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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韓國)의 영토(領土), 「方可四千里」 란 뜻은?
[마한(馬韓), 평안도(平安道) 하늘(天) 아래 있었다]
2024년 05월 11일
○ 「마한(馬韓)」은, 「세 개의 한(韓)나라로 이루어졌던 한국(韓國) 곧 삼한(三韓) 중의 우두머리로 변한(弁韓: 卞韓)과 진한(辰韓: 秦韓)의 왕(王)까지도 마한(馬韓)인에서 임명(任命)할 정도(程度)로 막강(莫强)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하였다.
삼한(三韓)에 대해서는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편에서 가장 세밀(細密)하게 기록(記錄)해 놓고 있으며,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이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반도왕조(半島王朝)다”라고 주장(主張)하며 그 근거(根據) 곧 논거(論據)로 들이밀고 있는 사서(史書) 중의 하나다.」
정말로, 진실(眞實)로 “위지(魏志)”에서 기록(記錄)하고 있는 원문(原文) 내용(內容)에 『반도(半島) 조선왕조(朝鮮王朝)【총칭(總稱)】』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일까?
결론적(結論的)인 답(答)이지만 :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거짓말이다. 어디에도 옛 조선왕조(朝鮮王朝)가 오늘날의 반도(半島) 땅에 있었다는 그 어떤 정황(情況)이나 흔적(痕迹)조차 찾을 수 없다.」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인 식민사학자(植民史學者)들! “그들 맘대로 그렇다”라고 하는 것일 뿐이다.
➠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한(韓)」【필자(筆者) 주(注) : 원문(原文)의 번역(飜譯)은, 독자(讀者)들 누구라도 보면 충분(充分)히 이해(理解)할 수 있도록 ‘한문(漢文)과 한글’을 함께 사용(使用)하고, 지형지세(地形地勢), 거리(距離), 방향(方向) 등 역시(亦是) 쉽게 알 수 있도록 상세(詳細)하게 설명(說明)하였다】
「三國志, 魏志, 韓」 / 韓 :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為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者, 古之辰國也. :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南)쪽에 있는데, 동(東)쪽과 서(西)쪽으로는 바다(海)를 한계(限界)로 한다. 남(南)쪽은 왜(倭)와 접(接)해 있으며, 사방(四方) 사천(四千)리이다. 세 종류(種類)가 있다. 하나는 마한(馬韓)이고, 둘은 진한(辰韓)이고, 셋은 변한(弁韓)인데, 진한(辰韓)은 옛 진국(辰國)이다〉라고 하였다.
➊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南)쪽에 있다〉 : 대방(帶方)이 어디냐? 왜(倭)를 지칭할 때 “대방(帶方)으로부터 1만(萬) 2 천리(千里)”를 기록해 놓고 있다.
우선적(優先的)으로 열도(列島)와는 전혀 관계(關係)가 없다. 역설적(逆說的)으로 12,000리를 찾으면 : “대방(帶方)”은 평양(平壤) 근교(近郊) 남(南)쪽에 있어야 하며, 평양(平壤)이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로부터 이동(移動), 신강(新疆)의 북부(北部)로, 또 동진(東進)하는 과정(過程)을 보면, 대방(帶方)은 후한(後漢)과 삼국(三國) 때의 평양(平壤) 근교(近郊) 남(南)쪽 지대(地帶)여야 한다.
“한(韓)”은, 「고구려(高駒驪)•백제(百濟)•신라(新羅)’ 이전(以前)의 국가(國家)로,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로부터 대륙(大陸)까지에 걸쳐 드넓은 땅에 있었다」라고 보아야 그 조건(條件)을 충족시킬 수 있다.
➋ 〈동(東)쪽과 서(西)쪽은 바다(海)로 한계(限界) 한다〉: 그렇다면 「“남(南)쪽은 바다(海)가 아닌, 뭍(陸地)이었다”」라는 뜻이다. “한반도(韓半島) 땅과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땅이다”라는 것은, 삼척동자【三尺童子 : 키가 3척도 되지 않는 철모르는 어린아이를 뜻하는 말이다】도 다 알 수 있는 것이다.
➌ 〈남(南)쪽은 왜(倭)와 접(接)해 있다〉 : 즉(卽) “➋”의 글에서 설명(說明)한 바와 같이 “동(東)쪽과 서(西)쪽만이 바다(海)”이고, 「남(南)쪽은 왜(倭)와 접해 있으니, 곧 육지(陸地)로 서로 연이어져 있었다」라는 뜻이 된다.
이런 ‘지형지세(地形地勢)’를 가진 곳이 ‘한반도(韓半島)’가 될 수 없음은, 한반도(韓半島) 땅 자체(自體)가 반도(半島)라고 부르는, 삼면(三面)이 바다에 막혀있는 특색(特色), 특징(特徵)을 말하는 것이니만큼 : 「한반도(韓半島)와는 털끝만큼도 관계(關係)가 없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倭)”는 “한(韓)”의 남(南)쪽 땅에 살면서 그 땅이 상접(相接)하고 있었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記錄)은 ‘왜(倭)와 한(韓)’ 모두 가 “반도(半島)”와는 전혀 관계없는 대륙(大陸)의 광활(廣闊)한 땅에 있었다는 증거(證據)다.
“한(韓)”을 “반도(半島)에 있었다”라고 한다면 : “왜(倭)는 존재(存在)하지 않았다”라는 말과 같다.
➍ 〈사방(四方) 4 천리(千里)이다【方 可 四 千 里】〉라고 하였는데 : “方” : 사방(四方)을 뜻하는 말로, 동서남북(東西南北)을 일컫는다. 인용(引用) 예(例)를 보면 : 「사방(四方)이 산(山)으로 둘러싸여 있다. 또는 사방(四方)이 고요하다」라는 인용문(引用文)에서 알 수 있듯이 “동서남북(東西南北)”의 네 방향을 모두 일컫는 말이다.
