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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안수와 21세기를 향한 목회적 의미
정미현
I. 들어가는 말
내가 신학을 하게 된 동기는 내게 유아세례를 베풀고 어려서부터 줄곧 나의 성장과정을 지켜본 목사님의 권유로부터 비롯된다. 지금부터 약 20 여년전 어느 날 그 목사님은 나에게 처음으로 여성목사가 되어 볼 것을 권유하였다. 그 당시는 나의 소속교단인 한국 기독교장로회에서 여성안수법이 통과된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였고 법적으로는 안수가 가능하였으나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실제로는 여성이 안수받고 활동하는데에 많은 어려움이 있을 때였다. 나는 여성안수라는 것을 당연한 필연성으로 인정하였으나, 그 길이 한국사회에서 얼마나 힘든 것인가는 짐작이 갔으므로 완강히 거절하였다. 그래서 "목사님, 다시는 제게 그런 소리 말아주십시요."라고 말했지만, 그 분의 말씀은 어느새 내 마음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하고, 유럽으로 유학가서 학위과정 중에 여성목사, 여성목회에 대한 내 결심이 더욱 굳어져갔다. 특히 유럽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당당히 말씀 전하고, 예전을 이끌고, 목회활동하는 여성 목사님들을 대하면서, 나 자신도 안수받고 활동해야겠다는 의식이 강해졌던 것이다.
나는 오랜 준비와 기다림 끝에 작년에 안수받게 되었는데, 가족들을 초청했을 때의 일이었다. 10살된 사내조카에게 고모가 안수받으니 참석해 달라고 하였다. "안수가 뭐야?" "응, 목사님이 되는 거란다." 그랬더니 그 애의 반응은 곧바로 "여자인데, 목사가 되?"하며 펄쩍 놀라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 나온지 10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어느새 한국 사회의 보편적 통념에 길들여져서 여자가 목사직을 받는다는 것을 무척 이상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이었다. 이것은 유교적 가부장적 질서가 뿌리 깊게 자리잡은 한국사회 뿐 아니라, 이미 기독교 전통 2000여년 동안 축적되어 온 세계적 현상이었다.
II. 몸말
아담과 이브의 타락 사건으로부터 여성비하의 역사는 비롯된다. 지금까지 기독교 전통은 인간의 죄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였다. 매튜 폭스가 말한대로 우리는 이제 원죄에서 출발해서는 안되고 본래적 "창조의 축복(Original Blessing)"으로 되돌아가도록 노력해야 된다. 이것은 원죄를 부정하자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죄성을 강조하며 교회의 권위로 인간을 억압하고 인간의 존엄과 창조의 선함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킨 교회사의 문제성을 밝혀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상실한 것을 되찾아 가자는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 안에서 정착되고 발전되는 가운데에서 이 죄성을 강조하는 신학은 인간을 무력하고 의존적 존재로 묶어 두려는 의도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죄인의 신학과 정치 권력 사이에는 정치적 상관관계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치 권력과 결합되고 제도화된 교회의 가르침이 아니라, 예수가 본래적으로 시작한 곳에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 세계를 다시 본래 모습으로 온전케 하시는 화해와 회복의 역사를 이루셨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고후 5:17)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의 역사는 창조의 본래적 모습일 수가 없다. 그것은 원죄 이후 깨어진 에덴의 모습이었으며, 망가진 관계성의 상징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깨어진 관계가 회복됨을 믿고 살아가는 신앙인이라면, 이러한 남녀간의 지배-피지배의 왜곡된 관계성안에 머물 수 없는 것이다.
본 강연에서는 여성 안수의 당위성을 논하기 위해 먼저 성서에서 여성에 대한 입장을 살펴보고,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특별히 개신교의 중요한 출발점이 되는 종교개혁기와 그 이후의 변화들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II-1. 성서적 배경
가. 구약성서적 입장에서
ㄱ) 하나님은 어느 특정 성에 고착되어 있는 존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구약의 하나님은 "남성신"인 것처럼 오해되어 왔다. 그래서 "하나님이 남성이면, 남성이 곧 하나님"이라는 논리적 비약도 실제로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경향성은 남성적 이미지가 곧 하나님을 대변하는 것으로써 남성 성직의 정당성을 뒷받침해 준 반면에, 여성을 성직에서 배제하는 기본 원리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하나님에게는 남성적 이미지가 나타남과 동시에 여성적 이미지도 함께 나타난다. 야웨 하나님의 여성성은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그러하다.
첫째, 구약의 하나님의 명칭으로 사용되는 "엘 샷다이"는 주석적으로 양육하는 어머니의 "젖가슴"을 가진 하나님을 뜻한다. 이 "샷다이" 하나님 이름은 구약에 약 48회 나타나는데 이 명칭이 창세기에서는 생육과 번성에 관련되어 사용되어짐을 주목할 수 있다.(창 17:1, 28:3, 35:11, 43:14, 48:3, 49:25 등)
또한 욥기에서 이 하나님의 명칭은 개인의 현실생활에 구체적으로 관여하시는 하나님의 신성을 나타낸다. 즉 젖먹이는 가슴을 지닌 하나님의 이미지는 개인과 가족의 구체적 삶을 돌보시는 여성적 이미지를 지닌다.
둘째, 여성의 자궁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명사 "래햄"에서 파생되어진 동사 "라함"과 형용사 "라훔"은 모두 하나님의 자비한 속성을 나타낸다. 특히 히브리어의 비유적, 회화적 특징을 드러내는 복수명사 "라하밈"은 하나님의 모성적 속성을 묘사하는 것으로써, "자비", "긍휼"등의 용어로 개역성서에서 번역된 것이다. 이처럼 여성만의 고유한 신체의 일부를 나타내는
자궁이라는 용어가 은유적으로 사용되면서 자비와 긍휼로써 인내하며 새로운 생명을 탄생케하는 하나님의 여성적 이미지를 드러내 주는 것이다. 특히 신명기와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해산의 수고를 하고 젖먹이는 여인에 비유되어 나타난다.(신 32:18, 사 42:14, 사 49:15)
ㄴ) 전통적으로 구약시대에는 여성사제가 존재하지 않았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유는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거나, 남성에 대한 종속성이라기 보다는 당시 문화적, 역사적 여건상 여성과 남성의 역할분담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질 수 있다. 첫째 어머니로서의 여성은 선택된 백성의 역사를 이어가는 출산의 역할을 감당하게되며, 이것은 일종의 제사장 직무와도 비견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구약시대의 제사를 준비, 집행하는 과정은 남성적 힘을 요구하는 것이었으므로 여성이 이 직무에서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구약시대는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권리가 인정되지 않았으며,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일반적으로 낮았기 때문에 여성에게 제사장직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셋째 제사장 신분에서 제외된 것은 여성뿐만이 아니었다. 제사장 직분은 세습제로써 레위지파의 아론과 그 직계자손들이 그 역할을 이어갔으므로 이에 해당되지 못한 남성들도 제사장 직분에서 제외된 것이다. 문제는 당시에 여성의 생리나 출산이 부정한 것으로 여겨져서 정결예식에 여성이 적합하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넷째 고대 중동세계의 종교들은 여제사장 제도를 인정해 주었는데, 이는 주로 신전에서 행해지는 풍요를 기원하는 일종의 제의적 매춘행위였고 다산기원의 제의였다. 이러한 다신교적 종교행위와 차별을 두면서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에서는 제사장 직분에서 여성을 배제했다는 것이다.
ㄷ)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며, 따라서 종속적, 보조적 기능만을 담당해야 된다는 것은 전통적으로 창세기 2:18의 "돕는 배필"이라는 개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창세기 1장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따라 동등하게 지어졌음을 강조한다.(창 1:26f) 창 2장에 나타나는 "돕는다"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는 "에재르"인데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 동물에게 모두 사용된다. 그런데 '돕는 자'라는 것은 열등성을 나타내는 말이라기 보다 오히려 능력이 있는 사람이 도울 수가 있다. 이 단어는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도움을 베푸시는데 주로 사용되었음도 주목할 일이다(시 33:20, 70:5, 115:9,11, 121:1-2, 124:8, 146:5, 신 33:7, 26, 29 등). 배필 혹은 그의 상응하는 존재를 나타내는 단어 "크내그도"도 호혜성, 상호성, 관계적 평등성을 오히려 나타내는 것이다. 즉 이 용어는 보조적인 일을 하거나 자손생산의 기능, 종속적 역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포괄적 의미에서 지원을 하고 협력함을 말하는 것이다.
