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m.dcinside.com/board/napolitan/28546?page=2&recommend=1
작성자 이혁영
마을 한복판에는 으레 그렇듯 거대한 나무가 있었어.
나뭇가지처럼 보이는 부분들이 수많은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것만 빼면, 평범했지.
버들가지마냥 길게 늘어뜨린 그 손들은 끝도 없이 늘어졌어.
마을 사람들은 남녀노소 누구나 손을 하나씩 잡고 다니다가, 필요할 때 쓰곤 했지.
그럴 때 있잖아. 아, 손이 모자라! 싶을 때. 그때 빌려쓰는 거야.
손아귀에 비해 들어야 할 짐이 너무 많다든지 그럴 때만 유용한 건 아니지.
한 손으로 숟가락질, 한 손으로 젓가락질, 나무한테 끌어온 세 번째 손으로는 물컵을 잡고.
한 손으로 풀을 잡고, 한 손으로 호미질, 세 번째 손은 이마에 갖다대 손그늘을 만들고.
사람들은 그 손을 잘 쓰고 있었어.
사람들은 임무를 마친 손에 하이파이브를 하기도 하고, 악수를 하거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기도 했지.
근데 어느 날, 한 소년은, 손을 사용할 때마다 낮이 아주 미세하게 짧아진다는 걸 발견했어.
1초도 되지 않는 아주 작은 시간이지만, 확실히 낮은 짧아지고 있었어.
해는 낮아졌고, 그림자는 길어졌지.
어쩌면 나무가 자라난 탓일지도 몰라. 너무 거대해진 나무가 태양을 가려버린 거지.
어라, 손이 이렇게 길었던가, 나무가 여기까지 닿았던가?
나무는 분명히 자라나고 있었어.
마을 사람들은 알지 못할 정도로 서서히.
소년이 그것을 알아차린 계기는 간단해. 키를 재기 위해서, 손나무의 둥치 부근에 칼로 표시를 해왔거든.
칼로 그으면 수액이 흘러나와서 옷을 지저분하게 만들긴 했지만, 뭐 어때? 그 나이대 아이들은 옷을 버리는 게 일상인걸.
어쨌든 말이야, 어느 날의 일이야.
소년이 키를 표시한 지점이 어쩐지 소년의 머리 한참 위에 있던 거야.
소년의 키를 봐주던 이웃 어른이 웃음을 터뜨렸지.
하하하! 얼마나 빨리 크고 싶었던 거니? 거짓말하면 못 쓴다. 어서 제대로 다시 그으렴.
아니에요, 가짜로 표시한 게 아니에요. 나무가 자라서 그런가 보죠.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무는 사람과 달라서 가지의 끄트머리만 자란단다. 뿌리는 위로 자라지 않아. 그런데 어떻게 표시가 위로 올라갔단 말이니?
그렇담 뿌리가 위로 올라서 드러나기라도 했나 보죠.
아이,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라.
이웃 어른은 나무의 손 하나를 끌어다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어.
그렇게 소년의 의문은 시시하게 묵살된 거야.
소년이 보기에, 나무는 계속 자랐어.
소년의 키도 또래에 비해 꽤 빠르게 자라는 편이었지만 나무가 자라는 속도는 그보다 훨씬, 훨씬 빠른 것 같았지.
아니, 나무가 지상으로 올라오는 속도라고 해야 하나.
어느새 소년이 칼집을 내어 표기한 부분은 훌쩍 저 위로 올라가버렸어.
손을 빌려야만 칼집을 만질 수 있을 정도로.
재앙은 오래지 않아 다가왔어.
나무가 지표면으로 올라오는 데에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나 봐.
밤이었을까. 아니면 늦은 저녁이었을까.
뿌리 부근이 거의 다 드러나다시피 한 나무는, 마지막으로 힘을 모으는 듯 부들거리더니, 쾅 하고 한 번에 위로 솟았어.
뭐가 보였을까.
거기에 손바닥이 있었어. 뿌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거대한 손이 흙을 가르며 꿈틀거리고 있었어.
그것이 밖으로 나오려는 듯 지축을 뒤흔들며 요동쳤고, 곧 대지가 갈라지는 굉음과 함께 거대한 엄지손가락이 땅 밖으로 튀어나왔어.
