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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군기지 공사가 진행 중인 제주 강정마을 중덕해안. 푸른 바다와 구럼비바위가 한 폭의 풍경화를 연출하고 있다. ⓒ강정마을 카페/진달래산천 |
당초 오늘(6일) 해군이 제주 강정마을의 구럼비바위를 깨부수고 해군기지 공사를 강행한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어제 우근민 제주지사 일행이 당국에 공사 재검토를 요구하며 공사 중단을 요청했습니다. 그간 제주 강정마을을 지키기 위해 많은 분들이 애쓰셨는데요, 조정 시인도 그 가운데 한 분입니다. 이 글은 <진실의 길>이 조정 시인에게 청탁하여 받은 글입니다. <편집자 주>
멀리 계시는 그대에게 편지를 씁니다. 바깥에는 비가 내립니다. 이 편지가 조금 눅눅한 채 그대에게 닿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편지가 늦은 것은 참으로 미안한 일입니다. 우리가 무척 좋아하는 제주도 이야기를 들으면 용서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제주도 4월 하순은 고사리비가 잦습니다. 그날 안개가 덮친 중산간도로의 오리무중을 헤치며 서귀포에서 제주로 달리는 자동차들은 하나같이 외롭고 위태로웠습니다. 점심 먹고 느긋하게 산록도로를 드라이브하여 서귀포로 갈 때는 예상치 못한 위기였습니다.
영화 촬영 때문에 여러 날 서귀포에 머무는 지인을 만나 차 한 잔 마시고, 일없이 서귀포시장을 기웃거리다가 표선 쪽으로 스며들기로 한 계획을 급변경한 탓이었습니다.
여행자가 자신을 물로 규정하고, 마음 따라 어디로든 스며들기로 할 때 계획은 무계획보다 무모합니다. 침묵을 가장하고 투명한 공기 속을 어슬렁거리던 한 지명(地名)이 어수룩한 여행자를 낚아채는 경우 이전의 모든 계획은 삽시간에 진부하고 권태로운 것이 되고 마니까요.
처음 ‘강정’에 가던 날이 그랬습니다.
잡목 숲이 연둣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하는 마을 초입을 지나자 유명한 풍림콘도가 왼쪽에 보였고 제주에서 보기 드물게 수량이 풍부한 개천이 나타났습니다. 다리를 건너 제주해군기지 건설 공사장 입구를 지나쳤습니다. 저를 낚아챈 ‘강정의 혼’이 더듬더듬 입을 열기 시작한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강정이 저에게 하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집집에 꽂힌 노란 깃발들의 침울한 안색이 민망하였을 뿐입니다. 감귤이나 백합꽃 키우던 곳이 분명한 폐비닐하우스들은 더욱 서늘했습니다. 소문으로 듣던 강제 수용된 토지들이었습니다.
멀리 계시는 그대.
당신에게 제가 이 편지를 쓰게 될 줄 그때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강정포구와 골목 몇 개를 서성대는 동안 해가 기울었습니다. 낯선 표선보다는 제주시로 가는 편이 낫지 싶어 올라선 도로에서 잔뜩 움츠린 채 비안개와 싸우며 저는 두 개의 세계 사이에 서 있는 저를 보았습니다.
제 등 뒤에는 서귀포의 외진 마을 강정이, 앞에는 냉담하고 막강한 어떤 세력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무력한 제 두 손은 자동차 핸들을 꽉 쥐고 돌파를 생각하였습니다.
저자의 야바위꾼처럼 국민을 기만하는 국가 권력에 대해 그대는 늘 저보다 훨씬 분노하셨지요. 그 분노가 미처 닿지 못하는 먼 거리. 강정이 부적절하게 유린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국가는 언론을 통제함으로써 철저히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예산이 1조 3천억 원에 이르는 국책사업 부지 결정을 예고 후 불과 두 달 만에 강행해버렸다고 합니다. 1,900여 명 주민 중 은밀히 회유된 어촌계와 해녀계 80여 명을 중심으로 박수로 강행해 버린 시점 이후 강정에는 각종 야만이 횡행하고 있었습니다.
사태를 파악한 주민들이 나서서 민주적인 절차를 요구했지만, 4년 동안 주민들에게 돌아온 대답은 토지 강제 수용, 보상금 공탁, 벌금 부과, 법 적용이 의심스러운 연행, 체포, 구속 등이었답니다. 중앙 정부에 결탁하여 주민을 외면하는 도정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또 얼마나 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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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정마을 주민과 일반 시민들이 함께 ‘해군기지 건설 반대’ 집회를 갖고 있다. 왼쪽 두 번째 붉은색 점퍼가 양윤모 씨임. ⓒ강정마을 카페/진달래산천 |
평화의 이름으로 오실 그대, 저를 돌연히 강정으로 부른 그는 누구였을까요?