여기서 “방가(方可)” : “사방(四方)이 ∼가히 또는 쯤 또는 옳다” 등으로 쓰이니, 「가히 사방(四方) 4 천리(千里)이다. 또는 사방(四方) 4 천리(千里)쯤 된다」라고 번역(飜譯)하면 올바른 것이다.
「1 천리(千里)는 400㎞요, 4 천리(千里)면 1,600㎞요, 사방(四方) 4 천리(千里)라면 : 1,600㎞×1,600㎞= 「2,560,000㎢」【면적(面積), 평방킬로미터】가 되는데, 이는,
⒜ 남한(南韓) 100,000㎢의 25.6배(倍)가 되는 땅이요,
⒝ 한반도(韓半島) 220,000㎢의 11.6배(倍) 되는 땅이며,
⒞ 〈한반도[韓半島, 220,000㎢]+요녕성[遼寧省, 146,000㎢]+길림성[吉林省, 187,400㎢]+흑룡강성[黑龍江省, 473,000㎢]+하북성[河北省, 188,000㎢]+산서성[山西省, 157,000㎢]+산동성[山東省, 156,700㎢]+하남성[河南省, 167,000㎢]+섬서성[陝西省, 205,800㎢]+안휘성[安徽省, 139,400㎢]+호북성[湖北省, 185,900㎢]+강소성[江蘇省, 102,600㎢]+ 강서성[江西省, 166,900㎢] = “2,495,700㎢”〉를 합친 것보다도 더 큰 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 현(現) 중국(中國)의 총면적(總面積) : 「9,596,960㎢」의 27%로 「중원(中原) 요충지(要衝地) 모두의 땅이 바로 한(韓)의 땅이었다」라는 것이 된다.
➠➠➠ 「한(韓)은, 사방(四方) 4 천리(千里)」라는 말은, 「‘구려(句驪)=구려(駒驪)’, 부여(夫餘), 예(濊), ‘맥(貊)=맥(貉)’ 등의 또 다른 조선왕조(朝鮮王朝)들은 포함(包含)되지 않은 것이다.」
「구려(句驪, 駒驪), 부여(夫餘), 예(濊), 맥(貊, 貉), 한(馯, 韓)」 등의 토착지(土着地)는 : 〈지중해(地中海) 동안(東岸)으로부터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중원대륙(中原大陸) 모두의 땅을, 구이(九夷)들이 터전으로 삼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한(馯)이 곧 한(韓)”이라고 하였다.
이들 모두는, 『지중해(地中海) 동안(東岸)으로부터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오늘날의 대륙(大陸) 땅에 드넓게 분포(分包)되어 토착(土着)하였다」라는 설명(說明)이 가장 올바른 것이다.
➨ 위에서 언급(言及)한 “한(韓)”의 땅은, 「“한반도(韓半島)+요녕성(遼寧省)+길림성(吉林省)+흑룡강성(黑龍江省)+하북성(河北省)+산서성(山西省)+산동성(山東省)+하남성(河南省)+섬서성(陝西省)+안휘성(安徽省)+호북성(湖北省)+강소성(江蘇省)+ 강서성(江西省) = 2,495,700㎢”」를 합(合)친 것보다도 ‘더 큰 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위의 지도에서 각각의 성(省)을 보면서 ‘한(韓)’의 영토(領土)를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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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馬韓在西, 其民土著, 種植, 知蠶桑, 作綿布. 各有長帥, 大者自名為臣智, 其次為邑借,散在山海間, 無城郭. : 마한(馬韓)은 서(西)쪽에 있는데, 그 인민(人民)들은 대대로 그 땅에서 살며(土着), 씨를 뿌리고, 잠상(蠶桑)을 알고, 면포(綿布)를 짓는다. 각각 우두머리(將帥)가 있는데, 큰 자는 스스로 신지(臣智)라 이름하고, 그다음은 읍차(邑借)라 하며, 산해(山海) 간에 흩어져 있는데, 성곽(城郭)은 없다. 「有爰襄國•牟水國•桑外國•小石索國•大石索國•優休牟涿國•臣濆沽國•伯濟國•速盧不斯國•日華國•古誕者國•古離國•怒藍國•月支國•咨離牟盧國•素謂乾國•古爰國•莫盧國•卑離國•占離卑國•臣釁國•支侵國•狗盧國•卑彌國•監奚卑離國•古蒲國•致利鞠國•冉路國•兒林國•駟盧國•內卑離國•感奚國•萬盧國•辟卑離國•臼斯烏旦國•一離國•不彌國•支半國•狗素國•捷盧國•牟盧卑離國•臣蘇塗國•莫盧國•古臘國•臨素半國•臣雲新國•如來卑離國•楚山塗卑離國•一難國•狗奚國•不雲國•不斯濆邪國•爰池國•乾馬國•楚離國 凡五十餘國. : 원양국(爰襄國)•모수국(牟水國)•상외국(桑外國)•소석색국(小石索國)•대석색국(大石索國)•우휴모탁국(優休牟涿國)•신분고국(臣濆沽國)•백제국(伯濟國)•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일화국(日華國)•고탄자국(古誕者國)•고리국(高離國)•노람국(怒藍國)•월지국(月支國)•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소위건국(素謂乾國)•고원국(古爰國)•막로국(莫盧國)•비리국(卑離國)•점리비국(占離卑國)•신흔국(臣釁國)•지침국(支侵國)•구로국(狗盧國)•비미국(卑彌國)•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고포국(古蒲國)•치리국국(致利鞠國)•염로국(冉路國)•아림국(兒林國)•사로국(駟盧國)•내비리국(內卑離國)•감해국(感奚國)•만로국(萬盧國)•벽비리국(辟卑離國)•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일리국(一離國)•불미국(不彌國)•지반국(支半國)•구소국(狗素國)•첩로국(捷盧國)•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신소도국(臣蘇塗國)•막로국(莫盧國•고랍국(古臘國)•임소반국(臨素半國)•신운신국(臣雲新國)•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일난국(一難國)•구해국(狗奚國)•불운국(不雲國)•불사분사국(不斯濆邪國)•원지국(爰池國)•건마국(乾馬國)•초리국(楚離國) 등 무릇 오십(五十)여 나라가 있다.」 辰王治月支國. : 진왕(辰王)【마한(馬韓) 왕(王)】은 월지국(月支國)에서 다스렸다〉라고 하였다.
