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어가면서 심해지는 것은 나를 속이는 게 익숙해 진다.
'나는 아직은 괜찮아' 하며 몸[건강]을 속이려 하고, '내가 옳고 자네는 틀렸어' 하며 마음을 속이려 하니 옹고집이 늘어간다.
나를 속이지 말라. 나이를 먹어갈수록 반추해야겠지.
타인의 글을 올리고 비판할 때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이 작업이 우리에게 이익일 있을까?.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익보다 개인을 모독하려하거나 자기 변명이 우선이라면 아까운 시간과 지면을 활용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것이 때문이기에.
닉을 약간 변경시켰다.
남 : 교리적으로 고를 멸해 열반을 성취한다고 하는데, 고의 실상이 무엇입니까? /
나 : 고를 멸해 열반을 성취한다는 것은 일반 불자들이 저지르는 일상적인 오류다.
그러니 일반적으로 말을 할 때는 그냥 지나치게 되지만.. 이곳처럼 불교를 보다 깊이 알고자 하는 이들이 모인 곳에서는 주의해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곧 고멸은 열반의 다른 말이다. 열반이 곧 고멸이라는 것.
그러나 문장을 보면 고와 열반을 따로 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멸과 열반을 다른 것으로 보면.. 열반은 고멸이 아닌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고멸이 바로 열반이다.
그러나 봄은 고, 열반을 다른 것으로 보면서,, 더 나아가 고의 실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실상(實相)이란 불교 안에서 언어가 적멸한 부처님만이 궁구한 자리라 하니
봄이나 나는 접하지 못한 알 수 없는 곳이 아닌가..
거기다 토끼 뿔 하나 더 얹어 "고의 실상"이 무엇이냐?..
그렇게 물어?.. 그것도 본인은 이미 알고 있는 듯한 자리를 깔고??..
저 질문 하나만 보아도 그의 어리석음과 잘 모름이 섞인 잘못된 질문임이 그냥 보인다.
그러기에 저와 같은이 잘못된 질문으로 보이면 답을 꺼린다.
답은 또 다른 어리석음으로 들어가기 십상이니..
해서 무시하니..
그는 당장에 당신이 모르니까 답을 하지 않는다고 아우성이다
지가 얼마나 대단한 자라고.. 자기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으면 모르니까 대답을 안한다고 단정하지?..
웃기는 깡통이다.
해서 계속 이렇게 깐죽하며 질문을 한다.
남 : 고의 실상도 모르고, 고를 멸하는것도 모르고 구경열반을 논할수 있겠습니까?? /
나 : 실상은 부처님만이 알 수 있는 것임을 안다면 부처님인 자식인 불자(佛子)에게 묻는 게 가당한가?.. 봄의 천방지축이 하늘을 찌른다.
그러나 고가 무엇인지는.. 고성제에서 설명하듯 4고, 8고를 따라 깊이 새기면서 이해하고 있다.
4성제는 대부분의 불자들이 알고 있는 고요, 고집과 고멸인데..
도대체 봄이 말하는 '고의 실상도 모른다'는 것은 무엇이 기준일까?
자기 오만이 점점 기승을 부린다.
더욱 문제인 것은 구경은 빼고라도 열반과 고멸을 다른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그는 참선을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참선만 잘하면 열반을 성취할까?..
아함불자라고 스스로 칭하는 나의 눈으로는 절대 불가라 하겠다.
계를 제대로 지키지 않고, 반야를 배우고 익히지 않는 참선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세존께서 수행 방법으로 지관(止觀)을 제자에게 가르치셨다.
지(止)는 참선인 선정이다.
관(觀)은 무엇인가?.. 화두나 공안을 관하는 것인가?..
엄밀히 말해 공안은 지(止)인 삼마디를 닦는 것으로 관이라 할 수 없다.
관의 핵심은 반야를 관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런 즉 <아함경>에 나오는 내용인 지혜를 관찰하는 게 관이라는 위빠사나다.
이리 말하면 혹자는 좌선하면서 사량분별이 관이란 말야?.. 할 것 같은데..
불제자란 한적한 곳에서 자리를 깔고 앉아 마음을 고요히 하고[삼마디].. 부처님 가르침(반야)를 사유하여[위빠사나]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자. 경을 보면 그렇게 사유하다 의심이 생기면 세존께 나아가 의심을 여쭙고 세존의 답을 듣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봄이 나에게 질문하는 마음을 들여다 보면..
불자라는 연대감보다는 적대감으로 깔봄이 곳곳에 드러난다.
왜 저럴까?..
당연히 나의 언행이 그를 도발했겠지. 나의 어리석음으로 인정한다.
