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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한 가을비, 그동안의 먼지를 쓸어갔습니다. 더위도 이제 진짜 깨끗이 물러가겠지요. 낮의 미련도 없이 말입니다. ㅎㅎ 참으로 끈질겼습니다. 아파트 뒷담에 피어있던 무궁화도 드디어 한해를 마무리하였습니다. 이제야 가을인데 남은 기간이 얼마 안 될 것 같아 걱정됩니다. 하기야 보도에 보니 가을이 열흘 정도 짧아졌다고 하더군요. 이게 보통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생태계에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뜻이거든요. 소위 기후변화가 우습게 보여도 결코 우습지 않게 우리에게 다가오리라는 것입니다. 좋게 변화한다면 뭔 걱정이겠습니까 마는 그 반대일 수 있으니 말입니다. 꽁치 사라진지 오래 되었고 동태가 사라졌고 이제 오징어도 사라지려 한답니다. 통조림이나 먹으라고요? ㅋㅋ
한강 작가 덕분에 모처럼 출판사 인쇄소가 난리랍니다. 즐거운 비명소리가 들린다 합니다. 정말 기분좋은 소식입니다. 모니터에만 의존하며 살았는데 이제들 종이에 눈 대고 사는 시간이 늘었다니 말입니다. 모처럼 종이 활자가 주는 매력을 다시 느끼며 살기를 바랍니다. 독서의 계절에 아주 절묘하게 타이밍을 맞춰주었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덕에 이런저런 이야기들에 관심을 가지고 무엇보다 책에 손이 많이 가기를 바랍니다. 이 운동(?)이 우리 아이들에게도 넘어가야 하는데 말입니다. 책이 주는 매력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느끼면 좋겠습니다. 책을 읽는 아빠, 책을 읽는 엄마, 우리 아이들이 보고 배울 수 있는 가장 덕스럽고 매력 있는 장면이라 여겨집니다.
시월도 중순에 접어듭니다. 가을이 익어갑니다. 풍성한 열매를 그리며 삶의 풍성한 열매를 기대합니다. 보란된 주말을 빕니다. ^)^
2024년 10월 19일 김종우 목사 드림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아가 8 : 6)
<노트북>
책을 읽어주는 노인, 간호사의 안내로 한 할머니에게로 다가옵니다. 책 읽어드리는 분이에요. 싫다는데도 잘 달래서 두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습니다. 그리고 간호사는 물러갑니다. 노인은 자 어디까지 읽었더라 하면서 책을 폅니다. 그리고 읽어나갑니다. 두 남녀의 연애 이야기 같습니다. 조금씩 천천히 또박또박 읽어줍니다. 할머니가 겉은 건강해보이는데 치매 환자입니다. 아마도 두 사람은 그렇게 여러 날을 함께 하루하루를 지내온 듯합니다. 이야기가 전개되며 그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갑니다. 할머니는 가끔 그 다음이 궁금하다고 보챕니다. 그리고 물어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끝나는데요? 한창 재미있는데 끝을 밝히면 재미가 없지요. 달래면서 읽어갑니다.
한참이 되어서 할머니의 이름이 불려지는 것을 듣고는 그러면 그렇지 싶습니다. 이야기를 따라가며 짐작은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할머니 이름이 불려질 때 확실하게 드러나지요. 결국은 그렇게 되었구나.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나게 된 것이지? 바로 그 이야기가 읽혀지는 것입니다. 어디서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연애를 시작했는지부터 시작됩니다. 사랑 이야기 연애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재미있습니다. 사실 연애 경험이 있는 사람은 더더욱 흥미를 가지고 빠지게 됩니다. 자신의 지난 시절을 반추하며 그 때의 짜릿했던 감정을 다시 느끼기도 합니다. 그래서 뻐져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두 번 다시 경험할 수 없는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미국 남부의 작은 마을, 축제 기간 발랄한 성격의 부잣집 아가씨 ‘앨리’의 그 밝은 모습에 한번 보고 그만 빠졌습니다. 첫눈에 반할 때 뭔 계산이 필요합니까? 노아는 단번에 찍었고 끈기를 가지고 따라붙습니다.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사랑에 빠지면 별난 짓도 합니다. 그렇게 두 남녀가 신속하게 사랑에 빠집니다. 아직 성인이 되기 전이지만 성인이라고 스스로 믿는 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환경이 너무 다릅니다. 앨리와 노아는 부잣집 아가씨와 시골 목재소 노동자의 아들입니다. 사실을 알게된 앨리의 부모가 그다지 반겨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대놓고 반대하기보다는 딸을 설득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미 사랑에 빠진 딸이 단호하지요.
