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4년 12월 2일, 파리 노트르담 사원에서 나폴레옹은 직접 참석한 교황의 축복하에 프랑스 황제로 즉위합니다. 이런 자리에 연설이 빠질 수 없었겠지요. 이날 대관식에서 나폴레옹이 읽은 선언문은 나폴레옹이 직접 작성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 중에 이런 부분이 들어갑니다.
"나는 공화국의 영토를 완전하게 보전하며, 정교 협약의 법률과 종교의 자유를 존중하고, 존중받게 만들 것이며, 권리의 평등과 정치적, 시민적 자유, 그리고 국가 재산 매각의 취소 불가성을 존중하고, 존중받게 만들 것을 서약하는 바이다."
다 좋은 이야기입니다만, 저기 저 '국가 재산 매각의 취소 불가성'이라는 말은 대체 왜 나오게 된 것이며 무슨 의미가 들어 있을까요? 이야기는 다소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약 100년 전, 프랑스는 태양왕 루이 14세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루이 14세는 "L'État, c'est moi", 즉 "짐이 곧 국가이니라"라는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한데요. 루이 14세는 근대 유럽에서의 강대국 프랑스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일단, 베르사유 궁전에서의 화려한 궁정 생활로 프랑스뿐 아니라 온 유럽, 나아가 먼 훗날 전 세계에 프랑스 문화를 알릴 수 있게 만드는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프랑스가 침공받은 일도 없는데 줄기차게 여기저기 전쟁터에 끼어들어 프랑스의 권익을 지켰습니다. 네덜란드 전쟁, 플랑드르 전쟁,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 등에 끼어들어 프랑스 주변에 다른 강대국이 생기지 못하도록 했지요. 특히 라인강 너머 독일 지역이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지 못하고 자잘한 소공국들로 쪼개져서 100년 넘게 지리멸렬한 것은 리슐리외와 마자랭, 루이 14세가 대를 이어 가며 부단히 간섭한 결과였습니다. 덕택에 온 유럽이 프랑스를 유럽의 대표 강대국이자 문화 선진국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화려한 루이 14세. 그러나, 알고 보면 모두 후손들이 갚아야 할 빚더미)
그러나 모든 잔치가 끝난 뒤에는 누군가가 남아서 계산서를 처리해야 합니다. 루이 14세는 화려하게 살다 영광만을 남기고 갔지만, 그 뒤에 남겨진 부르봉 왕가는 엄청난 재정 적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거기에다 실속은 돌보지 않는 정신까지 물려준 덕분에 루이 16세 치세에도 영국을 견제한다는 목적으로 미국 독립전쟁에도 아낌없는 지원을 쏟아부었습니다. 가뜩이나 없는 살림에 말이지요. 결과적으로 루이 16세의 왕정은 재정 파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미국 행정부에 돈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요? 국채를 찍어 연준에 갖다주면 연준은 달러를 찍어 돌려줍니다. 조선 왕실에 돈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요? 임금님 밥상에 반찬수가 줄어듭니다. 프랑스 왕이 돈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요? 세금을 늘립니다. 세금을 늘리기 위해 소집한 삼부회(États généraux)에서 부르주아 계급의 분노가 폭발하여 결국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진 것은 이미 다 아실 겁니다. 결국 어떻게 보면 프랑스 혁명의 원인도 돈입니다. 혁명의 씨앗은 루이 14세가 짐이 곧 국가이니 뭐니 하고 흥청거릴 때 이미 뿌려진 것이지요.
그런데, 혁명을 하고 나면 그 후로 모두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 수 있을까요? 절대 아닙니다. 잔칫집 주인이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계산서는 식탁 위에 올려져 있었습니다. 삼부회를 대신해서 들어선 국민 공회(Convention nationale)는 교회 및 귀족의 토지 자산을 몰수하여 그것으로 재정 적자를 메꾸자는 제안을 내놓습니다. 이렇게 국가가 몰수한 토지를 담보로 1789년 12월, 5% 이자율의 공채를 발행합니다. 이것이 나중에 아시냐(Assignat) 지폐가 됩니다. 즉, 처음에는 채권이었으나, 나중에는 0% 금리의 지폐로 쓰이게 된 것입니다. 보통 돈은 태환 지폐라고 해서 금과 바꿀 수 있는 증서 같은 것이었는데, 약간 개념을 바꿔서 토지와 바꿀 수 있는 증서를 발행한 것입니다.
(인쇄 상태마저도 조잡한 아시냐 지폐...)
'아시냐'라는 저 프랑스어의 스펠링을 보시면 아시겠습니다만, 저건 정부가 강제로 지정한(assigned) 돈으로서, 태생부터가 자연스러운 돈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이미 파탄난 경제로 인해 돈이 궁해진 국민 공회는 이듬해인 1790년부터는 애당초 몰수된 토지의 총가치를 훨씬 넘어서는 양의 아시냐 지폐를 찍어 내기 시작했습니다. 결과는 바로 하이퍼 인플레이션이었습니다. 특히 정부가 인플레를 잡는답시고 생필품 가격 상한제를 강제하자, 생필품이 시장에서 싹 사라지고 암시장에서만 거래되는 등 역효과에 역효과만 불러일으켰고, 결국 수차례의 폭동으로 이어졌습니다.
