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04
8월1일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연중 제18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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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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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vN_3uXao98Y (김주헌 스테파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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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간절한 마음·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갈 때, 빈손으로 돌아오는 법은 없습니다!>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신 기적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자 협조자들인 사도들의 존재가 유난히 부각되고 있습니다. 난감한 현재 상황을 최초로 스승님께 보고한 사람들은 사도들이었습니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마태오 복음 14장 15절)
또한 상황의 심각성에 대해 너무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는 스승님께, 보다 구체적으로 현실을 정확하게 알려드린 사람들 역시 사도들이었습니다.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마태오 복음 14장 17절)
뿐만 아니라 스승님께서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시는 기적을 행하신 후, 그것들을 굶주린 백성들에게 일일이 나누어준 사람들 역시 사도들이었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마태오 복음 14장 19절)
동시에 군중들의 식사가 모든 끝난 후 돌아다니면서 남은 조각을 모아들인 사람들 역시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남은 조각을 한 군데 모아 보니 총 12광주리였습니다. 이는 곧 12사도의 숫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마태오 복으 14장 20절)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우리는 오늘 날의 사도들이(주교, 사제, 수도자, 평신도 지도자)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주님과 백성 사이에서 중재자·매개자 역할을 하는 존재입니다. 그들이 백성을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거나 갈라지게 하는 존재가 되어서 참으로 곤란합니다.
사제들은 백성에게 주님의 뜻을 알려주고,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존재여야 합니다. 백성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들은 대신해서 주님께 기도하고, 청하는 존재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사목자는 매일 주님께서 건네시는 생명의 빵, 즉 말씀을 정성껏 봉독하고 공부합니다. 진지하게 묵상하고 풀이하여, 백성에게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사제는 백성에게 영원한 생명의 양식도 나누어주어야 하지만, 동시에 지상의 빵·물질적인 빵도 골고루 분배해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지금 누가 너무 많은 빵을 지니고 있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그들을 잘 설득해서 내어놓게 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 못 가진 이들이 어디 있는지 잘 살펴보고, 그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보살펴야겠습니다.
사도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어야 할 마음 자세 하나는 주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심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는 바처럼, 주님 앞에 불가능은 없습니다.
주님께 나아가서 그분께 간절히 청할 때, 절대로 빈손으로 돌아오는 법은 없습니다. 사제들은 우리 주님의 전지전능하심에 대한 강한 믿음의 소유자여야 합니다.
자신과 자신의 힘만 믿는 사도들에게는 죽었다 깨어나도 은총과 기적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자신은 언제나 부족한 존재임을 파악한 사제들, 주님의 권능을 굳게 믿는 사목자들, 나는 그저 나약한 한 피조물이요, 중재자라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겸손한 봉사자의 삶에는 주님께서 베푸시는 놀라운 은총의 기적이 늘 함께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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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그대로 행하기만 하라>
우리 집은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전기가 들어올 정도로 시골이었고 또 아버지께서 육체노동을 하시어 저희를 키웠기에 매우 가난한 집에 속했습니다.
초등학교 때 2백 원이 없어 크레파스를 사 가지 못해 혼난 적도 있고, 또 초등학교 때 한 달에 2천 원만 내면 마실 수 있는 우유도 한 번 못 마셔봤습니다.
제가 막내고 위로 형이 둘 있는데 큰 형은 실업계 고등학교를 나왔고 작은 형도 가정 형편상 대학에 갈 수 없어서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공장에 취직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나름 대학에 들어간 제가 집을 살릴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런 형편에 저를 대학 보낸다는 것은 저에게 모든 것을 투자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학 잘 다니던 제가 신학교에 간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크게 실망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가족을 보면 크게 부유하지는 않더라도 모든 가족이 부족함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저희 셋이 주는 용돈으로 부족함 없이 지내십니다.
또 큰 형은 고졸임에도 불구하고 군대 제대 후 기적적으로 대기업에 취직하였고 일하면서 대학까지 나왔습니다.
작은 형도 공장 다니다가 이것저것 가게를 하게 되었는데 하는 것마다 잘 되었습니다. 본인 능력도 있었겠지만 본인도 무언가를 느꼈는지, 가족을 두고 유학을 떠나있던 저에게 전화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생이 신부님이 되려고 하니까 하느님께서 그 몫까지 돈을 벌게 해 주셔서 집 걱정 안 하게 해 주시나 보다.”