구럼비였습니다.
당신은 구럼비에 가보신 적이 없지요. 언젠가 꼭 함께 가서 보여주고 싶은 위대한 바위입니다. 물론 제주는 모든 곳이 아름답습니다. 제주도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것처럼 저 역시 제주 해안을 여러 번 돌아보았습니다. 시야가 고고한 애월해안도로, 북촌에서 종달리로 가는 동부해안도로, 남원과 위미의 소슬하게 빛나는 바다, 솔숲 아래 깎아지른 박수기정 등 그대도 아는 모든 아름다운 곳들을 저는 찬미하는 심정으로 바라봅니다.
하지만 구럼비처럼 저를 놀라게 한 곳은 없었습니다. 제주 해안의 용암 바위 중 사람을 편안하게 품에 안는 유일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납지 않은 너른 바위가 곳곳에 크고 작은 쉼터와 물샘을 풀어놓아 희귀한 생물들과 사람을 부릅니다.
아, 저는 지금 가장 먼저 해야 할 말을 뒤로 미루었군요. 그 모든 좋은 점보다 자랑할 일은 구럼비는 그 자체로 신비하고 아름답다는 것. 한라산을 달려 내려와 흰 파도와 만난 희열을 그대로 드러낸 구럼비의 수만 가지 표정을 당신에게 반드시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대가 구럼비에 누워 창공에 뜬 낮달을 바라보지 않았는데, 그대가 범섬 앞에서 춤추는 고래 떼를 보지 못했는데 구럼비를 폭파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지난 주에 해군은 서귀포 경찰서에 구럼비 발파 허가신청을 접수했다고 합니다. 이미 구럼비 곳곳에 4.5미터 깊이로 화약 장전 자리를 뚫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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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평론가 양윤모 씨는 해군기지 공사를 저지하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 구속됐는데, 3월 6일 현재 28일째 옥중에서 단식투쟁을 벌이고 있다. 사진은 양 씨가 작년에 구속됐을 때 면회 사진. ⓒ강정마을 카페/진달래산천 |
멀리 계시는 그대.
저는 어제 ‘국책보다 소중하지 않게 태어난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문장을 보았습니다.
당신에게 이 문장을 보냅니다. 강정에서는 양윤모라는 영화평론가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강정마을과 구럼비를 지키기 위해 싸워왔습니다. 지금 양윤모 씨는 옥중에서 28일째 단식 중입니다.
……23, 24, 25…27… 누군가 옥중에서 단식하는 날짜를 헤아리는 일은 두렵습니다. 수학 시간에 난무하는 숫자들이야 귀찮으면 제 의식 밖으로 밀어내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2012년 3월 6일, 2와 8 사이의 터질 듯한 긴장은 참담합니다. 양윤모 씨는 구럼비가 발파되면 물도 소금도 끊겠다 하고, 강정마을 주민 중 여러 사람이 해군기지가 백지화되지 않으면 목숨을 끊겠다고 결의합니다. 누가 이 신음에 귀를 기울일까요?
그대가 오시면 구럼비에 앉아 먼저 그 신음에 귀를 기울여주세요.
참으로 이상합니다.
지금 강정에는 진압 전문 1001부대를 비롯해 천 명의 전투경찰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구럼비 발파를 반대하는 주민들을 때리고 밟고 체포하고 가둘 것입니다. 경찰은 국회의 지시를 무시합니다.
국회에서는 예산을 삭감하면서까지, 해군기지 입지 선정 과정이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이다, 강정은 전략기지로 쓰기에 너무 좁고 확장 가능성 또한 없으므로 부지로서 타당하지 않다고 지적했습니다. ‘주민 참여와 의견 수렴 과정에 절차상 하자’ 문제를 해결하라고도 명시했습니다.
그런데 지적당한 부분은 바로잡지 않고 왜 주민을 무시하고 강행만을 외치냐고 묻는 마을회장님의 목소리가 자주 갈라져 우리는 애가 터집니다.
공포 영화에서 가장 무서운 장면이 우리 편인 줄 알았던 사람이 적으로 돌변했을 때입니다. 강정에서 만나는 경찰과 군인들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강정주민들은 날마다 노래하고 춤추면서 공포보다 높은 곳으로 날아오릅니다. 경이로운 힘이랍니다.
저는 당신이 세상의 모든 골목과 거리와 교실에서 해주었던 말을 기억합니다.
우리 안에 평화를 구축하는 정신을 확장하자는 말이었어요.
일어날지 말지 모르는 전쟁을 빌미로 지금 이곳에 사는 사람의 평화를 빼앗고 그 삶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고 늘 당신도 말하지 않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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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군이 기지건설을 이유로 천혜의 자원인 구럼비바위를 무참히 깨부수고 있다. ⓒ강정마을 카페/진달래산천 |
그리운 그대.
