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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호치민을 향하며
베트남을 향하려니 문득 4년 전 패키지여행으로 하노이와 하롱베이를 찾았을 때 같이 간 한 분이 떠오른다. 우연히 만난 그지만 알고 보니 그는 나하고도 연관이 있는 펌프업체 사장님이셨다. 특수성을 요하는 그가 만든 내산성 펌프제품이 내 근무처에 설치되어 있다. 그런 그는 과거 월남전에 참전한 용사였다. 베트남에 대해 그는 내가 갖는 상념과는 사뭇 달랐다. 아마 그럴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맹호부대 전사로 푸캇하고 뀌년(퀴논)에 있었다는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가이드에게 물어보았다. “우리나라에 대해 적개심은 없나요? 뀌년을 다시 가보고 싶은데 괜찮은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지금도 진중하게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그는 우리나라 6,70년대를 대변하는 상징 적 인물이다.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처지로 전쟁에 나가 돈을 벌고 열심히 일하여 자수성가를 해 말 그대로 지금은 반반한 사업체를 거느린 나름 출세를 한 중소기업체 사장님, 하지만 그는 안타깝게도 가해자로서 전쟁의 상흔을 그대로 지니고 사는 신세다. 돌이켜보는 과거가 지금에 이르러서는 결코 유쾌할 수만은 없다. 자칫하면 그 시대의 산 경험이 처절한 자기 부정으로 잔재되어 아픔으로 남을 수 있다. 인간애 적 고뇌가 스멀스멀 찾아드는 늘그막의 측은한 회상, 이는 그의 성숙한 인간됨을 달리 말한다싶기도 하다.
전쟁은 큰 희생이 따른다. 단지 국가로서 뿐이 아니다. 희생에 따른 남모를 정신적 상실감 내지 당시로선 예기치 않았던 상식은 피해의식과 실로 엄청난 후유증을 낳았다. 어디 후유증이라는 게 다리 절단이나 고엽제 후유증을 앓다가 사망한 희생자와 피해에 국한될 것인가. 아무튼 나는 지금의 우리를 이루도록 헌신한 그들이 자랑스럽기도 하지만 마음 한 구석 베트남에 대해 미안함도 따라 갖는다.
이번 여행은 배낭여행이다. 근무처 선배들과의 저녁 놀 모임이 있는데 그 모임에 한 분이 지금 달랏이라는 곳에 계시다. 달랏에는 연구용원자로가 하나 있는데 그로 내 근무처와 자매결연 협약을 맺고 친하게 지내왔다. 2년 전인가는 우리 근무처에 축구팀이 친선축구 원정 차 곳을 다녀오기도 했다. 사실 너무 오래된 원자로이기에 새로 지을 원자로를 원자력 선진국인 우리가 차지할 흑심이 작용 안 한 것은 아니다. 일본도 부지런히 그들을 찾은 것은 그런 연유가 있다.
아무튼 그 바람에 석수동 박사님(이하 S교수 내지는 박사로 칭함)은 과거 달랏 대학교에서 무료특강을 하였었고 이를 계기로 퇴직을 하자 그쪽에서 청을 해 잘은 모르지만 한국 국제 협력 단 해외봉사단(KOICA)의 한 일환으로서 2년간 곳에 나가있기로 한 것이다. 그러니까 교수 급료는 그들이 주는 것이 아니라 KOICA에서 주는 방식일 것인데 자원봉사인 만큼 큰돈일 수는 없다. 나는 그가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 없고 부럽기 그지없다. 일찍이 미국서 배운 학문을 모국에 쏟아내고 남은 열정을 자원봉사로 베트남에서 보내는 그에게는 ‘이바지하다’라는 말이 온전히 들어맞는다 싶다.
그런 그는 건조기 때인 2월쯤 한 번 놀러들 오라는 말을 했었다. 그로 서둘러 우리는 여장을 꾸렸다. 이번여행은 지난 번 중국 심양여행을 같이 한 두 분(이 박사(L박사로 칭함)/도 박사(D박사로 칭함)이 사모님을 모시고 가기로 하고 나와 김 이사님(K이사) 이라 하는 분하고 박 박사님(P박사라 칭함)이 같이 동행을 하기로 해 도합 7명이 한 팀이 된 배낭여행이다. 우리는 지난 해 12월쯤 비행기 표 예약을 미리 해두었었다. 한 푼이라도 덜 들이자는 것이지만 딱 당해서 이번 여행 포기하겠다는 헛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는 방비책도 곁들여진 것이다.
