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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종격투기 원문보기 글쓴이: Royal Navy
나폴레옹과 그를 중심으로 돌아간 나폴레옹 전쟁사는 유럽 근대사에 여러 방면에서 중요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나폴레옹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그런 중요한 주춧돌 사건 중의 하나가 바로 이번에 다루고자 하는 내용인 프랑스 은행, 즉 방크 드 프랑스(Banque de France)의 설립입니다.
나폴레옹이 설립한 방크 드 프랑스 이야기는 꽤 먼 과거, 즉 1690년 7월 10일, 영불 해협의 어느 해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뜬금없다구요? 속는 셈 치고 한번 읽어 보시지요.
1690년 당시 영국은 (뭐 항상 그렇지만) 또 프랑스와 전쟁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때는 9년 전쟁이라고 해서 1688~97년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와 대프랑스 동맹국, 즉 영국-네덜란드의 윌리엄 3세(오렌지 공 윌리엄), 영국 편에 붙은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 스웨덴 등 온갖 나라들이 다 뛰어든 전쟁이었습니다. 이 시대는 루이 14세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고, 아직 영국의 로열 네이비는 확고한 제해권을 확립하지 못한 시대였습니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1690년 7월 10일의 비치 헤드(Beachy Head) 해전이었습니다. 이 해전에서 75척의 프랑스 함대는 단 1척의 전함도 잃지 않고 56척의 영국-네덜란드 연합 함대를 완파하여 11척의 적함을 침몰시키거나 빼앗았습니다. 다만 프랑스 제독 투르빌 백작(Comte de Tourville)이 전과 확대에 소극적이어서 영국-네덜란드 연합 함대는 간신히 전멸을 면하고 템스강으로 퇴각할 수 있었습니다.
(비치 헤드 해전은 해전 중에서는 드물게도 영국식 지명이 붙은 해전입니다. 그만큼 영국이 수세에 몰린 전투였다는 반증이지요.)
이 해전으로 인해 영국은 난리가 났습니다. 섬나라가 제해권을 빼앗기다니! 그렇다고 육군이 튼실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이건 재앙이었고 하루빨리 저 강력한 루이 14세의 해군에 도전할 수 있는 강력한 해군 건설이 시급했습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해군 건설에는 무지막지한 자금이 들어갔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74문짜리 전열함 한 척을 건조하는 데 약 5만 파운드(현재 가치로는 대략 150억 원) 정도가 들어갔으니까 17세기 말의 빈약한 경제 규모로 볼 때, 이건 영국 정부로서도 상당한 부담이었습니다. 돈이 없다면 해군도 없었습니다.
(Aubrey 시리즈에 나오는 74문 전열함인 HMS Bellona입니다. 요즘의 이지스 구축함에 비하면 훨씬 싼 편이지요.)
자, 그러자면 먼저 '돈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다소 철학적인 문제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만, 여기서는 간단히 이렇게 설명하고 넘어가기로 하시지요. 원래 사람들에게는 돈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냥 식량이나 가죽, 옷감 같은 상품만 있었지요. 그러나, 가령 포도주 100리터의 가치가 여우 가죽 3장 반에 해당한다고 해서 멀쩡한 여우 가죽을 반으로 싹둑 자를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또 상대방은 여우 가죽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밀가루가 필요한 경우도 있을 수 있구요. 그때 등장한 것이 금이나 은 같은 귀금속이었습니다. 이런 귀금속은 닳지도 변하지도 않고, 또 필요한 만큼 조금씩 잘라서 쓸 수도 있고, 필요하면 다시 녹여 하나의 큰 덩어리로 만들 수도 있었으며, 그 공급이 무척 제한적인 데다, 그 자체로 예뻐서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다 귀하게 여겼으니까요. 그러니까 포도주를 파는 사람은 그에 해당하는 은을 조금 받아다가 그것을 다시 밀가루를 파는 사람에게 주고 밀가루를 얻을 수 있었고, 여우 가죽을 파는 사람도 가죽을 먼저 은으로 바꾼 뒤 그 가치에 해당하는 만큼의 포도주를 살 수 있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포도주나 밀가루를 사고 남는 은을 저장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지요. 고대 지중해 세계가 무척 국제적인 모습을 띠게 된 것도 은을 매개체로 하여 여러 민족들 간에 활발한 무역 활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아테네가 당시 에게해 최강의 함대를 건설하여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전쟁 몇 년 전에 아테네 인근에서 막대한 양의 은광이 발견되어 그 은을 재원으로 대해군을 건설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세계 최초의 프랑화입니다. 장 2세가 백년 전쟁 중 푸아티에 전투에서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흑태자에게 포로가 된 뒤, 그 몸값을 지불하기 위해 1360년에 주조된 금화인데, 당시 단어에 '프랑'이라는 말의 뜻이 자유를 뜻한다고 하여 프랑(franc)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장 2세는 일단 석방되어 이렇게 금화를 주조하는 등 자기 몸값 마련에 애를 썼으나, 결국 몸값에 해당하는 금을 다 모으지 못해 다시 자발적으로 잉글랜드로 건너가 포로 상태로 죽었습니다.)