무기를 파는 자들은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전쟁기지를 만들어서라도 몸집 불리기를 원하는 군대 역시 평화의 힘을 비웃습니다. 나라 여러 곳에 기지를 가졌으면서도 국제적 분쟁의 단초가 될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국민의 일상을 전장으로 만듭니다. 저는 우리가 무력으로 이길 수 없는 이웃나라와 사이좋게 지내기만을 바랍니다. 그것을 외교력이라고 하겠지요.
아무리 돌이켜 생각해봐도 일개 시인일 뿐인 저는 참으로 무력합니다.
사방에서 구름과 같이 몰려올 당신을 꿈꾸는 일이 제 몫입니다. 부서지는 구럼비를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도 시 한 편 지어 읽어주는 것뿐이었습니다. 곧 만나게 될 당신을 기다리며 다시 ‘돌을 위한 부탁’을 적습니다.
돌을 위한 부탁
돌이 부서지는 사진을 보았을 뿐인데
눈이 아팠다
내 앞을 지나가는 시간의 옷자락에 피가 묻어 있었다
돌도 혈연이구나
돌과 돌들을 짊어지기 위해
밥을 굶는 사람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아, 잘 웃는 책무 하나 얼굴에 새긴 붉은발말똥게
이 하찮은 녀석이
하느님처럼 웃는
강정 오지 맙서
해군님들, 토건족님들
우리가 내어줄 수 없는 것은
한낱 돌들
한 판 순정인 구럼비
돌도 혈연인 줄 알았을 뿐인데
천 년 전 조부님이 보이고 백 년 후 손손자들이 보인다
눈이 밝았구나
심장 펄떡이는 틈에 사람이 깃들여 사는
우리가 결코 내어줄 수 없는
돌들을 위해
강정 오지 맙서
멀리 계시는 그대.
당신이 제주에 오시면 강정으로 오기 전에 4.3 평화공원에 함께 가겠습니다. 지금 보여 드리는 사진의 조각상이 그곳에 있습니다. 4.3 당시 사망한 변병생 모녀의 모습입니다. 아기를 업고 피난 중에 등에 업힌 아기가 토벌대의 총에 맞아 죽었답니다. 엄마는 업었던 아기를 돌려 안고 애가 끊어지게 울다가 그 자리에서 동사하였습니다. 겨우내 눈에 덮여 있던 모녀는 봄이 오고 눈이 녹자 발견되었다는군요. 엄마는 스물다섯 살, 아기는 두 살이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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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4.3평화공원에 있는 변병생 모녀 조각상 |
당신도 나처럼 이 조각상 앞에서 눈물을 흘릴까요? 보세요, 강정은 꼭 변병생 모녀 같습니다. 마을을 둘러친 펜스 저편에서 마을 할망인 구럼비 부수는 소리가 들려올 때, 거대한 삼발이군(群)이 강정 포구의 숨구멍을 짓누르고 도열할 때, 허리에 철조망 두른 바지선이 강정 바다의 내장을 긁어낼 때, 그들은 경찰의 군화에 밟힐 때보다 크게 비명을 지릅니다. 사방이 깨어지고 뚫어진 구럼비를 품에 안은 주민들은 소리 없이 우는 가슴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울음을 너무 많이 참은 환자들입니다.
변병생 모녀는 눈이 녹는 봄에야 발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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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 시인 |
멀리 계시는 그대, 너무 늦지 않게 오십시오. 강정마을을 해체하려는 경찰이 까마귀 떼처럼 마을을 덮고 있어요. 구럼비를 폭파하려는 화약은 해군이 이미 준비했어요.
강정 사람들이 구럼비를 껴안고 죽은 전설로 남지 않게 도와주세요. 물론 강정은 아직 소리쳐 노래도 부르고 발 구르며 춤도 추고 있어요. 이 세상의 모든 당신이 올 때까지.
아, 이곳은 바다로 가는 길들이 철조망과 이상한 법으로 차단된 ‘게토’입니다.
냉담한 이웃의 모든 겨울을 녹이고 달려오실 당신에게, 평화와 비 개인 아침을 동봉하며 이만 총총.
첫댓글 내가 모르는 사실들이 너무 많네요. 멀다고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먼 곳의 당신이... 온 몸으로 강정과 구럼비의 아픔을 받아내고 있을 당신들에게 달려갑니다.
시가..가슴을 파고 드네요.
..ㅠㅠ..
하느님 제발 평화의섬 제주를 지켜주세요...
고맙습니다
....
먹먹하여...
가슴이 아픔니다. 한번의 방문이 이렇게 푹 빠지게 했습니다. 아이와 함께 다녀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