결국 아시냐 지폐는 가뜩이나 혁명으로 어수선한 프랑스 사회를 경제적으로 다시 한번 뒤흔들어 놓고 7년 만에 불명예스럽게 퇴장합니다. 퇴장할 때 정부는 이 지폐를 액면가의 3.33%에 해당하는 토지와 교환해 줍니다. 투자 손실율 96.67%... 더군다나 투자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지요.
프랑스는 1720년대에도 존 로(John Law)라는 스코틀랜드인이 일으킨, 북아메리카 부동산에 투자하는 미시시피사(社)라는 대규모 투자 거품 사건으로 인해서 지폐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미시시피 거품 사건은 한 줄로 요약하면, 존 로가 북미 땅을 담보로 프랑스에도 요즘 미국의 연준처럼 발권력이 있는 금융 회사를 차렸다가 거품으로 끝난 것입니다. 이때 프랑스인들은 지폐는 종이 쪼가리일 뿐 결코 돈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었지요. 이 아시냐 지폐 사건은 프랑스에서의 지폐의 위치에 대해 '관 뚜껑에 못질을 한' 꼴이 되어 버렸습니다.
(돈을 찍어 내는 남자, John Law.)
결국 나폴레옹은 부르봉 왕정 때 사용되던 프랑화를 부활시키고, 특히 자신의 이름을 딴 나폴레옹 금화를 주조하는 등 '내 재위 기간 중에는 절대 지폐를 발행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나폴레옹 금화에 대해서는 금화, 지폐, 그리고 군사력 편을 참조).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즉 저렇게 액면가의 3.33%나마, 귀족 및 교회로부터 몰수했던 토지를 넘겨받은 사람들의 소유권을 영구히 인정합니다. 그것이 바로 나폴레옹이 대관식에서 언급할 정도로 중요했던 '국가 재산 매각의 취소 불가성'입니다. 원래 소유주였던 봉건 귀족 및 교회에게 토지를 돌려주지 않아도 되므로 사회적으로 '소유권의 절대성'이 성립되는 순간이었지요. 이 소유권의 절대성은 비슷한 시기에 편찬된 나폴레옹 법전의 중요한 일부이기도 합니다.
(나폴레옹은 사라져도 나폴레옹 법전은 영원합니다.)
아무튼, 이로써 프랑스의 금융 위기는 일단락되었을까요?
결국 나폴레옹의 금 본위제 비슷한 금융 정책은 다량의 금, 은 또는 토지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영국과 스페인 등 해양 세력들과 적대적 관계를 맺게 되면서 해외로부터의 금 유입은 뚝 끊기게 됩니다. 나폴레옹은 군대의 지휘와 전략에만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루이 16세와 로베스피에르가 돈 때문에 결국 목이 잘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나폴레옹은 정복지로부터 금과 식량, 토지 같은 자원을 약탈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피정복 국가들의 반감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가령 1805년, 나폴레옹은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근위대에게 지급할 2주일 치의 급료마저도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는데, 이를 일거에 해결해 준 것이 바로 아우스터리츠 전투였습니다. 이 독일 원정에서의 귀환길에 나폴레옹은 전장에서 빼앗은 40여 폭의 오스트리아 및 러시아 군기 외에도 무려 5,000만 프랑 상당의 금, 은, 그리고 환어음을 챙겨 옵니다. 결국은 빛나는 승리 뒤에는 수탈과 착취가 뒤따랐던 것이지요.
이런 영광의 뒷면으로 인해 처음에는 혁명 정신에 동조하여, 그 혁명의 파도를 전해 주러 온 프랑스 정복군을 환영하던 군중들이 결국 등을 돌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거기에 영국에 대항하기 위해 대륙 봉쇄령을 내리는 순간부터 나폴레옹은 이미 패망의 길로 접어든 셈이 되었습니다. 유럽의 상인들과 금융인들 전체를 적으로 삼은 것이니까요. 세상에서 돈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나폴레옹이 1804년 대관식을 진행하면서도 영국에 대해 두려워했어야 할 부분은, 영국 해군이나 넬슨 제독보다도, 영국 수상 윌리엄 피트가 의회에서 통과시킨 '유럽 대륙에서 모종의 용도로 사용될' 250만 파운드의 자금이었습니다. 인도 및 서인도 제도에서 긁어모은 그 돈으로 영국은 유럽의 권력가들을 매수하고 첩자들에게 자금을 댔으니끼요.
(영국 수상 윌리엄 피트가 영란 은행의 주머니를 슬쩍하고 있는 당시의 풍자 만화. 영국이라고 뭐 금이 무한정 있는 것은 아니어서, 피트 수상도 나폴레옹과 싸울 돈을 마련하느라 지폐를 찍어 냈습니다...)
나폴레옹이 라이프치히나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실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러시아, 오스트리아나 프로이센 등은 그보다 훨씬 더한 대패를 여러 번 당하고도 결국 나폴레옹을 쓰러뜨렸으니까요. 손자께서 말씀하시길, 전쟁은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승패가 결정되어 있으며, 전투는 단지 그 결과를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마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이겼다고 하더라도 결국 브뤼셀이든 바이에른이든 어디 다른 곳에서 패하면서 결국 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워털루 전투... 단순한 확인 절차치고는 너무 유혈이 낭자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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