나. 신약성서적 입장에서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목사의 안수란 설교와 성만찬, 축도를 베풀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는 것이다. 여성에게 이러한 권한이 주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교회의 역사안에서 오랜 세월에 거쳐 논의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권한은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부여할 수 있다는 제도로부터 접근하기 보다는 성별의 차이를 너머서서 모든 신앙인이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여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근본적 성립근거는 부활이다. 이 부활의 첫 증언자가 여성이라는 점은 바로 복음의 핵심이 여성들의 입을 통하여 이 세계로 증언되었음을 말한다.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섬김(ministerium verbi divini)"이다. 이러한 봉사의 직분을 수행하는데에 여성이 배제되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본래적 의도가 아니라, 인간의 제도가 빚어낸 산물일 뿐이다.
1) 예수의 태도
한나 볼프는 정신분석학자 융의 개념에 따라 예수를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가 통합된 남성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시 유태적 관습의 한계를 뛰어 넘어 여성들에게 상당히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많은 비유의 말씀이 여성들에 관련된 것이었고, 언제나 여성들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많은 여성들이 예수 주변에서 활약하였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신분간, 인종간, 성별간의 모든 차별을 없애고 모든 인간을 동등한 인격체로 변화시키는 전적으로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는 하나님의 나라(basileia)이다. 예수는 심지어 여성들을 제자의 한 무리로 인정하여 주었고, "그 열둘"의 제자들과 함께 활동할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눅 8:1-3, 막 15:40-41, 마 27:51-56) 또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여성들은 예수에 의하여 부활의 첫 증언자가 될 수 있었다. 이것은 복음 증거의 귀중한 사명이 여성들에게도 주어졌음을 예수 스스로가 명하셨다는 것이다.
2) 바울의 견해
바울은 일반적으로 여성비하적 시각을 지닌 인물로 알려져있다. 이러한 해석의 문제점은 무엇보다도 인간바울과 당시 교회상황이 구분되어 있지 않고, 제 1 바울서신과 제 2 바울서신이 분리되지 않으며, 신약성서의 포괄적인 의도를 해석해 내려는 것(Exegese)과는 달리 상황을 무시한채 주석이 끼친 영향의 역사에 따라 바울을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려고 의도적 해석(Eisegese)을 하려는 것이다.
바울을 도와 동역하였으며 바울서신에 이름이 언급된 능동적인 협력가들의 약 25%는 여성들이었다. 모두 열한명의 여성들의 이름이 바울서신(롬 16: 1-16)과 골로새서에 언급된다. 유오디아, 율리아, 유니아, 마리아, 눔바, 버시, 뵈뵈, 브리스가, 순두게, 드루배나, 드루보사가 그 이름들이다.
또한 바울은 원래 세례 선언문이었던 갈 3:28의 말씀을 받아들여 인용하고 중요시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사람입니다. 유태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례 선언문은 인종간, 계급간, 성별간의 갈등요소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비본래적인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는 사람들이라면, 인종간, 계급간, 성별간의 구별이 아닌 차별의 논리에 사로잡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차별의 왜곡된 모습과 태도를 지닌 사람들이라면, 세례받았을 지라도 진정한 그리스도인 일 수 없을 것이다.
바울에게서 사도라는 호칭은 "그 열둘"에 국한하지 않는다.(고전 15:3-11) 바울은 사도를 광의적 의미로 사용한다. 바울은 교회를 운영하는데 더 포괄적 의미에서 사도적 직분의 다양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섬김의 직분에 여성을 무조건적으로 배제하지 않는다.(고전 12:1-31) 한편 바울은 여성에 대한 적대적 언급을 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고전 11:2-16에서 일종의 모순을 보인다. 그는 엄격한 랍비훈련교육을 받은 유태인이었다. 또한 헬레니즘 문화권 안에 있던 도시 타르수스 출신이고 로마의 시민권을 갖었을 정도의 특권층 사람이었다. 바울은 유태 문화에 철저히 젖어 있었으므로 유태 여성들의 표지로 여겨진 베일을 여성들이 예배시간에 써야함을 역설한 것이다. 이러한 관습을 모르던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이방여성들에게 바울은 자신이 길들여진 관습을 솔직히 옹호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 본문에서 창세기 2장을 근거로 한 신학적 논리와 자신에게 익숙한 유태적 관습의 옹호, 자연법 사이에서 모순을 보이고 있다. 바울이 갖고 있었던 이론과 실제가 서로 갈등관계로 드러난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남성과 여성이 서로 나을 것이 없고 서로 동등하게 중요하다는 것(고전 11: 11-12)을 이론적으로 알면서도 여자들이 베일을 쓰는 문제에서는 자신의 유태적 관습을 포기하지 못한 한계를 보인 것이다.
디모데 전, 후서와 디도서는 바울 이후 세대인 2세기 초엽에 등장한 것이다. 서문에 나와있는 것과는 달리 바울은 이 서신의 저자가 아니고 디모데우스와 디도는 이 서신의 수신자가 아니라 전체교회에게 보내졌다고 보는 것이 최근의 보편적 견해이다. 이 세 서신은 바울의 권위를 빌어 그 이름을 사용하여 저술된 것이고, 중심주제는 영지주의에 대한 방어이다. 영지주의의 유혹으로부터 교회를 지키고자 하는 것이 이 서신들의 주요 목적이다.
감독에 대한 조건을 말한 부분(딤전 3:1-7)이나, 예배 볼 때의 여자들의 행동에 관한 지침(딤전 2:8-15) 여성들이 교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침묵해야 한다는 구절(고전 14:33b-36) 등은 여성으로 하여금 교회내에서 공적 위치를 갖지 못하게 하는 대표적 성서본문들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상당히 다양하게 논의되어왔다. 필자는 고린도 전서의 이 구절은 목회서신 시기에 삽입된 것으로써 바울의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견해를 따른다. 바울은 여성들의 교회 내 공적 활동을 문제시 하기 보다는 오히려 여자 협력자들에 대해 긍정적 입장을 지닌다.(고전 11,4-5) 문학 비평적으로도 고전 14: 26-33a에서 예언과 침묵과 복종은 14: 33b-36과는 다른 맥락을 지니며, 33a절은 37절과 자연스레 연결되는 것이다. 또한 바울은 유태 율법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종식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제시하지 않는다. 물론 이 부분이 후대 삽입구라 하더라도 정경인 서신에 들어가 있음은 인정해야 되는데, 보편적으로 이해되기 보다는 당시의 상황적 특수성, 즉 초대교회를 위협하던 그릇된 가르침에 대한 교정이라는 것을 전제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목회서신과 바울이후 서신들은 교회의 통일성을 중시하는 것과 영지주의적 이단에 대항하려는 특성을 지닌다. 바울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이 선교와 교회건설에 앞장서서 행하던 모든 공적 활동들이 수십년 뒤 목회서신 등장시기(혹은 베드로 전서)에는 해서는 안되는 일로 금지되어갔다. 거짓으로 바울의 이름과 권위를 빌어 강요된 이러한 변화는 그리스도가 남자의 머리이고 남자는 여자의 머리라는 식의 체계와 인류 타락의 원인 제공자가 이브이므로 남성에 비해 여성의 열등성을 말한다.
이러한 내용들이 담겨있는 목회서신의 등장시기는 신약성서의 마지막 발전단계였고, 바울이 지녔던 종말론적 역동성이 극도로 약화되고, 이미 예언적 능력이 약화되었으며 교회는 제도화 되면서 통상적인 로마사회의 질서에 부응하던 때였다. 여성들을 가정으로 돌려보내고,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침묵을 강요케하며, 아이를 낳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등의 논리는 바로 고대 로마의 가족관으로의 회귀를 뜻한다. 그리고 여성들을 집안과 자녀생산, 어머니의 역할에 묶어두게 만드는 목회서신의 가르침은 성 적인 금욕을 강조하며 세상부정적 가치관을 지닌 영지주의에 맞서서 언급된 것이다. 즉 이러한 내용들은 초대 교회의 성장과정에서 영지주의와의 갈등구조라는 특수 상황속에서 생겨난 것이므로 모든 시대에 적용될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그 시대적, 역사적 맥락과의 연관성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II-2. 종교개혁기 이후 여성안수문제
가톨릭 신학자 알프레드 르와지(Alfred Loisy)는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였으나, 온 것은 교회였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교회가 예수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인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기능을 제대로 담당하지 못하고 제도화되면서 경직된 것에 대한 비판적 소리로 이해하여 볼수 있겠다. 교회의 모습, 교회의 선포의 내용은 비판적인 신학적 성찰을 통하여 깨어지고 계몽되어야 한다.
