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진 않지만 어느새 나는 한국 분들과 대화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내 한국어 실력이 부족하지만 한국 분들이 '애교'로 어여삐 봐주는 것 아닌가 하며 변변찮은 실력을 변명으로 여기고 있다. 한국 분들은 내가 한국어로 말하려 하면 한결같이 '어떻게 한국어를 배우게 되었느냐'고 물어본다. 그에 대한 내 대답은 늘 정해져 있다. '조용필에게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2학년 철도에 흥미가 많았던 '철도소년'이었던 나는 친구들로부터 한국의 철도시각표를 받은 적이 있었다. 거기엔 눈에 익은 한자와 함께 기하학 모양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한글이 빼곡이 들어차 있었다. 단순한 호기심을 가지고 함께 쓰여져 있는 한자를 보며 지명을 한글로 써내려가다 무의식중에 한글의 합리적인 조합을 발견하게 되었다. 마침 그 해에 시작된 nhk 한글강좌를 통해 의미는 몰랐지만 한글 자체는 읽을 수 있게 되었는데 그 때만 해도 이후 점점 한국과 한국어에 심취되어 가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내가 더더욱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라디오 카세트 덕이었다. 그것은 단파 방송 수신이 가능한 것이었는데 우연히 주파수가 맞아 kbs의 국제방송 프로그램인 '라디오 한국'의 일본어 방송을 듣게 되었다. 인터넷 같은 건 상상도 할 수 없던 당시, kbs의 일본어 방송에 나는 몰두하게 되었다. 딱 그 무렵이었다. 한국의 '조용필'이 압도적인 인기로 kbs 일본어 방송 뿐 아니라 일본의 매스컴에서도 그 명성을 날리던 때가. 한국이라고 하면 일본 방송도 예외 없이 화제의 중심에 '서울 올림픽'과 '조용필'을 두던 때였다. 처음에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가수란 것만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만 어느 새인가 그의 매력 자체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kbs의 일본어 방송은 단파방송이어 음질도 좋지 못했지만 그의노래가 흘러 나올 때마다 카세트 테잎에 녹음하여 몇 번이나 반복하여 듣곤 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입학선물로 숙부님으로부터 받은 용돈으로 한국어 사전을 사고, 나아가 매달 용돈을 조금씩 모아 통신 판매를 통해 조용필의 앨범을 모으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샀던 7집의 가사의 뜻을 이해해보려고 사전을 들고 그것에만 몰두하느라 학교 공부가 뒷전으로 밀리기도 했었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그 날의 충격... 하교하여 집에 돌아왔을 때 내 앞으로 소포가 도착해 있었다. 서둘러 포장을 뜯어보니 통신 판매로 주문했던 1집에서 4집까지의 카세트 테잎이었다. 순서대로 1집부터 카세트에 넣고 플레이 버튼을 누른 뒤 교복을 벗으려는 순간, 나는 몸 속의 피가 거꾸로 역류하는 느낌을 받았다. <창밖의 여자>의 오리지널 버젼을 처음 듣는 순간이었다. 이때의 충격이야말로 한국이라는 나라와 한국어라는 이국의 언어를 단순한 관심의 대상에서 나의 인생을 좌우하는 것으로 바꾸고, 나로 하여금 지금까지도 계속 한국어를 공부하게 만든 이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로부터 그의 노래는 세월과 함께 잊혀저 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나의 마음 속에 깊이 각인되게 된 것이다. 조용필의 노래는 항상 나를 그의 나라 한국으로 유혹하였다. 대학 1학년 봄 방학, 마침내 나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혼자 여행이었던 내가 가장 먼저 발길을 향했던 곳은 '설악산'이었다. 사진과 영상에서 보던 운무가 걸쳐 있는 설악산의 권금성에서 바라보는 전망, 그리고 그가 혼을 다해 부르는 <한오백년>이 항상 머리 속에서 교차하며, 중학 시절부터 언젠가는 꼭 가보리라 했던 동경의 마음이 날 설악산으로 이끈 것이었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난 조용필의 락음악들을 매우 좋아하지만 <한오백년> <생명> <한강>과 같은 한국적인 명곡들을 통해 한명의 외국인으로서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키웠고, 나아가 그 안에서 일종의 서슬이 퍼런 대단함까지 느낄 수 있었다. 아니, 조용필의 노래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기쁠 때나 슬플 때, 즐거울 때나 외로울 때도 늘 내 인생과 함께였다. 2001년 겨울 예술의 전당 공연은 한국의 팬들에게 매우 감동적이었을 것이지만 내게 있어서도 실로 가슴을 울리는 공연이었다. 공연을 보는 동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넘쳐 흘러 멈추질 않았다. 