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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31일 [예수 부활 대축일]
요한 20,1-9
부활한 예수님 만나는 유일한 법: 갈릴래아로 가라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면 부활을 믿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먼저 부활이 내 안에 없으면
부활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개가 꽃이 예쁘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개에게는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을 찾일 리도 없고
꽃을 보아도 아름답다는 것을 알아볼 수도 없습니다.
제가 대학생 때 어머니를 알아보지 못했던 일은 저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처음 가발을 쓰신 것을 본 날이었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진짜 아줌마로 불렀습니다.
예상하지 못하면 알아볼 수 없습니다.
한 국제 육상경기에서 선두에 한참 뒤진 채 꼴찌로 달리던 선수가 갑자기 쏟아진 폭우를 뚫고 끝까지 완주해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국제올림픽위원회에 따르면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2023 동남아시안게임 여자 5천m 경기에 출전한 캄보디아 대표 보우 삼낭(20) 선수는 꼴찌로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기록은 1위에 6분 가까이 뒤진 22분 54초였습니다.
대부분 선수가 이미 결승선을 통과한 상태에서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달렸습니다.
가난 때문인지,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스트레스 때문인지, 평소 빈혈에 시달려 온 이 선수는 경기 당일에도 코치가 출전을 만류할 정도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결승선을 통과한 뒤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악천후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역주하는 모습이 담긴 영상이 알려지면서 하루아침에 유명 스타가 됐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물론 경기를 포기할 권리가 있었지만, 국가를 대표하는 의무가 더 중요했고, 포기하지 않으면 목표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끝까지 달렸습니다.”
삼낭 선수는 자기를 위해 달렸다기보다는 나라와 희망이 필요한 이를 위해 달렸습니다.
그런데 그 달리기는 목숨을 내어놓아야 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달렸습니다.
분명 피의 열매가 있을 것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부활을 믿는 이에게 부활한 분이 보입니다.
그녀에게 감동한 많은 이들이 그녀를 돕겠다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미 부활한 이들입니다.
중학교 때 개신교 전도사 한 분이 우리에게 종교교육을 해주었습니다.
그분은 한국에서 전교하는 것도 좋지만 아무도 가지 않는 오지 나라로 가서 선교사로 죽는 것이 꿈이라고 했습니다.
가족이 함께 가야 해서 그 목적을 위해 몇 년간 계속 돈을 모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젠 돈이 얼추 모여서 떠날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은행으로 돈을 찾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돈을 찾고 나올 때 소매치기들에게 몇 년 동안 모은 돈을 모두 털리고 만 것입니다.
사실 그들이 위협할 때 그동안의 모든 꿈을 접어야 함에도 돈을 순순히 내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자신이 속한 교단에서 오지로 선교를 떠나겠다면 돈을 전액 지원하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이웃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을 때만 부활한 누군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차인표 씨도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목소리라도 한번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성경 공부하고 예수님 역할의 연극도 4년을 했지만,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난 순간은 갈릴래아로 가서였습니다.
신애라 씨 대신 인도 콜카타에 가난한 이를 위해 봉사해야 했을 때입니다.
그는 가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기 가게 되었고 비행기도 혼자 1등석을 타고 갔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한 아이가 손을 내밀 때 그는
“하느님께서 너를 사랑하신다. 너는 소중한 존재다.”라는 말을 해주려고 했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께서 그 아이를 통해 그 말을 해 주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죽을 줄 아는 이는 이미 부활을 믿는 사람입니다.
아름다움을 믿는 사람이 꽃을 발견하듯, 이미 부활의 삶을 사는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안나의 집 김하종 신부도 우리나라에 와서 가장 가난하고 냄새나는 사람에게 봉사하고 안아주려고 할 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언 것과 같습니다.
만약 저도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읽지 않았다면 아직 사해쪽에서 헤매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책을 통해 내가 추구하던 것을 버리고 이웃을 행복하게 하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신학교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이 갈릴래아였고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너 내게 많이 주었니? 근데 나는 네게 다 주었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웃 사랑의 실천 안에 계셨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31일 [예수부활대축일]
복음: 요한 20,1-9
우리는 오늘 무엇에 죽고 어떻게 부활할 것입니까?