1. 제 1의 종교개혁
이미 루터의 종교개혁이 있기 전에 개혁을 실행한 이탈리아 발덴시우스와 체코 후스의 노력은 우리가 주목해야 될 또 다른 "살아있는 유산"이다. 구체적으로 "제 1의 종교개혁"이라 함은 루터의 종교개혁 보다 100년 앞선 체코의 후스로부터 비롯된 개혁운동을 가리킨다. 종교개혁의 샛별과 같은 역할을 하였던 "제 1의 종교개혁"은 약한 자, 소외된 자의 힘이 결집되어 나타난 것으로써, 봉건제후, 기득권자와의 결탁으로 독일 농민전쟁에서 그 한계성을 드러낸 루터의 종교개혁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발덴시우스와 후스파 운동에서는 여성들의 활동이 두드러저서 많은 여성들이 설교가, 교육가, 저술가, 순교자, 재정 후원자등으로 활약하였다. 특히 후스파에 대한 로마 교황청의 당시 조사문헌 가운데 후에 교황으로 선출된 피우스 2세의 보고에 의하면 여성들이 성서의 복음을 로마의 교황보다 더 근본적으로 잘 이해하였다고 전한다.
2. 재세례파-인문주의
재세례파 운동과 인문주의에서 여성들에 대한 태도는 당시 제도권 교회보다 한 걸음 앞선 것이었다. 재세례파 운동의 초기단계 여성들은 "만인 사제설"의 원리에 따라 신앙생활 하는 가운데 여남의 평등공동체를 지향하였다. 여성들은 종교개혁적 격변기에 능동적으로 그들의 역할을 감당하여 갔으나, 개혁된 교회가 제도화되고 자리잡혀 가면서 그들의 자리를 다시 상실하게 된다.
한편 카톨릭 교인이었으나 토머스 모루스(Thomas Morus 1478-1535)나 에라스무스(Erasmus von Rotterdam 1466-1536)와 같은 인문주의자들은 여성에 대한 진보적 견해를 갖고 있었는데, 이것은 당시 종교개혁자들의 생각을 훨씬 앞지르는 것이었다.
3. 종교개혁 시대의 여성들
종교개혁은 종교적 측면의 변화뿐 아니라, 결혼제도에 대한 근본적 입장의 변화를 통하여 사회전반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중세기 로마 카톨릭의 입장에서 볼 때 결혼은 7가지 성례전의 하나로써 신성시 되었으나, 실제로 중세기에는 금욕적 삶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였다. 따라서 사제와 수녀의 육체적 금욕과 순결을 규율로써 강요하고, 명상과 관조의 삶(vita contemplativa)이 활동적 삶(vita activa)보다 가치있는 것으로 구분짓는다. 이러한 삶의 양태에 변화를 가져온 것이 종교개혁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 말씀의 선포와 성찬의 두 가지 성례전만을 인정한다.
결혼은 성례전에 속하지 않더라도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속한 것으로써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특별한 사명을 주어 다른 삶의 방식으로 부른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간은 누구나 결혼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이었다. 이로 인하여 중세기 전반을 지배하였던 수도원과 수녀원이 해체되어가고, 부부, 가족, 가정단위의 새로운 삶의 양태에 대한 가치가 부각되었다. 결혼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가장 가치있는 삶의 방식이고, 종래의 수도원, 수녀원의 독신주의보다 소중한 삶으로 여겨졌다.
그렇지만 종교개혁 시기에 강조되기 시작한 결혼에 대한 긍정적 접근이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동반자로 대해 주었는가에 대하여서는 상이한 견해들이 있다. 바로 이 점이 종교개혁의 여성관에 대한 모순과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종교개혁이 초래한 여성의 지위에 대한 견해를 두가지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오히려 퇴보되었다는 부정적 견해이다. 종교개혁 이전 여성들은 수녀원이라는 여성들의 고유한 영역에서 자아를 실현시켜 나아갈 수 있었다. 남성의 역할이 배제된 채 여성들의 자율적 공동체가 운영되었기 때문에 여성들은 능동적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었고 높은 수준의 교육으로 독립적 인격체로 성숙될 수 있었다. 종교개혁은 이러한 기회를 짓밟은 것이고 여성들은 "수녀원에서 부엌으로" 자신들의 삶의 무대를 옮기도록 강요받았다. 한 가정에 종속된 여성들의 삶은 이후 한 남성에게 종속되는 것으로 이어져 자아실현의 기회가 극히 축소된 것이다.
둘째로 종교개혁은 현대적 수준의 여성해방을 가져다 주지 못하였으나, 종교개혁이 있음으로해서 근대 이후 개신교에서의 여성 지위에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는 긍정적 견해이다. 여성들은 수녀원을 벗어남으로 일시적으로 교육과 자아실현의 기회를 상실하였으나, 이후 종교개혁은 여성들, 특히 소녀들에 대한 일반적 교육의 기회를 확대되었다. 이것은 수녀원에 들어 갈 수 있었던 소수 특정 계층의 여성들에게만 해당되는 교육이 여성들에게 보편적으로 시행될 수 있었음을 말한다. 여성의 성(性)과 결혼제도에 대한 긍정적 변화도 오히려 여성들로 하여금 주체적으로 살아갈 가능성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결혼이 로마 카톨릭에서처럼 7가지 성례전에 속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여성에게 부당한 결혼으로부터 여성이 벗어날 수 있는 이혼의 가능성이 열려진 것도 여성들의 권익보호를 위해서 도움이 되었다.
나는 두 번째의 견해가 더욱 설득력 있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21세기를 살아가는 현재 카톨릭 교회보다 개신교에서 여성 지위가 향상된 것은 이러한 종교개혁을 통한 점진적 변화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은 이를 물심양면으로 뒷받침한 여성들에 의하여 진행되어질 수 있었다. 이들은 여남간의 성서적 평등사상에 감명받고 이러한 삶이 실제로 실현되기를 바란 사람들이었으며, 만인사제설에 입각하여 여성도 남성도 모두 사제가 될 수 있음을 환영한 사람들이었다.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마리 덴티레, 카타리나 폰 보라, 카타리나 젤-쉬츠, 비브란디스 로젠블라트, 아굴라 폰 그룸바하, 마가레타 블라러등이 있다. 이들은 종교개혁가와 결혼하였고, 직간접적으로 종교개혁을 수행하기 위하여 힘쓴 인물들이었다. 종교개혁을 주도한 사제와 결혼함으로 제 1세대 목사의 부인이 된 사람들은 심지어 사제를 유혹한 창녀라는 비난을 받는 등 사회적 불이익을 감수하여야 하였다. 사제와의 결혼이 드물었던 그 시절에 결혼한 사제부부는 그들의 결혼생활이 하나님의 축복가운데 이루어졌음을 보이기를 원하여 부단히 노력하였다. 이 여성들 가운데는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이 미온적임을 지적하고 시대를 초월한 급진적 사상으로 더욱 철저한 개혁을 지향한 이들도 있었다. 시대적 한계에 부딪혀 그 뜻이 많이 좌절되었으되 종교개혁을 위하여 수고한 여성들의 노력이 축적됨으로 인하여 개신교회 내에서는 20세기에 들어와 차츰 여성들을 위한 지도적 위치가 확보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루터는 만인사제직 사상을 통하여 전통적인 사제직 이해를 문제시하였다. "교황, 주교, 사제 및 승려를 영적 계급이라고 부르고, 군주, 영주, 직공 및 농부를 '세속적 계급'이라고 부르는 것은 조작적인 것이다. 실로 이것은 순전한 거짓과 위선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영적 계급'에 속하며 그들 가운데는 직무상의 차별이외에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 전서 12장에서 우리는 다 한 몸이나 모든 지체가 다른 지체를 섬기기 위하여 각기 자기대로의 임무를 가진다고 말한 것과 같다. 그것은 우리가 다 한 세례와 한 복음과 한 신앙을 가지고 있고 또 다같은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 세례를 통하여 사제로서 성별을 받는다. 이것은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2장에서 '여러분은 왕의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국민'(9절)이라고 말하고, 또 요한계시록에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사람들을 사셨다고(계 5:9-10)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다. 구두 수선공, 대장장이, 농부는 각기 자기들의 일과 직무를 맡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다 성별받은 사제와 주교와 같다." 이것은 계급간, 성별간의 차이를 너머서서 모든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성별받은 성직자임을 역설한 것이다. 루터는 사제에게만 할 수 있는 것으로 국한되어 있는 고해성사나 사제의 특권으로 알려진 설교를 누구나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재해석한다.
