 넘어오니 어제 그 길이 나온다. 이젠 구면인 해남 길을 사뿐히 지나오니 두시 남짓됐다. 차를 배에 실어야 하니 점심은 마눌이 25시마트에서 김밥을 사와서 떼웠다. 여행치고는 꾀나 강행군이다.
40분 만에 보길도에 도착하여 배에서 차를 끌고 나오자말자 윤선도의 유적지 부용동을 찾았다.부용은 연꽃 봉오리가 터져 피는 듯한 형상을 부용(芙蓉)이라 한단다.이것도 풍수용어다.
고산 윤선도는 송강 정철만큼 한시대를 풍미한 정치가이자 우리를 고3때 무딘 괴롭혔던 문학가였다.
어부사시사를 보자
우는 거시 벅구기가 프른 거시 버들숩가
➪우는 것이 뻐꾸기인가 푸른 것이 버들숲인가
이어라 이어라
➪저어라 저어라
漁村 두어 집이 냇속의 나락 들락
➪어촌 두어 집이 안개 속에 보일락 말락
至지匊국悤총 至지匊국悤총 於어思사臥와
말가흔 기픈 소희 온갇 고기 뒤노나다
➪맑은 깊은 연못에 온갖 고기 뛰노는구나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는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라는 후렴이 생각나는 이 노회한 선비를 400년 후에 내가 찾아 나선다.
이곳 해남윤씨로 비상한 두뇌로 일찍이 출사하여 효종 현종의 사부가 되었는가 하면 당파싸움의 소용돌이의 한복판에서 서인세력 그것도 감히 우암 송시렬에게 맞장뜨려했던 강골이면서 직설적인 노정객을 만나려 나는 수년을 벼르고 별렸던 것이다. 예송논쟁이 한창일 때 감히 송시열에게 극형인 사형에 쳐해야 한다며 남인의 괴수를 자쳐했던 강골의 이 선비를 존경스런 마음으로 되새김해보고있다.
나는 일찍부터 겉과 속이 다른 송시열같은 부류는 병적으로 싫어하는 체질을 가졌었다. 현재도 송시열 같은 비열한 정치가가 수두룩한데 내가 천생적으로 정치에 문외한이라해도 고산을 우러르지 않을 수 없었을 거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강화도로 피신했다는 전황을 듣고 식솔 수백을 이끌고 강화도로 가는 중 남한산성에서 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의 허망함을 느껴 제주도로 칩거하려고 가던 중 산세에 반하여 이곳 보길도에 안착한 것이 윤고산이 보길도와의 인연이란다.
산세를 보니 과연 국세가 그럴 듯 하다. 주봉의 중심에 위치한 낙서재는 주산과 안산의 바란스를 고려한 흔적이 역력하고 좌우청백이 유정한 걸 보면 약간의 풍수식견만 있어도 딘박에 반할 듯한 명당일 것 같다.
이런 연유로 효종이 죽어서 왕릉자리를 정할 때 윤고산이 산릉간심관(山陵看審官)으로 지명되었다는 사실을 보면 역시 당시의 풍수술사를 자처한 분들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역사가 반증해주고 있지 않은가
조선 역대 28왕 중에 장자로 왕통이 계승한 왕이 여섯분 뿐이고 골육상쟁으로 아비가 아들을 독살하고 삼촌이 찬탈하고 요절하고 대가 끊기는 가계를 보면 과연 풍수가 있기는 있는 것인가. 당시 소위 국상을 치르면 사방 십리안에 있는 묘는 강제 이장을 시키면서 무소불위의 치외법권을 누리면서 산소를 정한 결과가 그것이라면 잠꼬대 이상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천하풍객 윤선도야 부용동이 웬말인고
절해고도 섬산이면 장풍득수 아에 없고
수려한 현무인들 득수없는 혈장이면
분금인들 옳을 손가 그 누가 장담 할까
즉흥으로 고산의 시조를 흉내내보니 그럴듯도 하다 . 그러게 진작에 풍수라는 건 이런 짝인 것이다. 이토록 윤고산이 풍수에 달인 이면 조상들은 어디다 모셔두었기에 조부는 아버지를 양자로 들이고 양자간 부친은 또 양자로 윤선도를 입양했다니 그게 풍수의 한계란 말인가
고산의 아랫대가 과거에 급제한 인물이 있다고 했나 누가. 증손자 공재 윤두서는 화가로 명성을 날린 양반이지 집안 대대로 풍수득을 보았음직한 인물이 배출되지 않았음은 풍수 그것 말짱 도루묵이라는 결론이다.
