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호준의 「팔각정」 감상 / 이수명
팔각정
서호준
네가 온 순간부터 전혀 기억이 없다. 우리는 연인이었는지 모르고 자주 보던 사촌지간이었는지 모르고 서로의 숨소리였는지도 모르겠다. 너는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는데 고개를 돌리자 눈이 쏟아졌다. 가을에 내리는 눈은 내가 알던 가을을 거짓으로 만들어버리고, 내가 알던 사람이 어디 한둘이었나. 그들을 몽땅 태운 720번 버스가 언덕을 넘어가고 있다. 돌아오지 않으면 좋겠어. 가을 담배에서 겨울밤으로. 가을 담배에서 겨울밤으로. 잘 넘어가지 않는 페이지를 두고 나는 맥주를 들이켰다. 슬픔에 대해서라면 할 말 없어. 우리는 말없이 가지 요리를 먹었다. 너는 말이 없었고 나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나는 쟁반에서 가장 큰 가지를 집어 들었다. 맛을 느끼기 위해 꼭꼭 씹어야 할 거야. 나는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묘사를 하고 싶어. 이런 것에 대해서라면 우리 할 말 많잖아. 그러나 나는 우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좋았다. 너무 좋았다. 우리는 손을 잡았다. 우리는 내기를 하고 있었다. 빈 접시를 서둘러 치우지 않기로. 모든 문장을 걸고 아무 내용도 남기지 않기로. 눈보라가 몰아쳤고 그것은 팔각정을 가로지르며 우리의 안색을 지워 갔다. 나는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계속해서 떠올리고 있었다.
―시집 『엔터 더 드래곤』 파란 2023.5 ...................................................................................................................................
두 사람이 팔각정에 있다. 연인이었는지 사촌지간이었는지 모른다. 눈이 내리는데 가을인지 겨울인지 알 수 없는 계절이다. 다른 사람은 없다. 알던 사람들을 “몽땅 태운 720번 버스가 언덕을 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마치 세상에 남겨진 마지막 존재들 같고, 팔각정은 마지막 현실적 장소처럼 고립돼 보인다. 팔각정에서 무엇을 할까. 가지 요리를 먹는다. 나는 내 존재를 표시라도 하듯, “맛을 느끼기 위해 꼭꼭 씹어야 할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감각하게 된 것에 대해 “뜨거운 묘사를 하고 싶”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모든 문장을 걸고 아무 내용도 남기지 않기로” 한다. 이 세계에 대한 증언을 하지 않기로 하는 것이다. 세계가 내용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있어도 사라져 간다. 눈보라가 몰아치면서 위태로운 팔각정을, 그리고 두 사람을 지워가는 것처럼. 이수명(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