이러한 선구적 사상을 지녔음에도 루터는 그 당시 이 사상을 철저하게 실현시키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다. 그래서 루터는 위기 상황이나, 설교할 남자가 없을 때, 특별히 말씀을 잘 전하는 여자가 있을 때 여성에게 설교권을 허락하였고, 평상시에는 남성은 교회에서, 여성은 가정에서 설교하는 방법을 선호하였다. 이와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만인 사제설을 통하여 여성은 말씀 선포나 영적 사제직의 자리에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등의 논리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때문에 구체적으로 실현되지 못한 루터의 실천적 한계에 머물러 있기 보다는, 오히려 그 사상을 현재적으로 긍정적인 시각에서 평가하고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칼빈의 견해는 여성의 성직 임명에 반대하는 입장을 옹호하는 것으로 지금까지 주로 해석되어져왔다. 그러나 최근의 칼빈연구는 칼빈의 견해가 여성의 성직 임명을 옹호하는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음을 제시한다. 칼빈은 원칙을 중시하는 종교개혁자였으나, 고루하게 전통과 관습, 명분에 사로잡혀 있기 보다는 능률과 실질, 상황성을 더욱 중요시하였다. "...여성이 머리수건없이 외출한다면 그것이 하나의 죄라는 식으로 어떻게 여성의 머리수건을 종교적으로 문제시 할 수 있는가? (교회에서) 여성이 침묵하라는 계명이 성스러운 것이어서, 그것을 위반하는 것은 가장 최악의 악행을 범하는 것이라는 말인가? (기도할 적에) 무릎을 꿇는 것이나 시체를 묻는 것이 하나의 신비스런 것이어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죄 짓는 일인가? 전적으로 아니다! 왜냐하면 한 여성이 이웃을 도우려고 황급히 뛰어 나가느라 머리에 수건을 쓰지 못하고 나갔다면, 그녀가 머리수건없이 나다녔다고 해서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 또한 여성이 말하는 것이 어떤 다른 곳에서의 침묵보다 더 적합한 경우들이 있다. 또한 병으로 무릎을 꿇기가 힘든 사람이 서서 기도했다면, 그것도 문제될 것이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의가 준비되지 않았을 때나 혹은 시체가 매장되지 않은 채 지시가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데 동반해 줄 사람이 없을 때에는 일찌감치 매장하는 것이 낫다."
이것은 칼빈이 종교개혁을 통하여 질서와 규율을 정립하기 위해 애썼지만, 상황을 전혀 무시한채 원칙만을 고집하는 완고한 인물이 아니었고, 오히려 융통성있게 실제적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흔적을 보여주는 예이다. 이 인용문에서 또한 칼빈은 교회내에서 여성의 일방적 침묵만을 옹호 내지 강요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칼빈은 "그의 계속 출판된 기독교 강요에서 여자는 교회의 직분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교회 안에서의 여자의침묵 문제는 인간들이 제정한 질서의 문제요, 변화하는 환경에 따라 바뀔 수 있음"을 시사하였다.
중세교회의 문제성을 지적하고 나선 것이 종교개혁이었기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은 무엇보다도 교회론에 가치를 부여하였다. 루터보다 더욱 교회론에 비중을 둔 칼빈의 주저 "기독교 강요"는 신론, 기독론, 성령론으로 구분된 삼위일체론에 입각하여 교회를 어떻게 바로 세우는가하는 방향성을 제시한다. 여기에서 그는 교회내의 직분론(목사, 박사, 장로, 집사)을 언급하면서 어떤 특정 성에 국한시키거나 여성의 목사직 배제를 고정화하지 않았다. 또한 그러한 직분은 직능상의 구별이지 위계질서화된 차별이 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정립되어가던 개혁교회는 그 가시적 교회의 정체성을 "어머니"로서의 교회의 모습에서 찾고 있다. 실제로 "기독교 강요" 첫 장의 제목은 "모든 경건한 사람들의 어머니인 교회 안에서 통일성을 지켜야만 하는 참된 교회에 대하여(Von der wahren Kirche, mit der wir die Einheit halten m ssen, weil sie die Mutter aller Frommen ist)"라고 붙여져있다.
초대 교부들의 전통을 따라 어머니로서의 교회를 말하는 칼빈은 교회의 교육 또한 강조하였다. "지금 우리는 가시적 교회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므로, 우리가 그 교회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유용하며 필요한 것인지를 '어머니'라는 존경스런 이름으로 불리는 교회로부터 배우려한다. 왜냐하면 만일 이 어머니가 우리를 자궁에 품고 있다가 우리를 낳고, 그녀의 가슴의 젖을 먹여 기르고, 마침내 우리가 우리의 썩어질 육신을 벗어버리고 천사처럼 될 때까지(마 22:30) 우리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생명으로 인도할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품에서처럼 신도들을 양육하는 포용적 교회의 모습을 칼빈은 추구한 것이다.
종교개혁 사상은 여성을 악의 근원이나 유혹자로 보고 여성을 죄악시하던 전통적 입장을 깨트리고 성, 여성의 존재, 결혼에 새로운 가치관을 불러 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사회적인 공적 지위를 갖는데까지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종교개혁으로 여성의 지위가 온전하게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제도교회를 벗어난 비주류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여성들은 비교적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기본적 의도는 여성비하적 원칙주의에 빠진 것이 아니고, 시대적 한계성을 지니지만 그 사상가운데 여성의 교회내 공적 역할과 지위를 인정해 줄 수 있는 요소들은 긍정적으로 수용되어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이론적으로 정립했으나 실제로 구현하지 못한 원칙들은 오늘의 시점에서 여성신학적인 비판적 검토를 통하여 적용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특히 루터에 의하여 사상적 토대가 놓여졌고 칼빈도 교리적 맥락에서 접근하고 있으나, 구체적으로 실현되지 못한 "만인 사제직" 사상은 여성신학적 측면에서 뿐 아니라, 평신도의 다양한 능력이 발휘되지 못하고 당회장 중심의 교권주의가 극대화된 한국 개신교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각을 제시한다.
4. 경건주의
종교개혁의 내용을 교리화하고, 문자화된 교리 자체가 신앙의 절대적 척도가 되어 마치 "종이 교황"을 섬기는 어리석음을 범한 것은 정통주의의 문제성이다. 정통주의가 지배한 17세기에는 또한 계몽주의 이후 근대적 인간의 합리주의와 지성주의가 강하게 작용하면서 신앙을 경멸하는 사조가 생기기도 했는데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한 것이 경건주의이다. 즉 경건주의는 화석화된 신앙의 형태와 지성적으로 신앙을 무시하는 태도에 맞서서 생동감 있는 신앙을 일깨우려던 시도였다. 이러한 경건주의 신앙운동의 주역은 다름 아닌 여성들이었다.
경건주의는 독일의 필립 야콥 스페너와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를 주축으로 니콜라스 루드비히 진젠도르프에게 이어지면서 발달하였고, 이후 영미권의 각성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입히고 개신교 선교활동에 촉매작용을 하게되었다. 이와같은 경건주의 운동이 발달되는데는 여성들의 활약이 매우 컸다. 경건주의 운동에 대한 관심 때문에 귀족이면서 평민과 결혼한 요안나 엘레노라 페터슨, 진젠도르프의 부인으로서 활약한 에르트무드 도로테아 본 로이제 에버스도르프, 진젠도르프가 헤른후트에 공동체를 세우는데 결정적 영향을 끼친 그의 외할머니 엔리에테 카타리나 폰 게르스도르프, 진젠도르프의 어머니 샤롯테 유스티네 폰 게르스도르프, 아델하이드 아말리에 폰 골리친, 바바라 율리아네 폰 크루데너등이 그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외에도 많은 평범한 여성들의 활약도 두드러졌는데 이들은 경건주의 운동에서 예언가로, 후원자로, 지도자로, 행정가 등으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들은 단순히 남성의 조력가로만 활동한 것이 아니었다. 지도적인 남성 경건주의자들 마저도 여성이 경건주의적 삶에 더욱 적합한 존재임을 인정하였고, 경건주의적 거듭남의 삶이 여성들에 의하여 수행되어짐을 확신했다.