좋은 방법은 두 사람을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일단 시골을 떠납니다. 나아가 앨리를 대도시로 유학을 보내버립니다. 강제 분리조치를 하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헤어졌지만 가슴에 새겨진 사랑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느 날 밤 폐가농가에서 밤 늦게까지 지내다가 경찰까지 동원된 수색작업의 대상이 됩니다. 그 일 후 앨리의 부모는 특단의 조치를 내린 것입니다. 그 때 노아는 약속합니다. 이 집을 당신과 내가 사는 집으로 만들고 당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꾸며줄게. 헤어지고 나서 노아는 매일 편지를 써서 보냅니다. 그런데 아무런 답장이 없습니다. 한 달이 지나고 수 개월이 지나고 1년이 되도록 소식 하나 없습니다.
그렇지요. 어쩌면 편지 한 번 없을 수가 있지? 정말 끝내자는 건가? 어떻게 답장 한 번 없지? 진짜 끝장내자는 건가? 세월은 흐릅니다. 노아는 2차대전 참전을 하고 앨리는 간호원으로 지원하여 전쟁터로 갑니다. 앨리는 부상자들 간호하며 거기서 괜챦은 남자를 만납니다. 역시나 부잣집 아들입니다. 물론 부모님도 적극 환영합니다. 사람도 괜찮고 환경도 좋습니다.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사랑하게 되었고 약혼까지 합니다. 한편 제대하고 무사히 돌아온 노아를 위해 아버지는 전 재산 정리하고 노아가 원하던 폐가 농가를 사들입니다. 얼마 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노아는 혼자 힘으로 농가를 재건축합니다. 두 사람이 꿈꾸었던 대로.
가까이 강이 흐르고 조용한 곳에 두 사람의 보금자리를 만들기는 그만입니다. 그야말로 행복의 보금자리입니다. 그러나 상대가 없습니다. 때로 외로움을 달래려 이웃 동네 전쟁과부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있기는 하지만 마음은 다른 데 있습니다. 여자도 그것을 알고 이해합니다. 여자는 남자의 마음에 다른 여자가 있다는 낌새를 잘 알아차리지요. 말 그대로입니다. 노아도 숨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집을 배경으로 찍은 노아의 사진이 지역신문에 난 것을 앨리가 보았습니다. 집을 팔려는 광고였지요. 순간 놀랍니다. 함께 꿈꾸었던 바로 그 집이라는 사실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반가움, 놀람, 당황. 어쩌지요? 약혼자 ‘론’에게 잠시 마음정리를 위해 다녀오겠다고 말합니다.
이미 약혼한 사이, 물론 아직 결혼까지 한 것은 아닙니다. 어느 쪽을 사랑한다고요? 서운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앨리가 노아에게 따집니다. 어떻게 편지 한 번 없었느냐고요. 사실 하루 빠짐 없이 1년 365일 보냈습니다. 어떻게 답장 한 번 없었느냐고 되묻습니다. 앨리의 엄마가 가로챘던 것입니다. 사태가 다시 위기를 맞은 듯합니다. 엄마는 그것을 모아 앨리에게 돌려주며 알아서 선택하라고 말해줍니다. 현명한 선택, 그것은 편안한 생활일까요, 사랑하는 사람일까요? 사랑은 있는 대로 받아주는 것. 상대방의 모난 성격도 받아주는 것입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성공하였는지 모르지만 론은 오랜 시간 상처를 안고 지냈으리라 짐작합니다. 영화 ‘노트북’(The Notebook)을 보았습니다. 2004년 작품인데 재개봉했습니다.
