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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과가 취업 안되면 디지탈미디어학과 나오면 취업 시켜 준데? 웃기지 마쇼! 2005/07/10 10:33 | 추천 0 스크랩 0 |
'국문과'에서 '디지탈미디어학'되면 장사가 되나? 대한민국주의를 싫어하는 권력자 눈치보는게지.
[조선일보]의 변절을 지적하면 [조선일보]에 대한 명예훼손일까?
조선닷컴 메인 화면에 100자평 논객이 너무나 싫어서 염증 갖게 하는 연합뉴스 기사가 몇 건 올라 있다. 박근혜대표에 대해서 온건한 입장으로 뽑은 제목도, 곧 한나라당 지지자가 정 떨어지는 감성주의로 제목이 바뀐 것을 확인한다. '변절'에 대해서 흥분하면서 제 정신 갖기를 바라는 것은, 미련한 집착일까?
국어국문학과에서 아주 쉽게 학과를 바꾸는 이들이 많음은 안다.
그러나, 뒤집어서 학과를 안 바꾸고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임은 숨겨지고 있다. 이는 미국의 영문학과 사례를 봐도 알 수 있다. 미국은 미국문학을 다루는 학과목을 고치지 않고도, 얼마든지 새로운 추세를 다룰 수 있다. 디지털 미디어학이란 이름을 앞세운 것은 카이스트에서 직장을 가졌던 최혜실교수가 원조로 안다. 그러나, 최혜실교수의 생각은 참을 수 없는 철학적 빈곤이다. 한 편에서는 '디지탈미디어학'을 말하면서, 한 편에서는 미국의 영문학과의 (탈)구조주의 차원에 맞는 개편에 걸맞는 사상이 아닌 '루카치'시대의 리얼리즘 독법을 보인다.
[조선일보]가 좋아하는 김윤식교수는 오래전부터 6.15 선언에 걸맞는 이념적 궤적을 학술화하였던 이이다. 그리고, 최혜실교수는 김윤식교수에 가장 가깝게 영향을 받은 이로 추정되는데(당사자는 너무 기뻐할 것이며, 조선일보를 장기간 좌파가 악용했다는 점에서 조선일보 독자를 향해서는 아닌 척 조금 할듯?), 김윤식교수가 기고하며 중심좌장대접을 받는 문예지마다의 최교수의 위치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참고 자료일 것이며 이러한 바탕에서 논리의 불순성을 지적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기자 조갑제씨의 사상을 (앵무새처럼?) 복제 하는 소설가이면서도 강준만교수의 논문 분석으로는 마르크스주의 궤적을 늘 유지하는 류철균교수도 김윤식교수의 제자가 분명하다.
하나의 작품을 읽을 때에 문학으로 읽는 것과 텍스트로 읽는 것은 엄청나게 다르다. 소설 텍스트에서 영화를 거쳐서 게임을 거쳐 지나갈 수 있다. [임진왜란] 소설 붙잡고 스타크를 이야기할 수 있고, 그 절충선에서 음악도 이야기할 수 있고 미술을 이야기할 수 있다.
학문은 건축술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정교한 건축술은 학문적 논문쓰기의 표범으로 아직도 전세계를 압도하고 있다. 그런데, 인터넷을 말하면 인터넷학, 문화콘텐츠를 말한다고 문화콘텐츠학, 이란 학과명은 과연 가능한 것일까? 몽고를 말하면 몽고주의, 흉노를 말하면 흉노주의. 조금 더 나아가면 '사실'을 말하면 '사실주의', '초현실'을 말하면 '초현실주의' '만사마'를 말하면 '만사마주의'가 되는 식의, 적확한 1970년대식 사고관이며 1930년대 후반에서 1940년대 출생 세대 특유의 강도높은 왜색적 사고관이 근저에 있으며, 결국은 사회현실은 포드주의나 테일러주의 같은 분업화 밖에 없다는 식이다. 강도 높은 왜색논리에 빠진 이들의 특기는, 세상이 다 바뀌었다고 주장하면서 자기 말 듣지 않으면 다 망할 것이다(이러한 세계관을 젊은 세대들이 알기에 가장 좋게 표현한 이는 '화상고'의 '다 죽여 버리겠다. 허이짜~!'하는 것이다.)란 논리를 자주 쓰는 데, 실제로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다.
똥을 앞에 싸놓으면 앞에 똥은 문들어질 뿐 절대로 딴 데로 안 간다는, 노래 [세상은 요지경]이 나왔던 원곡의 시대에 있었던 시정의 농담조는, 오늘의 진실을 말해준다. 이것과 동전의 양면으로 과거에 있었던 감정은, [한비자]에서 기록된 '문들어지면서 존재하는 앞의 똥은 치워도 된다'는 식의 표현을 신뢰한 군인정치인이었을 것이다.
말하는 김에 조금 더 하자. '국어국문학과'학과목을 유지하면서도 얼마든지 운신의 폭이 자유로울 수도 있는 게 정상적인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대통령을 띄우는 언론인이 결국은 박대통령과 무관하게 좌익적인 자신의 세계관을 짚어넣어 왜곡하고, 박정희대통령 연구를 자기의 이익과 권리를 위해서 사용하듯, 김동리 선생의 문학적 테제를 절대적 성경으로 고집하여 절대적 권력을 확보하는 문학권력자가 분명히 존재한다. 언뜻 보면 이렇게 결사적이면 좌익담론의 국문학 침투에 결사저항적이어야 하겠지만, 문학권력자 노장 세대의 퇴출이 막아지거나 해당 집단의 이익이 보장되는 선에서, 좌익에 문호를 활짝 열어준지가 꽤 오래되었다.