다행히 부근에 앉아 있던 분들이 공연에 몰입하여 내 눈물을 눈치채진 못하는 것 같았다. <난 아니야>를 아이들이 노래하는 장면에서 최초의 눈물 한 방울이 맺혔다. <못찾겠다 꾀꼬리>에서는 나도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이 노래의 내용은 일본의 풍경과도 매우 비슷한 부분이 있다. 다른 점이라면 달이 뜨는 것이 한국에선 교회 지붕인 것에 비해 일본에선 절 지붕 위라는 것 정도일까? 어린 시절을 회상하니 곧바로 초등학생때부터 중학생이 되어 한국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한국어 공부를 시작하고, 조용필 노래와 만났던 그때가 떠오르고, '지금 이곳에서 그의 노래를 듣고 있는 내 자신이 있다'는 사실에 더욱 더 감정이 북받쳐 올라 그만 누선(淚腺)이 느슨해져 버린 것이었다. 확실히 '조용필'은 사춘기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내 추억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리고 <친구여>에서는 태어난 국가가 다름에도 그를 통해 알게 된 많은 친구들과 감동을 함께 맛 보고 있다는 사실이 더한 감동으로 밀려왔다. 나는 그의 노래의 매력이 언어의 벽을 초월하여, 기쁠 때는 기쁘게, 슬플 때는 슬프게, 즐거울 때는 즐겁게 그리고 외로울 때는 외롭게 온몸으로 부르는 표현력의 풍부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조용필의 노래에 매료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국 사람들과 한국어로 대화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9개월 정도 한국의 한 대학에서 어학 연수를 받은 경험도 있지만 조용필에 몰두했을 때 만큼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했던 기억도 없다. 주위 사람들에게 종종 '다음에는 어느 나라말을 공부할 거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그러나 또 다른 언어를 습득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난 원래 머리가 그다지 좋지 않기 때문이다(이렇게 말해 버리면 그뿐이겠지만). 그리고 지금의 내게 한국어 외의 다른 외국어 습득이 만만치 않고, 별 흥미도 생기지 않는 것은 낯선 이국의 언어를 배우게끔 만든, '조용필'에 필적할 만한 존재가 그 어느 곳에도 없기 때문이다. 야마구치 류우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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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외국에서 본 한국/국제
'한국을 알게 한 이름, 조용필' 야마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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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1.06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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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DNA는 알고 있다
예술의 힘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어와 사고방식이 다른 이에게 이처럼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수 있다는 것에 경의를 느낍니다. 더불어 한사람의 음악세게의 흐름을 따라여기가지 온사람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낯선 외국가수에 매료되어 그의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려는 자세는 참 배울 만한것 같군
요... 끝으로 한사람의 가수를 이리도 사랑을 할 수있군요
국경을 떠나서 이렇게 감동하는 것자체가 아름답게 사는 모습을 보는 것 같군요... 매우 충만된 삶을 누리는 것같아 부럽기도 하군요
좋은 글입니다.. 저도 조용필선생 존경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저두 80년 유치원생때부터 용필이오빠~~~를 좋아했었죠. 그래서 유치원때 첫사랑이 조용필 닮은 애였답니다 ㅋㅋㅋ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일본이라는 나라는 참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군요....이분처럼 한국과 일본 양국이 서로의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그런 시절이 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