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글·전요섭 (성결대 기독교상담학 교수. 한국복음주의기독교상담학 회장. www.profjeon.com)
국어사전에서 ‘허무(虛無)’라는 단어는 “아무 것도 없고 텅 빔, 마음이 비어 아무 생각이 없음, 덧없음, 즉 무상함” 등을 뜻한다. 한자로는 공허할 ‘허(虛)’에 없을 ‘무(無)’가 합쳐져 생긴 말로서 “비어있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즉 공허(空虛)의 뜻으로 “아무 것도 없는 빈 곳”이라는 의미가 기본적인 뜻이다.
히브리어에서 허무는 (쉐케르)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구약 성경에 113회 사용되었다. 허무(시 119:118, 잠 11:18), 허사(렘 3:23, 삼상 25:21), 망령된(잠 6:19), 속임(잠 20:17), 거역하여(삼하 18:13), 거짓말(출 5:9, 20:16, 왕상 22:22), 죄악(시 7:14) 등 다양한 의미로 번역되고 사용되었다. 히브리어에서 이 단어는 ‘헛된’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짓’의 의미가 매우 강하게 드러난다.
또한 히브리어에서 허무를 뜻하는 단어 (헤벨)은 구약성경에서 73회 사용되었는데 전도서에서만 34회나 쓰인 것으로 보아 인생과 그 인생사가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표현하고자 한 것 같다. 본래 이 단어는 ‘수증기’ ‘호흡’을 의미하는데 이는 입김이나 안개에서 파생된 단어로써 햇볕이 비치면 그런 것들은 순식간에 사라지게 되므로 성경에서 이 단어는 ‘헛된 것’ ‘허무한 것’으로 번역된다.
아울러서 (헤벨)은 ‘우상’의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로도 사용되는데 ‘우상(렘 10:8)’ ‘허무한 것(신 32:21)’ ‘허무한 신(대하 13:9)’ ‘헛된 것(렘 10:8)’ ‘허탄한 것(렘2:5)’ 등으로도 사용되었다. 이 단어의 의미를 요약하면 허무한 것은 곧 우상이고, 인생과 재물도 허무한 것이라는 뜻이다. 신명기 32:21절에 쓰인 (헤벨)은 허무한 것(개역성경)으로 번역한 것 보다 공동번역에서는 ‘허수아비’로 번역했는데 이는 ‘우상’을 표현하는 뜻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또 허무라는 단어에 우상의 뜻을 강하게 내포한 히브리어는 (샤웨)이다. 이 말은 기본적으로 ‘허무하다(시 89:48)’ ‘헛되이(렘 6:29)’ ‘허무한 것(겔 21;29)’ ‘허탄한(겔 12:24)’의 뜻과 ‘거짓(사 30:28)’ ‘궤사(시 144:8)’ ‘망령되이(출 20:7)’ ‘특별하게 곤고(욥 7:3)’ ‘무효하다(신 5:11)’라는 의미를 가지고 54회 사용되었다. 유사 단어인 허망은 ‘거짓이 많고 망령됨’ ‘허황하고 미덥지 아니함’ ‘허탄(虛誕)함’의 뜻으로 허무에 비하여 ‘거짓’의 의미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헬라어로 허무는 (마타이오스)로 사용되는데 이는 70인역(LXX), (헤벨), (샤웨)를 옮긴 말로써 ‘효력이 없는’ ‘진실성이 없는’ ‘성공이 없는’ 등의 뜻으로 사용되며, 영어로는 devoid of force, devoid of truth, vain 등으로 번역된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용도를 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약 1:26, 고전 3:20, 딛 3:9)’ ‘헛되고(고전 15:17)’ ‘망령된 행실(벧전 1:18)’ ‘헛된 일(행 14:15)’ 등으로 쓰였다.
여기서 망령된 행실이나 헛된 일이란 이교도들의 신들과 그것들에 대해 예배하는 행위를 내포하고 있는 것을 보면 히브리어에서 ‘우상’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마타이오스)에서 유래된 (마타이오테스)는 '허망한 것’(엡 4:17), ‘허무한 데’(롬 8:20), ‘허탄한 것’(벧후 2:18)으로 신약성경에서 3회 사용되었지만, 인생과 인간의 무가치성에 대해 사용된다.
