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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8. 묵상글 들 ( 대림 제4주일. - 마침내 임마누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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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8. 대림 제4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마침내 임마누엘>
마태오 1,18-24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마침내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나는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께서 너와 함께
너는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께서 나와 너와 함께
나와 너는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 뜻대로 나는 너와 함께
하느님 뜻대로 너는 나와 함께
그리하여 나와 너는 우리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마침내 임마누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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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8. 대림 제4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내 때가 아닌 하느님의 때에 순종하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오실 거라는 예고를
천사를 통해 아하즈와 요셉이 듣는데 오늘 전례의 핵심은
아하즈가 들은 예고가 700여 년이 지나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우리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도 이렇게 오래 기다려야만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면 어떻겠습니까?
이런 예고가 우리에게 희망이겠습니까? 아니면 오히려 절망이겠습니까?
우리도 하느님은 임마누엘 하느님이라는 얘기를 듣지만
실제 우리의 체험은 하느님께서 빨리 오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 하느님이 임마누엘 하느님이라는 말은 거짓말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하느님을 믿는 것에,
그리고 하느님 말씀에 희망을 거는 것에 자주 실패하는데
어쩌면 그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오시는 것은,
우리의 요구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 때문에 오시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오시는 때도,
우리가 바라거나 지정하는 때가 아니라 당신 구원계획에 따르는 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은총에 따르는 이런 하느님의 주도성에 순종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오셔야 한다고,
우리 주도성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오시고 안 오시고는 하느님 결정 사항이고,
언제 오시고 어떻게 오시는 것도 하느님 결정 사항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언제 도둑이 올지 모르니 깨어있어야 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심도 그렇게 깨어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내 때가 아니라 하느님의 때에 이렇게 깨어있는
우리의 대림 시기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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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8. 대림 제4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주님 성탄의 정점에 와 있는 대림 제 4주일입니다. 제 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이라는 예언이 복음에서 실현됩니다. 주님의 천사가 마리아가 아들을 낳게 되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요셉에게 알려 줍니다. 바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의 마지막 시기는 예수 그리스도인 임마누엘 주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제 2독서에서 바오로는 ‘하느님의 복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복음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입니다. 그분은 인성으로 말하면 다윗의 자손이요 신성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우리가 기도와 전례에서 늘 사용하는 호칭인데,이 호칭이야말로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입니다 ‘우리 주’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떠받드는 신앙고백이고,예수 그리스도’는 나자렛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곧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신앙고백입니다.
오늘 우리가 듣는 마태오 복음에서 요셉에게 알리는 주님 탄생 이야기는 앞의 본문과 바로 연결됩니다. 즉 예수님의 족보에 대한 설명입니다. 족보는 메시아를 자리매김하고 본질적인 물음,즉 ‘예수님은 누구이신가’에 답하고자 하느님 백성의 총체적인 역사를 종합적으로 제시합니다. 탄생 예고 이야기는 ‘예수님은 누구이시며 어디에서 오셨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이라고 설명합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사건의 흐름을 바꿔 놓으실 수 있으십니다. 성경에서(창세 16,7-13; 탈출 3,2) 하느님을 가리키는 “주님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납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예언자적 영감의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마련하시는 의사소통 방법입니다(창세 20,3; 28,12; 욥 33,15). 이로써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인정하고, 예수의 아버지로서 책임을 떠맡아야 했습니다. 요셉은 아기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그를 양자로 받아들였습니다. ‘다윗의 아들’이라는 호칭이 요셉의 이름과 연결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났으나 요셉을 통하여 다윗의 자손이 됨으로서 참으로 인간으로 오심을 말해줍니다.
