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곱의 축복
27장 26절 ~ 29절
26.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장관 비골로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27.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로 너희를 떠나가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창26:16
28.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29.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며 너로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창24:31
=====================================================================
미국 캐롤라이나주에 샌더슨이라고 하는 판사가 있었습니다. 이 판사에게는 3살 된
딸아이가 있었는데 어느 날 이 딸아이가 하루 종일 방성대곡하며 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부인이 아무리 달래도 아이가 울음을 그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남편이 들어오니까
“여보, 난 두 손 다 들었으니까 당신이 달래보세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샌더슨 판사가 딸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울고 있니?” 물으니까
딸아이가 “아빠가 일주일 전에 사다 준 거북이가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어요. 거북이가 죽었기 때문에 우는 거예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샌더슨 판사가 다른 가게에도 거북이를 파니까 새 거북이를 사주겠다고 했지만 아이는 여전히 울음을 멈추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거북이 장례식을 치러주자고해도 아이는 계속 웁니다.
그래서 샌더슨 판사는 아이에게 할 수 없이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애야, 장례식이라는 것은 재미있는 것이야. 친구들도 초대하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케이크도 먹고, 풍선도 불어 놓고 마치 생일 파티랑 같은 것이란다.”
그러니까 이 아이가 갑자기 울음을 멈추고 행복한 표정으로 방긋방긋 웃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큰 일이 벌어졌습니다. 갑자기 거북이가 잠에서 깨어나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딸아이가 이 거북이를 가만히 지켜보더니 샌더슨 판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 이 거북이 죽이자!”
이 이야기는 3살 난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인간은 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이삭의 집안에 큰 경사가 났습니다. 아버지 이삭의 수명이 다해서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아들을 마지막으로 축복하는 날입니다. 얼마나 경사스러운 날입니까? 그런데 이런 축복의 장면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인간의 죄성을 여지없이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했습니다. 정말이지 의인이 없는 집안이 어느 집안이냐, 이삭의 집안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우리 신앙의 조상이라, 믿음의 조상이라 여기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도 이 이삭의 집안에 의인이 하나도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축복하는 현장에서도 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의 죄성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Ⅰ. 의인은 없나니
1. 이삭의 죄
먼저 아버지 이삭의 죄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이삭의 첫째 죄목은 ‘하나님 말씀을 무시한 죄’입니다.
리브가가 쌍둥이를 잉태했을 때 뱃속에서 쌍둥이가 다툴 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하나님이 대답하시기를
“네 복중에 두 민족이 있구나. 두 민족이 나뉠 것이니라. 그런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삭과 리브가에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분명하게 계시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큰 자인 에서를 사랑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삭이 사냥을 해서 만들어 오는 별미를 먹으면 미각에 닿는 쾌감이 너무 좋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축복권이 야곱에게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에서를 사랑한 것입니다.
이삭의 두 번째 죄는 자식을 편애한 죄입니다.
이 당시 족장들은 자녀를 축복할 때 자녀들을 다 불러 모은 후 한 사람씩 축복을 해 주고 장자에게는 좀 더 많은 축복을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삭을 가만히 보면 자기 맏아들 에서만 가만히 부릅니다. 에서에게 모든 축복을 다 해 주고 야곱에게는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됐습니까?
야곱이 에서처럼 변장을 해서 이삭을 속이지 않습니까?
이삭은 에서를 축복한다는 착각 속에 야곱에게 모든 축복을 다 해 주었던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이삭은 자녀 교육 부실의 죄가 있습니다.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삭에게 언제나 두 가지를 교육시켰습니다. 그것은 “너는 가나안 땅의 여인 중에서는 아내를 취하지 말지니라. 그리고 네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절대로 떠나지 말라”였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자녀들이 나이 40이 될 동안에 이런 교육을 시켰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에서는 가나안 땅에 있는 헷 족속 가운데서 여인 둘을 취하게 됩니다. 야곱은 약속의 땅을 떠나서 삼촌 라반이 있는 밧단아람이라는 곳에 쫓겨나 20년 동안을 살게 됩니다.
믿음의 위대한 조상 가운데 한 사람인 이삭에게도 이러한 죄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
나 놀랍습니까? 이삭이 이러할진대 나머지 가족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2. 에서의 죄
맏 아들 에서의 죄는 무엇입니까? 장자권을 무시하고 팔아먹은 장자권 매도죄가 있습니다. 그리고 가족의 결혼 법칙을 무시하고 하나님이 멸망시킬 가나안 땅의 여인들을 취하여 결혼하는 중혼죄도 범하게 됩니다. 후에 이스마엘의 딸 가운데서도 세 번째 부인을 취하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게다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결과를 지금 보고 있으면서도 아우 야곱을 미워했습니다. 창세기 27장 41절에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왔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에서는 야곱을 죽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에서의 죄는 ‘살인 미수죄’입니다. 에서는 첫 살인자 가인의 전철을 따라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3. 야곱의 죄
그렇다면 둘째 아들 야곱의 죄는 무엇입니까? 야곱은 이름부터 ‘사기꾼’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의 죄는 사기죄입니다.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는 아버지를 속이기 위해 몸에 털을 붙이고, 형의 옷을 입고, 형의 향수를 뿌리고 가서 축복을 가로챕니다. 그런데 더 괘씸한 죄는 사기 행각을 벌일 때에 하나님의 이름을 동반한 신성 모독죄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가 만든 별미를 가지고 아버지 이삭을 찾아갔습니다.
