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덕 목사 -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께 왔으나 만날 수 없었다. 늘 나자렛에서 생활하던 예수님이 공적 복음전도의 일을 시작하신 뒤로 그렇게 자주 가족을 만나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온 가족이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많은 사람들 때문에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이 복음 구절을 통하여 예수님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하셨는지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참으로 바쁘셨다. 복음 말씀을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수많은 병자들을 치료하셨으며, 그리고 힘든 여행을 계속했을 뿐만 아니라 밤을 새워 기도하셨다.
어떤 사람이 가족이 온 것을 예수님께 알렸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사도직은 모든 인간이 본연의 하느님 자녀의 모습, 곧 한 가족을 회복하는 데 있었다. 이 일이 그리운 가족을 상봉하는 것보다 우선이었다.
우리는 때때로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갇힐 때가 많다. 내 지역사회, 내 종교, 내 나라, 내 민족이라는 장벽 안에 우리를 가두는 때가 많다. 예수께는 아무 장벽이 없었다. 예수님은 죄인들, 이방인들, 소외받는 사람들과 함께하셨다. 그들을 하느님의 아들과 딸로 인정하신 것이다.
한 아이를 위탁받아 같이 생활하고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둘째 아이가 이 아이의 보모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친동생을 챙기는 것보다 더 열성이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면서 남다른 기쁨에 잠긴다. 우리 장벽 뒤에 있는 이를 내 가족으로, 다같이 하느님의 사랑받는 이웃으로 받든다면 복음 정신에 좀더 일치할 수 있지 않을까?
- 최경용 신부-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사가가 짤막한 세가지 교훈의 말씀을 연결없이 모아놓은 단절어 집성문입니다. 마르코 복음 4장 21절부터 25절에는 이 내용이 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선 이 세가지 단절어를 설명해 봅니다.
먼저 이 말씀들의 상황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하신 후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주어야 할 사명을 강조하시는 것으로 봅니다.
첫번째 말씀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 두거나 침상 밑에 두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등경 위에 얹어 놓아야 방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등불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가지고 오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세상의 빛이요 등불이신 예수님은 그릇으로 가리워지거나 침상 밑에 들어가 숨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드러내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등불이 등경 위에서 자신의 모습을 환하게 드러내듯이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하느님의 나라도 드러내야 할 것이며 때가 되면 밝히 알려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은 당분간 사람들에게 숨겨진 채로 있을 것이지만 십자가 위에서는 환히 밝혀질 것입니다. 이로써 등불이 예수님이라면 등불을 올려 놓는 등경은 십자가임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등불이신 주님을 환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밝히 알려야 합니다.
두 번째 단절어로서 예수님은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져서 세상에 드러나게 마련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우리나라 정치가들, 공무원들과 재벌들에게서 드러나는 현실입니다.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고 비밀은 드러나고야 만다’는 격언이 동서고금에 널리 퍼져있듯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결국은 드러나지 않을 비밀은 없습니다. 지금 숨은 행적도 장차 하느님의 심판 때에는 반드시 드러나고야 말 것입니다.