다른 탄생예고이야기의 경우처럼 천사는 아기의 이름을 알려줍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시다’ 라는 의미의 ‘예수아’를 그리스어로 표기한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구원을 의미하는 ‘여호수아’와 같은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구원자’라 불리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신명 32,15; 1사무 10,19; 루카 2,11). 1세기 유다인의 세계에서 이 호칭은 오직 하느님께만 사용됩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가 해방자의 역할을 한다 하더라도 ‘구원자’로 지칭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신약성경에서 ‘구원자’로 불리움 받습니다. ‘죄에서 구원하다”라는 표현은 더욱더 놀라운 것입니다. 메시아가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해방시키는 구실을 한다면 죄에서 구원할 권한은 오직 하느님에게만 속합니다. 그분이 곧 임마누엘 주님이시며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인간이 되시어 내려 오십니다. .
바로 그 구원자, 해방자이신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심을 기쁘게 준비하는 기간 되시길 바랍니다.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알코이 (Alcoy) 의 아기 예수
스페인 -1568년
알코이 사람들은 모두 뜨겁게 환호하며 그 성물(聖物) 을 찾은 일을 축하했다. 숨겨진 장소를 가르쳐 준 그 아기 예수께 감사드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관청은 두달 후에 미랄레 미망인의 집과 성체가 숨겨져 있던 마구간을 사들여서 그 곳에 아기예수를 기념하는 소성당을 세웠다. 나는 기쁘게도 1965년에 그 은총의 장소를 방문하도록 허락받았었다. 그 장소는 오늘날 “거룩한 무덤(Santo Sepulcro) "의 수녀원 수녀들에 의해서 돌보아지고 있다. 몇 가지 공식적인 기념행사들이 그 당시 뿐만 아니라 계속적으로 이어져 왔으며 여러 가지 종류의 예술 작품으로 이 놀라운 사건을 영원히 알려 주고 있고, 그 기적을 증명하고 있다. 로마 교황청은 그 이래로, “기적을 일으킨 가장 거룩한 아기 예수"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갖고 있는 알코이의 아기 예수에 대한 신앙심을 속죄행위로써 허가했다.
알코이는 매년 1월 29일에서 31일까지 3일 동안의 축제로, 알코이의 놀라운 아기 예수를 축하한다. 거룩한 성체축일 때와 마찬가지로, 성체가 장중한 행렬로, 거리를 통과해서 운반된다. 미소 짓고 있는 아기 예수의 입상이 꽃들 사이로 함께 나아간다. 그 입상은 1568년 기적의 날 이래로 몸을 숙이고 있다. 알코이는 아마도 세상에서 유일하게, 여름뿐만 아니라 한겨울에도 “성체축일행렬”을 하는 도시일 것이다.
성체 축일
주님이 지나가시는 날이다.
그 날에는 주님이 우리 집의 문지방에 서 계신다.
그리고 자비롭게 성스러운 축복의 손을 드신다.
충만한 봄 기운이 주님에게 그의 가장 아름다운 꽃을 바친다.
초여름의 첫번째 장미가 제대를 장식하고,
찬양의 노래가 환호하듯이 온 나라를 물결친다.
그런 다음 사람들은 경외심에 가득 차서 신성하게 그 고귀한 손님 주위에 모인다.
그러면 주님은 축복을 주시며 온화하게 그들 가운데에서 쉬신다.
길을 잘못 든 영혼이 놀랍게도 되돌아온다.
성스러운 성광의 황금빛 광휘로부터
피곤한 인간들의 눈 속으로 희미판 빛이 흘러들어간다.
성체 안에는 우리의 완전한 행복이 숨겨진 채로 살아 있기 때문이다.(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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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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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8. 대림 제4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 몸에 잉태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20)
오늘은 대림 4 주일입니다. 가까이 오신 아기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채비를 갖추어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준비만으로는 부족한 일입니다. 준비를 넘어서, 이제는 우리의 결정적인 협조를 필요로 할 때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탄생이 우리의 협조를 통해서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아기 예수의 탄생도 요셉과 마리아의 응답과 협조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이를 잘 보여주는데, 먼저 <제1독서>에서는 임마누엘의 탄생이 예고되고, 곧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다.”(이사 7,14)라고 예고됩니다.