용서 못 받을 죄
세상 살면서 잘못 한번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용서하고 살 줄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용서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해야 합니다. 왜요? 하나님이 하라고 하십니다. 얼마나 용서하라 하십니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가능해요? 아무튼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서로 용서하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하면서도 나오는 기도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주옵시고’ 인생 살아가면서 용서는 어쩌면 필수입니다. 그래야 하나님도 우리 죄를 용서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쉽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가치 있는 일인 줄 압니다. 때로는 이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어찌해야 합니까? 예,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할 수 없는 죄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다만 힘들 뿐이지요. 그러나 용서해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 하나님도 용서하지 못할 죄가 있나요? 우리는 보통 하나님께 나아가면 무슨 죄든지 용서받을 수 있다고 배웠고 알고 믿고 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아니 우리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용서하실 수 없는 죄가 있다는 말인가? 말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꼭 그렇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도 바로 그것을 말씀하고 있지요. 마 12 : 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분명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용서받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죄 용서받지 못하니 이런 경우는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한 마다로 무서운 저주입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가 생겨서는 안 됩니다. 설명이 나오지요.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령훼방죄’입니다. 하나님도 용서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도대체 이게 무엇일까요?
도무지 용서가 되지 않는 죄, 무시무시한 죄입니다. 도대체 무슨 죄인가요? 무엇이 ‘성령훼방죄’라는 말입니까? 문제는 죄에도 급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에서 구분하듯이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닌 줄 압니다. 세상에서 구분하는 것은 대단히 복잡하고 다양하지요. 그래서 벌칙도 다양합니다. 오죽하면 형법만 보아도 그 죄와 형벌의 종류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에게는 단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요일 5 : 16 - 17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여기 보면 두 가지가 나옵니다.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고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습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해서는 구하래요 말래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말씀합니다. 그 얘기는 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해서는 용서를 구하지 말라 그 뜻입니다. 그러니 용서하시겠다는 말입니까, 용서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용서하지 않겠다, 하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런 무서운 죄가 무엇인지 궁금하지요? 알아야 조심하고 경계를 하지요. 이런 죄는 평생 짓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교회 열심히 다니며 신앙해도 절대로 천국 못가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정신 바짝 차리고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을 잘 보아야 합니다.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귀신 들려서 눈이 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시비를 걸었지요. 예수님이 귀신 들렸다는 겁니다. 세상에! 말이 됩니까? 귀신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는 말인데, 그게 말이 되냐고요?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 12 : 25 - 26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더구나 자기네 제자들도 귀신 쫓아내는 역사를 하는데 그러면 그들은 무슨 능력으로 그런 일을 하느냐고 되묻습니다. 27절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그렇지요? 말이 안 되는 말로 예수님을 비방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28절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이 사역이 자기 힘으로 하시는 겁니까,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하여서 하시는 일입니까?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십니다. 요 14 : 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그러니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당신 안에 누가 있어서 누가 하시는 일입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이 육으로 계셔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영으로 계셔서 그 일을 하시는 줄 믿습니다. 또한 하나님 계신 그곳, 예수님이 계신 그곳이 곧 하나님 나라인 줄 믿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선포하셨지요.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시며 선포한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 4 : 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그곳에 예수님이 계시니 그곳이 곧 하나님 나라 천국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지금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성령의 역사를 유대인들이 아는가? 그렇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훼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바로 마 12 : 31 - 32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용서가 가능하답니다. 그런데 ‘성령을 훼방하는 것’과 ‘성령을 거역하는 것’은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소위 ‘사망에 이르는 죄’가 된다는 말이지요. 물론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나 성령을 거역하는 것이나 그 말이 그 말입니다. 