경건주의에서는 종교적 영감, 종교의 감정을 중시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전하는 여성들의 예언현상이 활발하였다. 경건주의자들에게 거룩한 예언자로 보여졌던 이들은 그러나 제도권 교회의 입장에서는 종교적, 정치적으로 위협적인 존재였다.
독일 헤른후트에 보헤미안 동포단을 위하여 공동체를 건립하도록 도운 진젠도르프는 할머니, 아내, 장모등 주변여성들의 경건주의 확산을 위한 노력에 자극을 받았고, 여성들이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이며, 교회 공동체의 주도적 역할을 감당하기에 조금도 부족함 없음을 확신하였다. 여성은 더 이상 죄의 근원이 아니었고, 여성에 대한 종교적인 부정적 편견은 차츰 사라졌다. 그 결과 19세기 초 경건주의의 한 교회 공동체 내에서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권리행사가 가능했고, 교회 내에서의 공적 지위가 확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경건주의도 제도화되고 난 후에는 이렇게 예언적 능력으로 열렬하게 말씀을 전하던 여성들은 경건주의 자체를 거부하는 정통주의자들과 경건주의 내부에서 기득권을 잡은 남성들에 의해 거부당하게 된다. 하나님이 여성들의 심령에 우선적으로 말씀하신다고 보고, 이들 여성들의 공적 활약을 지원했던 초기 경건주의 지도자들과는 달리 후기 경건주의 주체세력 남성들은 여성을 참여적, 능동적 주체의 자리로부터 밀어낸 것이다.
5. 19세기 이후
독일어권 유럽에서 이 시기에 여성에 대한 태도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유형이 공존하는 것이었다. 1. 성서를 여성적 관점에서 해석하며 여남 평등한 교회의 개혁을 시도하는 유형, 2. 전통에 의거하여 여성의 역할을 제한하는 보수적 근본주의적 유형, 3. 성차별에 대한 사회적 문제성을 제기한 사회주의적, 종교사회주의적 유형들, 4. 자유주의적, 낙관주의적 유형으로 교육과 역사적 진보에 의하여 여성문제가 점진적으로 해결될 것을 전망하는 유형들이다.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은 "대각성 운동"이후 개신교 여성들의 지위는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대각성 운동은 사람들을 깨우치는 일종의 환기 작용을 하였고 여성들은 남성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으며, 아울러 남성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기도 하였고 책임의식도 더욱 불러 일으켰다. 이것은 부흥운동의 성격상 기존의 교회에 비판적인 대응을 하는 점에서 어떤 성직을 지니고 있는가보다는 신앙심이 척도가 되었기 때문이고 평신도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아진 까닭이었다. 부흥운동가들은 평신도를 설교단에 세우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는데, 성직에 임명되지 않은 평신도들, 특히 여성들도 주님이 내린 특별한 소명을 감당할 수 있다는 논리에서였다.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진 것은 영국보다 신대륙에서였다.
미국에서 개신교 여성운동은 노예제 폐지운동과 맞물려서 발전되었다. 1837년 뉴욕에서 최초로 "노예제 반대를 위한 여성회의"가 개최된 후 이를 주제로 한 순회 강연이 곳곳에서 이어졌다. 노예제 반대운동은 여성 권리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지고 사라 그림케(Sarah Grimke)는 1833년 개신교 페미니즘을 최초로 선언한 "양성간의 평등과 여성의 조건에 관한 서한"을 출판하였다. 이후 개신교 페미니즘은 다양한 사회적 영향을 흡수하면서 발전되었는데 여성의 참정권 획득과 여성의 성직 임명권이 중요 관심사였다. 1848년 뉴욕주 세네카 폴즈에서 "여성권리대회"가 열렸고, 여성도 설교할 권리가 있다는 결의문이 정식으로 채택되었다.
미국에서 개혁전통 최초의 여성 목회자는 앙트와네트 브라운(Antoinette L. Brown)이었다. 그녀는 1853년 뉴욕주에 있는 한 회중교회에서 안수를 받은 것이다. 장로교 첫 여성 목회자는 루이자 마리아 래이맨 우슬리(Louisa Mariah Layman Woosley)로 1889년 안수를 받았다. 미국에서도 1950년에 이르기까지 여성 목회자는 보편적 현상이 아니었고 미국의 가장 큰 두 장로교회가 여성안수를 허용한 것은 1956년과 1965년이었다.
19세기의 여성운동가인 엘리자베트 캐디 스탠튼(Elizabeth Cady Stanton)은 본격적으로 여성신학적 문제를 제기한 인물이다. 스탠튼은 80세 되던 1895년과 3년 뒤인 1898년에 "여성의 성서"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이 책의 출판동기는 성서가 여성평등운동을 하는데 오히려 걸림돌인 것처럼 왜곡되어 지는 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미국과 유럽의 25명의 여성들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쓰여진 것으로써 여성이 언급된 성서의 내용을 여성의 시각에서 주석한 최초의 책이 된다. 이후 여성신학은 1960년대 이후 여성운동과 해방신학의 영향으로 본격적으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다.
6. 한국교회 여성들
20세기 초 한국교회를 발전시키는데 공헌한 이들은 이름없는 평신도 여성들이었다. 이들은 남자들과 같이 교회 건축등의 육체적 노동을 감수하였을 뿐 아니라, "성미제도"를 통하여 교회재정에 결정적 보탬을 주었다. 또한 한국교회 초기에 소위 "전도부인"이라 불리우던 여성들의 교회를 향한 헌신과 열정은 숭고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삼천리 반도에 각 가정을 직접 방문하며 성서이야기와 찬송을 전해주던 전도부인들의 단순한 선교방법은 당시의 네비우스 선교방법보다 훨씬 효과적이었다고 한다. 이와같은 전도부인들의 노고에 힘입어 한국교회는 그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한국교회가 제도화 되어지면서 이들의 노고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남성 성직자 중심의 교권주의가 깊게 자리 잡혀 가게되었다.
1907년 한국 장로교회 최초의 목사가 배출되고 남성으로만 이루어진 독노회가 결성된 이래로 한국교회는 초창기부터 여성을 말씀의 선포와 성례전 집행의 사역에서 배제하였고 여성의 교회내에서의 공적 활동을 법적으로 금하게 하였다. 여성은 가르치는 일과 치리에서 밀려나 전도와 봉사에만 전념할 것을 강요당하였고 회의 석상에서 공식적 발언권조차 갖지 못하였다. 근본주의 신학에 뿌리 내린 한국교회에서 여성안수문제가 차츰 해결된 것은 1950년대 이후의 일이다. 이것은 수많은 여성들의 눈물어린 수고가 오랜 세월을 두고 축적된 결과이다. 1955년 감리교회에서 여성안수가 허락되어 전밀라와 명화용이 안수받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독신신분이어야 한다는 성차별의 규정이 있는 것이었고, 1991년에 와서야 이러한 조항이 철폐된다. 1977년에는 한국 기독교 장로회에서 양정신이 안수를 받았고, 1996년에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 측에서 박진숙이 안수받았다.
III. 21세기 여성목회의 의의
성서는 복음과 상황의 변증법적 긴장관계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성서 자체가 쓰여진 문화적 상황,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 몇몇 성서귀절에 얽매이고, 교회전통에 일방적으로 얽매여서 여성안수를 거부하는 것은 문제적이다. 우리는 문화적, 시대적 차이로 인하여 성서에서 말하는 모든 규율들을 그대로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 실행할 수가 없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고후 3:6) 여성안수를 불허하는 전통과 같이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 하는 것은 "개혁주의 원칙"을 몰이해하는 것이다. 전통 자체에 대한 재해석을 통하여 잘못된 것은 시정하고, 변화를 추구하는 지혜가 우리에게 요청된다. 바로 그것이 진정 이 땅에 하늘에서와 같이 불가시적 교회가 완성될 때까지 가시적 교회가 지향할 자세인 것이다. "개혁된 교회란 있을 수 없고 늘 새롭게 개혁되어야만 하는 교회(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가 바로 우리가 속한 가시적 교회가 추구해야 될 모습이다.