4km 옆에 세연정이라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정원이 있다. 사실 나는 이 세연정을 보려 보길도에 온 셈이다
도합 16년을 귀향살이 하고 낙향할 때면 이곳 보길도에서 연못을 파고 신선사상에 염원하고 신선노름하듯 살았을 노 정객의 모습이 어른 거린다.원림을 수려하게 만들고 연못에 배띄우고 정자에서 노닐면 어부사시사가 절로 나올 법 하다.
장마가 끝났는지 태양이 작열하니 옆지기는 세연정에 들어오지도 않고 차안에서 에어컨을 켜놓은 체 빨리 나오기를 기다리니
대충대충 둘러보고 나와야 했다
이제 보길도의 맑은 하늘에 남빛 바다위로 푸른 별이 쏟아지는 환상의 바닷가가 있는 곳을 찾아 나선다.
팜플렛을 보니 예송 갯돌해안이 제일 좋아보인다. 섬안의 길이라 5분이내의 거리인데 이렇게 허망할 수가. 거제도 몽돌해변 같은 건 맞는데 우리 같은 여행객도 두어팀 밖에 없고 휴양지같은 분위는 영 아니올시다다. 허망한 마음으로 면사무소에 들러 길을 묻고 중리 은모래해변으로 향하나 휑한 촌 바닷가에 인적하나 없다.성질 급한 나는 이럴때 순발력을 발휘한다.빨리 보길도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 뿐이다.
[환상의 해수욕장 완도 명사십리]
완도로 가는 막배가 6시 30분에 출항한다 하여 번개불에 콩 튀겨먹듯이 보길교를 건너 노화도 동천항에서 가까스로 완도 화흥포행 배를 탔다. 이 배는 차량만 싣고 가는 배인지 객실이 없나보다 차안에서 바다를 건너는 체험도 즐겁다.
엊저녁 봐두었던 명사십리 해수욕장을 네비에 쳤다. 30분만에 신지도 명사십리 해수욕장에 당도 했다.신지도가 완도옆에 붙어있던 자그만 섬인데 신지대교가 개통되고 부터 해수욕장이 알려지기 시작했나보다.경포대만큼 긴 백사장에 넓고 깨끗한 천연의 해수욕장이다. 콘도도 이미 들어서고 있고 팬션 모텔이 충분히 있어 좋다. 아마 수년내에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명소가 되지 싶다.
샤워장 등 편의시설도 훌륭하고 완도군에서 맹렬적으로 지원하는 가 보다. 마침 해변콘셔트가 있어 휴양온 객들에게 힐링하느라 고능성 엠프는 쉴틈이 없다.
보길도 그 후진 바다에서 올휴가의 마지막 밤을 보냈으면 얼마나 허전했을까 생각하니 아찔하다. 바다 내음 물씬 나는 파라솔 탁자에서 간만에 정말 간만에 회포를 풀고 일배일배 불일배도 좋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해변을 걸어보는 것도 오랫만에 좋았다.
여름휴가 정말 휴가는 이렇게 예정되지 않는 곳에서 예정없이 보내는 것이 좋다. 이게 오래 남을 추억이다. 남아야 이십년 이겠지만 추억할 수 있다는 건 아름다운거야
이곳 해수욕장은 백사장 뒤로 송림이 있어 야영장으로 텐트칠 공간을 빌릴수도 있고 그늘 아래 평상을 2만원이면 사용할 수 있으니 그운치가 솔솔하고 팬션 모텔도 5만원이면 되니 아직은 착한 해수욕장인 셈이다. 언젠가 그 때가 오면 해운대나 경포대처럼 될날도 있겠지만 남도를 기행할거면 한번쯤 완도(세진도)명사십리를 가봄직 할것이로다.
