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둘러 4호선 지하철을 탔어요. 일주일 사이 인 서울 4번을 하다 보니 출근 길 같기도 합니다. 경로석에 앉아 깜빡 잠이 들었는데 누가 팔을 터치해서 눈을 떴어요. 60대 부부가 눈 앞에 서 있는 것이 자리를 체인지 하자는 뜻 같았어요. 백팩을 치우자마자 아줌마가 앉았고 나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며 일어나지 않았어요. 눈 깔아 C. 뭐, 어쩌라고? 민증 깔까?
-
종종걸음으로 하동관을 찾아가 곰탕 2개를 따로 따로 포장 주문하고 아침을 먹었어요. 뭔 일로 주인장이 살갑게 챙겨줄까요? 카카오 택시가 딱 맞춰 픽업을 와서 세상 편하게 서대문 적십자 병원까지 데려다 줬어요. 왕십리에 있던 병원이 언제 서대문으로 이사를 왔을까요? 오랜만에 새끼들이 아비가 공수해온 먹이를 먹는 모습을 보는 것은 오진 일입니다.
-
MRI를 찍었고 주치의 소견이 요추 1번이 탈골 되었는데 운 좋게 신경과 근육이 무사해 수술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어요. 후, 천만다행 십년감수했습니다. 1인실로 병동 체인지 해달라고 오더를 내긴 했는데 병동이 언제 나올지는 모르겠다네요. 모처럼 좌청룡 우백호로 새끼들을 끼고 까르르거렸더니 힘이 불끈 솟아 나는 것 같습니다.
-
21세기의 대안, 포스트모더니즘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슈퍼 히어로 헤겔이 키워드로 등장하는 바람에 복습 카드를 사용하려고요. 우리가 아는 것처럼 헤겔은 칸트를 종합하면서 ‘빌동(교양)‘을 갖추어 나갈 것을 말해요. 헤겔 철학은 칸트가 멈춰 선 바로 그곳에서 출발합니다. 칸트는 인간의 이성이 ‘물 자체’라고 하는 세계의 본 모습은 알 수 없으며 단지 그것이 나타난 현상만을 알 수 있을 뿐 이라고 했지요.
-
이성의 권한을 제한하는 듯한 느낌이 있어요. 그런데 헤겔은 모든 것을 낳고 그 구석구석까지 꿰뚫어 보는 ‘신적 이성’을 제시함으로써 칸트가 이성의 인식 능력의 한계라고 선언한 물 자체의 영역까지 진입합니다. 이 물 자체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방법이 바로 헤겔의 변증법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대부분의 사람은 ‘변증법’ 하면 헤겔을 떠올리는 것 같아요. 변증법은 정, 반, 합이 정석입니다. 그런데 헤겔은 변증법을 정, 반합으로 이야기한 적이 없어요.
-
사실 정·반·합의 변증법은 헤겔의 친구인 피히테(1762-1814)가 말한 것으로, 헤겔은 이러한 변증법을 도식적이라고 비판했어요. 헤겔은 변증법을 살아 있는 현실의 운동하는 원리 자체로 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오늘 친구를 만났다. 나는 떡볶이를 먹고 싶은데, 친구는 야구장에 가자고 한다. 그럴 때 정(正)은 떡볶이를 먹는 것이고, 반(反)은 야구장을 가는 것이다. 그러면 이 둘의 합(合)은 무엇일까?
-
‘야구장에서 떡볶이를 먹는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논리는 변증법과 전혀 상관이 없어요. 왜냐하면 ‘반’은 모순적으로 ‘정’에서 도출 되어야 하기 때문이에요. 변증법은 모순 관계인데 앞의 예시는 모순이 아니라 반대 관계입니다. 모순은 둘이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관계를 말합니다. 변증법이란 밀알이 썩어 줄기와 잎이 나고 다시 그 줄기와 잎이 시들면 수 많은 밀이 열리는 이치와 같아요. 처음의 밀알이 정(正)이라면 줄기와 잎은 반(反)이며, 다시 생겨난 밀은 합(合)입니다.
-
변증법은 형식 논리와 비교해 보면 그 특징이 잘 드러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식 형식 논리의 근본을 이루고 있는 것은 동일률과 모순율 입니다. '동일률'이란 동일한 사유 과정에서의 판단은 반드시 동일성을 유지 해야 한다는 법칙이고, '모순율'은 어떤 사유 대상에 대하여 동일한 시간과 관계 아래에서는 두 가지 모순되는 판단을 할 수 없다는 사유 법칙입니다.
-
이러한 형식 논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모순이 없다는 점입니다. 반면 변증법 논리에서는 대립이나 모순이 논리의 핵심적인 계기가 돼요. 모든 일은 모순과 대립을 포함하고 있지만, 모순 때문에 변화하고 발전 하며 또한 진보할 수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모순이야말로 변화와 발전의 원동력인 것입니다. 헤겔의 변증법은 이와 같은 모순의 논리, 즉 변화와 발전의 논리를 근간으로 하고 있어요.