살아있는 것은 부드럽다. 그 부드러움은 여성의 중요한 속성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은 성에 따라 남녀의 역할과 특징을 고정적으로 관념화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과 남성의 특성을 종래의 관습대로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문제이겠지만, 여성은 일반적으로 부드러움의 존재적 특성을 지닌다. 21세기의 화두로 떠오르는 대표적 개념들을 보면 화합, 평화, 조화, 자연, 생명등이다. 여성이 이런 역할을 감당하기에 더 월등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개념들은 여성의 자연적 특성과 더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지금까지 남성들에 의하여 주도된 역사가 분열과 갈등과 살상으로 이어져 왔으므로 이에 대한 대안으로 기득권을 갖지 못했던 여성들이 제도권 안에서 지도력을 갖음으로 가부장 사회가 가모장 사회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가 지향할 바는 아니다.
이것은 교회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내에 자리잡고 있는 복음의 해방적 메시지를 가리우는 억압기제의 해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가부장주의이건, 가모장주의이건 이러한 권위주의로써 사람들을 교회와 종교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 둘 수 있는 시대는 이제 지났다고 본다.
많은 미래 학자들은 21세기를 감정(Feeling), 상상력(Fiction), 여성(Female)의 머릿글자를 따서 3F의 시대라 부른다. 지능지수보다 남을 배려하는 감성지수의 가치가 이제 중요하게 부각된다. 단순한 답습보다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창의성의 가치가 돋보인다. 앞으로의 세계는 사회 여러분야에서 근육질의 남성적 힘보다, 여성적 섬세함이 더욱 필요하다. 교회도 이 점에서 예외일 수가 없다.
여성신도의 수가 보편적으로 70% 이상을 차지하는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여성목회자들은 남성 목회자들에게 터놓지 못한 여성신자들의 고민들을 들어주는 목회상담적 능력을 지닌다. 또한 이들은 일터에서 지친 사회인들을 품어줄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고 다시 세상으로 담대히 나아갈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감당하는데 큰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에 오는 것이 교회의 권위에 눌려서가 아니라, 복음을 진정으로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행위에서 비롯되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을 어머니처럼 포용하는 교회의 모습을 꾸며 나아가는데에 여성 목회자들은 많은 잠재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컴퓨터 시대가 도래하여 전자 민주주의가 생겨나고, 굳이 학교에 가지 않더래도 인터넷을 통하여 질좋은 강의를 섭취할 수 있으며, 사이버 세계안의 예배, 사이버 정부까지도 들어설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기술문명의 발달로 인간의 생활이 전반적으로 변화되고 편리해졌지만, 개인주의화의 극단적 표상인 컴퓨터 시대가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마주하여 진솔하게 이야기할 대상을 요청하고 있다.
물론 여성 목회자의 역할을 종래에 "여성의 일"이라고 여겨진 상담, 교육에 한정지을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될 것이다. 여성목회를 특수목회 현장에만 국한시켜서도 안될 것이다. 또한 여성이 안수받고 여성 목회자로 불리울 지라도, 종래에 전도사와 같은 보조적 역할만을 하도록 제한된다면, 여성안수의 의의는 약화될 것이다. 즉 능동적 주체로서 목회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IV. 나오는 말
종교개혁 이후 500여년이 지났으나 교회 내에서 여성들의 역할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오늘날의 한국 교회 여성들은 제 1세대 개신교 여성들이 담당하던 역할들, 즉 교회안에서 수동적 봉사자의 일을 담당하고, 능동적이고, 지도적인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은 마련되지 못하였다. 여전히 한국교회에서 여성신도들의 자리는 교회의 부엌, 스피커 달린 유아방, 심방하는 일, 유치부로부터 청소년에 이르는 교육, 꽃꽂이, 바자회 준비등에 보편적으로 한정되어 있다. 물론 이러한 일들의 가치와 중요도, 기여도가 떨어진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성의 차이를 넘어서서 각자의 역량과 취향에 따라서 그 역할이 자유로이 수행되어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성이건 남성이건 한정된 역할에 자신을 수동적으로 맞추기 보다는, 창조적이고 능동적인 참여가 유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여성이건 남성이건 성의 차이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데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성직안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제사장"으로 부르심 받은(벧전 2:9, 계 1:6)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사이다. "그 때가 되면, 종들에게까지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나의 영을 부어주겠다"(욜 2:29)라고 일찌기 예언자 요엘을 통하여 선포된 야훼 하나님의 말씀은 초대 교회 공동체가 성립되어지던 때 사도 베드로에 의하여 새로이 증거되었다.(행 2:16)
가부장주의로부터 비롯된 위계질서화된 남녀간의 관계는 분명 하나님이 본래적으로 의도하신 창조질서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죄된 인간의 타락의 결과물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뒤틀려진 관계의 회복을 위한 화해의 제물이 되셨다. 진정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려는 신앙인이라면 계급간, 인종간, 성별간 차별을 두고 인간이 인간위에 군림하는 그러한 모습을 따를 수는 없을 것이다.
히브리 문화권에서 생겨난 그리스도교는 그리스어 문화권에서 초대교회의 성장을 이루었고, 중세 교회의 라틴 문화권에서 외형적으로 발전되었다. 이후 독일어 문화권을 중심으로 종교개혁의 과정을 거친 후 영어 문화권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근대 이후 전 세계로 확대 되어갔다. 이제 21세기는 동양 문화권, 특히 한반도에서 그리스도교의 역사가 활발하게 전개되리라는 것은 과거 역사에 비추어 본 미래적 전망이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세계교회는 한국교회를 주목하고, 여성 목회자의 활약을 기대하는데, 아직도 이들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 세계화의 물결로 세계의 자매교회들과의 교류도 더욱 확대되는데 여성안수라는 제도적 틀로 인하여 훌륭한 자질을 갖춘 많은 한국 교회여성들이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지도적 위치에서 활동할 수 없음은 부당하다.
여성이 교회에서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한국 교회현실에서 여성이 할 수 있는 말이 남성목사님의 설교에 "아멘"으로 박자 맞추어 응답하는 일이어서만은 안 될 것이다. 이제라도 여성들에게 수동적 침묵만을 강요하려는 태도에서 탈피하여 여성에게 안수도 주고, 실제로 목회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 것을 이 자리에 함께 한 여러 교회 지도자 어른들께 호소한다.
그리고 여성들에 의하여 선포되는 그 말씀이 진정 "하나님의 말씀에 봉사"하는 그러한 일이 되는지 비판적인 격려를 바란다. 그리고 여성들이 목회활동을 통하여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한다. 남성 목회자 사모처럼 여성 목회자의 배우자가 헌신적으로 노력해 줄 것을 우리나라 문화 사회적 형편상 지금으로서는 기대하기 힘들다. 때문에 여성 목회자 혼자서 감당해야 할 많은 짐이 있으며, 때문에 이러한 점에서도 선배 남성 목회자들의 따뜻한 격려가 많이 필요하다. 여성 목회가 활성화되면, 침체된 한국 개신교에 다각적으로 새로운 활력소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출처 :행복†충전소 원문보기▶ 글쓴이 : 익명회원 입니다
첫댓글 세상에는 '여자 목사' 말고도, '동성(同性) 결혼'을 인정하고 그러한 결혼식의 주례 까지 (목사가) 서 주는 교단(교파)도 있습니다. 원래 '집사'도 여자 집사는 성경에 없고(딤전3:12~13) '자매 일꾼'(롬16:1)은 있습니다만... ['누구니'님의 하시는 (좋은) 일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는 문장 하나보다는 전체 문맥과, 또한 그 글이 씌어진 시대적 배경까지도 고려해 가면서 읽어야 한다고 봅니다. 바울 자신의 성향이 강하게 들어간 바울서신보다는, 남녀, 빈부 차별을 전혀 않으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더 우선시하여 계승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기에 저는 여성 장로, 여성 목사에 대해 환영하는 입장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더 우선시 하여 계승해야 할 만큼 바울이 쓴 글과 예수님의 말씀이 서로 충돌하는 부분이 있습니까? 바울 서신에서 우리가 계승해야 할 부분과 아닌 부분이 있나요? 있다면 그 기준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저는 바울이 기록한 서신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고 있기에 바울서신서가 바울의 개인적인 성향이 들어갔다는 아마쿠사님의 분별에는 동의가 되지 않네요,,너울에 관한 문제는 고린도 지역만의 풍습이다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계시는줄을 알지만 이제는 바울이 기록한 성경이 문제가 있다는 식의 주장도 나오고 있나봅니다,, 말씀의 권위가 어디까지 떨어지고 있는지,, 이런글을 대할때마다 두렵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 같지만, 성경은 씌어진 배경을 고려하고 읽어야 합니다. 바울이 쓴 서신은 엄연히 1세기 중동 및 지중해 연안의 문화를 바탕으로, 또한 그 문화권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쓰여졌습니다. 그것을 고려하고, 그 시대적인 상황을 생각하여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심각한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저랑 만나면 입맞추고 인사하시겠습니까? 전 남자인데요? 바울이 분명 형제들을 만나면 입맞춤으로 문안하라 했지 않습니까?