<제2독서>에서는 예고된 이 일이 이루어진 다음, 그 은총으로 이루어진 일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곧 바오로는 자신의 사도직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은총임을 말하고 있습니다(로마 1,1-7).
오늘 <복음>에서는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과 예언이 요셉의 협조를 통해 이루어짐을 밝혀줍니다. 이를 먼저 이렇게 전합니다.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마태 1,18)
이 소식에 요셉은 무척 당혹했을 것입니다. 약혼자의 임신사실에 온갖 의혹과 치욕스런 배신감으로 분노와 갈등을 겪었을 것입니다. 마리아에 대한 서운함과 불신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남자 없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궁색하고 구차한 변명 정도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약혼녀 마리아가 아기를 가진 사실을 드러내어 재판을 걸게 되면 그녀를 죽음에 몰아넣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고, 그냥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마리아를 집 안에 받아들이는 일도 우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공적인 고소를 통해 마리아를 수치스럽게 만들지 않으려고,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마태 1,19)
참으로, 그는 “의로운 사람”(마태 1,19)이었습니다.
그럴 즈음에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에게서 벌어진 일을 밝혀줍니다.
“그 몸에 잉태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20)
참으로 기이하고 황당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이성과 자연계의 모든 법칙을 뛰어넘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이 터무니없는 일을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그렇지만, 그는 ‘의심’이라는 악을 떨치고, ‘신비’라는 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 일이 거룩한 분의 개입으로 이루어진 일임을 믿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 안에 자신을 가두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인간의 지혜로 가히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 은총의 법을 따르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야흐로 은총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해가 아직 뜨지는 않았지만, 이미 그 빛으로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약혼녀 마리아의 성령잉태 사실뿐만 아니라, 요셉에게도 ‘사명’을 부여합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마태 1,21)
이처럼, 주님의 천사는 그에게 아버지의 역할을 부여했습니다. 곧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붙이는 영예를 받았습니다. 비록 아기는 자신의 자식이 아니지만, 그를 보살필 아버지로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마침내 요셉은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분 뜻에 협조자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아내를 맞아들였습니다.”(마태 1,24).
참으로, 그는 ‘순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안락과 평안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결국, 그는 결혼하기도 전에 아내를 포기해야만 했고, 아들을 얻기도 전에 아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리하여 ‘행동하는 믿음과 순명’으로 구원받는 모든 이들의 양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인류를 향한 하느님 ‘구원계획의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온 누리에 구원을 가져왔습니다.
이처럼, 구원은 ‘우리의 협조’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구원의 협조자’가 된다는 것은 구원을 이루시고자 하는 “그분의 뜻” 안에 머물고, “그분의 뜻”에 따라 협조하여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요셉은 오늘 <복음>에서뿐만 아니라, 복음서 전체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항상 침묵으로 하느님의 음성에 마음의 귀를 열고, “아버지의 뜻”에 순명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분이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요셉 성인과 함께 구원의 협조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령의 활동과 거룩한 분의 힘을 받아들였으면 좋겠습니다. 의심하기보다 신비를 품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행동하는 믿음과 순명으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주님!
의심을 떨치고 신비를 받아들이게 하소서.
당신의 개입을 맞아들이게 하소서.
기이하고 황당하게 보여도 ‘당신의 뜻’에 가두어지게 하소서.
어처구니없고 터무니없게 보여도 ‘당신의 뜻’을 품고 살아가게 하소서.
제 안에 ‘당신의 뜻’을 세우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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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8. 대림 제4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를 도구삼아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함께하신다는 것을 좀 더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도록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눈높이를 맞춰주시기 위해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십니다. 준비된 마음 안에 하느님을 잘 모셔드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대림초 4개가 환히 빛을 밝히는 그만큼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음을 느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간 순명하는 삶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은총을 얻기를 바랍니다.
미국 샌디에고에 1729년에 지어진 미션성당이 있는데 제단 위에 양팔이 없는 십자고상을 모셔놓았습니다. 왜 그런 십자고상을 모셨을까요? 그분의 손이 되어드려야 한다는 간절한 호소를 듣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도구삼아 당신의 뜻을 펼치십니다. 주님의 뜻은 인간의 선한 응답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우리에게 간절히 호소했습니다.