여기서의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다 알려지기에는 아직 시기상조이고 적절치 않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가리워져 있지만 결국엔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고야 만다는 뜻이겠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대한 복음전파를 독촉하고 격려하기 위해 다른 복음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두려워 하지 말라.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내가 어두운 데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서 말하고 귀에 대고 속삭이는 말을 지붕 위에서 외쳐라”(마태 10,26-27; 루카 12,2-3)고요. 따라서 우리들은 마음 속으로만 신앙을 간직하고 있어서는 부족합니다. 명백히 드러나게 사람들 앞에서 신앙을 증거하고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단절어로서 예수님은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줄 알고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달란트와 금화의 비유 등으로써 복음서에 여러번 나오는 말씀입니다.(마태 25,29; 루카 19,26 참조)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달란트를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리는데에 잘 활용하는 사람은 교회 안에서 더 큰 일을 하며 주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빈익빈 부익부’라는 말도 있고 “되로 주면 되로 받고 말로 주면 말로 받는다”는 격언도 있듯이 현재 영적인 부를 쌓는 사람은 종말에 더 받게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조금 가진 것마저 종말에 빼앗길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마음을 연 사람은 더욱 더 그 신비를 잘 깨닫고, 마음을 닫은 사람은 스스로 안다고 생각한 것마저도 빼앗길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세가지 단절어를 통해 예수님의 교훈을 알아듣도록 합시다. 세상의 빛이요 등불이신 예수님과 하늘나라에 관한 복음은 감추거나 숨길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환히 드러내고 널리 알려야 합니다. 등불이신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환히 드러내고 널리 알리는 신자일수록 영적으로 부유해지고 주님의 축복을 많이 받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귀환시키시는 하느님
-경규봉 신부-
페르시아의 고레스가 바빌론 왕이 된 첫해(기원전 538년)에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예언(예레 29,10)하신 대로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시어 당신의 도구로 삼으셨다. 고레스는 칙령을 내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모든 나라를 맡기셨고, 예루살렘에 당신의 성전을 지을 임무를 맡기셨다고 선언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짓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원주민들에게도 유대인들이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예물을 가져가도록 지원하라고 명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이웃의 도움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차비를 하였다.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는 왕위에 오른 즉시 페르시아 제국을 통합하였고, 기원전 539년에는 바빌론까지 정복하였다. 그는 다음 해인 기원전 538년에 칙령을 내려 유다의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도록 하였다. 그는 다른 민족들에게 유화정책을 폈고, 그들의 성전이나 제단 등을 복구시켜 주곤 하였다.
그는 백성들이 그들의 신들을 섬기도록 허락했고, 백성들로 하여금 그 신들에게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도록 부탁하기도 했다. 그가 진정 야훼하느님을 유일하고 참된 신으로 깨닫고 섬겼는지 알 수 없지만,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움직이셨음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그는 바빌론 제국의 어느 곳에서든지 살아남은 유대인들 모두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성전을 지을 자원을 제공하도록 했다. 당시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재물을 주는 것은 고대 근동지방의 관습이었다. 상대의 물건이나 사람을 잘못 가진 것에 대한 사죄의 표시로서 속죄 예물(1사무 6,1-3)을 피해자에게 주었던 것이다(출애 12,35-36).
그렇지만 하느님께서 바빌론 사람들로 하여금 그 관습을 지키도록 주관하셨으며(출애 12,36), 이 예물들을 통해 유대인들은 성전을 짓는 데 필요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빌론 각지에서 흩어져 살면서 귀양살이를 해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갖은 고난과 역경을 오직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이겨냈다. 그들은 언젠가 주님께서 불러주실 그날을 기다리며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로마 5,3-4)는 말씀처럼 그들은 고통을 인내로 이겨내며 주님께 대한 희망을 키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희망을 하느님께서는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포로가 되도록 하신 까닭은 그들을 버리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을 거듭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생활을 통해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더욱 굳건히 했고, 깊은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우상숭배에서 벗어나 유일하신 하느님만을 섬기게 되었고, 하느님의 법을 충실히 지키는 백성으로 변화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정하신 때가 이르자 이방인인 고레스를 통해서 당신의 백성을 바빌론의 포로생활에서 해방시키시고, 당신 백성으로 하여금 새롭게 태어나 당신을 섬기도록 인도하셨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섭리 안에서 그처럼 당신 백성을 이끄신 것이다.