오늘 예수님은 수많은 군중을 보시며 저들을 먹일 빵을 어디서 구할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다른 복음에서는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하십니다. 이 모든 말씀은 그대로 행하기만 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신들이 기적을 행할 수 없는 사람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들을 다 먹이려면 2백 데나리온은 있어야 할 것이라 하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돈을 벌어오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돈은 있으니 빵을 구할 장소만 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먹을 것이 어느 정도 있느냐고 물은 것도 아닙니다. 그냥 있는 것을 나누어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에 따를 수 없는 이유는 본인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적은 예수님이 일으키는 것이지 우리가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하라는 대로 행하면 그만입니다.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성체성사와 연결됩니다. 성체성사는 또 카나의 혼인잔치를 통해 더 잘 이해될 수 있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것은 성모님의 믿음을 통한 그리스도의 기적입니다. 일꾼들은 그저 그것을 퍼서 나를 뿐입니다.
우리들의 믿음으로 밀떡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시킨다고 착각하면 큰일입니다. 우리는 그런 믿음이 없습니다. 그저 “그가 시키는 대로 행하라.”라고 하신 성모님 말씀 따라 주님께서 행하신 예식를 행할 뿐입니다.
이런 상황에 “나는 못한다.”, “이렇게 부족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은 겸손이 아니라 교만한 것입니다. 나보고 기적을 행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시키는 것만 하면 기적은 이미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가진 것을 있는 그대로 봉헌했습니다. 그러니 기적처럼 저의 주위의 많은 이들이 저를 통해 풍요해지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제힘으로 돈을 벌고 결혼하여 가정을 가지고 이렇게 주위에 물질적으로 영적으로 풍요하게 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든 그분은 그것을 통해 5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하시려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므로 내가 가진 보잘것없는 능력은 핑계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아무 소용도 없을 것들이 봉헌되기만 한다면, 그것은 마치 물 펌프에 한 바가지 먼저 부어야 하는 마중물처럼 더 많은 물이 솟아나게 하는 밑천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자기봉헌으로 모든 사람이 생명의 빵을 나누어 먹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쓰시겠다면 드립시다. 그대로 두면 정말 아무 소용이 없는 것도 그분 안에서는 5천 명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은총으로 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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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뉴욕에는 신앙인들에게 필요한 책과 성물을 파는 가게가 있습니다. 집 축복식이 있어서 성물 가게에 들렀습니다. 성물을 사면서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22년째 성물가게를 하고 있는데 집주인이 월세를 올려달라고 했답니다. 주인이 이야기하는 월세를 주면 가게 운영이 어려워서 다른 가게를 알아보았는데 여의치 않았다고 합니다. 변호사와 이야기해서 내년 4월까지는 가게를 운영할 수 있도록 부탁했다고 합니다. 책은 50% 할인해서 팔고 있다고 합니다. 뉴욕에 있는 신앙인들에게 필요한 성물 가게인데 내년이면 문을 닫는다고 하니 안타까웠습니다. 팬데믹의 영향으로 LA에 있는 성물 가게도 문을 닫았다고 들었습니다. 2년 동안 교회의 모임과 전례가 멈추었습니다. 첫 영성체, 견진, 피정과 같은 전례가 있으면 그에 따른 성물의 수요가 있었는데 그런 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뉴욕에 있는 성물 가게가 계속 운영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녁에 모임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성물 가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성물 가게의 사정을 아는 분들도 있었고, 성물 가게를 이용했던 분들도 있었습니다. 내년 4월까지 주말마다 동북부에 있는 성당엘 다니면서 성물과 책을 판매하는 것도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작은 트럭을 개조해서 다니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먼저 신부님들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부탁을 하면 들어줄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성물을 사진 찍어서 인터넷에 올리는 방안도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교회의 전례와 교육에 관해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2년 동안 비대면 모임이 많았습니다. 디지털 시대에 익숙한 젊은 세대들에게 기존의 전례와 교육은 지루하고, 이해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신심활동인 ‘성령 기도회, ME, 꾸르실료, 레지오, 성서공부’와 같은 경우에도 인터넷과 영상을 통한 자료들이 많으면 좋겠다는 의견들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기본 정신은 잊지 말아야 하지만 그것을 전하는 방법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다양하게 변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도 좋지만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배가 고팠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자고 했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해결 방법입니다. 모인 사람들을 먹이기에는 많은 돈이 필요한데 그만큼의 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먹을 것이 있는지 알아보셨습니다. 사람들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를 제자들에게 주었습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고기와 빵을 들어 하느님께 기도드린 다음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물고기와 빵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도 12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단순히 빵을 배불리 먹었다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더욱 뜨거워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빵을 많게 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를 드릴 때, 우리들 또한 주님처럼 빵이 있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한 조각의 빵을 나누어 줄 수 있을 때, 우리의 신앙은 점차 깊어지는 것입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는 신앙에서 달의 본 모습을 볼 수 있는 신앙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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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4,13-21: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외딴 곳으로 물러가셨다. 아무도 따라오지 못하도록 배를 타고 가셨다. 이렇게 외딴 곳으로 물러가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아직은 당신이 누구시라는 것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행동으로 당신이 누구신지를 알리고자 하셨다. 그러나 군중은 그분을 끝까지 따라간다. 아마 예수님께 큰 희망을 가졌기 때문이다. 또한 사랑은 모든 위험을 극복하고 쫓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16절) 제자들은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17절) 그들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다. 교부들은 이 빵 다섯 개를 율법서 5권으로, 물고기 두 마리를 예언서와 요한의 가르침으로 해석한다. 예수님은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18절) 하셨다. 빵과 물고기를 받으신 주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나누어 주셨다.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보신 것은 사람들에게 눈을 하늘에 두라고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주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보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빵이 나눠지지 않았다면,그 빵은 그 많은 군중을 먹일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 기적으로 사랑의 실천, 서로 한 마음이 되어 모든 것을 함께 나눌 것을 가르치신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빵과 물고기만 주심으로써 그것을 누구나 똑같이 나누게 하신다.