우리는 호치민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그 다음날 달랏으로 비행기를 타고 가 이틀을 묵은 후 차를 대절해 나트랑(나짱)으로 가서 남은 하룻밤을 채우며 놀다가 다시 호치민으로 돌아와서 인천공항으로 오는 4박5일로 잡았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언어다. 어느 누구도 베트남어를 할 줄 모른다. S박사님이 달랏에서는 안내를 해주겠지만 여타 여정에서는 전혀 도움을 받을 수는 없다. 차라리 혼밥, 혼술(혼자 먹는 밥과 술)을 하는 여행이라면 실수도 자기 차지니 부담은 덜할 것인데 7명이 움직이는 배낭여행은 간단하지만은 않다.
그러기에 애초 호텔을 잡을 때 비록 별 셋이지만 관광지 근처로 잡기는 잡았다. 덜 이동하고 덜 헷갈리고 시간절약도 하자는 속셈이었다. 그런데 여정을 꾸리는 중 일이 잘 풀리려는지 마침 호치민시에 사는 D박사님 친구 분이 호치민시 안내는 해주겠다고 선뜻 나서 한 시름 덜기는 덜었다. 그래도 불안타 싶어 일행은 맛 집과 볼거리 등등 책임제로 할당을 했다. 나는 우리를 안내해줄 D박사 친구 분과 S 박사님에게 줄 고추장 된장 그리고 깻잎 등등을 챙겼다. 아무리 자원이 풍부한 베트남이라지만 고향의 된장과 고추장만 할까 싶어서다.
한 짐이 되는 무게감이지만 나는 행복했다. 여행은 말 그대로 행복을 찾는 길이다. 그간 잠재한 나의 어느 마음 한 구석 가상함이 뒤따른다면 더할 것이 없는 터다. 일상의 찌든 때 같은 아쉬움과 지루함을 벗어난 자유, 일탈하여 다시 생기를 찾겠다는 희망 찬 마당에선 배려와 너그러움보다 더한 달달한 맛은 없다. 한국 진생캔디라며 주는 인삼 맛의 향기를 뭇 외지인들은 순도 높은 미소와 웃음으로 내게 되돌려 주곤 했다. 오히려 이는 그가 채워준 기쁨이다. 작은 미소가 전하는 동질감, 행복은 바로 마음에서부터 가까이 존재한다. 나는 그 흡족함으로 인삼사탕 같은 정서를 알알이 챙기며 외지에서 맞는 낯선 풍광과 생경한 맛을 달콤하게 때로는 오묘한 전설로 되새기며 일상으로 돌아오곤 했었다. 이번에도 나는 행복 캔디를 챙겼다.
나는 하노이와 하롱베이를 두 번 다녀왔다. 한 번은 어머니를 모시고 효도관광 차 갔었고 또 한 번은 앙코르 와트가 너무 마음에 들어 다시 찾는 길에 잠시 들렸었다. 당시 하롱베이에서는 ‘다금바리’라는 우리나라에서 아주 비싸게 치는 생선회를 먹을 수 있었는데 나는 먹지를 못했다. 우리 돈으로 쳐 5만원이면 먹는 그 회를 콜레라가 겁이나 나는 거절하고 말았다. 그 때 경험으로는 달러도 사용이 가능하지만 환전 손해가 꽤 많았다.
베트남 돈이 즉석에서 이것저것 내키는 갈증대로 쓰니 좋기는 한데 문제는 나중 돌아올 때 거의 쓸 모가 없다는 데 있다. 아무튼 우리나라 시중 웬만한 곳에서는 베트남 돈 환전이 안 된다. 지난 번 여행길에 과거 외환은행이었던 곳에까지 가서 겨우 바꿨었는데 그 때 남겨둔 베트남 돈을 다시 챙겨 넣었다. 무려 2백2십 만동, 얼핏 많은 돈 같지만 베트남 돈 만동은 우리 돈으로 쳐 5백 원에 해당되니 웬만큼 바꾸면 엄청나게 큰돈으로 느껴지는 베트남 돈이다.
드디어 2월9일 나의 행복 찾기는 시작됐다. 글에 지치다 보면 가끔은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생각이 불쑥 들곤 하는데 나로선 모처럼 비상구를 찾은 셈이다. 전 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이 나이에도 설레는 기분은 어찌 감당이 안 된다. 새벽5시 40분 대전서 출발한 버스는 공항을 향해 달린다. 공항에 도착하니 7시45분, 이른 시각이지만 인천공항은 초만원이다. 먹고살기 힘들다 하더니만 다 거짓말 같다. 연휴가 낀 것도 아닌데 어디고 빈틈이 없다. 베트남 항공 줄에도 골프가방에 화려한 치장을 한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가방을 부치기에 앞서서 우리는 입고 온 겨울외투 부터 정리를 했다. 이곳은 영하 10도를 넘나드는 추위인데 호치민은 영상 33도라 하니 옷이 애매해진다. 나는 신발만 샌들로 갈아 신었다. 갈아 신고 보니 꼴이 우습다. 위는 겨울철 아래는 한 여름.