“그대의 몸을 지니고 있을 뿐 지상에서 그리스도는 더이상 몸이 없습니다. 그대의 손과 발을 지니고 있을 뿐 그리스도는 손도 발도 없습니다. 그대의 눈은 이 세상을 자비로 바라보시는 바로 그분의 눈이요, 그대의 두 발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려 걸음을 내딛는 바로 그분의 발이며 그대의 두 손은 세상을 강복하시려 펼쳐 드신 바로 그분의 손입니다. 그리스도는 더이상 몸이 없습니다. 그대의 몸이 바로 그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나를 원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어렵고 힘든 가운데에도 하느님의 사랑은 여전합니다. 다만 내가 힘들 때는 그 고통에 가려서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시련과 역경 안에서 하느님을 결정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기적은 문제가 있는 곳에서 믿음을 바탕으로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예기치 못한 어려움에 직면할 때 양다리 걸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주님의 능력은 만날 수 없게 됩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언제나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임마누엘”(אמנוּאל) 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임마누(אמנוּ)라는 말과 엘(אל)이라는 말이 합쳐진 단어로 ‘임마누’는 ‘우리와 함께 있다’라는 뜻이고 ‘엘’은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두 말을 합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 됩니다.
오늘 복음은 신비로운 예수님의 탄생을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서있던 요셉의 처신을 통해 순명의 역사를, 믿음과 응답의 결과를 보게 됩니다. 요셉을 바라보면 정말 너무도 기막힌 일을 당했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얼마나 마음이 설레였겠습니까? 그런데 약혼한 처녀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임신을 했다는 사실에 접하게 됩니다. 실망, 또 실망, 배신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놀랍고 분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냥 결혼을 하자니 남의 여자를 데리고 사는 것이 되고, 파혼을 하자니 한 사람을 돌팔매질을 당해 죽게 만드는 것이고……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따지고, 소문내고, 망신을 주며 소란을 피울 수도 있었으나 요셉은 법을 어기지도 않고 마리아를 죽음에로 몰아넣지 않으면서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고 결국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시대 상황으로 봐서 의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날 밤 꿈에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하셨습니다. “예수”라는 뜻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ihsouς)는 ‘예슈아’(ישוע)를 그리스어로 음역한 신약성경에 나오는 발음입니다.‘예수’라는 이름은 ‘하느님은 구원이시다’, ‘하느님은 구세주시다’ 라는 뜻을 갖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예언된 말씀이었습니다. 1독서 이사야 7장 14절을 보면,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요셉은 자기 삶의 상식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요셉에게 닥친 일은 믿음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불가사의 한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에 대한 해명도, 설명도 없습니다. ‘믿겠으면 믿고, 말겠으면 말라.’는 식입니다. 사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이렇게 보통 사람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로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믿음은 바로 어려운 일에 처했을 때 그 빛을 발하게 됩니다. 내 뜻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인간의 구원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인간의 협력을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인간과 더불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 편에서의 응답이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응답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구원은 하느님의 부르심과 믿음으로 표현되는 인간의 응답으로 이루어집니다.
믿음에 따르는 순명이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마땅하고 옳은 일에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비상식적이고 비논리적이며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님의 뜻이기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고통과 시련이 동반할 수도 있습니다. 큰 사람이 되려면 이러한 단련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갈등과 상처를 가슴에 담고 상대를 철저하게 배려하며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한 요셉의 태도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남의 허물을 사랑으로 덮어주고, 그 부족함을 채워주기 위해 노력하나요? 이웃의 잘못을 들추어내고 싶어 하는 마음은 없는지요? 험담을 하고 뒷담화를 하는 곳에는 진실한 사람이 없고 하느님께서는 그를 안타깝게 바라보십니다.
