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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도 총독 앞에서 심문 받는 바울
사도행전 24:27~25:12
오늘 본문 말씀은 로마 총독 벨릭스가 임기를 마치고 떠나고 그 후임으로 온 베스도 총독 앞에서 고발자들인 유대인들과 사도 바울이 재판을 받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몇 가지 영적 교훈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모든 일을 섭리하신다는 점을 배울 수 있습니다.
24장 27절과 25장 1절을 다시 함께 읽겠습니다.
“이태가 지난 후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받으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베스도가 부임한 후 삼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우리가 지지난 주일에 살펴본 대로 벨릭스 총독은 탐욕스럽고 잔인한 사람이었습니다. 벨릭스는 사도 바울을 이년 동안이나 가이사랴의 헤롯 궁전 감옥에 구류하여 두고서 뇌물을 받으려고 그를 자주 불러내어 말을 시켰으나 정작 복음 진리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이 없었기에 세월만 낭비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의 학정과 탐욕과 무자비함 때문에 유대인들의 원성을 사서 네로 황제에게 그 사실이 알려져서 결국 총독의 자리에서 해임되고 로마에 소환되어서 처벌받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죄가 없는 사도 바울이 이태 동안이나 벨릭스 총독의 욕심 때문에 또한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얻을 계산으로 가이사랴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 시간 낭비인 것같이 생각되어집니다.
하지만 이 이 년 동안이라는 기간이 하나님 나라의 유익을 위하여 꼭 필요했던 기간입니다. 그 이년의 여유 기간이 정말로 필요로 한 분이 있었으니, 곧 바울의 동역자이자 친구인 의사 누가였습니다. 누가는 본래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어서 초대 교회 역사에 대한 내용을 기록하여 놓을 필요성을 깊이 느끼고 이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기록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의 이차 전도 여행 때에 뒤늦게 사도 바울의 전도 여행에 동참하기 시작하였던 사람으로서 복음의 근원이신 예수님과 그 후에 세워진 초대 교회의 형성 과정에 대하여 자세한 사실을 확인하고자 하는 욕구가 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이 가이사랴에 갇혀 있는 그 이년 동안에 가까이에 갈릴리 지방도 있고 예루살렘도 멀지 않았기에, 의사 누가는 역사가로서 철저한 고증 정신을 가지고 사실 확인을 직접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를 만나고 주님의 부활을 직접 눈으로 보았던 이들도 만나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 대하여 출생부터 부활 승천까지의 내용을 자세히 살폈습니다. 또한 초대 교회의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사도 베드로의 초기 사역에 대한 증인들을 만나서 사도행전의 초반부에서 사도 베드로 중심의 전도 활동을 구체적으로 알아갔습니다. 누가는 분명 가이사랴에 네 딸과 함께 살고 있는 전도자 빌립과 깊이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고 가이사랴의 백부장 고넬료에 대한 이야기도 가이사랴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확인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도 수시로 가서 초기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발전 과정도 하나씩 되짚어 확인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역사가 누가의 치밀한 고증을 통하여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내용이 거의 이 때에 완성됨으로써 예수님 지상 사역과 그 후 초대교회 시대에 복음이 어떻게 전파되었고 교회들은 어떻게 세워졌는가에 대한 분명한 역사적 기록이 정립되어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함으로써 그 후 이천년이 넘는 동안 예수님의 지상 사역과 기독교회 공동체의 성장 과정에 대한 분명한 정보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만약 가이사랴에서 사도 바울이 이년 정도 갇혀서 의사 누가가 초대 교회의 예수님의 사역의 전승과 초대 교회의 형성 과정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조사할 기회가 없었다고 한다면 그 후 교회는 기준이 없이 중구난방으로 성장하다가 흩어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그의 선하신 뜻을 이루기 위하여 섭리적으로 일하신다는 점을 믿고서, 종종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련과 역경을 인하여 답답한 상황을 만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조용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기다리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의 방식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주님의 뜻이지만, 그 과정이 투옥의 과정이 있고 로마의 군대의 호송을 받아서 가게 되고 배타고 가는 길에 유라굴로 폭풍을 만나 죽을 뻔하다가 겨울 내내 몰타라는 섬에서 머물다가 로마에 가서 또 이태 동안이나 로마 감옥에서 전도하던 중에 로마의 귀족 자제들로 구성된 시위대와 로마 황실에 전도하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있고 선하신 계획이 있지만, 그 뜻을 이루어가는 과정은 우리가 짐작하지 못할 때가 많고 전혀 예상치 못한 경로를 통과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의 삶 속에서 예기치 아니한 장애와 지연과 정체, 역경의 시간들은 결코 쓸모없는 낭비의 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신성한 시간이요 하나님의 때가 채워져가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과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우리의 그릇이 만들어가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그 낭비되고 허비되는 것 같은 시간을 믿음과 소망과 인내와 감사함 중에 기도하며 지내야 할 것입니다. 고난 중에 도리어 주님을 더욱 찬양하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우리 삶 속에서 성취되기를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주의 종들과 주님의 참 성도들은 무고한 고발을 당할 수 있음을 항상 기억하고 성결을 잘 지켜야 하겠습니다.