➊ 「월지국(月支國)」은 「월씨국(月氏國)」을 말하는 것으로 장안(長安)으로부터 12,000리(里) 또는 11,600리(里)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월지국(月支國)을 목지국(目支國)이라고 하는 자(者)들은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들인 식민사학자(植民史學者)【매국노(賣國奴)+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들이다.
「마한(馬韓)이 평안도(平安道) 땅」이라면 “천안(天安) 땅에 있었다는 목지국(目支國)은 또 평양(平壤) 땅으로 이동(移動)되어야 할까?” 이제 식민사학자(植民史學者)【매국노(賣國奴)+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들은, 무덤(墓地)으로 들어가기 위해 입관(入棺) 절차(節次)를 밟아야 한다.
➠ 월지국(月支國) / [佛學大辭典] : 〈月支[地名]又作月氏。國名。在印度之西。史記大宛列傳曰:月氏在大宛西可二三千里,其南則大夏,西則安息,北則康居也[大宛去長安萬二千五百五十里。月氏在天竺北可七千里] 漢書西域傳上曰:大月氏國,治監氏城,去長安萬一千六里。玄應音義四曰:月支國,薄佉羅國應是也,在雪山之西北也,或雲月氏。雜寶藏經七曰:月氏國有王,名栴檀罽尼吒,聞罽賓國尊者阿羅漢字祇夜多有大稱名,思欲相見,即自躬駕,與諸臣從,往造彼國。原語Kuṣana〉
前漢書, 大月氏國 / 西域 : 〈大月氏國, 治監氏城, 去長安萬一千六百里. 東至都護治所四千七百四十里, 西至安息四十九日行, 南與罽賓接, 中略〉
➋ 〈마한(馬韓)의 진왕(辰王)은 월지국(月支國)에서 다스렸다〉고 하였으니, 「월지국(月支國)은, 마한의 소도(所都 : 王城)였다.」라는 뜻이다.
「월지국(月支國)」은 오늘날의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아무다리아강(江)’【규수(嬀水)】 남안(南岸)에 있었던 옛 나라다.
➠➠➠ 여기서 「진왕(辰王)」이라는 말은 「‘진한(辰韓)의 왕(王)’이란 의미(意味)가 아니다.」 “마한(馬韓)의 왕(王)을 진왕(辰王)”이라고 칭(稱)하였는데, 이는 「동국(東國)의 왕(王)」이라는 뜻이며, ‘진한(辰韓)=진한(秦韓)’과 ‘변한(弁韓)=변한(卞韓)’까지도 마한인(馬韓人)을 임명(任命)하여 다스리도록 했다는 것은, 곧 ‘마한(馬韓)의 진왕(辰王)이 관리(官吏)를 보내 다스리도록 했다’라는 뜻과 같은 말이다.
➌ 해동역사 : 마한(馬韓)에는 원양국(爰襄國) 《문헌통고(文獻通考)》에는 애양국(愛襄國)으로 되어 있다. ㆍ모수국(牟水國)ㆍ상외국(桑外國)ㆍ소석색국(小石索國)ㆍ대석색국(大石索國)ㆍ우휴모탁국(優休牟涿國)ㆍ신분활국(臣濆活國)ㆍ백제국(伯濟國) 《문헌통고》에는 백제국(伯齊國)으로 되어 있다. ㆍ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ㆍ일화국(日華國)ㆍ고탄자국(古誕者國)ㆍ고리국(古離國)ㆍ노람국(怒藍國)ㆍ월지국(月支國) ㆍ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 《문헌통고》에는 치리모로국(治離牟盧國)으로 되어 있다. ㆍ소위건국(素謂乾國)ㆍ고원국(古爰國)ㆍ막로국(莫盧國)ㆍ비리국(卑離國)ㆍ점리비국(占離卑國)ㆍ신흔국(臣釁國)ㆍ지침국(支侵國)ㆍ구로국(狗盧國)ㆍ비미국(卑彌國)ㆍ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ㆍ고포국(古蒲國)ㆍ치리국국(致利鞠國)ㆍ염로국(冉路國)ㆍ아림국(兒林國)ㆍ사로국(駟盧國)ㆍ내비리국(內卑離國)ㆍ감해국(感奚國)ㆍ만로국(萬盧國)ㆍ벽비리국(辟卑離國)ㆍ구사오조국(臼斯烏朝國)ㆍ일리국(一離國)ㆍ불리국(不離國) 《문헌통고》에는 불미국(不彌國)으로 되어 있다. ㆍ지반국(支半國)ㆍ구소국(狗素國)ㆍ첩로국(捷盧國) 살펴보건대, 《문헌통고》에는 서로국(棲盧國)으로 되어 있다. ㆍ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ㆍ신소도국(臣蘇塗國)ㆍ막로국(莫盧國)ㆍ고랍국(古臘國)ㆍ임소반국(臨素半國)ㆍ신운신국(臣雲新國)ㆍ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ㆍ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ㆍ일난국(一難國)ㆍ구해국(狗奚國)ㆍ불운국(不雲國)ㆍ불사분야국(不斯濆邪國)ㆍ원지국(奚池國)ㆍ건마국(乾馬國)ㆍ초리국(楚離國) 등 총 50여 국이 있다. 중략(中略) [삼국지(三國志)]
