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볶이·튀김 빼고 김밥만 해야 분식집 맛이 좋아지죠”
현대미포조선의 1도크(오른쪽)와 2도크에서 배를 만드는 모습. 1도크 왼쪽의 배가 현대미포조선의 주력인 석유화학제품 운반선(PC선)이다. [중앙포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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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식집도 김밥 하나로 특화하면 김밥 마는 기술이 금방 늘잖아요. 효율과 생산성도 오르고요. 우리도 그렇게 하겠다는 거죠. 떡볶이에 튀김까지 만들기엔 우리 회사 부엌이 좁아요.”
현대미포조선의 기업설명(IR) 담당 대리의 말이었다. 박 펀드매니저는 그 뜻을 금방 알아들었다. ‘김밥’은 중형 석유화학제품 운반선(PC선), ‘떡볶이와 튀김’은 여러 다른 종류의 배, ‘부엌’은 배를 건조하는 도크를 말하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 지금까진 배를 이것저것 다 만들어 왔지만 이젠 중형 PC선으로 집중하겠다는 뜻이었다.
‘선택과 집중’ 전략을 확인한 박 펀드매니저는 주저없이 현대미포조선을 투자 목록에 올렸다. 그해 수백억원의 적자가 예상되던 회사였지만, 미래를 산 것이다. 당시 550억원이었던 현대미포조선의 시가총액은 지금 3조원이 넘는다.
현대미포조선은 1975년 옛 현대그룹의 수리 전문 조선사로 문을 열었다. 그러다 95년 배를 만드는 ‘신조’ 사업에 뛰어들었다. 중국과 동남아 조선소들이 값싼 인건비를 무기로 위협했기 때문이다. 수리 분야에서 평판을 쌓은 데다 현대중공업이라는 든든한 계열사가 있어서인지 신조 쪽에선 ‘초짜’인데도 일감을 꽤 따냈다. 여객선·컨테이너선·PC선 외에도 해저케이블설치선·해양시추선 같은 고급 기술이 필요한 선박까지 수주했다.
그게 탈을 냈다. 기술이 충분치 못한 상태에서 선발사들도 어려워 하는 선박을 수주한 게 화근이었다. 만들다 잘못돼 다시 만드는 일이 잦았다. 건조 비용은 치솟았고, 납기를 대지 못하기도 했다. 결과는 대형 적자. 2001년 626억원, 이듬해엔 745억원의 당기순손실을 냈다. 증권가에선 부정적인 분석 보고서가 쏟아졌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사업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 이게 현대미포조선의 결론이었다. 기술과 효율을 높이기 위해 한 가지 배로 전문화하기로 한 것이다.
마침 2000년 납품한 4만t급 중형 PC선에 대한 평가가 좋아 영국 석유회사 BP로부터 2002년 말 12척을 발주받아 놓은 터였다. 이를 발판으로 현대미포조선은 중형 PC선에 승부를 걸었다. 중형 PC선은 경쟁자도 적었다. 대형 조선사들은 대형 유조선에 집중하느라 신경을 쓰지 않았고, 중국은 기술이 떨어져 따라오지 못하는 ‘블루 오션’이었다. 여기에다 중동 산유국들이 정유·유화 공장을 막 짓기 시작하면서 제품을 실어나를 PC선 발주가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타이밍이 잘 맞은 것이다. 곧 손실이 확 줄었다. 2003년부터 흑자로 바뀌었다. 기술과 효율이란 두 마리 토끼도 잡았다. 한 척 만드는 데 걸리는 기간이 10개월에서 7개월로 줄었다. 중간에 다시 만드는 일이 줄면서 영업이익률은 쑥쑥 올라갔다. 2003년 5.6%에서 2004년에는 9.1%가 됐다. 수주량도 2002년 24척에서 2003년 39척, 이듬해엔 92척으로 뛰었다.
노동조합도 힘을 보탰다. 여느 조선사처럼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파업은 현대미포조선의 연례행사였다. 그러다 97년부터 분규가 사라졌다.
지난해 글로벌 금융위기로 조선 경기가 바닥에 가라앉았을 때는 노조가 임금 협상을 회사에 일임했다. 회사는 임금을 동결한 대신 직원 1인당 평균 37주(당시 시가 480만원)의 주식을 나눠줬다.
2006년부터는 다른 종류의 선박으로도 진출하기 시작했다. PC선 시장이 슬슬 포화 상태에 이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엔 차량 운반선을 택했다. 중국에서 차량 수입과 수출이 함께 증가할 것이란 분석에 따라서다. 에너지 수요도 늘 것이라고 판단해 LPG운반선도 만들기 시작했다. 다만 배의 사이즈는 철저히 중형급에 국한시켰다. 도크의 크기나 대형 조선사들과의 경쟁을 고려해서다. ‘어웨이 경기’ 대신 익숙한 ‘홈경기’를 하겠다는 전략이다. 최원길 현대미포조선 사장은 “고부가가치 틈새 선박 시장을 발굴해 만드는 배의 종류를 차근차근 늘려 가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