-
헤겔의 '정신 현상학'과 아도르노의'부정 변증법'사이의 논쟁은 한국어로 '지양'으로 번역되는 Aufheben이란 개념으로 집중 됩니다. 이 개념을 중심으로 역사에 대한 '신뢰의 해석학'과 '의혹의 해석학'은 양방향으로 갈라집니다. 역사의 동일성과 부정성 사이의 싸움은 헤겔로부터 시작 되었다고 해요. 동일성이 역사의 부정성에도 불구 하고 현재까지 진행되어 온 긍정적 개념이라면, 부정성은 타자성의 희생에 근거하여 승리를 거둔 동일성 부정으로 부정성의 명예를 회복하는 개념입니다.
-
포스트모더니즘은 '모순'이 만드는 생성(창조)이 중요한 키워드라는 것을 기억하시라. 따라서 신의 섭리와 그것에 대한 부정 역시 이 개념 안에서 드러 납니다. 헤겔은 '정신 현상학'에서 역사가 변증법적 운동에 근거하여 발전해 간다고 보았어요. 변증법적 운동을 역사 속에서 이끌어 가는 것은 기독교 신학의 '성령'을 의미하는 '절대 정신'입니다. 이로써 역사의 방향을 결정하는 이성으로서의 절대 정신은 역사 운동과 연관 됩니다. 그렇다면 헤겔의 변증법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
그것은 바로 사태의 시작을 알리는 즉자의 正과 이 사태를 맞은편의 대상으로 세울 수 있는 대자의 반(反), 정과 반의 결합을 통해 부정적인 것은 제거하고 긍정적인 것은 보존하는 즉자와 대자의 合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정-반-합의 변증법적 운동을 통하여 하나의 계기가 끝나면 다시 새로운 계기로 넘어가게 되고 새로운 계기는 또 다시 이전 계기의 합으로 새로운 변증법적 운동을 전개하게 됩니다.
-
이렇게 하여 역사는 마지막 종착지인 '절대 정신'을 완성하게 돼요. 이렇게 되면 정-반-합의 진행 속에 시간적 움직임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운동입니다. 그런데 Aufheben은 바로 역사의 변증법적 운동의 움직임이 동력을 제공하는 핵심 개념입니다. 이 단어는 '위'를 뜻하는 auf와 '끌어올리다' 의미하는 heben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이것이 '위로 끌어 올리다'입니다.
-
보다 중요한 것은 이 하나의 단어 안에 '폐기하다'와 '보존하다'를 동시에 가리키는 정반대 양가적 의미가 들어 있다는 점입니다. 역사는 부정 성과 타자성을 폐기하는 동시에 자아 성과 동일성은 그대로 보존하면서 발전해 나간다는 것 같아요. 역사의 보존성과 타자성은 전쟁, 살인, 부조리, 고통, 모순, 십자가를 가리키고 동일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멈추지 않고 부정 성과 타자성을 '지양'하면서 신의 나라의 영광을 향하여 계속 진행해 나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앞서 말한 지양(止揚)의 의미를 좀 더 살펴보자면 이는 대립하는 두 견해가 제3의 입장으로 종합되는 계기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지양'이라는 말은 두 견해의 좋은 점은 취하고 나쁜 점은 버려서 한 단계 더 높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반적 지향의 반대개념이 아니란 것을 주의 하시라. 헤겔은 변증법을 통하여 인간의 정신에 관한 놀라운 철학적 통찰을 보여주었습니다.
-
왜냐하면 인간의 정신이 진보하는 과정은 변증법적 단계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변증법은 고정되고 편협한 지식을 부정할 것을 요구하며, 동시에 상식의 테두리에 갇힌 우리를 끊임 없이 움직이게 만듭니다. 이러한 과정을 연속적으로 거치면 초보적인 지식을 넘어 진리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이 헤겔의 이상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듯이 지식이라는 것은 처음에는 착각에서 시작하여 다양하게 문답을 나누고 음미해 나가는 중에 차츰 수정되는 것입니다(디스커션의 원리).
-
존재는 사건이고 만물은 움직인데, 빅뱅으로 탄생한 지구를 인간이 언어를 통해 '정지'를 만들어 세계를 망쳐 놓은 것이 됩니다. 진리(현상)라는 것도 인간이 확률(은유) 중 하나를 개념화 시킨 것 일 뿐입니다. 해서, 진리를 절대화 시키면 화석화 된다는 것 아닙니까? 당근 불변은 없습니다. 사랑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진리도 움직이는 거라고.
2024.7.4.THU.악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