참으로 감사하고 은혜로운 부활 성야입니다.
영광스러운 주님 부활, 그러나 한 마리 나비처럼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예수님 부활 사건입니다.
저는 이번 부활 시기, 구체적인 제 삶 속에서, 공동체 생활 안에서 주님 부활의 흔적을 찾고, 느껴보기 위해 나름 노력을 해봤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넉넉한 고장 태안에 내려와 산지 벌써 만 4년이 지나갑니다.
막 도착했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도착하자마자 팬데믹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약되어 있던 피정 센터 모든 스케줄이 백 퍼센트 취소되었습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집합 금지 명령까지 내려져 피정객들은 단 한 명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건물 싸이즈가 큰 관계로 한 달 전기세가 나왔는데, 입이 딱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심각한 상황이 계속되니, 한때 관구에서는 폐업뿐만 아니라 매각까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희는 그게 무슨 소리냐? 수많은 청소년들이 다녀간 오라토리오요, 많은 살레시안들의 땀과 눈물이 흩뿌려진 성지 같은 내리를 어떻게 포기하냐?
절대 그럴 수는 없다며,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는데, 드디어 길을 찾았습니다.
집합 금지 명령이 내려졌지만, 용기를 내서 피정객들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딱 한 분이 피정을 오셨습니다.
그러다가 두분, 세분, 그리고 어느 순간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네명 미만은 가능하니, 여기 네 명 저기 네 명, 저 건너편에 네 명, 또 다른 쪽에 네 명...
그런 노력의 결과 팬데믹이 한창이던 시절에도 아무런 경제적 타격을 입지 않고, 피정 센터는 잘 돌아갔습니다.
오히려 흑자를 내서 선교 기금이나 양성 기금으로 기여를 했습니다.
오늘 같은 경우도 정말이지 하느님께, 또 멀리서 찾아오신 교우들께 깊이 고개 숙여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는 태안읍에서도 50분이나 더 들어와야 하는, 오지입니다만, 이 외딴 곳의 시골 성당을 꽉 채워서 부활 성야 미사를 봉헌할 수 있다는 것, 너무나 큰 감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바로 이런 우리 공동체의 모습에서 주님 부활의 확실한 표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한때 메말라가고 죽어가던 저희 공동체였지만, 형제들의 헌신과 희생, 많은 교우들의 기도와 협조 덕분에 다시 맥박이 뛰기 시작했고, 생기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주님 부활의 흔적은 바로 우리가 매일 몸담고 살아가는 공동체, 특별히 내 안에서 발견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제 지난 수도 여정을 되돌아볼 때마다 저는 언제나 깊은 감사의 정을 느낍니다.
한때 저는 살아있었지만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가 없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몸과 마음에 에너지가 모두 다 빠져나가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습니다.
공동체에 그 어떤 기여도 할수 없었고, 제 존재 자체가 형제들에게 짐이 된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속상하고, 그야말로 매일 매일이 숨만 쉬고 있지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세상 나 혼자뿐이로구나, 이제 내 인생 끝이로구나, 하고 좌절하고 살아가던 그때
한 존재가 제게 다가왔습니다.
따뜻한 손을 내밀어주셨고, 무한한 인내심과 배려로 저를 일으켜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분은 저를 죽음에서 부활시키기 위해 주님께서 보내주신 천사였습니다.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전기를 읽으면서, 그분께서도 한때 저와 비슷한 체험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을 보고 큰 위안이 되기도 했습니다.
한 대담 프로그램 중에 누군가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교황님 생애 중에 가장 힘들고 어두웠던 순간, 하느님이 대체 계시긴 한건가 하는 생각이
든 때는 언제였습니까?
교황님께서는 즉시 이런 대답을 하셨습니다.
“예수회 부에노스 아이레스 관구장 직무를 끝내고 나서였습니다.
1983년부터 1992년까지 만 9년 동안 황폐한 시기가 계속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어두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독일로, 독일에서 코르도바로 유배되었던 그 순간, 정말 힘들었습니다.