그러자 이삭이 27장 20절에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 하니까
야곱이 대답합니다.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
마나 고약한 죄를 짓습니까? 야곱은 사기꾼 중에서도 가장 질이 나쁜 사기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은 진실을 말할 때만 사용하는 것이지 사기 칠 때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야곱은 얼마나 나쁜 죄를 범한 것입니까?
4. 리브가의 죄
그러면 어머니 리브가의 죄는 무엇입니까?
첫째 죄는 ‘기도 나태죄’입니다.
결혼한 지 20년 동안 아이가 없을 때는 이삭과 함께 아이를 달라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쌍둥이를 주셨습니다.
뱃속에서 두 아이가 다투니까 또 기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이게 웬일입니까?”
이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될 것이다”라는 응답을 주십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 25장에서 자식 문제로 어려울 때는 리브가가 하나님께 기도하더니, 이제 남편 이삭이 아들 야곱에게 언약적인 축복을 전수하는 중대한 시간에는 기도하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기도 나태죄가 리브가의 죄목입니다.
여러분 중에 기도를 쉬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오늘 이 시간에 기도를 회복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또 리브가는 야곱의 사기죄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팔에 털을 붙일 때 누구의 말에 따른 것입니까? 어머니의 말에 따른 것입니다. 별미도 어머니 리브가가 만들어 준 것입니다. 즉 리브가는 사기를 방조한 ‘사기 방조죄’와 ‘사기 교사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형법에 따르면 사기 방조죄와 교사죄를 저지른 사람은 정범과 동일하게 처벌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리브가의 죄는 작은 죄가 아닙니다.
아울러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말씀을 알고서도 남편 이삭에게 한마디 조언
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지 않고 사기 등과 같은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동참하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역사상 최고의 믿음의 집안이 이삭의 집안인데도 불구하고 이 집안이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가족 구성원 모두가 죄가 있는 집안이라고 할 때 이삭보다 신앙이 못한 우리의 집안은 어떻겠습니까? 우리의 집안에서 죄가 발견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나오신 여러분 중에 죄의식 가운데 나오신 분이 계시다면 누구나 다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시고 회개하고 위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의인을 복 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찾아서 용서하시고 복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와 벌 가운데서도 의를 행하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Ⅱ. 야곱이 받은 축복
고등 사기꾼 야곱이 사기라는 방법을 통해서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받습니다.
그 축복의 내용은 네 가지입니다.
1. 물질적 축복
이삭은 죽을 때가 다 되었는데도 세상의 향취가 그리운 사람 같습니다. 야곱의 옷의 향취를 맡습니다. 그리고선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이상합니다. 죽을 때가 되면 세상에 대해 초연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향취와 쾌락을 아쉬워합니다. 이삭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야곱을 축복할 때에도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축복을 제 1순위에 두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2. 원수에 대한 승리의 축복
야곱은 우선 물질의 축복을 다 받았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원수에 대한 승리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너를 굴복하리라.”
남자들은 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야곱은 누구와 싸워도 승리한다는 승리의 약속인 것입니다.
얼마나 복된 약속입니까?
3. 가족에 대한 지도력의 축복
세 번째는 가족에 대한 지도력의 축복입니다.
가족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그 가운데 지도력이 있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제 처갓집에도 처의 형제가 일곱인데 제 처만 빼고 모두 덩치가 큽니다. 모두 모여서 한 번 웃으면 지붕이 떠나갈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작은 체구의 제 처가 한 마디 하면 전부 “예! 예!” 합니다. 이것이 가족의 지도력입니다. 야곱에게 이런 지도력을 주신 것입니다.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삭은 에서에게 야곱을 지배하라고 하는 말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도전심을 허용하지 않으시고 사기라는 수단을 통해서 도리어 야곱이 축복받고, 야곱이 에서를 지배하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4. 하나님이 한편 되어주시는 축복
네 번째로는 하나님이 한편 되어 주시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얼마나 좋은 말씀입니까.
이 말씀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게 저주하는 자는 내가 저주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저주하시고, 나를 축복하는 자는 내가 안 갚아도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이 내 편 되어 주신다니, 세상에 억 만 명이 나를 반대해도 하나님이 내 편 되어 주시면 우리는 어떤 싸움에도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야곱이 이런 네 가지 축복을 받았습니다.
Ⅲ. 축복의 원인
그러나 야곱은 복 받을 원인이 있거나 복 받을 의가 있어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사기죄와 신성 모독죄 가운데서도 이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야곱 같은 고등 사기꾼을 축복해 주셨을까요?