(1356년에 벌어진 푸아티에 전투입니다. 여기서 장 2세가 포로가 되는 바람에 그 몸값 지불을 위해 프랑스의 프랑화가 탄생했습니다.)
좀 횡설수설하기는 했는데, '돈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한 줄로 요약하면 '돈은 금이나 은이다'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영화 '미션 임파서블4'를 보니 유명한 국제 암살자는 그 보수로 항상 다이아몬드만을 받는다고 하던데, 실제로는 보석은 보편적인 돈이 될 수 없었습니다. 보석은 더 작은 단위로 자르거나 부서뜨리면 그 가치가 떨어지거든요. 그러니까 17세기 말 해군 건설을 위해 영국의 윌리엄 3세는 금이나 은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영국 왕실에는 금이나 은이 없었습니다. 전쟁이라는 것은 돈을 무지막지하게 잡아먹는 괴물이었으니 정상적으로 세금을 다 거두어도 터무니없이 돈이 부족한 편이었거든요. 결국 남는 옵션은 돈을 빌리는 것이었습니다. 민간의 '장사치'들은 항상 돈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1692년 영국 왕실에서는 흔히 하던 대로 연 10%라는 짭짤한 이자를 약속하는 국채(Life annuity)를 발행했습니다. 판매 총액은 100만 파운드였지요. 그런데 정작 팔린 액수는 고작 108,000파운드에 불과했습니다. 목표액의 1/10에 불과한 액수였지요.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1692년 6월 지금의 벨기에 지방인 나뮈르(Namur) 포위전입니다. 이 전투도 9년 전쟁의 일환이었고, 프랑스 측에서는 루이 14세와 함께 공성전의 대가인 보방(Vauban)도 직접 참여했습니다.)
뭐 사실 놀라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일단 당시 9년 전쟁이 일어난 이유 자체가 네덜란드의 오렌지 공이었던 윌리엄 3세가 영국 왕위에 오르는 것이 문제가 되어 터진 것이었던 만큼 당시 윌리엄 3세는 국내에서도 정치적 기반이 약한 편이었고, 또 전쟁에서 이겨 영국 왕위를 공고히 할 지 아니면 고향인 네덜란드로 쫓겨날 지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평생 원금은 갚지 않고 이자만 연 10%씩 주겠다는 종이 쪼가리 국채를 믿고 윌리엄 3세에게 돈을 내줄 사람이 많지 않았던 것입니다. 궁지에 빠진 영국 왕실은 이자를 14%까지 올려 주겠다고 공표하지만, 여전히 국채는 팔리지 않았습니다. (요즘 이탈리아나 스페인 등에서 국채 발행에 실패했다 성공했다 하는 것이 이런 상황입니다. 국채 이자가 높아질수록 그 국가는 망할 가능성이 높다고 시장이 판단하는 것이지요.)
(인플레가 심하지 않았던 1793년만 하더라도 영국 국채(Consol)의 정상적인 이자는 3~5%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1694년 영국 의회는 울며 겨자 먹기로 3년 전인 1691년 스코틀랜드의 사업가인 윌리엄 패터슨(William Patterson)이 내놓았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 제안이 바로 현대 영국의 중앙은행인 영란 은행(Bank of England)의 설립이었습니다. (여기서 참고로 영란 은행의 '란'자는 네덜란드의 한자어인 화'란'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잉글랜드의 '랜'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즉, 영란 은행은 네덜란드와는 무관합니다.) 영란 은행은 흔히 국가 중앙은행의 효시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사실 그보다 먼저인 1668년 스웨덴의 리크스방크(Riksbank)가 유럽 최초의 중앙은행으로 설립되었지요. 여기서 착각해서는 안되는 것이, 영국의 영란 은행이나 스웨덴의 리크스방크나 모두 국가 소유의 은행이 아니라 개인 주주들이 소유하는 사기업이라는 점입니다.