‘허무’의 뜻을 가진 성경 용어들을 살펴보면 허무는 주로 ‘우상’을 가리키는 용어로써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고, 텅 빈 것이며, 거짓된 것이므로 우상을 섬기는 일도 허사이다. 우상은 허망하여 그 속에 아무 것도 없어 말할 줄도 모르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돌이나 나무토막에 불과한데, 그러한 우상 앞에 절하며, 섬기는 인간의 행위는 또 얼마나 더 허망한가 하는 것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또한 인생과 모든 세상사(世上事)가 허무한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전도자는 “해 아래 새 것이 없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고 탄식했다. 인간의 숨결은 허무한 것이며(시 62:9), 인간이 땀 흘려 모은 재물도 역시 허무한 것이어서 마치 안개와 같다(잠 21:6). 시편 기자도 인생은 허무한 것이며(시 89:47), 인생이란 지나가는 그림자 같고(시 144:4), 인생이 주 앞에서는 없는 것 같다고(시 39:5) 그의 인생철학을 설파하였다.
신약성경에서도 베드로는 이사야서 40장 6~8절을 인용하여 모든 육체와 그 인간의 부귀영화는 꽃과 같이 시드는 것이나(벧전 1:24) 오직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지혜 자들의 생각들도 공허한 것이며(고전 3:20), 어리석은 논쟁이나 싸움도 역시 헛되다(딛 3:9).
사실상 그리스도인의 믿음도 부활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지 않으면 헛되다. 우상과 우상숭배는 헛된 것(행 14:15)으로써, 그것들이 비록 선조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이라 할지라도 모두 헛된 것으로 묘사된다(벧전 1:18). 인간의 욕망은 ‘구멍 뚫린 항아리’와 같다. 재물로 인한 만족이 항구성이 없음을 말하는 것은(전 4:13-16) 이제 더 이상 지혜자만의 지혜가 아니다.
현대인들은 그 무엇에도 만족할 만한 성취감을 못 느끼지 못한다. 사람들은 술집을 전전하며, 마음의 ‘공허’를 채우려고 술을 마시지만 공허를 채울 수 없다.
어느 회사 사보의 조사에서 직장인의 78.9%가 한 주일에 한두 번은 술좌석에 참석한다는 통계가 발표됐다. 또 직장 남성의 73%가 흡연자이고 그중 68%가 하루 한 갑 이상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수치는 일반 국민 남성 흡연율인 61.2%보다 12%나 높은 것이다.
세계에서 제일 부유하다는 덴마크는 인구 500만 명밖에 안되는 이 조그만 나라에서 자살자 수가 1년에 3천명이 넘는다. 이 세상에서 제일 잘 사는 나라,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이 풍족한 나라에서 이렇게 자살자가 많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삶의 만족이란 물질의 부요함에 의한 것이 아님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세상에서 그 어떤 것에 가치를 두고 끊임없이 노력하여 목표에 도달한다고 해도 그것이 사람의 영혼에 진정한 만족을 가져다주지는 못하며, 오히려 더 큰 허무와 깊은 회의에 직면할 뿐이다. 미국의 유명한 작가 Ernest M. Hemingway(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부와 명예를 다 얻고도 권총 자살한 사건은 이러한 것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비만과 그로 인해서 발생되는 성인병은 부귀질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비만해지는 이유는 병적인 현상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소비하는 열량보다 섭취하는 것이 더 많기 때문에 발생된 결과이다. 즉 많이 먹기 때문이라는 간단한 이유이다.