빵은 사도들에게 주어졌다. 거룩한 은총의 선물이 그들을 통해 분배될 것이다. 군중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고 만족했다.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 나서 남은 빵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으로 군중들은 만족하였고, 이제 이 말씀을 다른 민족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도록 열두 사도에게 거룩한 권능이 넉넉하게 남겨졌다. 제자들은 이 기적을 통하여 당신을 알아보아야 했다.
옛날 광야에서 주어진 만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역시 외딴 곳에서 음식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그분은 아낌없이 주셨다. 조그만 것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너끈히 먹이신 것은 옛날의 기적과 같다.그때 이스라엘은 필요한 만큼 그것을 먹었고, 지금은 빵조각이 많이 남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가져가려 하지 않았다.
그때 빵과 물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었다. 떼어 나눈 빵과 물고기로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사도들이 거둔 빵조각이 열두 광주리가 되었다. 이 빵은 이제 다른 사람들, 즉 다른 민족들에게도 나누어질 수 있도록 사도들에게 풍성한 은총으로 돌아간 것이다. 우리 자신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 앞에 내어 놓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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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오천 명을 먹이시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마태 14,14)
복음서 저자들은 이 장면을 조금씩 다르게 기록했습니다. 마태오복음에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는 말만 있고, 마르코복음에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다는 말만 있는데(마르 6,34), 루카복음서 저자는 두 가지를 합해서 기록했습니다.(루카 9,11) 아마도 실제로는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을 먼저 하시고, 그다음에 하느님 나라에 관해서 가르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들처럼 사는 인간들을 가엾게 여기셔서 ‘목자로서’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가엾은 인간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목자이신 분’입니다. 병자 치유, 설교, 빵의 기적은 모두 ‘목자로서’ 하신 일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주신 일이고,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해 주신 일입니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마태 14,15-17)
제자들이 자신들의 배고픔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군중의 배고픔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제자들이 군중을 해산시켜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자고 건의한 것은 책임회피가 아니라, 그 상황에서 그들이 생각해낸 최선책을 말한 것입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는 말씀은, “처음부터 못 한다는 말만 하지 말고, 너희가 할 수 있는 일부터 찾아보아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빵도 돈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지시하신 것은, 제자들의 믿음을 끌어올리기 위해서입니다.(요한 6,6)
제자들은 예수님의 의도를 몰랐고,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군중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찾았을 것입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오천 명이 넘는 군중 속에서 제자들이 구할 수 있었던 음식 전부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 가운데 일부가 아니라.) 다른 복음서에는 제자들이 ‘저희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라는 뜻의 부정적인 대답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제자들은 그렇게 대답했으면서도 예수님의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서, 빵을 구하려고 돌아다녔습니다.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먹여야 하는 상황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구해 온 일은 결과적으로 ‘사람의 힘’으로는 군중을 먹일 수 없음을 확인한 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남아 있는 해결책은 하나뿐입니다.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일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니, ‘하느님의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마태 14,18-21)
기적이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기적의 재료로 사용하시긴 했지만, 그 빵과 물고기가 있었기 때문에 기적을 행하실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빵과 물고기가 없었다면, 다른 방법으로 기적을 일으키셨을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기적의 과정이나 방법은 언급되어 있지 않고, 기적의 결과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기적의 과정이나 방법’은 ‘하느님의 신비’에 속한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빵은 제자들이 구해 온 그 빵이 아니라, ‘기적의 빵’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기적의 빵’을 받아서, 다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그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는 예수님의 지시가 실현되었습니다. 결과만 놓고 보면,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는 말씀은, “빵은 내가 마련할 테니, 너희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라는 말씀이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우리에게 시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은 주님께서 하실 것이고,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됩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라는 말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체험했다는 뜻입니다. <‘빵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당신이 사람들을 먹이시는 목자라는 것을 드러내신 일이고, 또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생명과 행복을 주시는 메시아라는 것을 드러내신 일이기도 합니다.>