그런데 그에 못지 않은 원인은 소위 참선을 한다는 자들은
자기 공부가 최선이라는 자부와
교학을 하는 자들을 무시하려는 풍토에 푸욱 젖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말은 공손한 척 마음은 시커멓다.
시꺼먼 마음으로 보고 댓글을 올리니 어떤 내용이 나오는지.. 삼척동자도 아는 거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올리는 글을 찬찬히 보라고 강조한다.
간단히 말해 욕을으로 도배해놓고 천천히 음미하면서 보시요 하는 것이지 않은가.
봄, 댁은 그렇게 하는지 몰라도 나는 그리 안한다.
길어지니 여기서 끊내기로 하..
이것을 살펴보자..
남 : @주나효진<세간은 물질에 의지한다>는 님의 말에 실소를 금치 못했는데...그 한마디가 얼마나 아함에 문외한인지를 스스로 증명하였지요.
아함은 부처님 근본경전으로 통칭되므로 아함불자의 눈이라 함은 부처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님이 말한게 부처의 입장인가요?
아함경이 부처님의 말씀이라면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라 할수 있습니다.
이게 다르면 되겠습니까? 아함이던 대승이던 교리던 선종이던 말과 방법이 다를뿐 불법의 적적대의는 호리의 차이도 없습니다.
아함과 선종이 다르고 대승이 다르다면 부처님이 잘못된겁니다.
그것이 아니면 부처님 욕보이는 짓이죠./
나 : '세간은 물질에 의지한다'는 말은 내가 만든 말이라 하겠다. 세존께서도 그렇게 가르치셨는지 모르지만..
이 때 물질은 3계인 욕계와 색계, 무색계에서 욕계와 색계를 염두에 두고 있다.
세존께서 물질은 4대가 화합해 있는 것으로 설명하셨다. 색계란 그런 4대로 이루어진 것에 집잡하고 있는 세계를 말한다.
특히 <심경>을 말하면서 공을 에너지에 색등 5온을 물질 m에 비유한 것을 기억하는지?..
세간은 에너지가 아닌 물질 세계에 의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아함에 무지한 것인지?..
우리는 자신의 경향에 따라 아함불자라 하듯이 반야불자, 화엄불자, 참선불자라 이름할 수 있다.
그 말을 보면 그가 무엇을 좋아하고 따르는지 알 수 있다.
그들 각자는 모두 부처를 따르는 제자들이다.
그런데 아함불자만이 유독 부처님을 대변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함불자가 아니면 아무렇게 행동해도 괜찮다는 건 아니겠지?..
내가 말하는 것은 내가 본 <아함경>이요, <반야심경>이다.
나는 부처님을, 불교를 욕보이지 않고 지금보다 잘되기를 바라며 노력한다.
내가 말하는 게 부처님의 입장?..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남님의 말의 오류가 너무 심해 대답하기가 거북스럽다.
<경>은 부처님 말이요, 선은 부처님 마음이라는 말은 나 역시 듣고 있던 것으로 가끔 사용하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저 말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 의심한다.
석가 부처님 말씀이 <경>이라면.. 경 안에 석가 부처님 마음이 모두 포함되어 있어야지. 경을 떠나 어디에 석가 부처님 마음이 있을 수 있는가? 경 따로 마음 따로인가??..
선이 부처님 마음이라면 그런 선은 경 안에 있다는 것. 그러니 경 밖에서 구하는 것은 삼가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불립문자응 강조하는 간화선은 잘못이라는 건가?..
아니다.
지관 수행에서 지를 행할 때 반야는 필요없다 오직 산란한 마음을 평정으로 돌이키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다만 그것은 간단하지 않아 9차제정으로 정리하셨다.
9차제정의 마지막인 멸진정은 보는 자와 보이는 색이 멸한 곧 12처가 멸한 상태라 한다.
그런 상태가 되어 12연기법을 관하면 명명백백이 빈틈없이 통찰되어 더 이상 의심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열반=고멸]
그리 아는 것은 부처님 자리에 이르렀을 때 얘기다.
그렇지 못한 수준인 불자들에게 "모든 불교의 대의는 호리의 차이도 없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호리의 차이가 없음을 볼 때까지 용맹정진하는 게 지금 할 일이지..
경험도 하지 못한 것을 마치 지가 깨달은 것처럼 차이가 없다고 하는 게 나에게나 너에게나 의미가 있어?..
만법귀일이라 하는데.. 그것은 부처 자리에서 보는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하나 하나 확인해 가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만법귀일이니.. 하고 말을 시작하는 것은
쥐뿔이 하는 짓.
자신을 속이지 말라.
[심연생]의 핵심은 나와 남 모두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것
우리는 거울을 보고 말하는 게 된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성불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