사람이 많이 먹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마음에 허전함을 느끼는 정서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목마른 정서, 배고픈 정서, 허전하다는 감정이 비만의 근본적인 이유라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왜 이 같은 정서를 느끼는가? 이에 대해서 ‘사랑의 결핍’ 때문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사랑의 결핍 때문에 사람들은 공허를 느끼는 것이다. 도박 중독이나 마약, 알코올 중독에 빠지는 사람들도 처음에는 허전함,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시작하였다가 점점 더 깊어지는 공허를 채우기 위해 더 많은 양의 알코올과 마약을 필요로 하다가 ‘중독’이라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사랑이 부족하여 허전함을 느끼며, 괴로워하는 사람이 그것을 채우기 위해 다른 것에 집착하고 쾌락에 몸을 던진다고 해서 그 공허가 채워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이 필요한 자리에는 사랑이 들어가야 비로소 채워 질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 가졌어도 하나님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공허를 느낀다. 즉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모시지 못했다면 진정한 생명이 없음으로 항상 텅 비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경은 인생의 허무와 그 공허함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셨다.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은 허무한 인생을 대표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여인은 단지 ‘한 여인’으로 예수님 앞에 나타났지만 마치 오늘날 ‘모든 사람’을 대변하는 듯 하다. 인생의 참 만족과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심각한 ‘갈증’에 시달려 샘물을 마셔보아도 해갈되지 않는 갈증을 느끼고 있는 현대인의 대변인이다.
그래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내게 주사 다시는 갈증 나지 않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여인의 절규는 현대인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이 여인은 ‘실존적 공허’를 가진 자로서 실존주의 심리학자 Victor E. Frankl(빅토르 프랭클)은 이것을 ‘실존적 진공상태(existential vacuum)’라고 불렀다. 영적인 갈증을 채우지 못한 인생은 진공 상태에 있으므로 인생의 만족은 있을 수 없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인간의 ‘메마른’ ‘구멍 뚫린’ ‘진공 상태에 있는’ 항아리 같은 마음에 샘물을 채울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 공허가 메워지고, 샘물이 넘쳐 날 수 있다. 마음의 평안과 기쁨, 만족과 행복은 영적인 것이요, 환경이나 물질적인 또는 사회적인 그 어떤 것이 아니다.
부귀, 영화, 공명, 지식, 문화, 쾌락 등 그 무엇이라도 모두 몸에 끼어 입은 옷에 불과한 것이다. 옷은 아무리 끼워 입어도 마음을 채울 수는 없다. 밤이 새도록 술잔을 들어부어도 그 속은 채워지지 않는 것이다. 마음속에 생수이신 예수님을 모셔들여야만 그 마음이 채워지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생수가 넘쳐나기 전까지는 결코 진정한 행복도 기쁨 도 삶의 의미도 없을 것이다.
그 어떠한 즐거움도 풍요도 실로 안개같이 사라지는 것이며,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은 욕망만 키우는 갈증을 보태주는 ‘바닷물’과 같을 뿐인 것이다. 인생이 허무한 이유는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의식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Merton P. Strommen(스트로멘)은 자아 정체감 형성을 방해하는 요소 중에서 가장 큰 이유가 되는 것은 개인적인 실패 뒤에 오는 좌절감이라고 했다. 전도서 2장 23절에 ‘일 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노력의 무용함을 일컫는 말로써 열심히 수고하여 재물을 축적하지만 어김없이 찾아오는 죽음과 동시에 그의 재산은 후손이나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시편 기자는 “사람이 치부하여 그 집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말지어다. 저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 영광이 저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저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 역대의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영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16-20)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날 때는 마치 허무를 증명이라고 하는 듯, 손바닥을 활짝 편 채 힘없이 죽는다.
“나는 이 세상으로부터 한 가지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한 가지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종국엔 모든 것을 버릴 수밖에 없음에도 끝까지 움켜쥐려고 하는 인간의 끝없는 욕심이 허무의 깊이를 더하는 게 만드는 것이다.