궁지에 몰린 마리아를 감싸주고 품어주려 했던 요셉의 모습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웃에게 위로와 기쁨이 되고 하느님 축복의 통로가 되길 희망합니다. 하느님의 뜻 앞에 요셉이 이성적으로 생각하여 최선책으로 결정한 것은 다 소용이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혼자 고민하기 전에 하느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계산을 하고 이해득실을 따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한가운데서 나의 응답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응답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는 하지만 현실적인 이익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세상 것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 바르고 정직한 마음을 지녀야 하고 아주 사소한 것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관계 안에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 안에서 응답을 요구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순간 신앙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늬만 종교인이 아니라,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주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을 그분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더더욱 상식에 어긋나고 비합리적일 뿐 아니라 이해하기 어려울 때 그때야말로 그 안에서 주님의 뜻에 맞는 응답의 부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편안하고 안락한 길에 있지만, 우리의 관심은 그 길이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인가에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멋있게 보이는 길이라 해도 그 길이 우리의 목적지인 하늘나라와 연결되지 않은 길이라면 가지 말아야 합니다. 반면에 아무리 험한 길이라도 목적지를 향한 길이라면 그 길을 가야합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어려운 일이 일어나야만 하는가? 내가 이것을 감당해야 하나? 하는 마음이 들 때 응답의 소명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게 여겨지는 일, 궂은일, 곤란한 일에 직면해서 피하려 하지 말고 주님의 부르심을 생각하십시오. 길의 상태가 아니라, 그 길의 끝이 어딘가를 생각하십시오. 바로 그 마음 안에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그 응답 안에 완성될 것입니다.
주님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길 청하며 매일 매 순간 우리 마음속에 아기 예수님을 탄생시켜 드려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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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8. 대림 제4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거꾸로 읽는 세계사의 두 번째 이야기 ‘사라예보’ 사건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라예보는 탁구의 이 에리사 선수가 세계 탁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유고슬라비아의 도시입니다. 그러나 사라예보는 세계1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이 된 도시이기도 합니다. 사라예보에서 한 청년이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황태자를 저격하였습니다.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서 당시 세계는 동맹국과 연합국으로 나뉘어서 끔찍한 전쟁을 벌였습니다. 과학기술은 발전하지만 인류의 지성은 진보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1차 세계대전은 새로운 무기의 시험장이 되었고, 인류는 하느님의 모상을 버리고, 동생을 죽였던 카인처럼 이웃을 향해 총과 칼을 겨누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의 불씨는 사라예보에서 있었던 한 청년의 총구에서 시작되었지만 1차 세계대전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만나서 탐욕과 정복으로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는 유럽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고유한 문화는 말살되고, 자원은 수탈되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지만 제국주의의 탐욕은 끝나지 않았고, 20년 후에 2차 세계대전으로 인류는 또 한 번 참혹한 전쟁에 휘말리게 됩니다.
오늘은 대림 제4 주일입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예언합니다.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그분은 제국을 만들고, 세계를 정복하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탐욕과 욕망으로 식민지를 건설하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약소국의 문화를 말살하고, 자원을 착취하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이념, 세대, 혈연, 학연, 지연, 종교로 편을 가르고 차별하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임마누엘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복음을 선포하신 분이셨습니다.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할 것이라고 하면서 철저하게 비폭력을 실천하신 분이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신 분이셨습니다. 가난한 이들, 갇힌 이들, 아픈 이들, 세리, 창녀, 이방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신 분이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이는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친구의 잘못을 기꺼이 용서하라고 하신 분이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아픈 사람, 외로운 사람들을 위해서 왔다고 하셨습니다.
사라예보는 1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임마누엘 주님이 태어나시는 베들레헴은 하느님의 나라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베들레헴 성전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여행객으로 이곳에 왔다면 순례자가 되어서 가면 좋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순례자로 이곳에 왔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가면 좋겠습니다.” 임마누엘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 거룩한 사람은 신분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사람은 능력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사람은 직책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사람은 이웃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는 사람입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주고 여관으로 데려가주었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거룩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했던 자캐오는 거룩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했지만 닭이 울자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 사도는 거룩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던 요셉은 거룩한 사람입니다.
