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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지구는 둥글며 서쪽-동쪽이 연결"
콜럼버스 시절에 천문 지리학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영향력을 끼친 학자는 당대의 그 어느 누구도 아닌 2세기 경의 그리스 학자였던 프톨레마이오스(Claudius Ptolemaeus: 90–168[추정])였다. 무려 천 년이 넘는 시간 간격을 뛰어넘어 그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그 먼 옛날의 고대 그리스 학자들이 얼마나 놀라운 학문적 업적을 이룩했는지 경탄을 하게 된다. 도대체 이 학자의 연구결과가 어떻게 17세기 유럽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던 것일까? 그 과정을 알려면, 14~15세기의 르네상스 운동을 살펴봐야한다.
» 프톨레마이오스가 파악한 '세계' 지형을 그린 15세기의 지도. 출처/ Wikimedia Commons
14세기 이후 유럽은 지적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다. 자신 스스로를 ‘인문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출현하면서 그동안 권위의 상징이었던 파리대학, 옥스퍼드대학, 케임브리지 대학 등 이른바 '고대 대학들(Ancient Universities)'이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그들 스스로가 창안한 학문이 아니라 오래 전 고대 그리스와 로마문명에서 성취했던 찬란한 학문적 성취에 대한 부흥을 부르짖었다. 이른바 르네상스 운동이 시작됐던 것이다. 그들은 그동안 유럽에 알려져 있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 관련 서적이 오류 투성이이거나 아주 중요한 텍스트들이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원본을 직접 번역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는 대부분의 고전들은 이슬람 번역판이 재번역된 것들이었다. 이런 번역작업은 성서를 비롯하여 인문, 자연, 천문, 지리학 등 다방면에서 이루어졌는데 특히 지리학 분야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이 최초로 유럽에 소개되었다.
르네상스 시대 발굴된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은 그 당시 민족지학자들을 새로운 경지로 이끌었다. 고대 그리스 지리학 서적을 집대성하여 알렉산드리아에서 편찬된 지리학에서 우리는 대천문학자이기도 했던 프톨레마이오스가 지도 제작에 고도의 과학자적 역량을 발휘했다는 진면목을 엿볼 수 있다. 지리학에는 지구가 구체라는 사실이 처음부터 당연한 듯 전제되어 있어 2세기 경의 고대 그리스에서 이 문제는 더 이상 논란의 대상도 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관심은 실용적 측면에서 어떻게 지구의 3차원적 둥근 표면을 2차원에 그리느냐하는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이는 오늘날 널리 쓰이는 지도 제작의 투사기법의 원조로 평가할 수 있다.
» 프톨레마이오스.
<지리학>은 15세기 초에 인문학자 야코보 단젤로(Jacopo d'Angelo)에 의해 최초로 라틴어 번역이 이루어졌다. 15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최초의 지도들 뿐 아니라 당대에 알려진 이른바 제2종의 지도들이 첨가되면서 <지리학>은 매우 풍부한 자료집이 되었고, 지중해 너머로의 항해가 진전됨에 따라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결국 지구가 구체임을 전제로 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모델이 콜럼버스 시대에 가장 인기있고,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 모델에는 결정적인 오류가 있었다.
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이 많은 오류 덩어리였다고 폄훼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는 이 책의 유일한 덕목이 콜럼버스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여 그에게 확신을 불어넣어준 것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지리학>에는 지중해가 원래보다 너무 길게 그려져 있고, 인도양 남쪽은 막혀 있다고 되어 있으며, 유럽 서쪽으로 신비의 동방에 도달하는 거리가 짧게 계산되어 있다. 그런데, 실제로 콜럼버스에게 잘못된 확신을 심어준 것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오류가 아니라 그의 책에서 마리누스(Marinus)라는 지리학자가 지구 반지름을 프톨레마이오스 자신보다 훨씬 작게 생각했다는 점을 논박한 부분이었다. 이 대목은 오히려 콜럼버스로 하여금 마리누스가 옳다는 확신을 갖게 했고, 그의 무모한 도전에 큰 동기 부여가 되었다.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마리누스가 옳았다는 것을 자신이 증명했다고 뿌듯하게 생각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저술만큼 권위와 파급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콜럼버스가 대항해를 꿈꾸고 있던 시절에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새로이 번역되어 읽히고 있던 지리서를 통해 에라토스테네스라는 고대 그리스 학자의 지구 측정치가 지리 학자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 기원전 276–기원전 195[추정])는 기원전 235년에 또다른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통치 아래에 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관장이 된 인물이다. 당시 이 직책은 고대 세계의 학자로서는 차지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에 해당되어 오늘날의 하버드 대학 총장에 견줄 만하다.