아주 어두운 시기였습니다.
저는 그때 깊은 패배감에 젖어 이미 제가 죽었다고 믿었습니다.
마음이 너무 힘들다보니 기도도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계속 기도했습니다.
부단히 하느님께 나를 맡겼고, 용서를 구했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특별히 감실 앞에 드리던 기도가 제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주님 부활을 경축하고 계시는 교우분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은 다른 먼 곳이 아니라 우리 삶 안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노력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죽음을 딛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나를 막고 있는 죽음의 큰 돌을 굴려내는 일입니다.
매일 우리가 접하는 인간 관계 안에서 누군가와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다면, 그것은 또 다른 측면의 죽음입니다.
내가 아직도 누군가를 진심으로 용서하지 못하고, 그로 인해서 수시로 분노하고 마음의 평정심을 잃는다면, 그것은 아직도 내가 죽음에 머물러 있다는 표시입니다.
오늘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향해서도 부단히 죽고 부활하고, 죽고 부활할 것을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나는 오늘 무엇에 죽고, 어떻게 부활할 것인지 성찰해보는 부활성야가 되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부활 대축일 낮 미사 강론>
(2024. 3. 31.)(요한 20,1-9)
<지금, 여기.>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요한 20,1-9).”
1) ‘빈 무덤’은 부활의 증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은, 시신이 그곳에 없다는 표시일 뿐이고,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합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그 믿음을 사람들에게 증언할 수 있었던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할 때 ‘빈 무덤’은 언급하지도 않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들이 직접 만났다는 것을 강조하기만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3-8).” 라고 증언합니다.
<따라서 “부활의 증거는 ‘빈 무덤’이 아니라 ‘만남’이다.” 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2) 그렇다면 8절의 “보고 믿었다.” 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빈 무덤’을 보고 요한 사도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는 단순한 뜻이라면 좋겠는데, 정말 그런 뜻일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면, 왜 옆에 있는 베드로 사도에게 아무 말도 안 했을까?
그리고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충격과 슬픔 때문에 울고 있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막달레나를 내버려둔 채 그냥 가버렸을까?
네 복음서 어디에도 “무덤이 비어 있으니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다.” 라고 증언하는 요한 사도의 말은 없습니다.
어쩌면 요한 사도는 빈 무덤을 보고 사흘 째 되는 날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을 기억해내고, 혼자 속으로 예수님 부활을 믿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증언하지 않는(또는 증언하지 못하는) 믿음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냥 혼자만의 ‘생각’일 뿐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증언으로 이어지는 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8절의 “보고 믿었다.” 라는 말은,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막달레나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었다.”가 더 타당한 해석일 것입니다.
그래야 9절의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에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9절의 ‘그들’이라는 말을, 베드로 사도와 마리아 막달레나만을 가리키는 말로 생각하면서 요한 사도를 제외할 이유나 근거가 없습니다.>
3)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과 모든 사람의 부활에 대해서 말할 때 이런 말도 했습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여기서 ‘불쌍한’이라는 말은 ‘어리석은’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안 믿고, 그 일에 대해서나 자기 자신의 부활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들, 그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받기만을 바라면서, 그것만을 얻으려고 예수님께 청원기도를 바치는 사람들은,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영원하신 주님께 허무한 것만 청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것이고,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데도 받을 생각도 안 하면서, 주님께서 안 주실 것만 청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것입니다.
<원하고 노력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데도, 그것을 외면하고, 허무하게 사라질 것만 찾는 것은 어리석고 불쌍하고 답답한 일입니다.
그것은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지는 않고 ‘빈 무덤’만 찾고 있는 것과 같다고, 또는 ‘빈 무덤’에만 집착하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살아계시는 예수님을 만나려면 우리 자신도 ‘영적으로’ 살아 있어야 합니다.>
4)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라고 약속하셨는데, 그러면 언제부터? ‘부활 순간부터’일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가 사라지시는 일을 계속 반복하시는 것처럼 기록되어 있긴 한데, 오셨다가 떠나셨다가 다시 오셨다가 또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보이든지 안 보이든지 간에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믿어야 합니다.
지금, 여기서.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