이제 벨릭스 총독에 이어서 후임으로 온 베스도는 매우 활동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가이사랴에 와서 로마 총독에 부임하자마자 그의 영지인 유다 지역의 중심 도시인 예루살렘을 곧장 방문합니다. 그래서 그가 맞닥뜨려야 하는 유대인들의 본거지인 예루살렘에 가서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인 대세장들과 유대인 장로들과 고관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유대 지도자들은 만나자마자 사도 바울의 건을 이야기하면서 바울을 가이사랴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데려와서 재판을 받도록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는 그들이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오는 도중에 매복하여 있다가 바울을 죽이려는 흉악한 계획을 이루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베스도는 다행히 그들의 요구를 물리치고 유대인들 중에 유력한 자들과 함께 가이사랴에 가서 거기서 재판을 열자고 제안합니다. 베스도가 처음 부임하자마자 요구한 유대인들의 첫 요구를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베스도가 바울의 생명을 지키는 결정을 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돌보시는 은혜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팔 일 내지 십일 동안 예루살렘에 체류하던 베스도 총독은 가이사랴에 돌아온 다음날 곧장 재판정을 열어서 함께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 고발자들과 사도 바울을 불러서 심문을 합니다. 그 때에 그 유대인들은 여러 가지로 사도 바울을 고발하였으나 아무 증거를 제출하지 못합니다. 7절과 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하되 능히 증거를 대지 못한지라 바울이 변명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여기서 보면 유대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바울을 천하에 두어서는 안될 불경건한 자요 로마의 통치에 해악을 끼치는 불순분자로 만들고자 이것 저것 없는 죄목을 만들어서 고발하였습니다. 바울은 성전을 더럽힌 자요 율법을 모독한 자일 뿐 아니라 해외의 여러 로마 제국의 도시들마다 다니면서 예수라는 다른 임금이 있다고 헛소문을 퍼뜨려서 로마 제국의 통치 질서를 문란케 한 반역죄인으로 처형시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을 진실로 섬기는 주의 종들에게 늘 일어나는 공격들입니다. 마귀와 그 하수인들은 예수님과 그의 진실한 종들을 향하여 이렇게 늘 공격하곤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성도들에게 가르치기를,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장로에 대한 고발은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디모데전서 5:17~19)
라고 가르치라 명하였던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에 대하여 중상 모략을 하고 악한 소문을 만들어 퍼뜨리는 행위는 마귀가 하는 일이요 또한 지금도 이단과 사이비에 속한 자들이 지금도 주님의 몸된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자주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참 백성 된 우리는 사도의 가르침대로 다른 사람들의 소문만 듣고 함부로 주의 종과 교회 지도자들을 비방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을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주의 종들에 대한 일에 대하여 항상 주의 깊게 진실 여부를 확인하고 그 증인들이 분명한 후에야 교회의 정상적인 징계 절차를 진행하여 바로잡고 회개할 수 있도록 권면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주의 종과 교회 지도자들은 마귀와 세상이 항상 노리고 있음을 기억하고 범사에 조심해야 합니다. 깨끗한 양심을 지켜가도록 하고 세상의 비방을 받지 않도록 덕을 세우도록 행실도 조심해야 합니다. 디도서 2:7 이하에 이르기를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디도서 2:7,8)
고 하였습니다. 주의 종들과 교회의 장로, 권사, 집사 등 교회의 직분자들은 그 행실 속에 진실함과 선함과 아름다움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고 경건한 신앙의 비밀이 스며 있음을 세상 사람들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라는 사람의 입에서 이기적이고 거칠고 상스럽고 음란한 말이 툭툭 나오고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다툼과 자기 자랑과 교만함이 그의 몸에서 배어 나온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질 것이고 비방과 멸시가 주님의 이름과 교회에 쏟아질 것입니다. 마귀와 세상은 없는 일까지도 만들어서 주님의 성도들과 주의 종들과 교회를 공격하려고 늘 틈을 엿보고 있으니,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서 틈을 줘서는 안됩니다. 다니엘처럼, 사무엘처럼, 바울처럼 기회를 주지 말고 신앙과 양심 앞에 거리낌이 없도록 항상 성결하게 자기를 지키는 데 온 힘을 다 쏟아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성도는 정당한 목적을 가지고 세속 법정의 재판에 호소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변명을 듣고서 베스도 총독은 충분히 사도 바울의 무죄함을 알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고발인인 유대인과 피고인인 바울 간의 짧은 대화만 소개되고 있으나 상당히 긴 변론이 이어진 것 같습니다. 