(이 사람이 윌리엄 패터슨(William Patterson)입니다. 패터슨은 영란 은행 설립 이후 다른 위원들과의 불화로 인해 곧 영란 은행 이사회에서 탈퇴했습니다.)
그렇다면 기존에는 영국에 은행이 없었을까요? 물론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러 민간 은행이 설립되어 활발히 영업을 하고 있었지요. 문제는 윌리엄 3세의 정부를 이런 은행들이 믿지 못하여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는 점(즉 국채를 사지 않았다는 점)에 있었습니다. 패터슨이 제출한 제안은 '정부가 달라는 대로 얼마든지 돈을 빌려줄 테니 대신 몇 가지 특혜를 받는 그런 은행을 설립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제안에 따라 1694년에 설립된 영란 은행이 가지게 된 특혜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정부의 모든 대출을 관리할 독점권
(2) 정부에게 돈을 대출해 줄 독점권
(3) 다른 은행을 합작으로 설립할 권리
(4) 영란 은행이 파산하더라도 그 채무는 출자금 이하가 되도록 하는 유한 책임제
(5) 국채를 담보로 하여 지폐를 발행할 권리
한마디로 영국 정부의 돈줄을 쥐고 흔들 독점권을 달라는 것이었지요. 당장 궁했던 정부는 이 요청을 승인했고, 패터슨과 그 일당(런던의 금융가인 the City의 주요 멤버들)은 불과 12일 만에 120만 파운드의 출자금으로 영란 은행을 설립합니다. 정부에 대한 대출 조건은 연 8% 이자에 연간 관리 비용 4천 파운드. 정부로서도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습니다. 연 14%의 금리로도 모이지 않던 돈을 불과 8%의 금리로 빌릴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영국 왕실은 이렇게 빌린 돈의 2/3를 해군 건설에 투입합니다. 단, 이런 독점권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12년에 한 번씩 갱신하는(charter renewal) 것으로 정해졌습니다.
자, 이렇게 보면 영란 은행 설립자들은 연 6%의 이자를 손해 보는 것처럼 보입니다. 원래 14%를 받고 빌려줄 돈을 불과 8%에 빌려주는 셈이니까요. 120만 파운드가 원금이니까 매년 72,000파운드의 기회비용을 날리는 셈이지요. 그런데 왜 패터슨과 그 일당은 이런 조건으로 은행을 설립하려고 했을까요? 저 위에 나열된 5가지 조건 중 다른 조건들도 무척 짭짤했지만 마지막 조건, 즉 지폐를 발행할 수 있는 권리가 무엇보다도 만족스러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또 잠깐, 지폐(Bank Note)라구요? 아까 '돈은 금이나 은'이라고 하더니 이제 와서 무슨 종이돈 이야기가 나오나요? 사실 종이돈, 그러니까 지폐는 꽤 오래전부터 사용되었습니다. 원래 은행과 지폐의 기원은 이런 것이었다고 해요. 금화나 은화를 들고 다니자니 무겁기도 하고 또 도난의 위험도 컸습니다. 그래서 그 대신 튼튼한 금고를 가진 믿을 만한 귀금속 상인에게 금화를 맡겨 두고 그 영수증을 받아 두었다가 금화로 지불해야 할 일이 있을 때, 금화 대신 그 영수증을 건네주는 일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그 귀금속 상인에게 그 상인이 발행한 영수증을 들고 가면 거기에 쓰인 금액만큼의 금화를 받을 수 있다는 신용이 있어야 했지요. 사람들 생각이나 판단은 다 비슷한지라, 평판이 좋은 일부 귀금속 상인에게 그런 서비스를 받는 사람들이 집중되었고, 그런 일부 귀금속 상인들이 발행하는 금화 예치 영수증은 거의 해당 금화와 같은 가치로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폐와 은행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지폐를 금 태환 지폐라고 합니다. 즉, 지폐를 은행에 들고 가면 그 액수에 해당하는 금을 받을 수 있어야 했던 것이지요.