» 19세기에 복원된, 에라토스테네스의 세계 지도. 출처/ Wikimedia Commons
그는 수학,천문학, 철학 등 다방면에 연구업적을 남겼으나 오늘날 세계 최초로 지구 크기를 측정하는 방법을 기록으로 제대로 남긴 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프톨레마이오스와 마찬가지로 그도 지구가 구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전제하고 있었다. 그는 이런 전제 하에 남북 방향으로 멀리 떨어진 두 지역에서 동일한 날 동일한 시각에 관찰한 태양이 지면과 이루는 각이 서로 다를 것이란 점에 주목했다. 만일 그 각도 차이를 잴 수 있고, 두 지역 사이의 거리를 알 수 있다면, 아주 간단한 기하학적 방법에 의해서 지구 둘레 길이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에라토스테네스는 하짓날 시에네(오늘날의 아스완)와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양의 각도를 재고, 두 지역간의 거리를 재서 지구의 원주길이를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거의 같은 수준으로 측정하는데 성공했다.
» 에라토스테네스.
바로 이 에라토스테네스의 측정치에 근거해 콜럼버스의 계획에 반대한 스페인 궁정 자문위원들 대부분이 콜럼버스의 계획에 반대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스페인에서 서쪽으로 항해하면 인도에 도달할 것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심지어 그 항로를 나타내는 지도를 제작했던 최초의 인물이 에라토스테네스였다! 결국 그의 측정치가 너무 크기는 했지만, 에라토스테네스도 사실상 콜럼버스로 하여금 인도를 찾아 대항해를 하게 한 멘토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에라토스테네스의 지구 둘레길이 측정은 지금부터 2,000년이 넘는 오래전에 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밀했다. 그런데, 그의 계산에 사용된 몇가지 전제들은 오류를 갖고 있었으며, 이상하게도 이런 오류들이 교묘히 서로 상쇄되어 매우 정확한 지구 둘레길이가 나오게 된 것이다. 이 부분은 에라토스테네스가 정말로 지구 둘레길이 측정방법을 최초로 창안한 사람인지에 대해 의문을 불러일으키며,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에 집중적으로 논의하도록 하겠다.
앞 글에서 콜럼버스와 동시대의 보수적인 학자들도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여기서 보수적인 학자들이란 당시 서구를 지배했던 가톨릭의 스콜라학파 학자들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들도 프톨레마이오스나 에라토스테네스 등과 같은 고대 그리스 학자들의 이론을 어떤 식이로든 받아들였던 것일까? 하지만, 이미 12~3세기에 중세 시대의 고대 대학들이 설립되던 시기부터 대학에서 신학자들이 지구가 구체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었다. 프톨레미오스나 에라토스테네스의 저술이 서구에 소개되기 수백년 전 부터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들은 어떤 경로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그들의 학문 체계에 편입하게 되었던 것일까?
» 아리스토텔레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대 그리스의 대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의 저술이 다른 두 학자들보다 훨씬 먼저 중세에 소개되었고, 그의 저술 속에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과 이를 논증하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이 당시 어떤 비중을 차지했는지를 알려면 중세 시대 신학에 고대 그리스 철학이 유입된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476년 서로마제국이 무너지기 전후로 대다수의 학자들이 이슬람권으로 옮겨갔고 유럽은 학문의 암흑기를 맞이한다. 그 이유는 2세기경부터 서구의 중세 초기 기독교 이론을 세운 이른바 교부(敎父)들이 체계적인 학문적 연구보다는 당대의 고대 그리스 철학이나 그 아류들, 그리고 여러 이교 사상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이 전하는 복음을 보호하려는 목적에서 기존의 철학적 개념이나 논변을 사용하는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성경이 가르치는 것 이상의 어떤 철학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어떤 새로운 이론 체계를 만들어 낼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단지 그들이 믿는 것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이미 존재하던 철학을 사용했다. 말하자면, 철학은 단지 기독교 사상을 위해 예비된 도구로 여겨졌을 뿐이다. 예를 들어 플라톤의 철학이 교부들에 의해 재조명 받고 연구되었지만, 그 목적은 오직 그들의 신학을 더욱 빛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나마 이전의 그리스 철학과 다른 새로운 체계를 만들려는 아우구스티누스(A. Augustinus, 354-430)의 성과가 교회를 통해 전달되어 어느 정도 학문적 체계를 갖춘 교부철학으로 자리매김하였으며, 교부들에게 전혀 관심을 끌지 못했고 심지어 적대적인 대접을 받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은 보에티우스(A. M. S. Boethius, 480-524) 등의 주석가들을 통해 근근이 전수되고 있었다.