대림 4주일을 지내면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신비’를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것은 바로 나를 위한 것입니다. 부족하고, 죄를 많이 지었고, 별로 잘한 것도 없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권능과 모든 권세를 가지진 분이 아주 연약한 아이의 모습으로 비천한 마구간에 태어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쁜 꽃이 그 고운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는 어두운 땅속에서 끊임없이 양분과 물을 찾아 고생하는 뿌리의 수고와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건강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기쁘게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주님의 성탄을 이렇게 잘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은 말없이 우리를 도와주고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우리를 사랑한 고마운 이웃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모여 기도하고, 주님께서 하신 약속들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는다면, 주어진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기쁘게 생활한다면 바로 이곳에도 분명 주님께서는 오실 것입니다. 2000년 전에 베들레헴으로 오셨던 임마누엘 주님은 이 자리에 있는 우리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겸손과 비움의 구유로 만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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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8. 대림 제4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종이에서 펜을 떼지 않은 채 4개의 직선으로 9개의 점을 연결하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간단해 보이지만 전혀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5개의 직선이라면 쉬울 것 같은데, 4개의 직선이라고 하니 하나의 선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정답을 보고서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어렵게 생각했던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우선 정답은 이러했습니다. 경계를 벗어나면 쉽게 풀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점에서 조금도 벗어나면 안 될 것이라는 생각에 문제의 해답을 찾지 못했던 것이지요.
‘틀을 벗어나는 사고방식’은 우리 일상 안에서도 분명 필요로 합니다. 사실 습관적인 사고에서 벗어나기란 정말로 힘듭니다. 그래서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의 경기 장면을 보고 있습니다. 심판의 편파 판정으로 우리나라가 불리하다고 생각할 때가 더 많지 않았습니까? 우리나라가 승리하면 선수들이 잘해서이고, 다른 나라가 이기면 심판의 잘못된 판정과 텃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역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뜻도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요셉이 가지고 있었던 틀이 있었습니다. 의로운 사람, 율법에 맞게 살아가야 한다는 틀이었습니다. 이 틀에 의하면 마리아를 고발해서 공개 심판을 받게끔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틀을 깨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를 복음은 이를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파혼하기로 작정하지요. 파혼하기로 작정한 것은 아직도 틀 안에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꿈에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고 합니다.
이 말에 그는 틀에서 완전히 벗어납니다. 고발하지도 또 파혼하지도 않으면서 성가정을 이룹니다. 천사의 명령이니 당연히 따라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꿈에서 이루어진 명령입니다. 꿈 꾼 것을 누가 그대로 따르겠습니까?
틀을 깨려고 시도했기에, 꿈을 통해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 틀은 사랑하는 마음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요셉도 마리아를 진정으로 사랑했기에 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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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제대로 알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장스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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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8. 대림 제4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원한 롤모델 성 요셉
-배려와 존중, 침묵과 경청, 겸손과 순종-
"영원한 하늘의 빛 떠올라 있고, 구원의 아침샛별 반짝이나니
찬란한 천상빛이 우리를 불러 천국의 시민되라 초대하시네."
대림시기 제2부(12.17-24) 아침성무일도시 찬미가 5절이 아름다워 나눕니다. 우리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은 참 행복합니다. 큰 산같은 두분의 성인, 즉 성 요셉과 성 베네딕도를 배경의 수호성인으로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도원 로고에서 불암산佛巖山 큰 산봉우리 둘이 흡사 두 성인을 상징하는 듯 싶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성 요셉이고 마치 오늘이 성 요셉 축일처럼 생각됩니다. 오늘 대림 제4주일, 마음 안팎을 환히 비추는 대림 촛불 넷이 주님 오심이 임박함을 알리며 마치 성 요셉 축일을 경축하는 듯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앞서 참 좋은 아버지 요셉을 마련해 놓으신 하느님의 배려가 놀랍습니다. 어제 “오! 지혜(O Sapientia)”로 시작됐던 M후렴에 이어 12월18일, “오! 하느님(O Adonai)”으로 시작되는 M후렴도 좋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은연중 보여주는 성 요셉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오! 하느님이여 이스라엘 집안을 다스리시는 분이여, 불타는 가시덤불 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시고, 산에서 그에게 당신 법을 주셨으니, 오소서, 팔을 펴시어 우리를 구원하소서.”