(위 사진은 1913년 미 재무성에서 발행된 50달러짜리 지폐입니다. 이건 지폐에 GOLD라고 적혀 있고 은행에 가져가면 바로 50달러에 해당하는 금, 즉 당시 2.41896트로이 온스의 금으로 바꿔 받을 수 있는 금 태환 지폐입니다. 반면에 아래 것은 연방 준비 제도(Federal Reserve)에서 1914년에 발행한 50달러 지폐인데, 이건 금으로 바꿔 준다는 말이 전혀 없는 불태환 지폐입니다. 이런 불태환 지폐를 영어로는 fiat money라고 하지요.)
그러면 그 귀금속 상인, 그러니까 은행은 왜 그런 금고 대여라는 귀찮은 서비스를 제공했을까요? 이는 귀금속 상인들이 오묘한 진리에 눈을 뜨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들이 금을 1,000파운드어치 정도 맡겼다면, 원래 그 예치 영수증도 1,000파운드어치만 발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몇 년 동안 그런 일을 하다 보니 실제로 그 예치 영수증을 들고 은행에 찾아와서 해당 금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더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은행 금고에 든 금화는 1,000파운드어치밖에 없더라도, 1,200파운드어치의 예치 영수증, 즉 지폐를 발행해도 아무 탈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이렇게 되니까 은행가 입장에서는 허공에서 뚝 200파운드라는 돈이 생긴 것이나 다름없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지폐는 그 근본부터가 일종의 사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돈을 있는 것처럼 속이는 것이니까요. 경제학에서는 이것을 두고 신용의 창출이네 뭐네 하지요. 이렇게 존재하지 않는 금에 기반을 둔 지폐는 경제 공황 시에 문제가 되었습니다. 가령 전쟁이 난다든지 해서 사람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와 금화로 바꿔 달라고 하면 그 날로 그 은행은 파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문제가 반복되었기 때문에 지폐에 대한 신뢰도는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지폐는 국가나 중앙은행에서 발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은행 저 은행이 제 마음대로 발행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종류도 여러 가지였고, 발행처가 어느 은행이냐에 따라 아예 돈으로 받아 주지 않는 지폐도 있었습니다. 법적으로 통용이 강제되는 돈을 법정 화폐(legal tender)라고 하는데, 당시에는 그런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평범한 1달러 지폐입니다. 왼쪽 위를 보면 작은 글씨로 This note is legal tender라고 적혀 있지요.)
이런 지폐가 일으킨 온갖 해악 중에서 가장 악명 높았던 사건은 바로 프랑스에서 터졌습니다. 원래 루이 14세의 전쟁은 영국에만 돈 문제를 일으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도 금화나 은화 같은 경화(specie)가 부족해서 난리였었지요. 그러자 여기에 홀연히 나타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존 로(John Law)라는 스코틀랜드인이었습니다. 순수하게 암산만으로 카드놀이에서의 확률을 계산하여 연전연승할 정도의 천재였던 존 로는 스페인 왕위계승전쟁(1701–1714)으로 인해 파탄난 재정을 물려받은 루이 15세의 재무관(Contrôleur général des finances/영어: Controller General of Finances)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전부터 독점권을 가진 중앙은행 제도를 도입하여 국가 채무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해 왔기 때문이었지요.
(존 로입니다. 고향에서는 애정 문제로 결투 끝에 사람을 죽이고 야반도주해야 했지요.)
1716년 존 로는 방크 제네랄 프리베(Banque Générale Privée)라는 은행을 설립하고 여기서 지폐를 발행했습니다. 그 지폐의 담보는 (당장 금이나 은이 없었으므로) 북아메리카의 프랑스 식민지인 루이지애나와의 무역을 독점하는 회사인 미시시피 회사(Compagnie d'Occident 또는 The Mississippi Company)를 설립하고 그 주식을 담보로 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담보로 삼았던 미시시피 회사의 수익이 별로 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거품이 끼게 되어 점점 더 많은 지폐를 감당하지도 못할 정도로 찍어 냈다는 것이었지요. 결국 거품은 꺼졌고, 이때 발행된 지폐는 모두 휴지가 되었으며, 존 로는 여장을 하고 프랑스를 빠져나가 베네치아로 도주해야 했습니다. 이런 역사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지폐에 대한 신뢰도가 높지 않았습니다.
(존 로가 발행한 지폐입니다. 존 로의 자필 서명이 들어 있긴 하지만, 좀 성의가 없네요.)