‘모두’라는 말은, 소외되거나 차별당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만일에 한 명이라도 소외되거나 차별당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곳은 하느님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가 희망하는 하느님 나라는, ‘내가’ 행복한 나라가 아니라 ‘우리가 모두’ 함께 행복한 나라입니다. 신앙인은 지금 이 땅을 그런 나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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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바라신 새로운 세상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극심한 경쟁 구도 속에서 각자의 이익과 손실에 따라 움직이는 세상, 폭력과 전쟁과 억울한 죽음이 난무하는 세상이 아니라 모든 이가 평화를 누리고 아무도 굶지 않는 세상을 말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이 새로운 세상을 희망으로 일구어 가십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전하며 시작됩니다. 그의 죽음은 세상의 권력자인 헤로데가 자신의 생일을 맞아 연 연회 때에 일어났습니다. 식사가 의인의 죽음으로 끝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새로운 세상의 식사가 펼쳐집니다. 이 새로운 세상은 이전의 세상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곧 옛 세상의 삶의 방식에서 밖으로 나오셨습니다. 그러고는 연민 가득한 마음으로 세상살이에 지치고 굶주린 많은 사람을 보셨습니다. 반면에 제자들은 여전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논리에 충실합니다. 세상의 논리에 따라 생각하며 예수님께 말씀 드립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으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그러나 제자들은 자신들의 뜻을 좀처럼 굽히지 않습니다. 많은 군중을 먹이기에는 자신들이 가진 것이 너무나 적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공교롭게도 두 가지 먹을거리를 더한 수는 일곱입니다. 성경에서 일곱은 좋은 수, 완전한 수입니다. 많은 이를 위하여 일곱은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는 제자들의 말이 매우 역설적으로 들리는 순간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십니다.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온전히 예수님께 가져갑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행동하는 우리가 하느님께서 계획하시고 바라신 세상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내 사람들이 풀밭에 자리를 잡고 앉습니다.
이전 세상에서는 주인이 좋은 자리에 앉아 종들의 시중을 받았습니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공동체에서는 제자들이 허기진 이들을 자리에 앉히고 그들의 시중을 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가져온 빵을 들어 올리시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신 뒤 그것을 쪼개어 제자들에게 도로 내주시어 사람들과 나누게 하십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 많은 이가 배불리 먹고도 남은 것입니다. 이런 기적은 믿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순응한 이들을 통하여 일어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제자들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온갖 무상의 선물에 우리도 같은 방식으로 응답할 용기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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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홍성만 미카엘 신부님]
<작은 봉헌이 예수님의 손을 거치면서 큰 축복으로 이어집니다>
오늘 복음의 배경입니다. 멀리 푸르른 갈릴래아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풀이 무성한 산등성이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습니다.
병자들을 고쳐 주신 기적을 보았던 많은 사람이 떼를 지어 구름처럼 밀려옵니다. 때는 뉘엿뉘엿 해가 지는 저녁이며 외딴곳이라고 마르코, 마태오, 루카 복음은 일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몰려오는 군중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시원한 대답을 기다리지는 않으셨겠지만 그래도 무슨 말이 나올까 궁금하셨나 봅니다.
필립보가 대답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빵을 사다가 먹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대답입니다. 더군다나 이 외딴곳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봐도 '불가능하다'고 밖에 나올 수 없는 대답을 이미 알고 계실 예수님께서 왜 물어보셨을까? 성경은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라고 합니다.
곧이어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말합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마음속에 작정하시고 있으셨던 일을 하십니다.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며 분부하십니다.
그리고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는 바로 그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십니다. 이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는 바로 그 물고기를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십니다.
예수님 손에서 축성된 빵과 물고기는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았습니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고 하찮게 여겨지던 아주 작은 봉헌이 예수님의 손을 거쳐 커다란 축복으로 이어집니다. 그렇습니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는 나의 하찮아 보이는 기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는 자그마한 희생과 봉사.
이러한 것이 예수님을 거치면서 나와 이웃에 대한 커다란 축복으로 이어집니다. 빵의 기적은 성체성사의 예표(豫表)입니다.
주님께 할애하는 나의 기도 시간, 자그마한 희생ㆍ봉사는 밀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되듯, 이웃을 위한 축복으로 변화됩니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면서, 주님을 기억하면서 봉헌하는 나의 작은 희생과 봉사, 그리고 기도와 순종은 그 어느 때이고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화되어 나와 이웃의 평화와 위로의 양식이 됩니다.