• 기타 사서(史書)마다 다소(多少)의 차이(差異)는 있는데, 진서(晉書)에서는 마한(馬韓) 56개 나라(國), 후한서(後漢書)에서는 54개 나라(國), 위지(魏志)는 55개 나라(國) 등으로 기록(記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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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辰 韓 在 馬 韓 之 東, 其 耆 老 傳 世, 自 言 古 之 亡 人 避 秦 役 來 適 韓 國, 馬 韓 割 其 東 界 地 與 之. : 진한(辰韓)은 마한(馬韓)의 동(東)쪽에 있는데, 늙은 노인(耆老) 스스로 말하기를 옛 진(秦)나라에서 역(役)을 피해온 망인(亡人)들이 한국(韓國)에 오니, 마한(馬韓)이 그 동(東)쪽 지경의 땅을 나누어 주었다. 有 城 柵. 其 言 語 不 與 馬 韓 同, 名 國 為 邦, 弓 為 弧, 賊 為 寇, 行 酒 為 行 觴. : 성책(城柵)이 있고, 그 말(言)은 마한(馬韓)과 같지 않아, 국(國)을 방(邦)이라 이름하고, 궁(弓)을 호(弧)라 하고, 적(賊)을 구(寇)라 하고, 잔 질을 하여 술을 돌리는 것(行酒)을 행상(行觴)이라고 하였다. 相 呼 皆 為 徒, 有 似 秦 人, 非 但 燕, 齊 之 名 物 也. : 서로 부름을 모두 무리(徒)라 하니, 진(秦)나라 사람과 같음이 있으니, 단지 연(燕)나라와 제(齊)나라와 사물의 이름뿐이 아니다. 名 樂 浪 人 為 阿 殘 ; 東 方 人 名 我 為 阿, 謂 樂 浪 人 本 其 殘 餘 人. : 낙랑인(樂浪人)을 아잔(阿殘)이라 부르는데 : 동방인(東方人)은 아(我)를 아(阿)라 하며, 낙랑(樂浪) 사람은 본래 그 남은 나머지 사람들이다. 今 有 名 之 為 秦 韓 者. 始 有 六 國, 稍 分 為 十 二 國. : 이제(今) 이름을 진한(秦韓)이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6개 나라이었는데, 점점 나누어져 12 나라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➊ 「진한(辰韓)은, 진한(秦韓)이다」 즉 「쉽게 설명(說明)하면 : “진(秦)”나라에서 사역(使役)을 피하여 무리를 이뤄 이곳저곳 유랑(流浪)하다가 한국(韓國) 땅으로 들어오니, 이를 불쌍히 여긴 마한(馬韓) 왕(王)이 “동(東)쪽 지경의 땅을 쪼개어 나누어 살게 해줬다”」라는 이야기다.
➋ 그래서 〈대략적(大略的)으로 말(言)은 한국인(韓國人)들과 같았으나, “한국인(韓國人)들과 말(言)이 조금 달랐다.”〉라는 것이다.
이게 아주 중요(重要)한 것으로 : 「당시(當時)의 진(秦)나라와 한국(韓國)인들의 언어(言語)는 대략적(大略的)으로 같았으나, 조금 달랐다」라는 것이다. 곧 방언(方言)으로 인하여 조금 달랐다는 뜻으로 해석(解釋)될 수 있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진(秦)과 한국(韓國)은 같은 땅에 있었다”라는 것으로 밖에 볼 수밖에 없다. 넓은 땅에 “방언(方言)”은 존재(存在)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중국(中國)을 보면 확실(確實)하게 실감(實感)하게 된다.
➌ 여기서 “진한(秦韓)”에 관한 또 다른 해석(解釋)은, “위략(魏略)”에 따르면 : “그들은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었으므로 마한(馬韓)에게 제압(制壓)당한 것이 분명(分明)하다.”라고 한 것이다. [해동역사(海東繹史)]
➍ 필자(筆者)가 가장 중요(重要)하게 생각하고, 독자(讀者)분들에게 설파(說破)하고 싶은 것은 : 「마한(馬韓)이 반도(半島) ‘충청도(忠淸道)+전라도(全羅道)’ 땅에 없었다면 : ‘진한(辰韓)=진한(秦韓)’은, 경상도(慶尙道) 땅에 없었다【존재(存在)할 수 없다】」라는 것이고,
“옛 왜(倭)는 없었다”라는 것이다.
➎ 본시(本是) 진한(辰韓)은 진한(秦韓)이라고 했으며, 이는 진(秦)나라의 망인(亡人)들이 집단적(集團的)으로 무리를 이뤘기 때문이라고 하였고, 그래서 진(秦)의 명칭(名稱)들이 많이 통(通)했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서(史書)의 기록(記錄)이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라고 한다면 :
➨ 〈진한(秦韓)의 대부분(大部分) 백성(百姓)들은 마한(馬韓)의 서(西)쪽에 있었던 “진(秦)【시황제(始皇帝)의 진(秦) 또는 서역(西域)의 대진국(大秦國) 중의 한나라임은 틀림없을 것이다】나라”에서 사역(事役)과 전쟁(戰爭)과 굶주림을 피해 동(東)쪽으로, 동(東)쪽으로 유랑(流浪)하다가 결국(結局) “한국(韓國)의 땅”으로 들어왔고, 이때 이들은 마한(馬韓) 왕(王)에게 정복(征服)당하니, 마한(馬韓)의 진왕(辰王)은, 동(東)쪽 모퉁이 땅을 내어주고 진(秦)의 망인(亡人)들을 살 수 있도록 해줬다〉라고 보면, 올바른 역사해설(歷史解說)이 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두 가지는,
⒜ 대륙(大陸)의 ‘핵심(核心) 요충지(要衝地)’ 땅인 ‘중원(中原)’의 광활(廣闊)한 땅에는 「진(秦)과 전한(前漢) 왕조(王朝)는 존재(存在)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한국(韓國)의 땅은 방가(方可) 사천(四千)리」라고 했기 때문이다.