이삭의 집안은 구제불능성 죄인들의 집합소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야곱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죄에 대해서는 합당한 벌을 다 주셨습니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왜 지옥에 안 가고, 지옥 형벌을 안 받습니까? 그것은 우리 대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형벌을 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공로를 힘입어서 지옥 형벌이 면제되고 예수 믿는 사람은 언제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는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죄에는 벌이 있어서 이삭도 벌을 받습니다.
33절에 보니까 야곱에게 속은 것이 분해서 “심히 크게 떨었다”고 했습니다.
죽기 직전에 와들와들 떨고 있습니다.
에서는 어떻습니까?
방성대곡하면서 “아버지여, 남은 축복 없습니까? 야곱에게 다 주시고 남긴 것은 없으십니까?”하고 묻습니다.
아버지 이삭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국물도 없다!”하면서 에서를 축복한다고 하는 소리가 전부 저주 같은 소리만 합니다.
39절을 봅시다.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
이게 무슨 뜻입니까?
‘뜬다’는 것은 영어로 ‘away from’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의 뜻은 ‘땅의 기름짐에서 너는 관계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 이슬도 너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기름짐과 이슬은 야곱이 다 가져갔기 때문에 에서는 받을 것이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또 이삭은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원수의 공격이 얼마나 많은지 칼을 잡고 있지 않으면 잠을 못 자는 존재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도 어려운 말씀입니다.
영어 성경을 보니까 “when you grow restless, you will throw his yoke from off your neck”라고 되어 있습니다. 직역하면, “네가 방랑하고, 마음을 둘 수 없고 헤매는 존재가 되어야 너는 네 아우의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 버릴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방랑자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물권도 없고, 인간의 공격을 받고, 또 아우의 지배를 받다가 그게 싫어서 아우를 떠나게 되면 방랑자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게 축복입니까, 저주입니까? 제 생각에는 안 들으니 만 못한 소리인 것 같습니다.
에서는 장자권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긴 죄로 이런 저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도 아버지를 사기 친 죄로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서 외삼촌 라반이 있는 곳으로 도망가는 도망자 신세가 됐습니다. 리브가도 사랑하는 아들과는 헤어지고, 사랑하지 않는 아들을 데리고 살면서 근심에 근심을 더하는 벌을 받게 됐습니다.
인간의 죄는 이처럼 벌을 다 받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은 ‘죄와 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죄와 벌 가운데서도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고, 이삭을 축복하시고, 야곱을 축복하시고, 언약의 자손을 계속해서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죄와 벌로 만연한 인간 세상을 축복하시기를 쉬지 아니하십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오, 일하시는 분이시다.
첫째로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오, 하나님이 일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불의해도 하나님 홀로 의로운 일을 행하십니다. 역사의 고삐는 인간이 쥐고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쥐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로마서 3장 4절에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통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회에 어떻게 이처럼 죄악이 만연한가? 이 사회에 어찌 이처럼 괴이한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어찌 배은망덕과 몰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었는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과 고모라 땅에 살면서 ‘심령이 상한 것’처럼 우리의 심령도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시고, 죄와 벌과 악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홀로 보좌에 앉으셔서 지금도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고, 축복하시고, 구원하시는 역사를 계속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을 보면 어지럽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면 우리의 심령은 고요와 평안을 되찾게 됩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우리 편으로 삼아야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백성을 겸손케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이삭의 가족 이야기를 왜 기록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을 겸손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것을 싫어하십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언제나 다툼과 분열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민으로 큰 교만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그렇게 교만할 이유가 없다. 너희 조상들은 이처럼 죄악이 많은 가족에서 시작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 앞에서 겸손하라.” 오늘 여러분의 영혼이 교만하고 높아져있다면 다시금 겸손의 영혼을 되찾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결국 이 모든 역사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죄인인데 그 가정을 축복해 주셨습니까? 목적은 한 가지입니다. 그 가정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하나님께서 만민 중에 축복해주시기 위한 놀라운 구원의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야곱이 받은 축복은 죄인 된 우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야곱보다 낫습니까? 야곱이 우리보다 낫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인 된 야곱을 축복하셨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었다는 그 사실만으로 우리를 축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야곱이 받은 축복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하는 여러분에게 야곱이 받은 물질의 축복,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과 곡식과 포도주의 축복이 넘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한 원수에게 늘 이기는 축복이 여러분에게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들에게 영적인 지도력이 임해서 가족의 지도자가 되시고, 사회에서도 사람을 주께로 이끄는 영적인 지도자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고, 여러분을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심으로 하나님이 한편 되시는 은혜가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24편 3절로 6절 말씀으로 끝을 맺겠습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셀라)”
오늘 우리 모두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합시다. 흉용하는 세상 가운데 멀리 보좌에 앉으시고, 홍수위에 좌정하셔서 지금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며 야곱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의 축복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