성 요셉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두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수차례 인용했지만 늘 새롭습니다. 영원한 롤모델인 성 요셉을 참으로 흠모하는 마음에서 쏟아 놓은 고백시입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
아버지 불암산 앞에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 모자를 벗고
큰 절을 올린다
있음 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불암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늘 행복할 수는 없을까
불암산처럼!”-2000.11.17.
이와 더불어 그보다 한참뒤에 쓴 “저녁 불암산”도 제가 좋아하는 짧은 시입니다.
“아,
크다
깊다
고요하다
저녁 불암산!”-2007.12.
그대로 성 요셉을 상징하는 듯한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입니다. 제 집무실에는 어느 아픈 자매가 깊은 신심으로 6개월에 걸쳐 그린 “크고 깊고 고요한” 산같은 모습의 성 요셉의 초상화도 늘 바라볼 수 있도록 비치되어 있습니다.
첫째, 성 요셉은 배려와 존중의 큰 마음을 지닌 ‘큰 산’같은 분입니다.
참으로 큰 산같은 연민의 사람 성 요셉입니다. 오늘 복음 서두 말씀이 바로 이런 넉넉하고 자비로운, 배려하고 존중하는 성 요셉의 큰 마음이 정말 잘 드러납니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전에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얼마나 침착하고 지혜로운 대응인지요! 추호도 흥분이나 분노를 감지할 수 없습니다. 성 요셉의 관심은 오로지 마리아의 안전이였습니다. 감쪽같이 마리아를 살려내고 지켜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마음은 더 큽니다. 바로 그 절체절명의 순간 하느님의 결정적 개입이 이뤄집니다.
둘째, 성 요셉은 침묵과 경청의 깊은 사랑을 지닌 ‘깊은 산’같은 분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전폭적 신뢰와 사랑을 받은 침묵과 경청의 사람, 성 요셉입니다. 경청을 위한 침묵이요, 요셉이 침묵중 경청한 후 조용히 헤어질 마음을 굳혔을 때, 꿈에 주의 천사가 나타납니다. 필경 성 요셉은 깊은 고뇌중에 밤샘 기도에 돌입했음이 분명합니다. 바로 그 순간 하느님은 당신 천사를 통해 개입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이 얼마나 요셉을 신뢰했는지 당신의 속내를 다 드러내십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참으로 탄생할 아기 예수님이 얼마나 고귀한 분인지 그 심오한 의미가 잘 드러납니다. 예수는 본디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를 뜻하는 히브리 말 이름인 여호수아가 줄어서 된 예수아를 그리스말식으로 음역한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자 성령으로 잉태된 참으로 심오한 예수님의 신원입니다. 바로 제2독서 로마서의 바오로 사도의 고백과 일치합니다.
“그분께서는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로 이런 고백과 일치되는 신비로운 비밀이,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이고 영으로는 하느님의 아드님인 예수님의 고귀한 신분이 은밀히 요셉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이처럼 요셉은 하느님의 전폭적 신뢰를 받은 침묵과 경청의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의 신적 기원을 알았기에 요셉은 참으로 예수님을 헌신적으로 돌봤을 것입니다.
셋째, 성 요셉은 겸손과 순종의 고요한 믿음을 지닌 고요한 산같은 분입니다.