거대한 엄지는 금이 간 지면을 짚은 채 부들거렸어.
뭔가를 꺼내려고 하듯이.
그러더니 뒤이어 검지, 중지, 약지, 소지가 모조리 튀어나오며 지층을 갈아엎었어.
흉폭하게 꿈틀거리는 손가락들은 그것들의 자유를 찾는 몸부림 중에 지표면에 있는 몇몇 가옥들과 지층 아래에 있는 모든 구조물을 파괴했어.
암반을 건드렸는지 우물에는 흙탕물이 차올랐고 저수지는 한순간에 하수처리장만 못하게 되어버렸지.
거대한 손가락마다 반지처럼 지붕들이 꿰여 있었어.
벌어진 지층의 틈새로부터는 지상의 그 누구도 들어보지 못한 지하 생물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어.
많은 사람들이 대지의 균열 아래로 떨어져 절명했어.
외롭진 않았을 거야, 집채 그대로 추락했으니 적어도 함께 살던 가족들과 떨어질 일은 없지.
운좋게 살아남은 사람들은 대부분 거대한 손가락 끝에 짓이겨져 죽어버리고 말았어.
개중에서도 운이 좋았던 극소수의 사람들은 마을 입구까지 도달하는 데에 성공했지. 발이 무지하게 빠른 사람들이었어.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온전히 마을을 벗어나지 못했지.
그들의 손 때문이었어.
빌린 손을 얘기하는 게 아냐.
네 손, 몸뚱이에 달린 두 개의 손. 그 손들만은 떠나기를 거부했어.
손은 나무의 손들과 멋대로 깍지를 끼고 얽히고설켜 몸뚱이를 가둬놓았지.
팔을 자른다는 생각을 한 사람이 있었을까? 잘 모르겠지만, 실행에 옮기진 못했을 거야. 칼이나 톱을 쓰려면 손이 필요하거든.
사람이 손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었는지 알면 놀랄걸.
거미줄 같은 손들에 묶인 사람들은 나무에게 잡혀 허망하게 최후를 맞이했어.
그 중에는 소년도 있었지.
소년을 손으로 묶은 나무는 길게 늘어진 손들을 양옆으로 젖혔어.
그러자 소년은 손들 아래에 숨겨져 있던, 여태까지는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나무의 기괴하게 뒤틀린 거대한 입을 마주하게 되었지.
줄기에 직접 연결된 그 구멍은 입이라기보다는 식도에 가까웠어.
부식성 액체로 가득한 그곳에 손들이 달려들어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쑤셔넣었어.
소년도 불쌍한 희생자들 중 하나에 불과했고.
사람들은 끝없이 밀어넣어졌어. 소년은 손에게 붙잡힌 사람들의 무게를 이길 수 없었고, 그대로 나무의 입 안으로 추락했어.
그러는 동안에도 나무는 새로운 희생자를 찾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지. 이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났어.
나무가 소년의 어머니를 꿰뚫어 소년의 아버지와 함께 입에 밀어넣고 있을 때, 나무의 머리 부분에서 무언가 자라났어.
손이야, 손.
소년의 앳되고 작은 손.
손들이 봉우리를 틔우고 있었어.
곧 가느다랗고 긴 손목은 나무의 가장 높은 꼭대기에서 흔들렸지.
나무는 언젠가 멈추겠지만, 그때도 소년의 하얀 손과 손목은 나무 맨 위에서 만족스럽게 인사하게 될 거야.
그 바로 아래에는 가족들의 손들이 있겠지.
뭐, 너무 자주 빌리지는 마.
첫댓글 오... 우와...오....
와.... 이런 글은 또 처음이야....
와 어떻게 이런 상상을..
식물을소중히? 흥미롭다
우와 ... 너무 잘썼어 ..
손이 부족해서 리필했나보네..
헐....그럼 처음에 빌린 손들도 사실은.....
와 손을 빌린다는걸 이렇게 표현하다니 기발하다
어우..
사람을 샴푸리필하듯이
헐
오우 특이하다....
상상력 대단한데~~~~~
적이요 빌리는건 암묵적 합의된 사항이고 사람먹는건 합의 안됐잔아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