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시 편 33 : 1 – 6
다윗이 어려서 양치던 목자 체험을 바탕으로 인생의 주인 되시며 인도자 되시는 여호와를 목자로 자신은 양으로 비유하여 쓴 시로서 신불신간에 많은 사람이 애송합니다.
시의 배경이 평화스러워서 다윗이 모든 역경이 사라지고 평온할 때 지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4),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5),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라’(6)는 말씀은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도피하여 광야 어느 굴에 숨었을 때 예루살렘 성전을 사모하며 쓴 시라고 합니다.
탕자가 돼지우리에서 굶주려 죽게 되었을 때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과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15:17)라고 생각하며 아버지 집을 사모했던 것처럼, 평온할 때보다 삶의 위기를 당했을 때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라”(마10:36)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대부분이 원수는 사랑하는 부모나 자녀 또는 형제자매 간에 있습니다.
요셉도 그의 형들로 인해 애굽으로 팔려가서 13년 동안을 종으로, 죄수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다윗도 자신을 가장 괴롭힌 대적은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이었습니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 왕을 반역하여 죽이고 왕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다급하게 왕궁을 맨발로 빠져나와 울며 감람산으로 올라가 광야로 도망쳐 어느 굴속에 숨어 지냈습니다(6).
압살롬이 아버지를 죽이려고 대적했을 때 다윗은 신하들에게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삼하18:5)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아버지를 대적하려고 노새를 타고 달리다가 그의 머리가 큰 상수리나무 가지에 걸려 매달린 것을 요압이 죽였습니다(삼하18:5,15). 그러나 요압이 죽였다기보다는 압살롬 자신이 스스로 죽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일생에 압살롬을 피하여 광야에 숨었을 때가 가장 괴로웠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목자가 되셔서 다윗을 지켜주셨습니다.
다윗은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을 친다 하여도”(시3:1,6)라는 말씀을 보면 당시 얼마나 큰 위기였던 가를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어려서 아버지 양을 지킬 때 양들을 우리에 잠들게 하고 이리나 늑대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잠을 자지 않고 양을 지켰던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목자로서 이리와 늑대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양들을 지켜주었기 때문에 양들은 편이 잘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압살롬을 피하여 숨었음에도 여호와가 목자가 되어 자신을 지켜주심으로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신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우리도 평안할 때 주께서 지켜주심을 깨닫고 감사하는 것보다는 살 소망도 없을 정도의 위기를 당했을 때 주님이 지켜주시고 돌보아 주심을 믿고 평안을 감사하며 노래할 수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4), ‘원수의 목전’(5)은 압살롬을 피하여 숨었던 때가 얼마나 위험했던가를 말해줍니다. 그럼에도 ‘주께서 지팡이와 막대기로 인도하시고 지켜주심으로 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안위했다’고 말했습니다(4).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주심’(5)이란 전쟁에서 포로로 잡아 온 원수들 앞에서 승리자를 위하여 베푸는 승전 축하 잔치를 의미합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한 상에서 식사를 같이하는 것은 상호 간의 친밀한 교제의 관계를 나타내 주는 것으로 다윗이 하나님과 기쁨의 잔치상을 함께 나누는 것에 비유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기름을 머리에 바르는 것은 큰 기쁨을 상징합니다. ‘주께서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친다’고 말한 것은 주님의 극진한 친절과 호의를 입고 기뻐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잔치가 시작되면 주인이 손님의 잔에 술을 가득 차게 부어주는 것은 손님에게 풍성한 호의를 베푸는 것을 의미합니다. ‘잔’은 기업을 의미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다윗 왕국도 강성하게 해 주셨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풍성한 은혜를 주셨음을 감사해서 노래한 것입니다.