이 평화와 위로의 양식은 수많은 사람을 살리는 원천이 됩니다. 오늘도 주님의 살과 피로 변화될 작고 큰 봉헌을 실천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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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권동성 폰시아노 신부님]
<작은 것을 나누고자 할 때 하느님께서 도구로 삼으심>
요한복음 사가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빵을 많게 하신 기적 이야기를 전하면서 많은 군중이 예수를 따라갔다고 합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따른 것은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일으키는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군중은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바라보면서 예수님께 대한 저마다의 기대를 하고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어떤 기대를 하고 있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우리 신앙인들 역시 예수님을 따라나선 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왜 찾아 왔고, 예수님에게 어떤 기대를 걸고 있는지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군중은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체험한 후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군중을 피해 혼자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활동에 대한 군중의 오해를 원하지 않으셨기에 군중을 떠나가십니다.
예수님의 활동은 현세적인 이익이나 성공이 아닌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역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그리스도교 신앙도 그러한 현세적인 이익이나 성공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것을 내어 주고, 더 낮은 자가 되라고 요구합니다. 다시금 우리는 예수님을 왜 찾고, 그분을 섬기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빵을 많게 한 기적은 예수님 편에서 베풀어진 선물입니다. 누군가의 요청에 따라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이 당신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잘 아셨다고 전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당황하게 됩니다.
마태오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고 전합니다. 그래서 그들 중의 병자를 고쳐 주셨고,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셨고, 이제 군중을 배불리 먹이고자 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청하기도 전에 미리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겪는 어려움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당신 백성을 측은히 여기고 보살펴주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을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고 합니다. 하느님이 베풀어주시는 선물은 이처럼 풍성합니다. 모두가 함께 나누고도 남음이 있는 축복입니다. 하지만 ‘더 가지고자 하는 우리의 욕심’으로 인해 부족함이 발생합니다.
더 많이 가지고자 할수록 우리는 불행의 늪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지금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지금 부족하다는 생각이 자신의 삶에 불만을 가져오게 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내가 더 가지고자 하면 누군가는 덜 가져야 합니다. 여기에서 폭력과 착취가 발생합니다. 그러한 곳에서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자리하지 못합니다. 이웃은 나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전락할 뿐입니다. 이제 나만의 불행이 아니라 이웃의 불행까지 초래하게 됩니다.
우리는 빵의 기적을 가능하게 한 또 하나의 실천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소년의 ‘내어놓음’이었습니다. 소년의 헌신, 작은 실천으로부터 시작된 예수님이 베풂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을 나누고자 할 때, 우리가 가진 것을 내어놓을 때, 그것이 비록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라 해도 하느님께서는 큰 도구로 삼으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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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찬홍 야고보 신부님]
<감사히 먹겠습니다.>
며칠 전 좀 터프한 형제님께 ‘부부싸움 하다가 밥상을 엎어본 적이 있습니까?’라고 여쭤보았습니다. 저는 그분의 화끈한(?) 성격으로는 적어도 한두 번은 엎었으리라 생각했었는데, 그런 생각은 저의 편견이었습니다.
형제님께서는 ‘저는 아무리 화가 나도, 절대 밥상은 엎지 않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직접적인 표현을 하진 않았지만, 매일 먹는 음식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음식을 소중히 여기는 고귀한 마음이 있습니다.
매일 섭취하는 음식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있어서, 음식을 함부로 다르지 않고, 또한 버리지 않습니다. ‘음식에 고마워하지 않고, 무시하면 언젠가는 밥을 굶는 날이 올 것이다. 그 때문에 늘 음식에 감사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 마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음식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지니는 것!’ ‘비록, 내 손으로 수확한 음식이요, 내 노동력의 대가로 얻은 음식이라 하더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녀야 할 기본적인 자세요, 매 삶을 통해 기적을 체험하는 삶이 아닐까 합니다.
복음에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기적을 베풉니다. 그런데, 단순하게 “빵아 많아지거라!” “물고기야! 숫자가 늘어나거라”라는 말로써 기적을 행사하지 않습니다.
먼저, 빵과 물고기를 손에 들고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에, 제자들에게 주시고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명하십니다.
하찮은 빵과 물고기이지만, 이런 음식을 내려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다시 하느님께 내어 드림으로써, 바로 기적이라는 놀라운 사건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매일 받아 모시는 성체를 통해서도 체험되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빵과 포도주를 봉헌합니다.
이 빵과 포도주가 미사의 거룩한 성변화를 통해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되고, 우리는 거룩하게 변화된 그것을 받아 모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빵과 포도주를 봉헌할 때, 단순하게 빵과 포도주만을 봉헌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빵과 물고기를 손에 들고 가사의 기도를 드리신 것처럼, 우리 역시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온 누리의 주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주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로 저희가 땅을 일구어 얻은 이 빵을… 저희가 포도를 가꾸어 얻은 이 술을… 당신께 드리니 구원에 양식이… 음료가 되게 하소서.”
라는 감사 기도를 드린 후에 우리가 봉헌한 빵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몸과 피가 되어 다시 우리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빵과 포도주는 우리의 노력, 결실, 정성을 의미합니다.