이는 이어지는 25장 18절과 19절에 보면, 베스도 총독이 아그립바 왕의 예방을 받고서 바울의 재판 건에 대하여 이야기를 할 때에 진술하기를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고 한 것을 보면, 베스도 총독의 재판 당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서도 사도 바울이 진술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재판 중에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증거할 기회가 왔을 때에 주님의 부활 사실을 유대인 고발자들과 베스도 총독 앞에서도 분명히 증언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총독도 사도 바울이 이번에 이렇게 재판받는 것이 종교적인 문제 때문이지, 정치적인 소란을 피워서 로마 제국의 안정을 해치는 불순분자가 아닌 것을 총독도 분명히 알아챘던 것이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총독은 바울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재판을 종결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스도는 자기의 정치적 이득을 얻을 심산으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심문을 받겠느냐고 묻습니다. 분명히 사도 바울이 무죄라는 것도 알고 그가 이년 전에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까지 이송된 이유가 그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 때문이라는 것을 이런 저런 경로로 알았을텐데도 사도 바울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이송하여 재판하게 하려는 것은 베스도 역시 사도 바울에 대한 재판 것이 유대인들의 초 관심사인 것을 알고 유대인들의 바람대로 해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에게 의견을 물어본 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이기에 총독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재판을 진행할 것인가를 묻는 총독의 질문을 받았을 때 단호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10절로부터 12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대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니라 하니라”
베스도 총독이 자기의 정치적 이득을 위하여 사도 바울에게 예루살렘 행을 제안하였을 때에 사도 바울은 자기의 뜻을 확실히 선언합니다. 그는 로마의 제국의 통치자 가이사 네로에게 상소하여 자기에 대한 최종 판결을 받겠다고 요청한 것입니다. 그는 로마 시민권자이기 때문에 자기의 재판 건에 대하여 최종 항소를 황제의 재판 자리에 올릴 수 있는 권한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만약 베스도 총독의 제안대로 한다면 그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매복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손에 살해될 것을 알기 때문에 단호하게 총독의 제안을 거절하고 로마로 가서 가이사 앞에서 최종 재판을 받겠노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 결과 베스도 총독은 자기의 배심원들 곧 그의 법률적 조언자들과 상의한 다음에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로마에 가서 최종적인 판결을 받도록 로마 이송 판결을 내립니다.
이렇듯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서 가이사 법정에 호소한 것은 그의 사사로운 이득을 위한 것이 아니요 정당한 권리를 행사한 것입니다. 그가 자기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하여 그에게 주어진 로마 시민권의 권리를 사용하여 유대인들의 부당한 정치적 압력이 없는 로마에 가서 최종 판결을 받겠다는 결정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도가 이렇게 결정을 한 것은 그가 예루살렘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밤중에 그의 곁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이르신 바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는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주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난 결정이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일찍이 고린도교회에 있을 때에도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파할 소망을 갖고 있었기에 이렇게 로마에 가서 재판 받기를 요청하게 된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른 말씀 중에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법정에 출두하고 시비를 가리는 것을 책망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 사도가 행한 상소 건과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쓴 편지의 내용이 상충하는 것은 아닌가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서 사도 바울이 성도끼리 세상 법정인 고린도 시의 세속 법정에서 서로 다툰 것을 비난한 것은 그들이 사사로운 욕심을 내어 서로 성도끼리 비판하고 헐뜯는 일을 세상 사람들 앞에서 행한 것에 대한 책망인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끼리 서로 지혜롭게 조정하여 협의하고 그래도 되지 않으면 교회의 지도자들인 주의 종의 중재 하에 잘 결정함으로써 평화롭게 해결하라는 취지입니다. 믿는 사람들까지 서로 죽을 듯하게 싸워가면서 세상 법정에서 믿는 자들의 인격의 형편 없음을 다 드러내는 것은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기에 사도가 그런 일은 불의한 일이요 신앙을 저버린 행위라고 책망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교회의 분쟁으로 인하여 목사와 장로와 성도들 간에 입에 올릴 수 없는 비방과 비난을 하는 경우가 세상 법정에서 자주 나타나서 믿지 않는 재판장이 교회 법을 들먹이면서 쌍방을 책망하는 일들이 있다고 하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장차 주님으로부터 책망이 있을 것이니 우리는 그런 일은 삼가야 할 것입니다. 차라리 속임을 당하거나 차라리 손해를 보는 것이 낫지 않느냐고 사도가 말씀한 바 있습니다(고린도전서 6:6,7). 그러므로 우리가 차라리 손해를 보더라도 주님의 이름에 먹칠하는 법정에서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일은 피해야 하겠습니다.