그런데, 8-9세기 무렵 카롤링거 왕조의 출현으로 교육 제도가 자리를 잡으면서 스콜라 철학이 태동하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이 학원 철학의 형태로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2세기에는 이슬람 세계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의 번역이 역수입되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새롭게 조명되었으며. 13세기 대학 설립과 함께 본격적인 학문 교육이 시작되면서 스콜라 철학의 핵심부분으로 자리잡게 된다.
1200년 경, 파리, 볼로냐, 옥스퍼드, 그리고 케임브리지 등 이른바 고대 대학들(the ancient universities)이 학문의 중심으로 크게 번성했다. 이들 대학이 자연스럽게 출현한 것은 12세기를 통해 아랍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되었던 고대 그리스 로마의 새로운 지식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대학의 활성화와 함께 그 시대에 가장 영향력이 컸던 학문사상은 고대 그리스 대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으로 서구 유럽에 급속도로 확산되었으며, 특히 스콜라 학파의 학자들은 그의 우주론과 히브리 종교체계를 교묘히 조합하여 중세의 우주 철학을 구성했다.
이런 우주체계의 골간은 인간이 사는 지구는 변하는 반면 달,수성,금성,태양, 화성, 토성과 같은 천체들은 결코 변하지 않는 완전한 투명구에 박혀 규칙적으로 지구를 돈다는 것이다. 그 천체들 너머에는 역시 수정구체 속에 박힌 별들이 있고, 그 밖에는 대천사인 케루빔(Cherubim)과 여덟 계급의 천사들이 창조주에게 영원한 찬사를 보내고 있다고 믿어졌다. 이런 우주론에서 천사들과 관련된 부분은 히브리 성서와 전설에 기반한 내용이고, 그밖에 천체와 관련된 부분은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빌려온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체계를 중세 신학 체계에 대폭적으로 채용하여 전통적인 스콜라학의 체계 속에 혼연히 융화시킨 사람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다.
교부 철학이 신플라톤 주의적으로 해석된 플라톤 철학과 가까웠다면, 스콜라 철학은 이슬람 신학자들에 의해 해석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가까웠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권위도 인정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받아들여 적극적인 해석을 가했던 도미니코 학파가 중세 신학의 주류가 되면서 서구 유럽에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 1206-1280)와 함께 스콜라 철학을 발전시킨 대표적 인물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 그리스 시대에 매우 다양한 분야에서 기여한 대학자였다. 그의 중요한 업적 중에는 지구가 구체임을 논증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의 저서 <하늘에 관하여(On the Heavens)>에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월식 때 달에 생기는 그림자의 외각은 항상 곡선이다. 월식을 일으키는 것은 태양과 달 사이에 지구가 놓여서 지구 그림자를 달표면에 드리우는 것이니 당연히 그 그림자의 모습은 지구표면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구는 둥글다. …… 우리의 별 관측에서도 이런 사실은 명백한데, 단지 지구가 둥글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크지도 않다. 우리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조금만 이동해도 지평선이 크게 바뀐다. 우리 머리 위에 나타나보이는 별의 경우 이런 변화는 더욱 확실하다. 우리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조금만 이동해도 나타나보이는 별자리가 바뀐다. 실제로 이집트나 사이프러스에서는 관측 가능하지만 그 북쪽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별들이 있다. 그리고, 북쪽에서는 항상 밤하늘에 머물러 있지만, 이집트와 사이프러스에서는 지평선으로 뜨고 지는 별들도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지구가 단지 구체일 뿐 아니라 별로 크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작은 위치 이동 때문에 그렇게 큰 변화가 생길 수 없다. 따라서, 헤라클레스 기둥 바깥의 서쪽과 인도의 동쪽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특히 그 사이에 하나의 거대한 바다가 존재한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확신으로 폄훼해서는 안된다.“
비록 조심스럽긴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도 스페인 서쪽에서 출발하여 대양을 항해해서 가면 결국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음을 알 수 있으며, 결국 이론적으로 콜럼버스의 항해 계획이 아주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을 계승한 스콜라 학자들도 콜럼버스의 항해 계획을 반대했을 것임엔 틀림없다. 그의 저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떻게 이런 값을 얻었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는 않고 있지만, 지구 둘레 길이가 약 64,000 킬로미터 정도 된다고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 값은 콜럼버스가 주장했던 지구 둘레 길이보다 세 배 이상 큰 것으로 만일 콜럼버스가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의 신학자들과 논쟁을 벌였다면, 신학자들은 콜럼버스가 세운 항해 계획으로는 인도 근처에도 가지 못할 것이라고 논박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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