아무튼 이게 도대체 어떻게 짓는 죄라는 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말했느냐 하면 귀신 들렸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귀신의 역사라고 한 것이지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귀신의 역사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탓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 성령의 역사를 거부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한갓 사람으로만 보았지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오죽하면 나를 믿지 못하겠거든 하는 일이라도 보고 믿으라고 하셨지요. 요 10 : 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찌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그럼에도 믿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거역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 말입니다. 그러나 그 나타나는 일을 보면 이것이 사람의 하는 일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역사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역사를 거부하는 일이고 성령을 훼방하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믿지 않기로 작정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죽기로 작심했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죽도록 해줘야지요. 왜 이런 결과가 나올까요? 하나님 말씀 곧 율법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 뜻대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알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지요. 오직 자기 의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마음 자세가 없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정답이다, 그러니 잔소리 말고 따라와라, 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자기 지식만이 절대적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신 겁니다. 눅 18 : 17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히 받들지 아니하면 천국과는 상관없는 자가 될 것입니다. 말씀을 깨닫고자 하는 마음이 없고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무조건 정답이다, 그 식입니다. 그것이 뭐다? 그것이 성령훼방죄라는 말입니다. 어린아이가 아니라 이미 어른이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자신은 지시하는 자이지 듣는 자가 아니라는 입장이지요. 놀라운 고집 아닙니까? 결국 자기가 하나님입니다. 자기가 이미 정답을 갖고 있으니 성령의 역사하심은 필요 없습니다. 거부하는 것이지요.
이어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봅니다. 마 12 : 33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성령훼방죄를 말씀하시며 갑자기 왜 나무 이야기를 하실까요?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이겁니다.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는 것입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열매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설명하신 것이 35절이지요.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그렇다면 나무가 무엇이고 그 열매가 무엇인가요? 나무는 사람이고 열매는 그가 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결론이 36 - 37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잘 알아야 합니다. 결국은 말이 중요한데 무슨 말을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세상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겠지요. 앞에서도 말했듯이 하나님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사역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것이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치유사역은 그 도구입니다. 치유사역도 무엇으로 하셨습니까? 약을 처방하셨나요? 귀신을 쫓아내는데 몽둥이로 했습니까? 모두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말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하나님 말씀이 능력입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하셔서 그 나오는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치유보다 중요한 것은 천국복음이지요. 육신의 치유는 잠깐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생이고 주님은 바로 그 영생을 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복음을 전파하며 가르치셨습니다.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듣는 영혼들이 살 길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 듣는 것을 훼방하고 듣지 못하게 합니다. 자기가 안 가는 것은 개인사정입니다. 그런데 왜 남들 가는 것까지 방해하지요? 그것이 하나님 하시는 일을 훼방하는 것이고 성령훼방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저주하셨습니다. 마 23 : 1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우리는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전하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잘 분별해야 합니다. 듣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이 우리를 살리고 죽이는 것입니다. 롬 10 :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렇지요. 들어야 길이 열립니다. 그리고 무엇을 들어야 합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자기 생각, 자기 고집을 전한다면 그것은 죽으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마 23 : 15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어렵게 전도를 해서 교인 하나 얻었는데 왜 더 지옥 자식이 되어버립니까? 잘못 먹인 것이지요. 하나님 말씀을 먹여야 사는데 자기 말을 먹인 것입니다. 그러니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일이지요.
말씀을 분별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만 알면 쉽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세상 이야기 들려주고 싶어 하실까요, 천국 이야기 들려주고 싶어 하실까요? 성경 없어도 세상 이야기는 차고도 넘칩니다. 우리가 매일 듣고 보는 것들이 세상일 아닙니까? 요즘은 세상 끝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금방 우리 눈과 귀로 들어옵니다. 그런데 교회에 와서도 세상 이야기 들어야 합니까? 왜 성경 가지고도 세상 이야기합니까? 그게 하나님 뜻이다, 자기 뜻이다? 자기 생각 자기 고집이지요. 그걸 전하고 들으며 할렐루야, 아멘, 하면 둘 다 죽는 겁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그 짓하는 것이 곧 성령훼방죄입니다.