다만 사도 바울의 이번 경우에는 사도 바울에게 덮어 씌워진 신성모독죄의 비방과 로마 법체계를 흔드는 정치법이라는 오명을 벗어내야만 복음 전파의 정당성이 보호받고 사도 바울 역시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계속 이룰 수 있기에, 이처럼 세속 법정인 로마의 가이사 법정에 상소를 당당하게 요청한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신앙과 자신의 결백과 무죄함을 위하여 필요할 때에는 법에 호소하는 것이 절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될 수 있는 한 소송을 피하고 고소 고발을 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의 진실함과 주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필요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법률 체계도 선용하는 것은 정당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도 신앙의 양심과 지혜와 건전한 판단력을 가지고 살펴서 행하도록 합시다.
기억나는 것은 얼마전 돌아가신 부산의 수영로 교회의 정필도 목사님은 교회를 섬길 때에 많은 고소 고발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는 말없이 그 고소 고발을 당하여 많은 고생을 했지만, 무고하게 없는 말을 지어낸 사람에게 일체 무고죄로 맞고발을 하지 않고 끝까지 조용히 대응하곤 했다고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하나님은 결국은 정필도 목사님에게 다 이기게 해주시고 그의 사역에도 복을 주시곤 하셨고 대적하는 자들은 스스로 물러가게 하시곤 하셨다고 합니다.
오늘날은 소송 남발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할 수 있거든 지혜롭게 행하여 남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게 조심합시다. 이를 위하여 욕심을 부리지도 말고 분별하여 남의 말을 쉽게 믿지 말고 좀 손해가 낫다고 하여 경찰 부르고 고소 고발 남발하지 말고 차분하게 모든 일들을 처리하고자 힘씁시다. 할 수 없이 재판하게 될 경우에는 우리 자신의 명예와 신앙과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꼭 필요한 경우에만 하도록 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재판하는 과정에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 도리어 큰 정신적 고통을 당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지곤 하니, 때로 지체되고 때로 돌아가고 때로 곤란과 역풍을 만날지라도 주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잠잠하고 기도하면서 기다립시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과정을 친히 개입해주시고 더 좋은 결과, 더 선한 결과, 가장 완전한 인도하심으로 우리의 길을 인도해주실 줄 믿습니다.
또한 신실하게 주님을 섬길 때 반드시 주의 종과 성도인 우리에게 마귀와 세상이 공격할 거리를 찾아 없는 말을 지어 공격하고 넘어뜨리고자 하는 일이 생길 수 있음을 기억합시다. 그래서 시빗거리를 주지 않도록 늘 깨어 조심하고 늘 성결을 지켜 행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런 일을 당할지라도 낙심하지 말아야 하며, 주의 종과 주님의 신실한 교우들을 향한 쓸데 없는 비방들에 쉽게 현혹되지 말고 도리어 주의 종과 진실한 성도들을 잘 지켜 보호하는 방패막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세상에서 신실하고 지혜롭고 주의 깊게 행하여 주의 이름에 비방이 돌아가지 않도록 하여 세상 법정에 서지 않도록 하되, 우리의 신앙과 양심에 비추어 아무런 꺼림이 없이 행하였으나 세상 법정에 서게 될 때에는 세상 법정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법 제도이니 마음에 부담 없이 당당히 임하여 우리의 누명을 벗고 주님의 이름에 아무런 해가 되지 않도록 선용하시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사는 나날 동안에 이런 저런 많은 시련과 도전들이 가로막고 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성결한 중에 양심을 따라 행하고 주님 주신 사명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며 살아갈진대 하나님께서 우리와 언제나 함께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정해주실 것이요 우리의 대적들을 주님께서 친히 다루어주실 것이요 우리의 공의를 주님께서 정오의 빛같이 환하게 드러내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