⒝ 「첫 번째의 진(秦)은 시황제(始皇帝) 진(秦)이고, 두 번째의 진(秦)은, 서역(西域)의 대진【大秦 : 불림(拂菻)】이다.」
여러 가지로 닮은 꼴이기 때문에 문제(問題)를 제기(提起)하는 것이다. 「“마한(馬韓)”은 월지국(月氏國)=월씨국(月氏國)에서 다스렸다」라는 기록(記錄)에 비춰보면 :
「대진(大秦)은, 진(秦)과 같고, 전한(前漢) 역시(亦是) 신강(新疆) 구자(龜茲) 경내(境內)를 벗어날 수 없다.」 이렇게 구도(構圖)를 잡고 보면 : 한국(韓國)【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구려(駒麗)【구려(駒驪)】•예(濊)【옥저(沃沮)】, 맥(貃)등과 함께 한 구이(九夷)들의 터전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로부터 중원대륙(中原大陸)을 토착화(土着化)한 것이다.
이러한 해설(解說)은 자의적(恣意的)이거나 임의적(任意的)인 것이 아니다. 정사(正史)라고 불리는 역사서(歷史書) 기록(記錄)에 따른 것이다.
平安道 成川都護府, 강산(江山)은 마한(馬韓)의 하늘(天)이로다
➏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식민사학자(植民史學者)【매국노(賣國奴)+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들이 말하는 반도조선왕조(半島朝鮮王朝)의 지리지(地理志)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54권 / 평안도(平安道) 성천도호부(成川都護府) :
〈題詠 : 江山猶是馬韓天。張脩詩:院宇雖非松讓日,江山猶是馬韓天。云云 : 제영(題詠) : 강산(江山)은 오히려 마한(馬韓)의 하늘(天)이로다. 장수(張脩)의 시에, “원우(院宇)는 비록 송양(松讓)의 시대 아니지만, 강산(江山)은 오히려 마한(馬韓)의 때로다.”〉라고 하였다‘
이 뜻은, 「원우(院宇)란, “고려(高麗) 중기(中期) 이후(以後)에 서원(書院), 사우(祠宇), 정사(精舍), 영당(影堂) 따위를 통틀어 이르던 말”이다. 따라서 「성천도호부(成川都護府)에 있는 여러 ’서원(書院), 사우(祠宇), 정사(精舍), 영당(影堂)‘등은 송양(松壤) 시대(時代)의 것은 아니지만 강(江)이나 산(山) 등의 땅(地)은, 옛 마한(馬韓)의 것이다.」라는 이야기다.
이 기록(記錄)에 따른다면 : 「마한(馬韓)은 충청도(忠淸道), 전라도(全羅道) 땅이 아니라 : 평안도(平安道)+함경도(咸鏡道)+황해도(黃海道) 등지(等地)에 있었다」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역사통설(歷史通說)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 논자(論者)들의 말에 따르면 : 〈마한(馬韓)의 하늘(天)은 평안도(平安道) 있고, 마한(馬韓)의 땅(地)은 충청도(忠淸道), 전라도(全羅道)에 있다〉라는 말이 된다. 이런 황당무계(荒唐無稽)하고, 귀신(鬼神)이 씨 나락 까먹는 소리가 정식(正式)으로 인정(認定)받아 통용(通用)되는 곳이 바로 대한민국(大韓民國)이다. 황당(荒唐)한 나라다.】
송양(松讓, ?~?)이 누군가? 기언(記言) 34 外篇 / 東事 3 : 〈國號高句麗。當漢建昭二年。降松壤。滅荇人北沃沮始大。: 국호(國號)를 고구려(高句麗)라고 하니, 이때는 한(漢)나라 건소(建昭) 2년【BC 37年】에 해당한다. 송양(松讓)의 항복을 받고 행인(荇人)과 북옥저(北沃沮)를 멸망시키고 나서 비로소 나라가 커졌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송양(松壤)은 지명으로, 평안도(平安道) 강동현(江東縣)의 이칭(異稱)이다.”라고 해설(解說)하고 있다.
식민사학자(植民史學者)【매국노(賣國奴)+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들이 설명(說明)하는 바에 따르면 : 오늘날의 평안도(平安道) 강동현(江東縣) 땅이 바로 “마한(馬韓)”의 땅이라고 하였다. 그럼 “진한(辰韓)=진한(秦韓)”은 어디에 있다는 것일까?
강동현(江東縣)에 단군총(檀君塚)이라고 전해지는 무덤도 있다고 하는데, 바로 이곳이 평양(平壤) 동(東)쪽 지근(至近) 곧 아주 가깝게 이웃하고 있다. 이곳이 “마한(馬韓)”의 땅이었다고 한다면 : 〈고구려(高駒驪) 땅에 “마한(馬韓)”이 있었다〉라는 것이다.
식민사학자(植民史學者)【매국노(賣國奴)+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들이 설명(說明)하는 바에 따른 것이다. 그러면 ‘진한(辰韓)=진한(秦韓)’은 강원도(江原道)와 함경도(咸鏡道) 땅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맞는 말인가? 틀린 말인가?