때때로 고난과 역경 속에서 우리가 힘들게 부르짖는 그 부르짖음을 하느님께서는 외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두 듣고 계신다. 다만 당신 섭리 안에서 때가 이르기를 기다리실 따름이다. 우리에게 적합한 때에 맞추어 하느님께서는 당신 구원의 손길을 펼치신다. 그러므로 어떠한 역경이나 환란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말고 참고 기다리며, 주님께서 주시는 때를 기다리는 신앙인이 되자...........◆
가족
-최혜영 수녀-
요즘처럼 가족해체 현상이 심각한 때에 예수님께서 혈연가족의 경계를 넘어 신앙가족을 이루어가시는 말씀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는 대안가족의 역할을 십분 발휘해야 한다고 봅니다. 캐나다로 이주한 초등학교 1학년 여자어린이의 작문에서 오늘날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야 할 가족의 비전을 봅니다. 교회와 가족 간의 연대를 통해 좀 더 건강한 가족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새로운 가족 모델을 만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가족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에요.
당신의 엄마나 아빠가 아니어도 돼요. 당신의 친구들이나 다른 사람도 가족이 될 수 있어요. 고아도 고아들로 만들어진 가족을 가지고 있어요. 가족 중에서 하나는 피가 똑같은 사람들이에요. 엄마, 아빠, 동생 그리고 더 있을 수도 있죠.
그 가족은 그냥 많은 가족 중에서 한 가지예요. … 한 사람하고 같이 산다고 해서 가족이 없는 것은 아니에요. 그 사람이 당신을 사랑한다면 가족이 될 수 있어요.
가족은 어떤 사람도 될 수 있어요. 어떤 가족들은 당신이 태어나게 하지 않을 수도 있을 거예요. … 이제 모든 사람들에게는 가족이 있다는 것을 알아요.
누군지 상관 없어요. 가족이 필요해요. 왜냐하면 내 생각에는 가족 없이 살 수 없기 때문이에요. 가족은 모든 사람들한테 있어요. 그래서 당신도 있어야 돼요.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한테 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누가 나의 가족인가?
-김덕진-
예수님은 자신을 낳아주고 30년 동안 길러준 어머니를 외면하고, 대신 하느님 말씀을 따르는 모든 이를 자신의 어머니요, 형제라고 말씀하신다. 아직도 유교적 가족관이 지배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는 배은망덕한 자식이라고 손가락질받기 딱 좋은 행동이다.
우리가 ‘가족’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면 흔히 환하게 웃고 있는 아버지와 인자하게 자식들을 바라보는 어머니, 그리고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아들과 딸이 함께 있는 모습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흔히 말하는 ‘정상 가족’의 그림이다. ‘화목한 가정’ 정도로 이야기할 수는 있겠지만 이 모습이 가족의 기준이고 올바른 모습인 것처럼 인식되는 일은 영 불편하다. 이혼이나 사별로 부모 한쪽만 있는 가정이 우리 주위에 매우 흔하고, 혼인을 하지 않은 채 아이를 낳아 기르는 비혼부모 가정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또 아이를 공개 입양하여 기르는 가정도, 함께 사는 한 부모가 재혼해 ‘피’가 섞이지 않은 부모나 형제 자매들과 살아가는 가정도 있다. 사회가 많이 변화했지만 ‘정상 가정’의 범주를 벗어난 가정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각은 여전히 곱지 않다. 그러한 가정, 가족관계도 아무런 불편 없이 존중받아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이들은 모두가 한 가족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우리 사회가 지독하게 고집하는 혈통주의나 가부장적 구조를 깨야 한다는 말씀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예수님이 풀어 나가시던 방식으로 따라 배우라는 말씀이다. 가정을 지키고 원만한 가족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우리 삶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가족하고만 살 수 없는 것이 사회이기에 가정의 테두리를 넘어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내 자식들에게 먹이고 입히기 위해 해왔던 일들을 세상을 위해서도 한번 시작해 보면 어떨까?
예수님과 형제 되기
- 유영일 신부 -
우리는 합리주의에 토대를 둔 자본주의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합리주의는 감성보다는 이성을 중시합니다. 이런 사고는 처녀가 애를 배어도 할 말이 있다는 속담이 말해주듯, 자기 합리화의 구실은 다 있기에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로 빠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서양 사람들은 평소에 잘해 주다가도 결정적인 이해관계가 걸리면 부모자식이건 부부사이건 소용이 없고, 법을 위반하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법대로 처리합니다.