곧 우리는 미사 때마다 우리의 삶 전체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이런 봉헌과 함께, “당신과 함께함으로 저희가 이렇게 살아갑니다. 오늘 이렇게 성당에 오게 되었습니다.”라는 감사 기도가 우리의 생명을 연장하고 삶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곧,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거룩한 축성으로 당신의 몸과 피로 변하는 기적을 체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진정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가 먹는 음식은 육신의 양식이 아니라, 배고픔을 없애는 것일 뿐입니다.
진정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가 미사를 통해 받아 모시는 성체는 예수님의 몸과 피가 아니라, 단순한 빵과 포도주의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에, 받아 모시는 예수님의 몸과 피에 진정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삶을 통해 기적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이루신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에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이, 바로 오늘날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이루시는 놀라운 기적이요, 우리가 체험해야 할 오병이어 기적입니다.
문득, 방위병 훈련소에서 식사 전에 외쳤던 구호가 생각납니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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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물음>
마태오 14,13-21 (오천 명을 먹이시다)
그때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여러 고을에서 그 소문을 듣고 군중이 육로로 그분을 따라나섰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
<물음>
나 있음에
세상은
나아져야 하는데
나 있음에도
세상은
그대로라면
나는
뭘 하고 있는가
나는
왜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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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손에 얹어 놓으면>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는데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들린 빵은 물론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것입니다. 자기의 것을 아낌없이 내놓고 예수님을 통해 이웃과 나누었을 때 큰 무리의 굶주림은 간단히 해결되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보잘것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해도 그것이 하나의 밀알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결과에 연연해 않고 나누면 그다음은 주님의 몫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시편23,1-3) 우리의 주님, 예수님은 푸른 풀밭에 쉬게 하시고 생기를 돋우어 주시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의탁하면 육체적으로뿐 아니라 영적으로 배고프지 않게 됩니다. 나의 모두를 주님의 손에 올려놓아야 하겠습니다. 먼저 올려놓아야 또 그렇게 할 힘을 얻게 됩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나눔의 신비’를 깨닫고 그것을 실천하기만 한다면 기아 문제는 해결된다고 합니다. 유엔난민기구의 통계에 의하면 2019년, 기아인구가 6억9천만 명에 달했고 2021년에는 8억1천만 명으로 추계하였습니다. 일부 국가에서는 식량을 전략무기로 삼기도 하며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더 많은 사람이 영양결핍을 겪고, 매년 1천만 명이 기아 또는 기아와 관련된 질병으로 사망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이라도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어 가진 것을 나누기만 하면 기아 문제를 하루아침에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통계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입니다. 해결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쓰지 않아서 문제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결식아동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굶주림보다 더 큰 목마름은 사랑입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14,16).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아무 조건 없이 베풀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교회의 얼굴은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사랑이 됩니다. 사랑하면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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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남극은 한겨울 기온이 영하 88도까지 내려가고 시속 140킬로미터의 눈 폭풍이 몰아치는 극한의 추위가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극한 추위를 극복하며 사는 동물이 있습니다. 바로 펭귄입니다. 이 추위를 이길 수 있는 것은 ‘허들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허들링은 펭귄들이 서로 몸을 붙여 겹겹이 원을 만들고 천천히 돌면서 바깥쪽에 서 있는 펭귄의 체온이 낮아지면 안쪽의 펭귄과 자리를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이 허들링으로 무리의 체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허들링은 단 한 번만 이루어질까요? 추위가 이어지는 4개월 동안 돌아가면서 서로를 품어주면서 극심한 추위를 이겨냅니다. 서로가 서로의 바람막이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무조건 희생되고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받지 않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공동체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우리 세상도 그렇습니다. 나만 각종 혜택을 누리고 싶지만, 그렇게 되어서는 함께 살 수 없습니다. 물론 혜택만 누리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를 굳이 판단할 필요 없습니다. 그저 자기 역할에 충실하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손해 보는 삶처럼 보이지만, 나도 모르게 누리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매 순간 감사할 일은 차고 넘칩니다. 서로를 향한 믿음으로 서로의 바람막이가 되어 지켜주는 공동체, 나에게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당신께서 먼저 그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은 남자만도 오천 명을 먹이시는 빵의 기적입니다. 그런데 이 기적이 이루어지기 전에 있었던 일들을 묵상해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십니다. 이렇게 외딴곳으로 가실 때는 늘 무슨 의미심장한 일을 하시기 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계획이 바뀌었습니다. 여러 고을에서 그분을 따라나섰기 때문이었습니다. 남자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이 쫓아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이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손길, 따뜻한 말과 눈빛, 구원을 간절하게 원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가엾은 마음이 드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믿지 않았다면 이렇게 모이지도 않았을 것이고, 가엾이 여기는 주님의 마음을 끌어낼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즉, 굳은 믿음을 가지고 함께 모이는 곳에서 주님께서도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통해,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가능한 일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믿음만 있다면, 그 믿음으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룰 수만 있다면, 차고 넘쳐서 모두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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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사랑의 기적>
-성체성사-
어제의 끝은 오늘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늘 새로운 시작이 있을뿐입니다. 하루하루가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요 사랑의 기적입니다. 오늘 8월1일 첫날은 구속주회의 설립자이자 고해사제들과 윤리신학자들의 수호성인인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생몰生沒연대를 보니 참 힘든 건강상태중에도 만91세 장수를 누린 성인이니 새삼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임을 깨닫습니다.