또 “충청도(忠淸道)와 전라도(全羅道)” 땅에 누가 있었다는 것이냐? 또 경상도(慶尙道) 땅에 누가 있었다는 것이냐? 식민사학자(植民史學者)【매국노(賣國奴)+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들의 ‘역사(歷史) 한계(限界)’가 바로 이런 것이다.
니들【식민사학자(植民史學者) : 매국노(賣國奴)+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 말대로면 : “경상도(慶尙道)+충청도(忠淸道)+전라도(全羅道)” 땅에는 “왜(倭)”가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解釋)된다. 맞는 말인가?
그렇다면 “경상도(慶尙道)+충청도(忠淸道)+전라도(全羅道)”에 본관(本貫)을 가진 수많은 대한민국(大韓民國) 국민(國民)들은 ‘왜(倭)의 후손(後孫)’들이 된다. 「이건 맞는 말인가? 틀린 말인가?」
• 「그대들은 앞으로 어디 가서 사학자(史學者)라고 말하지 마라! 창피(猖披)【체면이 깎이거나 아니꼬움을 당한 부끄러움】하지도 않냐!」
➠ 「장수(張脩)」의 시(詩)로,‘ 인동현(仁同縣)’ 조에도 등장(登場)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27권 경상도(慶尙道) 인동현(仁同縣)’조의 「題詠 : 公館壽同餘。張脩詩:〈天城赫居後,公館壽同餘 : 공관수동여(公館壽同餘), “장수(張脩)”의 시(詩)에, “천성(天城)은 혁거세(赫居世)의 뒤에 생겼고, 공관(公館)은 수동(壽同) 남은 터에 있네.”〉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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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弁辰亦十二國, 又有諸小別邑, 各有渠帥, 大者名臣智, 其次有險側, 次有樊濊, 次有殺奚, 次有邑借. : 변진(弁辰) 역시 12개 나라인데, 또한 여러 개의 작은 별읍(別邑)이 있다. 각각 거수(渠帥)가 있으니, 큰 자의 이름은 신지(臣智)이고, 그다음은 험측(險側)이라 하고, 다음은 번예(樊濊)라 하고, 다음은 살해(殺奚), 다음은 읍차(邑借)가 있다.「有已柢國•不斯國•弁辰彌離彌凍國•弁辰接塗國•勤耆國•難彌離彌凍國•弁辰古資彌凍國•弁辰古淳是國•冉奚國•弁辰半路國•弁[辰]樂奴國•軍彌國[弁軍彌國]•弁辰彌烏邪馬國•如湛國•弁辰甘路國•戶路國•州鮮國[馬延國]•弁辰狗邪國•弁辰走漕馬國•弁辰安邪國[馬延國]•弁辰瀆盧國•斯盧國•優由國」: 이저국(已柢國)ㆍ불사국(不斯國)ㆍ변진미리미동국(弁辰彌離彌凍國)ㆍ변진접도국(弁辰接塗國)ㆍ근기국(勤耆國)ㆍ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ㆍ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凍國)ㆍ변진고순시국(弁辰古淳是國)ㆍ염해국(冉奚國)ㆍ변진반로국(弁辰半路國)ㆍ변[辰]락노국(弁樂奴國)ㆍ군미국(軍彌國)[변군미국(弁軍彌國)]ㆍ변진미오사마국(弁辰彌烏邪馬國)ㆍ여담국(如湛國)ㆍ변진감로국(弁辰甘路國)ㆍ호로국(戶路國)ㆍ주선국(州鮮國)[馬延國]ㆍ변진구사국(弁辰狗邪國)ㆍ변진주조마국(弁辰走漕馬國)ㆍ변진안사국(弁辰安邪國)[마연국(馬延國)]ㆍ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ㆍ사로국(斯盧國)ㆍ우유국(優由國)이 있다. 弁, 辰韓合二十四國. : 변한(弁韓)과 진한(辰韓)을 합하여 모두 24국이다.〉
〈其十二國屬辰王. 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 辰王不得自立為王. : 그 12개 나라는 진왕(辰王)에 속하였다. 진왕(辰王)은 항상 마한(馬韓)사람이 만들어 대대로 서로 이어나갔다. 그래서 진왕(辰王)은 자립(自立)하여 왕위에 오르지 못하였다.〉
➠ 위의 글에서 언급(言及)한 바와 같이「진왕(辰王)」이라는 말은, 「‘진한(辰韓)의 왕(王)’이란 의미(意味)가 아니다.」 “마한(馬韓)의 왕(王)을 진왕(辰王)”이라고 칭(稱)하였는데, 이는 「동국(東國)의 왕(王)」이라는 뜻이며, ‘진한(辰韓)=진한(秦韓)’과 ‘변한(弁韓)=변한(卞韓)’까지도 마한인(馬韓人)을 임명(任命)하여 다스리도록 했다는 것은, 곧 ‘마한(馬韓)의 진왕(辰王)이 관리(官吏)를 보내 다스리도록 했다’라는 뜻과 같은 말이다.
그래서 스스로 “왕(王)”이 되려고 하였으나, 자립(自立)하지 못했다고 한 것이다.