. 엊저녁 일배가 부담인지 늘어진 잠에서 일어나니 체크아웃 시간도 오버했다. 하룻밤을 포근히 잠재워 준 모래뜸모델을 나오니 장마가 물러나고 본격적인 폭염이 내리 비친다. 해변으로 나서니 우리같은 일행은 쉬 싫증이 난다. 올때 들리지 못한 선암사나 들러서 집으로 갈까 하니 쾌히 의견일치라 귀환길에 선암사에 당도하니 들어가는 들입구의 길이 유홍준교수의 글처럼 일품이다.
[마지막으로 선암사에 들르다]
사진에서 익히 봐왔던 교각없는 아취형의 승선교는 그 운치가 색달라서 유교수의 탁견에 감흥되나 곧 나타나는 강선루는 그 모습에 별반 감회가 없고 일단 경내에 들어가니 누가 썼는지 가물한 선암사 현판글씨 하나는 볼만한데 장황하게 극찬한 돌담이나 배롱나무 등속은 나의 감동을 일으키지 못하니 전문가의 안목과 나의 속물같은 안목이 이렇게 다를까, 마스타플랜없이 증축하고 이어 짓다보니 가람배치가 짜임새 없고 뭔가 질서가 없어보이는 것은 이 절이 태고종의 본산임에도 법적으로는 조계종 사찰이고 관리는 순천시에서 한다는데서 현실을 봐야 할 것 같다 .조계산 넘어 5km거리에 있는 송광사는 고색창연하고 삐까 번쩍하는데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렇게 확연한 대조를 보일까.
일본인들이 침탈하고 우리 문화를 짓밟던 시절 일본불교 방식인 대처승으로 변절시키고 친일 스님을 배출하며 우리 불교를 진흙탕으로 만든 결과가 해방 후 비구 대처 싸움의 도화선이 되고,이승만 대통령은 방관자가 되어 싸움을 부채질 하여 급기야는 이곳 선암사에서 살인사건까지 났으니 일본놈을 저주해야 하나 대처스님들을 탓해야 하나.
나는 불교에 입문한지 수삼년이 되지만 불교교리하나 어거다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어도 내가 곧 부처라는데 대해서 확고한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불교는 종교 이전에 철학이다 생각되어지는 것도 이즈음 와서 깨달은 바다.
요새는 어디를 가도 정치이야기 종교 이야기는 꺼내지 말아야 하는데 괜스런 자판기로 쓰잘데 없는 문자를 나불거렸나보다.
사하촌 마을의 보리밥 오랫만에 일품으로 게눈 감추듯 먹어치우고 왔던 길 섬진강을 건너고 진주를 지나 창원쯤 지날 때 마침 퇴근시간에 임박한 차량들의 홍수 속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내년 여름 동해안 일주를 기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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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워낭님의 4년전기행문이 휴가를계획하는 삶의 이야기방 식구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슴니다.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저도 절 순례 하기를 좋아하여
몇 년 전 고창 선운사 근처에 숙소를 정하고 며칠간 보냈습니다.
등산코스도 올라 가 보고
도솔암을 거쳐 마애여래좌상도 보았지요.
그러나 기억에 남는 건 붉게 피어있던 상서화 무더기였어요.
올 봄에 여수관광으로 향일암을 가 보았습니다.
꽤 가파른 곳에 지어진 사찰이라
왠지 영험함이 감도는 절이라 느껴 졌습니다.
낙원읍성을 돌아보고 선암사로 갔는데
비가 내려 우산을 들고 먼 길을 한참이나 걸어갔지요.
옛날 달력에 많이 나왔던 승선교의 아름다움을 눈으로 확인하고
몇장의 사진으로 남기고
온 경내에 탐스럽게 피어있는 홍매화에 감탄을 했습니다.
송광사를 못 보고 온 것이 아쉬웠어요.
여행을 좋아하시는군요
부럽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감사합니다
비디오를 보는 듯 상세한 답사기에 감탄 또 감탄입니다.
과찬이시고요
팔순되면 기념으로 셋째딸이 책을 내준다해서 저장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