ㅎㅎㅎ 아마쿠사님 억지 부리시고 계시다는 느낌이 안드십니까? 전 자매인데요,, ㅎㅎ 각자 말씀에서 보여지는대로 순종하면 되겠지요,,, 강요한다고 되는것도 아니고,, 그러나 훗날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심판의 기준은 당연히 인간의 생각이 아닌 성경 말씀이라는 분별에는 동의 하시겠지요,,^^
전 억지가 아니라 지금 논리에 맞추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 적힌 어디까지를 받아들이시고 계십니까? 족장들이 여러 아내를 두었으니 지금도 그렇게 해도 된다고 하진 않으시겠죠? 구약의 제사법 하나하나까지 다 지키고 계십니까? 뭐, 그렇게 문자 그대로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으시다면야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그것 또한 자유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그것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시지는 마시기를 바랍니다.(제 경우를 이야기함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했습니다. 말 그대로 진리를 깨닫는 만큼 그 자유의 틀은 넓어지게 되어 있으니까요.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제가 구원받을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저를 가슴벅차게 했던 말씀이지요 주님이 주신 자유가 어떤것인지 저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은헤만 있는게 아니지요 주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이라고 했습니다,, 자유해야할 부분이있고 그 자유를 주신 분의 뜻에 따라 순종하고 지켜야 할 부분이 있지요,,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않으면 면류관을 얻지 못한다고 했습니다,,,우리가 부지런히 성경을 상고해야하는 이유가 여기 있지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지푸라기와 나무와 풀과 같아서 그 날에 다 불타 없어진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면류관을 얻을 그 법도 율법이라고 여기며 그 법에서도 자유하라고 하실분 같습니다,,,, 님이 말씀의 권위를 어디까지 두고 어떻게 대하든지 그것은 님의 책임이지요,, 저는 여기까지 님과 대화하고 싶습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말이 통하지 않으니 그만하는 게 좋겠군요. 애초에 이 질문을 올린 의도부터가 의문이 듭니다.
다른 아무 의도 없습니다,, 저는 숭사리에 남아있는 이유가 복음과 교회진리를 전하는데 있기에 여자목사제도는 내가알고 있는 교회진리에 반하는 것이기에 질문드려 본것 뿐입니다..
정미현씨 생각말고 누구니님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그길님도 누구님에게서 듣고싶다고 하셨지요.
너무 장황한 글을 올려 주셨네요,, 정미현 님이 누구니 님이 시겠지요 ?? 글을 제대로 다 읽지 못하고 바울의 견해 부부만 두번 읽었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바울의 가르침이 잘 못됐다는 논리의 글 같았습니다,, 남녀의 차별은 당연히 없습니다,, 그렇지만 교회안에서 남녀의 역활과 질서가 있다는 가르침과,, 교회안에서는 여자의 머리를 덮음으로 그것은 여자의 머리인 남자를가리는것으로서 사람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며 오직 교회 안에서는 주님의 영광만 드러나게 해야 한다는 영적인 의미가 있는 바울의 가르침이 잘못됐다고 말씀하고 계시는거 같습니다,,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고 말하면서,, 우리는 종종 인간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거 같습니다,, 아래 누구니님의 글을 대하면서 바울의 마음을 참 잘 아시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정작 바울이 알기를 원하는 부분은 모르시고 계시고 바울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서 왜곡된 시선이 있는듯 하여 안타깝습니다,, 복음도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지만 인간의 생각이 들어가면 구원받을수 없듯이 교회 진리또한 인간의 생각이 들어가면 그때부터는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인간의 생각과 방법대로 주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인간의 영광만이 드러난 더이상 성령의 역사와 성령님의 임재를 느낄수 없는 그런 인간의 종교집단이 만들어 지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교회 서신서를 대부분 쓴 사람이 사도바울인데,, 그 바울의 가르침이 유대문화에 젖어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분별하는 분의 글을 읽고 있자니,, 계란으로 바위를 치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 씁쓸합니다,,
교회 안에서 자매들이 위치에서 해야 할일과 그 일들을 통해 주님께 영광을 돌릴수 있는 일들은 얼마든지 있는데,, 굳이 성경에서 분명하게 보여주지도 않고 오히려 교회안에서 여자의 말하는것과 남자를 주관하는것등 금하고 있는 부분을 모른척 하고 그 반대로 행하고 있는 여자 감독의 길이 정말 성경적인지는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인거 같습니다,, 말로만 성경으로 돌아가자 성경에 권위를 두자,, 주장할 것이 아니라 성경이 정말 그러한가,, 베뢰아 사람들 처럼 신사답게 성경을 상고하는 마음부터 우리가 갖는것이 더 중요한거 같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 (살후 2:15) 사도바울이 전한 유전을 지킴으로 칭찬하고 (고전11:2) 굳게 서서 말로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대로 유전을 지키라고 권면하고 있네요,,, 말씀에 권위를 두고 순종할줄 아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윗글이 누구니 님의 글이라면 매우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일일이 초대교회의 유전을 따라야 한다면 왜 지금 자매들은 머리에 두건을 쓰지 않습니까? 만날 때마다 입맞춤으로 안부는 왜 묻지 않나요? 자신의 소유를 전부 팔아 공동의 재산으로 해야 합니까? 지금은 율법의 시대가 아니라 은혜의 시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자유한 자들입니다. 유전이라는 이름으로 예수의 사랑보다 더 앞세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한낱 율법에 불과합니다. 딱 잘라 물어 봅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지도자로 여자가 서는 것을 반대하실까요?
모든것이 다 율법이라고 취급하는군요,, 왜 교회안에서 자매들이 사람의 영광을 가리는 두건을 쓰지않고 천사들을 교훈하는 권세 아래있는 표시를 머리에 두지 않는지 저도 궁금합니다,, 은혜시대이기에 거추장스러워 보이고 불편해 보이고 시대에 뒤떨어져 보이는 모든것이 다 율법이라고 취급하시는 분과는 대화가 어려울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주장하고 있는게 아니라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걸 아시기 바랍니다,,
글쎄요...저도 같은 성경을 읽고 있는데, 왜 제게는 다르게 말씀하실까요? 좀 빗나간 예같지만, 이단 지도자들도 다 성경에 그렇게 쓰여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성경을 보는 관점이 절대진리라는 생각은 가지면 안된다고 봅니다.
고린도 전서 11장을 다시 묵상해 보시고 스스로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록된 말씀이 진리이지 내가보는 성경관점이 진리는 아니지요,,^^
님은 님 방식대로 열심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제 방식대로 열심히 믿을테니.
저는 지금 여기가 숭사리인지 양XX마을인지 혼동이 옵니다. -,.- 여기는 칼빈주의자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저는 칼빈주의자가 아닙니다,, 양** 그 카페에서도 율법으로 토론하다 쫓겨난 자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요,, 인간적인 생각을 버리고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경의 가르침대로 따르자는게 제 주장이지요,^^
아마쿠사님 아래에 제가 답글로 올려 놓은 글을 보셨는지요 머리에 수건 써야 합니다 남자들이 머리에 쓴 모자를 벗었듯이....그리고 율법은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려는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 자체를 율법으로 보심은.... 그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어떻게 행하는게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겠습니까 율법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마10:41)
칼빈주의를 반대하는 근본주의 독립침례교회에서도 여자가 목사가 되거나 남자들을 가르치려고 하는 행위를 근절하고 있습니다.