반면에 수천 년 동안 농촌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 사회 속에서 혈연, 지연에 의지하며 살아온 우리는, 공동체란 울타리가 있어서 좋긴 하지만 거기에 얽매이고 감정에 치우쳐서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감정이나 파벌 때문에 공동체가 깨지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저는 캐나다에서 교포사목을 하면서 이 두 사회의 장단점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서로가 장단점이 있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나를 기초로 한 이성의 차가운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보다는 '우리'라는 표현으로 대변되는 인간미가 살아있는 공동체 사회가 낫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성이든 감성이든 그것이 의지에 속하는 사랑으로 승화되지 않는다면 개인 이기주의냐 집단 이기주의냐의 차이만 있을 뿐 그 사회는 오래 지속되기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혈육인 어머니와 형제를 무시해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1독서에서 잠언의 저자는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의와 공정을 함께 언급한 것은 이성에 바탕을 둔 정의만으로는 부족하기에 사랑에 바탕을 둔 공정으로 보완이 되었을 때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실현될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런 차원에서 예수님께서는 요한 6,63에서"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육이 없는 생명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그러나 생명을 주는 당신의 말씀을 믿고 실천함으로써 영적인 차원으로 넘어가지 않는다면 그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그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시고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당신의 신원을 밝히시고 진리의 성령을 약속하신 후,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시면서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는 말씀으로 당신의 앞날에 대해 암시를 주십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발현하신 예수님께서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이시며 너희의 아버지이신 분, 내 하느님이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고 전하여라." 하심으로써 제자들을 형제로 들어 높이십니다. 인간의 지위가 종에서 친구로, 그리고 형제로 상승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의 부활로 우리를 구원하셨기에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지위를 회복하고 예수님과 공동상속자가 됨으로써 신적인 위치로까지 들어 높여지는 영광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에게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으며,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그분의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예수님과 형제가 되는 영광을 누리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하고 있습니까?
<코러스의 감동>
-양승국신부-
지난 2004년에 개봉된 프랑스 영화 ‘코러스’를 혹시 보셨나요? 함께 본 형제들, 다들 ‘오랜만에 보는 수작(秀作)이다’, ‘왕감동이었다’, ‘꼭 우리들 영화’라며 좋아들 하더군요.
성장통을 겪고 있는 자녀들을 두신 부모님들, 문제성 많은 아이들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신 선생님들께서도 꼭 한번 보셨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문제아들만 모아놓은 프랑스 마르세이유의 작은 기숙학교가 영화의 무대입니다.
다들 날개 다친 참새같이 불쌍한 아이들뿐입니다. 토요일마다 하염없이 아빠를 기다리는 전쟁고아 페피노, 엄마의 관심을 끌기 위해 말썽을 일으키는 모항주, 돌아갈 곳 없이 쓸쓸한 여름방학을 보내는 아이들의 학교에 미완성의 악보를 든 마티유가 사감선생으로 부임해옵니다.
기숙학교는 군대가 따로 없습니다. 안 그래도 부모사랑을 못 받아 삐쩍 마른 아이들을 교장은 병사 다루듯이 다룹니다. 잘못한 아이들에게 용서란 없습니다. 밥 먹듯이 아이들을 독방에 가둡니다.
마티유 선생은 출세지향적인 교장, 아이들을 위한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는 교장, 그래서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교장에 온 몸으로 맞섭니다.
마티유 선생은 아이들의 닫힌 마음을 열기 위해 팽개쳤던 악보를 다시 손에 듭니다. 합창단을 만들고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칩니다. 노래를 통해 아이들에게 일종의 ‘해방구’를 만들어줍니다.
주인공인 사감선생 배역을 너무 잘 골랐더군요. 인자한 아버지 같은 선생님, 머리가 시원하게 벗어졌지만, 그로 인해 더욱 편안한 분위기, 대머리라는 아이들의 놀림도 개의치 않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아이들의 얼굴에 미소가 감돈다면 아무 문제없습니다.