성인은 생애 마지막 13년 동안 나폴리의 고티의 작은 교구장 주교로 봉직한후 건강상 이유로 사직한후 수도공동체로 돌아가 글을 쓰고, 사람들을 만나며, 기도하다가 선종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성인은 고해소에서 신자들을 배려하여 항상 부드러운 태도를 유지하며 그들을 위로하였고 다음과 같은 말도 남겼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쁜 악습에 깊이 빠져들어 있을수록, 그만큼 더 부드럽고 다정하게 다가가야 한다. 고해신부는 죄가 남긴 무수한 상처를 돌보아야 한다. 그는 풍부한 사랑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꿀처럼 부드러워야 한다.”
이래서 고해사제들의 수호성인이 됐는가 봅니다. 성인들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자 사랑의 기적임을 깨닫습니다. 어제의 교황님 자랑에 하나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교황님이 거하시는 산타 마리아 공동체는 흡사 끊임없이 사랑의 기적이 일어나는 광야의 오아시스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산타 마리아 제의방 담당 안나 자매의 증언입니다.
“처음으로 교황님을 뵙고 저는 뒤로 물러났어요. 제가 보이지 않게 하려고요. 그분은 즉시 제게로 와서 ‘교황을 봤다고 숨지 마십시오. 아셨지요? 저도 다른 사제들과 같은 사제이니까요.’라고 말씀하셨죠. 항상 그분의 겸손과 덕이 저를 감동하게 합니다. 가끔, 성 베드로 대성전이나 산타 마르타의 집에 주일미사가 없으면 작은 경당에서 홀로 미사를 하십니다. 저는 곧바로 달려가 미사 준비를 꼼꼼히 합니다. 그분은 이런 저를 보고 벌써 몇 번이나 제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며, ‘자 보세요. 이 경당에 준비된 대로 전 미사를 합니다. 괜찮아요. 필요한 것 없어요.’ 라고 하시지요. 미사뒤 교황님은 다시 물과 포도주를 채워 놓고 제대를 정리하고 나오시죠.”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라 합니다. 평상적인 삶을 온전히 살아냄이 기적이자 도道라는 뜻이요, 구원은 바로 오늘 지금 여기에 있다는 뜻입니다. 고령의 연세에도 일상의 하나하나에, 특히 성체성사에 정성을 다하시는 교황님의 삶이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겸손한 믿음도 감동을 선사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으신 주님은 외딴곳에서 깊은 성찰 시간을 갖으려 했던 듯 합니다.
그러나 외딴곳에 도착했을 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불쌍한 사람들의 무리였습니다. 예수님의 연민의 사랑에서 시작된 사랑의 기적인 병고침의 치유요 광야에서의 성체성사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바로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이요 사랑입니다. 똑같은 예수님께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이 거룩한 사랑의 기적, 성체성사 미사시간에 광야 여정중에 있는 우리 병자들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은 이어 제자들이 가진 것 전부인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오라 하시고, 군중이 풀밭에 자리를 잡자 친히 성체성사를 집전하십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오천명을 먹이신 사랑의 기적이야기는 그대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를 상징합니다. 파스카 예수님 친히 사제를 통해 친히 미사를 주례하십니다. 그대로 하느님을 감동케하고 군중을 감동케 한 진인사대천명의 신망애信望愛의 자세입니다.
‘예수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대로 미사장면을 보는 듯 합니다. 분명 예수님의 진인사대천명의 신망애의 자세에 감동한 군중들이 지니고 있던 모든 것을 내놓아 나눴음이 분명하니 이 또한 사랑의 기적, 나눔의 기적입니다. 사실 성체성사의 정신대로 골고루 나눔의 기적, 사랑의 기적만 제대로 이뤄진다면 세상의 불평등은 많이 사라질 것입니다. 군비軍備로 낭비되는 자원이 빈곤 퇴치로 전용된다면 세상 가난한 이들의 굶주림도 완전히 해소될 것입니다.