여자목사는 자유주의에 대한 태동으로 말미암아 나온 것입니다. 물론 자유주의가 다 틀렸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성경에서 명백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큰 오산입니다. 그 당시의 풍습과 지금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교회 안에서의 질서를 지키는 문제는 풍습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여자가 목사가 되지 않는 것은 남자보다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허락된 질서의 문제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물론 이것이 여자가 교회에서 가르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여자도 분명히 교회에서 가르칠 수 있는 위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목사로서의
위치에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나이가 있고 경륜이 있는 자로서 교회에서 자라나는 후생들에게 권면하는 자로서 가르침을 줄 수 있다고 봅니다. 굳이 목사의 타이틀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여자가 남자보다 앞서야 한다거나 혹은 여자가 남자만큼 같은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여자목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성경에 한 아내의 남편이라고 언급되어 있는 것 뿐만 아니라 교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하신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오죽 남자들이 못났으면 여자들이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입장에 나설까 싶네요.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목사의 안수란 설교와 성만찬, 축도를 베풀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는 것이다"
본문에 언급된 위 주장은 절대로 동의할 수 없습니다.
설교와 축도, 성만찬은 목사에게만 주어지는 특별권한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행할 수 있는 권한입니다.
그리고 그길님이 지적한 바대로 성경은 여성 장로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질서이며 사도 바울은 그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여성의 권리가 신장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질서까지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남녀노소 종과 상전에 차별을 두지않고 동일한 위치에 두고있습니다.
눈. 코. 입. 귀... 이들중에 어떤것이 더 귀하고 클까요...
균형과 질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남녀노소 종과 상전 높고 낮음 크고 작음을 주신것은 균형과 질서로 세우신 창조의 법칙입니다.
이 세상은 지금 누가 더 크고 작으냐를 따지고 누가 더 높고 낮으냐를 따지느라 정신들이 없지요...
이는 아담의 타락이 가져다준 결과로 말미암아 초래된 하나님의 균형과 질서를 잃어버린 까닦이지요.
교회(회복)...교회는 아담안에서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균형과 질서를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되찾은 하나님의 균형과 질서로 통치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교회안에는 높고 낮음도 크고 작음도 없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안에서 균형과 질서로 새롭게 만들어진 하나된 몸뚱아리가 있을뿐이니다.
여성 목사... 아니됩니다
눈 코 입 귀 이 각 지체는 제 자리에 있을때 아름답지요.
눈이 있을 곳에 귀가 있고 귀가 있을 곳에 눈이 있는 얼굴을 상상해 보세요...아찔합니다.
교회를 아찔하게 만들려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희생을 치루시고 되찾은 균형과 질서인데...왜들 그러시는지
세상은 균형과 질서가 깨진 모습을 하고 있어서 저리도 징그러운 모습을 가지고 있는 반면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균형과 질서가 바로 잡혀있기 때문아닐까요..
제가 위에서 드린 질문들에 대한 답변들이 없으시네요. 윗글과 같은 생각을 가지신 회원들이 얼마나 되시는지 모르겠지만 견해의 차이 정도로 볼수만은 없는 문제로 생각됩니다. 성경을 오려내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지요. 순서는 이렇습니다. 여자 목사 인정한 후에는 동성애 목사도 인정합니다. 21세기 사회,문화적 상황(정황)에도 적용되는 그리스도의 차별없는 사랑의 '정신'으로 말이죠. 그런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복받은' 나라 미국에서 말이죠.
주의 군사님, 여자 목사 인정하는 거 하고 동성애 목사 인정하는 건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지나친 연결이라 봅니다.
미국의 사례를 보시면서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미국은 처음부터 동성애목사 인정했답니까...
동성애는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죄이므로 동성애자가 목사가 되는 건 반성경적임이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자가 목사가 되는 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습니까? 이런 경우에 성경해석을 문자적으로만 해버리면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진짜로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걸 문자적으로 받지 않고, 엉뚱한 걸 가지고 문자적 해석에 목매면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동성애가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죄인데 사람들이 죄로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죠.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성경에 대한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입니다. 여자가 목사가 되는 문제는 질서의 문제이기는 하나 이것을 사람의 생각으로 무시하고 재단하게 된다면 죄가 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말씀하신 문자적 해석에 관한 문제는 이곳에서 다룰수 없을 것 같고 이참에 토론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부분에서 헷갈려 하시고 논지도 뒤죽박죽인 경우가 많아서 말이지요. 숭사리에 많은 유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신약성경을 보는 관점이 약간 다를 수 있는데, 신약성경에는 구원이나 죄 같은 영원한 진리가 있는가 하면,
여자가 머리에 너울을 쓰는 문제와 같은 시대적인, 또는 문화적인 관점에서 해석해야 할 권면도 있는 것입니다.
종들에 관한 권면도 그 당시 신분적인 시대 상황에 따른 권면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그 말씀을 완전 무시하는 건 아닙니다. 종들에게 주신 권면도 오늘날의 상황에서 재해석하면 유익한 권면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의 여성 침묵 명령이나 남자를 가르치는 것을 금지한 것도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동등하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창조의 질서라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남자가 여자같이 되거나 여자가 남자같이 되는 건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십니다. 여성은 여성으로서, 남성은 남성으로서 교회 안에서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역할이 그저 배우고 침묵하고 기도하고 봉사하는 역할만으로 끝나는 건 아닙니다. 여성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가르치는 은사가 있으면 가르치는 직분을 받는 것이 교회를 위해 유익합니다. 단,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거스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부드럽고 온유하게 여성적인 목회를 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여자가 남자들을 주관하려 한다면, 창조질서에 맞지 않는 것이겠지요.
여성 사역자들이 여성으로서의 창조질서를 거스리면서 남자들 위에 군림하거나 남자들을 주관하려 한다면 아마도 생각있는 여성 성도들조차도 눈살을 찌푸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남종들과 여종들에게 공평하게 임하신다는 요엘서와 사도행전의 말씀은 여성들에게도 봉사 사역 뿐 아니라 예언(가르치는) 사역이 주어졌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여성들의 덕이 되지 않는 문제로 교회 안에서 침묵을 권면한 것은 일면 오늘날에도 타당하지만, 그 당시의 여성의 낮은 사회적 지위를 고려해야 보다 더 확실히 이해될 수 있는 권면입니다. 교회 내에서의 여성 침묵 명령을 오늘날에까지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본래의 뜻을 오도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에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을 오늘날까지도 문자 그대로 해석해 버리면 숭사리 카페 내에서도 마찬가지로 문자적으로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도 성도들의 모임(일종의 교회)이니까! 자매님들은 가르치지 말고 무조건 잠잠하라고 말입니다.ㅋㅋ
천사들을 교훈하는 것도 그 당시 시대적 배경입니까? 지금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에 순종하여 질서있게 하나님앞에 예배드리는것을 통하여 천사들을 교훈할 필요가 없는 시대인가요? 지금시대 그리스도인들은 천사들과 무관한가요,,?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영적인 예배가 아니던가요, ,하긴 교파의 예배는 인간을 향해 있고 인간이 중심인 경향이 많으니 그렇게 분별할수도 있겠군요,,
고린도의 여인 하면 매춘부를 떠올릴만큼 그당시 고린도는 성적으로 많이 타락한 도시였다고 하더군요,, 이 성적타락이 고린도 교회안에도 들어왔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고전도에 보낸 서신서는 고린도 교회에게만 보닌것이 아니라,, 고전1장2절에 보면 고린도 교회와 또 각처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자에게 보내는 글이라라고 분명하게 적혀 있습니다,, 성적으로 타락한 고린도 교회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라는걸 아시기 바랍니다,, 어린양 목사님 그만 가르치고 싶은데,, 자꾸 가르치게 만드시는군요,, ㅎㅎㅎㅎ
그길 자매님께서도 자기 견해를 당당하게 말하고 가르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성미는 잃어버리지 마세요..ㅎㅎ 그리고 앞으로 목사라는 칭호는 붙이지 마시고요...형제님이나 그냥 어린양님으로 불러 주세요.^^
커다란 둑을 무너뜨리는 것은 작은 구멍부터 시작되지요,, 말씀의 가르침에서 하나둘 벗어나 인간의 생각이 들어가기 시작하면 동성애 목사는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을 누가 장답하겠습니까,, ? 지금은 아니라 말하고 싶지만 세월이 가면 그 또한 장담할수 없는 문제지요,, 그리고 신약교회 진리에 눈이 떠지면 목사라는 호칭도 부담스러울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한분 주님이시고 모든 거듭난 성도는 왕같은 제사장이며 우리는 다 형제이기 때문이지요,, 다음부터는 목사라는 호칭 부르지 않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