Pascal(파스칼)은 “인간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의 공백이 있다.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다”고 말했고, Aurelius Augustinus(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은 “내가 주님 안에 있기까지는 아무런 평안도 만족도 없다.”라고 말함으로써 인간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공백과 공허, 허무를 극복할 수 있는 존재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채움 받기 원한다면 먼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세상의 욕심들을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공허를 느끼게 될 것이다. 왜냐면 지금까지 여러 가지 표현으로 말한 ‘세상의 것’ 혹은 ‘땅의 것’은 아무리 채워 넣어도 일시적인 행복감은 있을지 모르지만, 오히려 인간을 더욱 공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허무주의자들은 인생 자체가 허무한 것이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만족을 얻을 수가 없고, 노력하고 이루어 놓은 모든 것도 따지고 보면 시간을 낭비한 것이라고 본다. 창조주 하나님의 뜻에 맞게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한 사람은 그 인생을 허무하다고 평가하지 않는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생활할 때의 모습과 그로 인한 결과가 허무이다.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욕망을 버려야 한다. 전도서 1장 4절에 인간이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하고 욕심을 부리는데 이것의 헛됨을 알고 욕심을 버릴 것을 말하고 있다. 5~6절에는 인생의 짧음을 강조하며, ‘해’나 ‘바람’은 당장에는 위세가 대단한 것 같으나 곧 사라지고 만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인생도 그와 같음을 말해 주고 있다.
현재의 삶이 아무리 화려하고 번성한 것 같아 보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삶은 전도자가 말하듯이 헛된 것이 되고 만다. 7~8절에서는 채울 길이 없는 인간의 욕망에 대해서 말해 주고 있다. 인간은 유한하나 그의 욕망은 무한하므로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한다 하더라도 허무(불만족)에 빠진다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강줄기를 통하여 엄청난 량의 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지만 바다를 채우지 못하는 것처럼 인간의 욕망은 그 무엇이 들어온다고 해도 채워질 수 없는 끝없는 것이다. 결국 채우지 못하여 허무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허무를 미리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랬다면 욕심을 줄였을 것이다.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전도서 1장 9~11절은 인간의 능력의 유한성을 말하고 있다. 개인이 뛰어나서 뽐내고 또 그의 업적이 대단하다고 해도 영광은 길지 못하며, 그것을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으면 무의미한 것이 된다. 또한 그 영광을 인정할 사람들이 모두 유한한 존재들이고 자신의 일에만 집착하므로 인간의 영광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면 결국 헛된 것이 되고 만다.
허무라는 것은 자신의 살아온 나날들을 되돌아 볼 때 성취감이나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며, 결국 인정받고 싶은데 인정받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영원히 인정받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누구에게 인정받고 싶은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해서 세상의 추악하고 더러운 수단과 방법으로 인정받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사단적이고 세속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잠시 동안 인정받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허무나 허탈감에 빠지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따라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허무 속에서 빠져서 무력해 지는 것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므로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도우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깨달아야 한다(시 8:1-9). 하지만 혼자 힘으로 허무를 완전히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그리고 허무를 극복하게 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면서 이를 물리쳐야 한다. “하나님! 제가 허무에 빠지기를 원치 않으시지요? 제가 허무에 빠지지 않고 늘 밝고 명랑하고 승리하면서 성실하게 주님을 섬기기를 주님께서는 원하시지요?” 주님의 뜻을 물으면서 허무를 극복하는 자신의 모습을 마음속으로 그려야 한다.
아울러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 5:8-9).”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엡 5:11).”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는 말씀대로 자신의 마음을 허무에 빠뜨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만들려는 악한 영(evil Spirit)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적하고, 책망하며, 물리쳐야 한다.
하지만 한 번 허무를 대적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완전히 끝나는 것이 아니고 다음에는 더 고차원적이고 지능적으로 사단이 인간을 허무에 빠뜨려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분산시키고 하나님으로부터 이격시킬 것이다. 허무에 압도되어 하루하루를 살다보면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모습이 흐려지고 그 음성도 점점 작아지게 된다. 그럴 때 마다 계속적으로 허무를 대적해야 한다.
이것은 대단히 실제적인 것이어서 마귀를 대적할 때에 허무에 빠지려는 마음이 물러가게 될 것이다. “나를 허무에 빠뜨리려는 악한 영! 나는 그리스도안에서 성실함과 담대함으로 승리할 것이다. 이것을 앗아가는 영! 나를 허무에 빠뜨리려는 너의 궤계에 나는 빠지지 않을 것이다. 너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묶임을 받고 쫓겨날지어다!”
이와 같이 허무가 생길 때마다 외치고 선포하고 대적하면서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 이러한 논박과 대적이야말로 허무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성경적인 방법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