사랑의 기적중 기적이 바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입니다. 성체성사의 은총이 무수한 사랑의 기적을 발생시킵니다. 어제 수도원 주일 미사에는 요즘 코로나 이후 제일 많은 분들이 참석했습니다. 그대로 광야에서의 사랑의 기적을 방불케 했습니다. 오후에는 레지오 마리애 두 팀의 피정강의가 있었습니다. 참 화기애애한 광야의 오아시스같은 모임이었습니다.
팀원들의 순수와 열정의 사랑에 감동했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저변에서 큰 역할을 하는 마리아 성모님의 영적 군대, 주님의 사랑의 전사들처럼 느껴지는 형제자매들의 모습이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분들인데 이들 중 여러분은 매일 제 강론을 읽고 묵상한다 했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나 오늘 기념하는 알퐁소 같은 성인이 진짜 예언자라 할 수 있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그의 규칙에서 ‘거짓 평화를 주지 마라.’(4,25) 했습니다. 거짓 예언자가 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하난야가 거짓 예언자의 본보기입니다. 예수님의 예표와도 같은 예레미야는 참 예언자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망각한, 사람 비위에 맞추는 달콤한 거짓 위로를 전하는 하난야는 참 예언자가 아닙니다. 하난야는 ‘하느님은 은혜로우시다’라는 이름뜻인데 마치 그를 비웃는 듯 한 느낌이 듭니다. 인기에 영합한 하난야의 자신에 찬 다음 모습에 현혹된 군중은 환호했을 것이며 반대로 정직한 하느님의 예언자 예레미야는 환영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난야는 기고만장, 겸손한 자세는 추호도 없이 예레미야 예언자의 목에서 멍에를 벗겨 부수며 온 백성에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두 해 안에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의 멍에를 모든 민족들의 목에서 벗겨 이와 같이 부수겠다.’”
그러나 사필귀정, 참 예언자 예레미야의, “내가 너를 땅 위에서 치워 버리리니, 올해에 너는 죽을 것이다. 너는 주님을 거슬러 거역하는 말을 하였다.”라는 예언대로 그해 일곱째 달에 죽음을 맞이합니다.
참으로 참 예언자이자 구원자이신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참 예언자의 영성을, 날마다 진인사대천명의 사명에 충실한 신망애信望愛의 삶을, 사랑의 기적같은 삶을 살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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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마태 14,20)
<빵의 기적!>
8월의 첫 날인 오늘은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를 창설하신 '성 알폰소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분들과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에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 복음(마태 14,13-21)은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사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마태 14,19-20)
이 기적사화, 이 빵의 기적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먼저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권능'입니다. 그리고 배고픈 사람들과 어려운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이는 또한 우리를 통해 하느님의 권능이 드러나야 하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어려운 이웃에게 측은지심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빵을 들어 찬미하고 또 빵을 떼어 주셨다.'는 말씀을 통해 오늘날 교회가 미사 중에 거행하는 '성찬례의 모습'을 앞당겨 전하고 있습니다.
배고픈 이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분!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께로 향해 있어 예수님의 마음이 되면 '빵의 기적'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빵의 기적은 이기심을 벗어난 '나눔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영적 배고픔과 갈증의 상태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이 해방을 우리에게 주시는 해방자 그리스도 예수님을 찾고 갈망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먼저이고 첫째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진 결과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배불리 먹이는, '빵의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나를 통한 빵의 기적이 일어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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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nMuPHmqHGO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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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마태 14, 13)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
가장 알맞은
복음을 가장 쉽게
전하려고
노력한 알폰소 성인의
기쁜 축일이다.
모든 극단에서
벗어나
진리의 길잡이가
되시는 알폰소 성인은
또한 구속주회의
창설자이시기도 하다.
우리 삶의
가장 중심에
두어야 할 분은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을 닮은
가난한 이들을
향한 사랑은
알폰소 성인에게선
곧 생활이며 신앙
그 자체였다.
예수님의 복음은
화려한 성당 안에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님을 뜨겁게
만난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아픔에 동참하는 것이
복음의 참된 방향이다.
복음을
거스르지 않는
삶이 곧 사랑이다.
사랑 안에
사랑의 질서가
있다.
윤리와 신앙은
이와같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윤리의식과
정신문화는
신앙생활의
선물이다.
공동체의 사랑과
신뢰의 바탕 안에서
성장해 가는
윤리정신을
우리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낡은 것을
떠나야
새포도주를
만날 수 있다.
철저한 자기회개를
체험한 알폰소 성인의
삶에서 소외된 이들을
향해 찾아가는 삶이
회개의 삶이며
복음의 삶임을
깨닫게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 상처와
고통에서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떠남과 돌아감을
만난다.
소외된
가난한 이들을
찾아 떠나시는
삶에서
다시금 삶의 방향을
만나는 오늘이다.
복음은 공간에
결코
갇혀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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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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