지구의 오묘함은 바로 이런 경우 느끼는 게 아닐까. 싱가포르 여행을 갈 때였다. 한 겨울이라 옷이 한 가방을 다 차지했었다. 교대로 화장실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섰는데 비단 우리만 그러는 게 아니었다. 난생처음 추운 나라에 와 봤다하며 비싸게 샀다는 겨울옷을 싱가포르 사람들은 신주단지 모시듯 들고 다녔다. 그들은 평생 눈 구경이 소원이라 평창에 스키교실을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중국 사람들이 제주도를 선호하는 데는 내륙 깊숙이 사는 사람들의 바다에 대한 동경심에서 비롯한다. 그들은 내륙 호수 이름을 바다 이름을 따서 부쳐놓았다.
가보지 못하는 곳은 누구든 흠모의 대상이 된다. 그렇다고 한국 사람이 적도를 그리워하거나 북극을 동경하지는 않는다. 다녀보고 비로소 느끼는 금수강산 우리나라의 아름다움이 아닌가. 만약 우리나라에 산이 없었다면 위도 상 별 차이 없는 북경처럼 한 여름에는 푹푹 찌고 한겨울에는 거칠게 불어온 바람을 사납게 맞이해야 할 것이다. 자연 필터링을 해 내려오는 계곡물, 무료에 가깝게 제공되는 식수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물 값을 받는 식당을 나는 우리나라에서 본 적이 없다.
우리는 짐을 부치고 집에서 들고 온 빵하고 삶은 달걀로 간단히 요기를 했다. 꼭두새벽에 나왔는데 찐 달걀이라니, 이를 준비한 사람 역시 들뜬 마음임에 틀림이 없다. 어릴 적 삶은 달걀로 대변하던 소풍길이 떠올랐는지 소년 티 그대로 모두 환하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이 세상 인천공항만한 곳도 없다. 수속도 빠르고 일 처리가 그만 아니던가. 벌써 수년 째 공항서비스 세계 1위로 알려진 인천공항이다. 올해부터는 입국장의 외국으로 출국할 때 만 19세 이상 한국인은 얼굴 사진과 지문을 사전 등록을 하지 않아도 인천공항에서 자동출입국심사를 바로 이용할 수가 있다.
우리가 자동출입국심사대 이용을 하면 심사관 대배치가 가능해져 그만큼 외국인들에게 보다 빠르고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 더 편리한 인천공항이 될 것이다. 그런데 만 19세 이상이라는 데 단서가 있다. 이는 바로 주민등록증하고 상관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경찰청에 있는 지문 인식기능을 공항에 옮겨와 편리함을 갖춘다는 그런 구조로써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로직을 구비한 나라가 지구상에는 몇이 안 될 것이다. 아직 주민등록증도 없는 나라가 숫한 마당에 인터넷 강국으로서 우리의 위상을 제대로 알만하지 않은가.
비행까지 남은 한 시간, 대개 한국 사람들은 여기서 면세 상품을 다 산다. 우리가 선호하는 물건은 우리나라에 모두 있다. 비행기 선물 가이드 책자는 우리가 늘 흥미롭게 생각하는 위주로 짜여 있다. 우리가 아끼는 고급 양주의 경우 다른 나라 비행기에서는 소개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비싼 양주가 선호대상이 아니다. 화장품도 마찬가지다. 기내에서 예약을 하면 돌아올 때 들고 올 수가 있어 편하기도 하다. 면세점에서 나는 우왕좌왕 하지 않는다. 자연스런 안내자가 있다. 아줌마들이 우르르 몰린 곳에 가면 다 해결이 된다.
나는 엄마 선물을 사기로 했다. 물어보지 않아도 잘 아는 엄마 선물이다. 우리 집안 식구들이라면 모두 다 아는 상식 같은 선물, 엘리자베스 아덴이라는 화장품. 동생도 매제도 어김없이 이 화장품을 들고 들어온다. 그 제품이 들어선 위치를 보아도 그렇고 상점 크기를 보아도 그 세계에서는 그다지 우의를 점하지는 않는 것 같은데 엄마는 그 제품만을 찾는다. 과거 어느 때 어렵게 얻은 미제 화장품에 현혹된 것이 길고 길게 자리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 아닌가 싶다. 엘리자베스 아덴은 테일러 스위프트, 브리트니 스피어스,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 연예인 이름을 딴 향수로 유명하였었다.