그러나 영란 은행은 국왕의 법령에 의해 세워진 은행이고, 또 거기서 발행하는 지폐는 국채라는 든든한 담보가 있었으므로 그나마 신뢰도가 더 높은 편이었습니다. 영란 은행의 설립자들은 그 점을 십분 활용했습니다. 즉, 정부에 출자금 120만 파운드를 빌려주고 받은 채권을 근거로 또 다른 120만 파운드 상당의 지폐를 발행하여 시중의 민간인에게 빌려준 것입니다. 물론 이자를 받구요. 그렇게 되면 실제 출자금은 120만 파운드밖에 없는데, 그것을 정부와 민간에 각각 이중으로 빌려줄 수 있게 되므로 민간에 대한 이자율을 8%로 한다고 해도 8%x2=총 16%라는 고수익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거야 말로 땅 짚고 헤엄치는 식의 장사였습니다.
(영란 은행 설립을 제안한 사람은 패터슨이지만, 3년 뒤 실제로 그 세부 사항을 고안한 사람은 여기 나오는 제1대 핼리팩스 백작인 찰스 몬태규(Charles Montagu)였습니다. 영란 은행 설립의 공을 인정받아 그는 영국 재무 장관이 됩니다.)
영국 정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정부는 영란 은행의 독점권을 계속 새로 갱신해 주었습니다. 당시는 끊임없는 전쟁의 시기였고, 전쟁에는 세금만으로는 감당되지 않는 많은 돈이 들어갔는데, 그런 돈을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빌리기 위해서는 영란 은행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맨 처음 설립된 중앙은행인 스웨덴의 리크스방크도 러시아와의 전쟁에 들어가는 군자금을 빌리기 위해 만들어진 은행이었고, 나폴레옹 전쟁 기간 전후에 세워진 여러 유럽 국가들의 중앙은행도 모두 전쟁 자금을 충당하거나 그로 인해 생긴 빚을 처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었습니다. 미국 최초의 중앙은행인 First Bank of the United States도 독립 전쟁으로 인한 빚을 처리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만들어졌던 것이지요. 이렇게 중앙은행의 기원은 정부가 민간으로부터 전쟁 자금을 안정적으로 빌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유럽 각국 중앙은행의 설립과 연관된 전쟁들입니다.)
영란 은행이 이렇게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다른 유럽 국가들은 이런 중앙은행 설립에 소극적이었습니다. 일부 자본가들에게만 돌아가는 이익이 너무 컸거든요. 당장 급하지 않으면 이런 민간 소유의 중앙은행을 둘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1789년 프랑스의 루이 16세는 당장의 한 푼이 급한 상황으로까지 몰리게 되었습니다. 주제넘게 미국 독립전쟁에 끼어든 대가였지요. 이때 프랑스의 재무관이던 자크 네케르(Jacques Necker)는 더 이상 국채를 발행하지 말고 세금을 늘리자는 방향으로 국가 재정 방침을 정합니다. 그래서 세금을 늘리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했고, 그 결과 프랑스 혁명이 발발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돈을 빌리느니 세금을 더 거두는 것이 좀 더 건전한 재정을 꾸려 나가는 방침 같습니다만, 상황이 엉뚱하게 튀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나폴레옹이 브뤼메르 쿠데타를 통해 제1통령이 되었을 때, 그가 처리해야 할 가장 시급한 일은 당시 한창 진행 중이던 2차 대프랑스 동맹전쟁이 아니라 오히려 국내 경제의 파탄 문제였습니다. 나폴레옹은 궁극적으로는 외국에 대한 침공과 약탈로 이 문제를 해결했지만, 그건 나중의 문제였고, 당장은 어디선가 돈을 빌려야 했습니다. 외국을 침공하기 위해 군대를 조직하려고 해도 당장 돈이 필요했으니까요. 결국 나폴레옹도 쿠데타를 일으킨 지 불과 2개월 만인 1800년 1월 18일 영란 은행을 모델로 한 중앙은행인 방크 드 프랑스(Banque de France)를 설립하게 됩니다.