또 한 가지 있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해서 말씀한 것이 또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연관되는 이야기입니다. 히 6 : 4 - 6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할 수 없다고 하니 역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무슨 죄입니까? 앞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했답니다. 그렇지요? 이미 하나님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 듣고 다 알고 깨닫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떠났다는 말입니다. 즉 배역하고 배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돌이킬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 다시 반복합니다. 히 10 : 26 - 27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하나님 앞에 가장 무서운 죄는 하나님을 등지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누가 등집니까? 천국 맛을 본 하나님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심판하십니까? 우리가 여태 배우고 알고 믿는 바로는 예수 믿는 자는 무조건 천국이요, 예수 믿지 않는 자는 무조건 지옥입니다. 천만의 말씀이지요. 예수를 믿어야 천국 길이 열리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천국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원 받았지요. 그러나 모두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신 32 : 19 “여호와께서 보시고 미워하셨으니 그 자녀가 그를 격노케 한 연고로다” 누가 하나님을 격노케 합니까?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들이 어떤 자녀입니까? 20절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하고 그들의 종말의 어떠함을 보리니 그들은 심히 패역한 종류요 무신한 자녀임이로다” 패역한 종류, 무신한 자녀랍니다. 신 곧 하나님이 없는 자식들이랍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갖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이 없다니 말이 됩니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율법을 하나님의 뜻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믿는 것이지요. 하나님 나라 이야기하지 않고 세상 나라 이야기하는 겁니다. 오늘 십자가 세워 놓고 하나님 말씀이라고 전합니다. 하늘나라 이야기입니까, 세상 나라 이야기입니까? 분별해야 합니다.
성경은 세상 나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물론 세상을 빙자하여 하늘의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알아듣기 쉽게 즉 이해하도록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글자 그대로 세상 이야기로 전달한다면 하나님의 마음과는 상관없는 일이지요. 하나님 말씀이라고 전하지만 하나님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니 하나님 팔아서 세상 이야기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역사를 훼방하는 것입니다.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일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는 겁니다.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듣고 믿고 은혜로 충만하였음에도 배반합니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대적합니다.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미혹을 받으면 그럴 수 있습니다. 분별하여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이 자판기에서 떨어지듯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전적이 역사의 덕분이고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려면 힘든 광야를 지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 복지가 이스라엘 백성을 기다리고 있는 비어있는 땅이 아닙니다. 가나안 7족속이 살고 있는 땅입니다. 그들이 환영 현수막이라도 걸어놓고 기다리고 있답니까? 어떻게 들어가야 합니까? 싸워서 이겨야 들어가서 얻을 수 있습니다. 천국을 거저 들어가려는 신앙을 하고 있다면 빨리 깨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마귀 세력과 싸워서 이겨야 차지할 수 있습니다. 마귀가 ‘나는 마귀다’ 하고 달려듭니까? 천만의 말씀! 고후 11 : 14 - 15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광명의 천사’로 ‘의의 일군’으로 우리 앞에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일은 바로 분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생명을 얻습니다. 마귀의 말을 먹으면 죽는 것입니다. 처음 아담과 하와가 그렇게 당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당해서는 안 됩니다. ‘은혜가 넘칩니다!’ 하고 좋아할 일만은 아닙니다. 여태 알고 들어온 말씀이라고 건성으로 넘어가서도 안 됩니다. 유대인들이 그래서 버림당했습니다. ‘때를 따른 양식’(마 24 : 45) 곧 이 시대에 맞는 말씀을 찾아먹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빙자하여 주의 종이라 하며 세상 복이나 찾고 세상이야기나 하는 교회나 목자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그들이나 그들을 따라가는 신도가 바로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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