지옥 같은 분위기의 기숙학교, 아무런 꿈도 희망도 없는 음울한 학교에 마티유 선생은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따뜻한 마음과, 용서하는 마음을 통해서, 연민과 측은지심을 통해서.
잘못한 아이들에게 만회할 기회를 줍니다. 아이들 한명 한명을 소중히 여깁니다. 아이들 편에서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음울하던 아이들 얼굴에 환한 미소가 깃들게 만듭니다.
마티유 선생 한명의 헌신으로 인해 어두웠던 학교 전체가 밝아지기 시작합니다. 아이들 역시 그로부터 받은 사랑과 꿈과 희망을 마음 깊숙이 간직하게 됩니다. 그리고 평생을 살아갑니다.
결국 아이들 때문에 학교를 쫓겨나는 마티유 선생, 그러나 교장 선생의 지시로 인해 아이들은 작별인사도 배웅도 못합니다.
어쩔 수 없었던 아이들은 마음이 담긴 편지를 써서 떠나가는 마티유 선생 뒤로 날립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코러스’를 창공으로 날려 보냅니다.
오다가다 만난 아이들이지만 혈육 이상의 정으로 대하는 마티유 선생의 모습을 바라보며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었습니다.
보다 큰 사랑, 보다 진실한 사랑을 실천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혈연이나 학연, 지연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참 사랑은 모든 아이들을 내 친 자식처럼 여기게 만듭니다. 참 사랑은 모든 노인들을 내 어버이로 변화시킵니다. 참 사랑은 모든 가슴 아픈 사람들을 내 가족, 내 혈육으로 바꿉니다.
예수님과 형제 자매되는 법
- 이기양 신부-
예수님이 효자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불효자이셨던 것 같습니다. 출생부터도 부모의 뜻은 전혀 개입이 안 되고 하느님의 뜻으로 태어나 부모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으며, 소년 시절에는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다가 행방불명이 되어 며칠씩 찾아 헤매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장가를 가서 부모를 모신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부모보다 먼저 죽어 부모의 가슴에 못을 박은 불효 중의 불효를 저지르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효자였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황급히 쫓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은 거들떠도 안 보고 만나주지도 않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8,21)
이렇게 냉랭하고 섭섭하게만 말씀하셨지요.
그러면 정말 예수님은 불효자이셨겠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성가정이라는 차원에서는 가장 효자이셨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부모 곁을 떠났고, 생업까지도 뒤로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쫓아오라고 요구를 하셨습니다. 하지만 떠나온 집과 가족이 어찌 그립지 않겠습니까? 모든 것이 있는 고향이 그렇게 쉽게 잊혀지겠습니까? 그것을 잘 알았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9,62)
예수님께서 효자였는지, 불효자였는지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또 이렇게 살펴볼 수도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사제인 제가 효자이겠습니까? 불효자식이겠습니까? 아마도 인간적으로 봐서는 그렇게 효자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부모님을 옆에서 잘 모시지도 못하고 부모님의 원의를 채워드리지도 못했으니까요.
그렇다고 제가 그렇게 불효자인가 하면 또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습니다. 어쩌다 집에 가면 저에 대한 부모님의 기대치가 높고 또 많은 부분을 제일 먼저 저와 상의하고 싶어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만큼 신뢰하고 의지하시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제가 사목자로 있으면서 부모님께 효도한다고 맨날 집에만 가 있으면 그것이 바른 효도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해서 사는 것이 저로서는 가장 큰 효도일 것입니다.