‘고요한 물은 깊이 흐르고, 깊은 물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정수유심靜水流深, 심수무성深水無聲).’ 성 요셉이 바로 그러합니다. 참으로 좋은 산은 ‘높은 산’이 아니라 ‘깊은 산’이라 합니다. 겸손과 순종의 고요한 믿음을 지닌 성 요셉은 참 ‘깊은 산’같은 분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심중을 정확히 알아챈 성 요셉은 군말없이 순종으로 응답합니다. 얼마나 충실한 주님의 종인지요! 겸손과 순종으로 빛나는 성인의 믿음입니다. 얼마나 하느님과 깊은 내적 일치의 삶이었는지 깨닫습니다. 이런 성 요셉을 통해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의 실현은 너무나 자연스런 일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7,14).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를 뜻합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이름, 임마누엘인지요! 마침내 요셉의 순종의 믿음으로 마리아를 통한 임마누엘 구원자 예수님이 탄생할 수 있었으니, 성 요셉은 하느님께 대한 우리 인류의 자부심같은 존재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 삶의 영원한 롤모델 성 요셉입니다.
참으로 크고 깊고 고요한 불암산 같은 성 요셉입니다.
1.배려와 존중의 큰 산같은 마음의 사람,
2.침묵과 경청의 깊은 산같은 사랑의 사람,
3.겸손과 순종의 고요한 산같은 믿음의 사람, 성 요셉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주님을 닮은 이런 사람으로 변모시켜 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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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8. 대림 제4주일. 키엣 대주교님.
겸손과 순종의 실천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 모순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신학적 의미를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기에 성령의 은총으로 잉태되셨고, 또한 인간이시기에 한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류를 대표하여 마리아께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혈통을 받은 요셉과 마리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조용하고도 은밀하게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셉이라는 중재자를 통해 인류의 가족이 되셨고 국가와 혈통, 가족을 갖게 되셨고 그분의 이름은 가족과 종족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임마누엘이시며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인류 최초로 축복을 받은 요셉과 마리아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전해졌고 소녀들은 메시아의 어머니가 되는 희망을 품고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가족과 혈통, 나라의 영광이며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 역시 메시아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들었을 때 이렇게 겸손하게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또 엘리사벳이 그분을 칭송하자 다음과 같이 화답하였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잉태하게 된다면 그것은 자신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굽어살핌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 후 마리아는 주님이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이루신 모든 것, 모든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고 깊이 묵상하였습니다.
복음에는 뒤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인 목수일에만 열중하는 요셉성인을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것을 안 그는 몰래 떠나려고 합니다. 자신의 본분대로 겸손하고 바르게 의롭게 살아왔지만 감히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는 영광이 자신에게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분은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되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들의 계획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앞으로 겪어야 할 모든 고통과 고난도 감수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를 것을 약속했고 요셉 또한 망설임없이 하느님의 뜻에 따랐습니다. 오직 주님을 위하여 자신들의 꿈과 생각을 버리고 하느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이 모습은 예수님도 같습니다. 당신이 바로 하느님이시지만, 하느님의 권세는 한점도 없이 가장 가난하고 나약한 사람으로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을 맞으실 때까지 언제나 아버지 하느님의 뜻만을 따르셨습니다.
모든 것은 뜻이 있는 곳으로 모입니다. 아버지 뜻에 따라 겸손하게 내려오신 예수님은, 겸손한 마리아와 요셉의 가정을 당신의 거처로 정하셨습니다. 겸손함과 절대 순종이 있는 곳으로 오신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깊은 겸손과 순종을 알려주시기 위해 당신 스스로 가난한 구유에서 태어나시며 ‘겸손과 순종’을 실천하셨습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며 주님과 마리아 요셉성인의 겸손함과 순종의 마음으로 주님을 맞이한다면 행복한 성탄절이 될 것입니다.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주님께서는 스스로 내려오셔서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셨고 한 가족의 일원이 되신 것에 대한 신학적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십시오.
2. 상업화되고 있는 성탄절 속에 겸손한 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겸손과 순종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3. 지금 이 시대에 겸손과 순종을 지니고 산다는 것은 어떠합니까?
말씀의 나눔
1. 이제 성탄절이 며칠 안 남았습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주님과 마리아, 요셉 성인의 겸손과 손종을 실천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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