‘여호와’는 성호(聖號)로 ‘하나님의 이름 신명’(神名)입니다.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출3:14;6:2,3)이며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베들레헴 이새의 여덟 번째 아들로서 아버지와 형들에게 사랑도 받지 못하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 받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입니다. 죄인인 다윗이 감히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의 목자라고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여호와가 자신을 지키시는 목자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도 ‘여호와는 나를 지키시는 목자라’고 노래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윗은 여호와가 자신을 지켜주시는 목자이심을 믿었기 때문에 신하들에게 자신을 대적하는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삼하18:5)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진심으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믿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신다는 것을 믿을 때 나를 해치려고 하는 어떤 악한 원수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 왕궁을 도망쳐 나온 것은 압살롬을 대적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압살롬이 사랑하는 아들이기 때문에 대적하지 않고 피한 것입니다. 그때 피하지 않고 대적했다면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에 의해 죽었을 것이며 왕궁은 피바다가 되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아들을 죽인 아버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는 선한 목자라’(요10:14)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에게 ‘내 양이라’고 하셨습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단순히 상하의 종속 관계가 아닙니다. 목자는 양의 일상생활을 지킬 뿐 아니라 생명까지 돌보아 주며 선한 길로 인도해 줍니다. 양은 목자를 따를 때 안전과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지팡이’와 ‘막대기’(4)는 양을 지키는 목자는 항상 가지고 다녔습니다. ‘지팡이’와 ‘막대기’는 같은 말입니다. 그러나 ‘지팡이’는 양 무리를 인도하는 데 쓰이며, ‘막대기’는 양을 해치려 하는 맹수를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도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다급할 때는 막대기로 대적을 치고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는 양들에게 있어서 부족함이 없는 축복을 의미합니다. 푸른 풀밭은 양들에게 풍부한 양식입니다.
‘쉴만한 물가’는 잔잔하고 깨끗한 물이 흐르는 시냇가로 양들이 물을 먹기에 적당한 곳을 의미합니다. 목자가 인도하는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는 양들에게 낙원입니다.
그러나 푸른 풀밭에는 이리와 늑대가 숨어 있고, 쉴만한 물가에는 호랑이와 사자가 숨어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럼에도 양들이 꼴을 뜯고 물을 마시며 편이 쉴 수 있는 것은 지켜주는 목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푸른 풀밭이며 쉴만한 물가와 같은 곳입니다. 교회에도 악한 마귀들이 숨어 틈만 있으면 양을 공격합니다. 그러나 목자이신 여호와가 지켜주심으로 성도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편히 쉴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압살롬을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정죄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범한 죄로 압살롬이 대적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이 죽었을 때 다윗이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이라고 말한 것은 자신의 죄로 아들이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킨다’(3)는 말을 구속사적으로 죄로 인하여 죽은 영혼을 살리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이 ‘소생시키시고’라고 말한 것은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멸망 받을 죄인으로 곤고한 삶을 사는 자들을 회개시키시고 소생시켜주십니다. 죄로 인하여 지옥 형벌 받을 죄인을 용서하시고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자신을 죄악 된 생활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자가 되도록 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성도로서 성도답지 못하면 교회가 욕을 듣게 됩니다. 교회가 욕을 듣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성도가 잘못된 길로 갈 때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게 됩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을 의의길로 인도하신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도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성도들의 삶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셔서 자기 백성으로 지켜주심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지 않으면 하나님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 영광을 위해 우리를 의의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결론적으로 다윗은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겠다’(6)고 말했습니다. 광야에서 숨어 지내지만, 여호와의 집을 사모하는 마음은 간절했습니다.
성도들은 교회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병들거나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된 상황일 때 성도는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성전을 사모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집’은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신 성전입니다. 성전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거하는 것은 모든 성도의 믿음이요 소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는 우리(나)의 목자입니다. 양이 목자를 따르듯이 우리는 목자이신 여호와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교회는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지켜주시는 교회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그림자입니다.
우리 모두 다윗처럼 ‘여호와께서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시고 인도하셔서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라고 믿고 찬송하며 고백합시다(6).
우리의 목자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하나님의 나라로 데리고 가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날 우리의 목자 되신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영생합시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