〈土 地 肥 美, 宜 種 五 穀 及 稻 , 曉 蠶 桑 , 作 縑 布 , 乘 駕 牛 馬 。 : 땅은 기름지고 좋아, 오곡(五穀)과 벼(稻)에 마땅하며, 잠상(蠶桑:養蠶)을 알며, 비단과 베를 짓고, 소(牛) 말(馬)이 끄는 수레를 탄다. 嫁 娶 禮 俗 , 男 女 有 別 。 : 결혼하는데 예의범절의 풍속이 있으며, 남녀(男女) 구별이 있다. 以 大 鳥 羽 送 死 , 其 意 欲 使 死 者 飛 揚 。: 죽으면 큰 새의 깃털로 장사지내는데, 그 뜻은 사자(死者)가 날아오르게 하는 것이다. 國 出 鐵 , 韓 、 濊 、 倭 皆 從 取 之 。 : 나라에 철(鐵)이 나와, 한(韓), 예(濊), 왜(倭) 모두가 쫓아 이를 취하였다. 諸 巿 買 皆 用 鐵 , 如 中 國 用 錢 , 又 以 供 給 二 郡 。 : 여러 시장(市場)에서 철(鐵)을 사용하여 매매함에, 중국(中國)의 돈(錢)과 같이 사용했는데, 또 2군에 이것을 공급(供給)하였다. 俗 喜 歌 舞 飲 酒 。 有 瑟 , 其 形 似 筑 , 彈 之 亦 有 音 曲 。 : 풍속(風俗)에 노래하며 춤추며 술을 마시며 즐긴다. 거문고(瑟)가 있는데, 그 모양이 축(筑)【악기(樂器) 종류(種類)】과 비슷한데 연주(彈)하면 역시 음률의 곡조가 있다. 兒 生 , 便 以 石 厭 其 頭 , 欲 其 褊 。今 辰 韓 人 皆 褊 頭 。 아이(兒)가 태어나면, 돌로 그 머리를 누르는데, 머리를 납작하게 하려는 것이다. 지금 진한(辰韓)사람이 모두 편두(褊頭)이다. 男 女 近 倭 , 亦 文 身 。 : 왜(倭)와 가까워 남녀(男女)가 모두 문신(文身)을 한다. 便 步 戰 , 兵 仗 與 馬 韓 同 。 其 俗 , 行 者 相 逢 , 皆 住 讓 路 。: 보전(步戰)을 익히며, 병장기(兵仗器)는 마한(馬韓)과 같다. 그 풍속(風俗)에 행자(行者)가 서로 만나(相逢)면 모두 가는 길을 양보(讓步)한다.〉라고 하였다.
➊ 〈國 出 鐵 , 韓 、 濊 、 倭 皆 從 取 之 。 : 나라에 철(鐵)이 나와, 한(韓), 예(濊), 왜(倭) 모두가 쫓아 이를 취하였다〉라고 하였는데,
기원전(紀元前) 곧 「2천 3백 여년(餘年) 전(前)」의 “철광산(鐵鑛山)”의 모습은 어땠을까? 수백(數百) 미터(m) 또는 수(數) 킬로미터(㎞)를 지하(地下) 터널(Tunnel)을 굴착(掘鑿)하면서 철광석(鐵鑛石)을 찾았을까?
소위(所謂) 노천광산(露天鑛山) 수준(水準)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 같다. 철광석(鐵鑛石) 맥(脈)을 따라 지하(地下)로 내려간다고 해도 과연(果然) 얼마나 지하굴착(地下掘鑿)을 할 수 있었을까? 를 생각해보면 노천광산(露天鑛山) 수준(水準)을 말하는 일 것 같다.
과연(果然), 충청(忠淸), 전라(全羅), 경상(慶尙) 땅에 이러한 노천광산(露天鑛山) 수준(水準)의 철광산(鐵鑛山)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➋ 〈諸 巿 買 皆 用 鐵 , 如 中 國 用 錢 , 又 以 供 給 二 郡 。 : 여러 시장(市場)에서 철(鐵)을 사용하여 매매함에, 중국(中國)의 돈(錢)과 같이 사용했는데, 또 2군에 이것을 공급(供給)하였다〉
➠ 더구나 이곳에서 생산(生産)되는 “철(鐵)”이 많아 이웃 나라들도 이를 사용(使用)할 수 있었다고 하였고, 이를 시장(市場)에서는 화폐(錢)처럼 사용(使用)했다니, 다량(多量)의 질이 좋은 철광석(鐵鑛石)이 생산(生産)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저 꿈같은 이야기다.
진한(辰韓) 또는 변한(弁韓)에서는, 이를 2군(郡)에 공급(供給)했다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2군(郡)은?
➌ 〈男 女 近 倭 , 亦 文 身 。 : 왜(倭)와 가까워 남녀(男女)가 모두 문신(文身)을 한다〉
➠ 〈「진한(辰韓)=진한(秦韓)」과 「변한(弁韓)=변한(卞韓)」은 “왜(倭)”와 가깝다(近). 그래서 「진한(辰韓)=진한(秦韓)」과 「변한(弁韓)=변한(卞韓)」의 남자(男子)들과 여자(女子)들도 몸에 문신(文身)을 한 자들이 있었다〉라고 하였으니,
「당시(當時)에 변진한(弁辰韓)과 왜(倭)가 서로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문신(文身)한 자가 있다」라는 말은, 오늘날처럼 바다로 멀리 떨어져 있었던 관계(關係)를 표현(表現)하는 말이 아니다.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의 논리(論理)대로라면 : 「오늘날의 전라도(全羅道)와 경상도(慶尙道) 남(南)쪽은 바다(海)가 아니라, 육지(陸地)로 수천(數千) 리(里) 연이어져 있어야 한다.」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의 논리(論理)는 : 「전라도(全羅道)와 경상도(慶尙道) 남(南)쪽에 “왜(倭)가 있다”라고 주장(主張)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도(半島) 땅의 형세(形勢)로써는 불가능(不可能)한 것이다」
결국(結局)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도 「“반도(半島) 땅이 아닌 중원대륙(中原大陸) 땅에 한국(韓國)이 있었다”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라는 것이다.