저도 이럴진대 예수님은 효자 그 이상인 분이시지요.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 역시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봉헌하신 분이며 요셉 성인 역시 천사의 알림에 인간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지만 순응하고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것을 기꺼이 헌신하는 마음을 갖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성가정의 가족들은 효의 차원을 뛰어넘어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 자식에 대한 존경심을 당연하게 갖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위해서 이 모든 인간적인 인연을 끊고,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새로운 형제 자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을 아는 성모님과 요셉 성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가장 자랑스러운 분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형제요 자매라는 말씀은 섭섭한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충실하고 계시다는 것을 성모 마리아와 형제들이 함께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8,21)는 말씀은 과거의 말씀만이 아니라 사목자인 제 안에서도 지금 실현되고 있습니다. 저에게 형제가 몇 분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형제보다도 신자들을 훨씬 더 많이 만나게 됩니다. 사목자로 하느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과 가깝게 지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사목위원들이나 구역장, 반장 또는 단체장들이나 주일학교 교사 등 성당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분들과는 저의 육적인 형제 자매보다 오히려 더 자주 만나고 더 친하게 지내게 되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과 새로운 형제 자매가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저희 성당 초등부 교사들은 모두 어머니 교사들입니다. 행사 후 수고했다고 1박 2일로 단합대회를 가게 되었는데 그 때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결혼한 지 15~20년이 지났지만 그동안 남편 없이 밖에 나온 적이 한 번도 없다는 분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다른 곳에서 가는 것이면 엄두도 못낼 일이었지만 신앙 안에서 믿음이 있기에 남편이 보내준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 안에 한 형제 자매임을 체험할 수 있었던 단합대회였지요.
예수님의 형제 자매 또 본당 사제의 형제 자매가 되기 위해서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고 실천해 나갈 때 새로운 형제자매로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를 원한다면 하느님께서 불러주신 봉사 직분에 더욱 성실히 임하고 항상 겸손된 자세로 교회 안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느님의 새로운 형제 자매가 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의 형제 자매이십니까?
하느님과 함께 하는 가족
-상지종신부-
예수님과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예수님께 다가갈 수 없습니다.
이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은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볼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 만남의 하나의 장벽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애써 찾아온 예수님의 가족들을
측은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당신을 찾아온 가족들을 알아보지 못하던 예수님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가족들 사이에 자리하여
가족들의 귀한 만남을 방해하던 수많은 사람들을
야속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만나야 한다.
만나게 해 드려야 한다.
혈연을 가진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어찌 말로 표현하랴!
내가 할 수만 있다면
내가 해야만 한다.
"선생님의 어머님과 형제 분들이 선생님을 만나시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한 사람의 외침에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가족에 대한 사랑이
예수님을, 예수님의 가족을 생각하는 아름다운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랑, 이 마음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것이었습니다.
인간적인 테두리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인간적인 것이 부정적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것을 뛰어넘을 때, 인간적인 것은 완성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예수님을 사랑했던 한 사람이 장벽이라고 생각했던 그 것
예수님께는 장벽이 아니라 서로를 이어주는 다리였습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의 만남을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사람들
예수님께는 방해꾼이 아니라 한 가족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 온 어머니와 형제들을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인 테두리를 뛰어넘어
당신을 통해 하느님을 따르는 이들을 어머니와 형제로 받아들이셨을 뿐입니다.
복음은 인간적인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인간적인 것을 완성하기 위해 인간적인 것을 뛰어넘을 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혈연 관계만을 염두에 두신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 안에서 맺어지는 인간 관계를 제약하는 모든 인습적인 관계,
지연, 학연, 계층, 계급.....이 모두를 생각하신 것입니다.
인간적이라는 이름으로 용인되는
폐쇄적이고 분파적인 모든 요소는 제거되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의 기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만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이라는 기준으로 맺어지는 인간 관계는
다른 모든 인간적인 기준에 따른 관계에 참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 관계들을 완성시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 그것은 사랑과 정의의 실천입니다.
관념적이 아닌
가장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과 정의 실현 과정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믿는 이들의 가족입니다. 이 가족이 교회입니다.
이 가족 안에
이 교회 안에
내가 있습니다. 그대가 있습니다. 우리가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부과된 여러가지 인간적인 제약을 깨뜨려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여
이 가족 안에
이 교회 안에
내가 있어야 합니다. 그대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