하지만 실적 악화로 2년간 4억 달러에 가까운 적자를 냈고 얼마 전 LG생활건강이 인수를 검토했으나 인수 추진을 중단했으며 미국 메이크업 전문 업체인 레브론에 넘어갔다. 나 어릴 적 미제는 무엇이든 알아주었다. 어렴풋이 엘리자베스를 말하던 엄마가 생각나는 것도 같다. 어느 면 인간은 상념을 먹고 산다. 질보다 이득보다 더 소중할 때가 있다. 필시 엄마도 젊은 시절에 갖던 어느 향수 이를테면 귀하게 얻은 가치로서나 아니면 그 향수 괜찮은데 하는 아버지의 따스한 말 한마디에 지금에도 여전히 엘리자베스를 찾는지 모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설령 편견이라 해도 인간이 갖는 달콤한 향수는 상념에 연하고 추억이 또 큰 자리가 아닌가 싶다. 비행기가 고도 13킬로 선상에 올라섰다. 100미터마다 0.6도씩 떨어진다는 지론이 아니더라도 이 위치는 아마 엄청 추울 것이다. 영하 40도, 철저히 단열이 된 비행체지만 그래도 조금은 춥다. 시속 800킬로 이상으로 가다가 도착 40분 전 정도쯤 고도를 3킬로 정도로 낮춰 그때부터 하강준비를 한다. 비행시간 5시간 5분, 아마 돌아올 때는 4시간 정도 걸릴 것이다. 지구 자전과 우리가 동쪽으로 향하는 속도가 맞물려 짧아지는 시간이다.
5시간 만에 거리로서 높이로서 온도 50도를 넘나들고 비행체 하나로 지구 자전도 느끼며 또는 IT 신기술의 복합으로 자동출입국 심사를 말하는 이런 스킬을 상식처럼 느끼는 게 나로서는 어느 면 참 희한한 것이다. ‘떴다 떴다 비행기 날아라.’를 외치며 하늘을 신기한 듯 쳐다보던 그 이래 문명인으로서 그렇게 적응하고 적용하며 지금껏 잘 살아왔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와이파이 사용법을 얼마 전 터득했으니 남 하는 만큼 요즘 것도 제대로 잘하고도 있다싶다. 하지만 여행은 다르다. 그 맛으로 말할 것이 아니다. 문명은 어디까지나 혜택 많은 도구나 수단일 뿐이다.
정작 여행에서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은 어느 갖고 싶은 또는 잊고 지워진 상념을 다시 찾는 것이 아닐까. 어찌 살고 어떠한 의식으로 오늘을 이해하는 것인지 가서 그들을 보고 느끼는 것이 소중하다 싶다. 나와 다르기 때문 느껴지는 문화이고 삶의 상대성이다. 문화란 바로 이질감 속에서 싹트는 찬란한 빛이 아닌가. 삶의 우열, 문명의 척도로서의 가치판단은 정말 쓸데없는 짓이란 생각이 든다. 못사는 나라라고 업신여기고 골프를 치는 여유로서 상대를 쉽게 파악하려드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개중에는 있다.
엄마의 화장품 엘리자베스 아덴이 45불이라는 제품 가치를 떠나 이제는 어느 상념으로서 따스하게 내게 작용하듯 필시 여행은 이질감으로 색다르게 내게 자리할 어느 상념이 아닐까. 이를테면 그들의 울고 웃는 모습 속에 담긴 정서와 꿈 그리고 사랑이 내게 반영되고 동화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싶다. 그만큼 삶의 폭도 넓어진 격도 되는 것이다. 기내 음식이 제법 괜찮았다. 서비스도 그만이었다. 달콤한 레드와인에 반해 혹시 달랏에 유명하다는 와인이 아닌가 싶어 승무원을 찾아갔더니 아쉽게 와인은 프랑스산이었다. 베트남 산을 찾는 내 눈치를 챘는지 승무원이 베트남 산이라고 발포 형 상큼한 화이트 와인을 한 병 통째로 주었다. 순간 베트남이 내게 상큼하게 다가오는 듯싶었다. 어느 참 기체는 순식간 지면에 안착하였다. 나는 랜딩하는 부드러움 정도로 어디를 가든 꼭 기장의 점수를 매기는데 와인 덕분인지 나도 모르게 엄지 척 올라간다. 그렇게 나는 호치민에 살갑게 닿았다. 지구 서편으로 향하였기에 오후 1시 반, 우리시각으로는 3시 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