〈弁 辰 與 辰 韓 雜 居 , 亦 有 城 郭 。 衣 服 居 處 與 辰 韓 同。 言 語 法 俗 相 似 , 祠 祭 鬼 神 有 異 , 施 灶 皆 在 戶 西 。 : 변진(弁辰)은 진한(辰韓)과 섞여 살며, 또한 성곽(城郭)【외성(外城)과 내성(內城)】이 있다. 의복(衣服)과 거처(居處)는 진한(辰韓)과 같다. 언어(言語)와 법(法)과 풍속(風俗)은 서로 같음이 있고, 귀신(鬼神)에 제사(祠祭)하는 것은 다른데, 부엌 귀신을 섬기는 것은 모두 호서(戶西)에 두는 것이다. 其 瀆 盧 國 與 倭 接 界 。 : 독로국(瀆盧國)은 왜(倭)와 접해 있다. 十 二 國 亦 有 王, 其 人 形 皆 大. 衣 服 絜 清, 長 髮. 亦 作 廣 幅 細 布. 法 俗 特 嚴 峻. : 12 나라 역시 왕(王)이 있는데, 그 사람들의 형상(形象)은 모두 크다. 의복은 깨끗하고 청결하고, 머리가 길다. 또한 폭이 넓은 가느다란 포를 만들고, 법속(法俗)은 특히 엄하고 준열(峻烈)하다〉라고 하였다.
➊ 〈弁 辰 與 辰 韓 雜 居 , 亦 有 城 郭 。: 변진(弁辰)은 진한(辰韓)과 섞여 살며, 또한 성곽(城郭)【외성(外城)과 내성(內城)】이 있다.〉
➠ 이때도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을 별도(別途)로 축성(築成)했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변진(弁辰) 땅에서는 진한(辰韓)인들과 섞여 살았다는 것이다. ‘진한(辰韓)’과 ‘변진(弁辰)=변한(弁韓)’은 따로 구분(區分)할 수 없을 정도(程度)였다는 말과 같다.
➋ 〈其 瀆 盧 國 與 倭 接 界 。 : 독로국(瀆盧國)은 왜(倭)와 접해 있다〉라고 하였으니, 당시(當時)의 ‘진한(辰韓)과 변한(弁韓)’ 땅인 ‘전라(全羅), 경상(慶尙)’ 땅 남(南)쪽은, 수천(數千) 리(里) 육지(陸地)로, “바다(海)는 없었다”라는 뜻이다.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의 논리(論理)대로라면 : 「오늘날의 전라(全羅), 경상(慶尙) 땅에 본관(本貫)을 두고 있는 성씨(姓氏)들은 모두 “왜(倭)” 후손(後孫)들이라는 말과 같다.」
맞는 말일까? 틀린 말일까?
➌ 〈其 人 形 皆 大 。 衣 服 絜 清, 長 髮 。: 그 사람들의 형상(形象 : 身體)은 모두 크다. 의복(衣服)은 깨끗하고 청결(淸潔)하고, 머리는 길게 기른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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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도(半島) 한강(漢江)【반도(半島) 허리를 흐르는 하천(河川) 이름이 왜 한강(漢江)이었다는 것일까?】이남(以南)의 「충청도(忠淸道)+전라도(全羅道)+경상도(慶尙道) 땅이 방가(方可) 4 천리(千里)로, 그 면적(面積)이 2,560,000㎢ 정도(程度)가 된다」라면 :
차라리 왜곡(歪曲)되었다고 하더라도, 오늘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인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을 하늘처럼 떠받들며 존중(尊重)하며, 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 식민사학자(植民史學者)들을 우러러, 애지중지(愛之重之) ‘한글’ 해설서(解說書)를 달달 외우며 가슴에 품고 살련다. 그러나,
「방가(方可) 4 천리(千里) 땅에 있었다」라는 한국(韓國)을 찾아 나서보자! 그곳이 어딜까? “제2차 천지개벽(天地開闢)이 없었다”라고 한다면 : 〈분명(分明) 오늘날의 대륙(大陸) 중원(中原) 요충지 땅 전부(全部)다〉 라고 말한다.
2024년 05월 11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 다음 편으로는 :
「낙전당(樂全堂) 신익성(申翊聖)」이 저자로 되어있는 "낙전당집"속에 있는 "조선영토"에 대하려 알아보고자 합니다.
* 낙전당 신익성은 "상촌 신흠"의 장자(長子)로, 1599년에 선조의 세째 옹주였던 정숙옹주와 혼인하여 "동양위(東陽尉)"로 봉해진 인물로 혼란스럽웠던 당시 시대의 사대부로 많은 정보를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며 청나라에도 다녀온 바 있는 인물로 많은 시문을 남기고 있다고 전해집니다.
* 이런 분이 남겨놓은 글속에 있는 "조선영토"에 대한 여러 기록에 대해 몇 개를 선취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먼저 선생님의 노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다만 고대 국가의 면적과 관련하여 전국시대 이후 도량형이 진나라에 의해 통일된 이후에는 ㅂ"방"이라는 단위가 한변의 길이가 아니라 면적 즉 평방미터의 개념이라는 연구가 있어서 소개해 드립니다...물론 진나라 이전의 시대에는 그 단위가 맞지 않을 수 있겠지만 "방"이라는 개념이 길이가 아니라 면적이라면, 그리고 이 개념이 진나라 이전의 고조선시대에 쓰였다면...그 고대국가간 국경이나 크기가 많이 달라지지 않을까...그러면 선생님의 논리전개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유튜브 관련 동영상 주소를 첨부합니다
1편 : https://www.youtube.com/watch?v=S8_SNlI0k20&t=716s
2편 : https://www.youtube.com/watch?v=-Do1NXmizU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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