(나폴레옹은 마렝고로 가는 길에 스위스에서 당시 은퇴한 상태였던 네케르를 만날 기회를 가집니다. 그러나 네케르에게서 별다른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사실 경제 문제에 있어서 참고할 만한 사례가 매우 풍부했습니다. 영란 은행이 가장 좋은 롤모델이었고,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사례도 많았습니다. 존 로의 방크 제네랄 사건도 있었고 지극히 최근의 아시냐 지폐 건도 있었지요(아시냐 지폐에 대해서는 '재정 적자, 아시냐 지폐, 그리고 나폴레옹' 편 참조). 프랑스 중앙은행이 성공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시냐 지폐로 인해 지폐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에 떨어진 프랑스 국민들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래도 결국 지폐를 발행하는 것 외에는 당장 돈을 만들 방법이 없었거든요. 나폴레옹이 생각하기에 그 신뢰성 회복을 위해서는 지폐 발행 주체가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기관이어야 했습니다. 결국 프랑스 중앙은행도 정부가 아닌 민간 소유로 이루어졌고, 자본금, 즉 정부가 빌릴 돈은 3,000만 프랑(약 3,720억 원)으로 정해졌습니다. 나폴레옹도 이 은행의 주요 출자자 중 한 명이었고, 나폴레옹은 자기 가족 및 부하들도 여기에 출자하도록 독려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대체 어디서 그런 큰 돈이 생겼을까요? 그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별로 없네요. 확실한 것은 이 은행이 약 1달 뒤인 2월 20일에 영업을 시작했을 때, 아직 그 출자금 전액이 다 입금된 것도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은행은 지폐를 발행하기 시작했지요. 아마 출자금을 납입하지 않은 멤버 중에 나폴레옹 본인이 포함되었지 않을까 싶습니다. 결국 나폴레옹은 그 와중에서도 정말 허공에서 돈을 버는 재주를 피운 것이지요.
프랑스 중앙은행이 처음부터 전국적인 독점권을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은행이 지폐를 발행할 권리를 독점하게 된 것은 3년 뒤인 1803년 4월 14일이었습니다. 또한 그 권리는 오직 파리 시내에서만 통용되는 것이었고 또 15년 한정이었지요. 게다가 이 지폐는 1848년까지는 법정 화폐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나폴레옹의 권위 덕택에 프랑스 중앙은행은 꽤 빨리 자리잡을 수 있었고, 계속 독점권을 연장받았지요. 나중에 나폴레옹이 퇴위하고 부르봉 왕가가 돌아온 이후에도 프랑스 중앙은행은 살아남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후 거듭된 혁명 속에서도 살아남았고, 1848년부터는 전국적으로 그 영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정변을 겪으면서도 살아남았다는 것이 프랑스 중앙은행의 기초를 놓은 나폴레옹의 우수성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유로화 이전의 프랑스 100프랑 지폐입니다. 나폴레옹은 지폐에 나올 자격이 충분하고도 남는다고 할 수 있지요.)
(미국 연방 준비은행과 1달러 지폐 뒤에 있는 수수께끼의 피라미드 문양입니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가 발생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도 세계 금융에 대해 이것저것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저도 리먼 사태 이후에야 미국의 중앙은행인 FRB(연방 준비 제도 이사회)가 공공 기관이 아니라 사유 회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어떻게 일국의 중앙은행이 국유가 아닌 사유 회사일 수가 있는 지 처음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중앙은행에 얽힌 이런 역사를 살펴보면서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는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세웠던 프랑스 중앙은행도 국유화된 것은 무려 1946년이 되어서였습니다. 그나마 1993년에는 유로화로의 전환을 준비하기 위해 다시 민영화되었지요. 이런저런 사정을 보면, 나폴레옹이 금융에 대해 했던 다음 말은 여전히 유효한 것 같습니다.
"자본에는 조국이 없고, 은행가들에게는 애국심도, 고결함도 없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이익뿐이다."
(1814년 연합군에게 패배한 뒤 퐁텐블로에 돌아온 나폴레옹의 모습입니다. 이 초상은 당연히 훗날 그린 상상화지요. 이때 나폴레옹은 과연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군에게 패한 걸까요? 영국의 돈에 패한 걸까요? 나폴레옹 본인의 생각은 후자였습니다.)
출처: Nasica님 블로그
첫댓글 역시 전쟁에서 돈의 중요하다는걸 알게 해준글이네요
전쟁에 필요한 것은 3가지이다
돈, 돈, 그리고 더 많은 돈
프리드리히가 돈에 전전긍긍하던걸 제대로 배운 나폴레옹 ㅎㅎ
...결극 시발놈의 전장땜에....자본이 노동을 누르고 돈에 허덕이는 삶을 사는거라고 하면 너무 비약인가...
손자가 이미 수천년전에 전쟁은 돈이라고.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