대학생들은 한 학기 강좌에서 나온 학점으로 인문학에서 대단한 것을 배웠다고 자부하며 취업의 길을 열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최혜실교수의 수준으로 짐작해보는 한국의 디지털 미디어 학은 배우나 안 배우나 똑같은 것과 같다. 수요자 중심의 교육학으로서 학생들 구미에 맞추되, 교양강좌 차원에서 교양의 증진으로 바람직한 사회인이 되도록 하는 일반강좌일 것이다. 최혜실교수가 원조급인데 이하 영향 집단의 그 분야 글쓰기는 말할 것도 없다. 그저, 피상적으로 1970년대식 사유로 이론을 가지고 도구적으로 몇 개 끄적거리고 알았다고 할 뿐이며, 건축적으로 자신의 사유를 일관되게 발전하는 일은 없다.
결국, 조선일보(조선닷컴)은 '대한민국정신'을 살리는 방향성을 강조하지못하도록 하는 좌파정치에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결론이 가능하다. 교육여건이 안 좋은 대학일수록 대학은 학생들의 욕구에 휘둘리기 쉽고, 학생들의 욕구는 이전 시대 패러다임을 가진 부모들의 욕구의 반영이 되기 쉬우나, 정론을 펼쳐야 할 신문이 이렇게 (막말로) 얼빵하다면, 조선일보 광고의 '할말은 하는 신문'이란 말을 어떻게 믿겠는가?
마지막으로 류철균교수의 주장을 인용한 부분에 대해서, 정말 문제를 지적하고 싶어진다. 도서관에서 남북공동연구로 스탈린의 마르 언어학을 어쩌고 하는 책을 보았으며, 어느 출판사에서 영인된 북한책은 김일성 김정일이 언어학도 어쨌네 하는 내용으로, 아마도 대학원생들의 학술논문을 겨냥한 듯 제시되어 있다. 국어국문학이 조갑제기자사이트에서 제시한 통계수치로 세계 11위의 경제권이어서 가능성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된다는 식의 얼버무림은 본질을 가린다. 서울방송 [야심만만]의 배너광고조차 한반도기를 넣었다 뺐다 북한의 눈치를 강하게 보고 있으며, 별 볼일 없는 대학교는 교육여건이 추락하여 좌파정치의 입김에 가장 쉽게 휘말리며, 별 볼일 없는 대학교부터 부모와 속세의 여론에 세뇌된 대학생들의 요구가 강한 게 현실이다. 그러한 속에서 '최혜실교수'와 '류철균교수'등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출신의 그 분야 연구자나, '최유찬교수'등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출신의 그 분야 연구자들의 글쓰기는 학문적 체계성과 거리가 멀면서도, 대학 서열주의를 좋아하는 이들의 보호속에서 비정상적으로 양육되어 온 것이다.
최혜실교수와 류철균교수와 최유찬교수의 그 분야 글쓰기가 학문이 아니다, 란 근거자료로는 '스콜스'란 문학이론가의 번역서들을 예로 들고 싶다. 한양대 국어국문학과의 디지털분야 인식은 서울대 국문과 연세대 국문과의 인식보다도 훨씬 덜 학문적이다. 그러나, 학문이 아니어도 정치적 이유와 학부모의 계산착오가 만나면, 학과 개설은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정말로 묻고 싶다. 국문과 나와야 소설 쓰나? 국문과 나와야 소설가 되는 게 거짓말이면, 그 학과 나와도 별 볼일 없는 게 사실이다. 이 명명백백한 사실을 모르면서도, 좌파 국문학자들에 휘둘리는 학부모와 서울대 국문과면 넉나가게 편들어주는 [조선일보]는 깨우쳐야 한다.
문제의 본질은 시대에 걸맞는 문학인식재편과 대한민국주의의 세대전승적 양상을 포기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이다.
6.25전쟁의 이야기가 우파쪽에서는 세대에 걸맞게 다음 세대 수준으로, <이전 재건축>이 안되고 좌파만 되었듯이, 순수문학쪽에 줄서서 밥그릇 챙긴 사람들이 좌파에 문호를 열어두면서, <노인세대=우파= 유사 트로트장르> 비슷하게 권력을 유지하려는 밥맛 떨어지는 책략 때문일 것이다. 최혜실교수가 한편에서는 전통문학시대의 어법을 유지하며 한편에서는 피상적으로 학문미달의 구조주의 적용을 하는 이유는, 권력적 배경으로서 트로트 수준으로의 노년만의 향유물로 그치게 하면서도 변화를 거부하는 특정 세대의 존재와 좌파에의 타협이 있는 것이다. http://www.chosun.com/national/news/200507/20050708027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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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따위 얄팍한 속임수에 얼마나 잘 속는지를 보았기에,
거짓말 못하고 솔직하게 직언하는 성격에,
또 절필의 의지는 무너졌다.
밥벌이 되는 어문학과 방향은 중요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조선일보의 이러한 기사 쓰기는 재고되어야 한다.
국문과에서 전공을 멀리하면서도 밥벌이에 나서는 이들에 마음의 고향으로서 변신하면서도 남아잇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최혜실교수가 한편에서는 루카치 시대 문학론 적고 한편에서는 구조주의 시대 문학론을 적는것에 '학문이 아니다'라고 표현했다. 혹자는 명예훼손이라고 보겠으나, 나는 최혜실교수가 국문과의 대학 서열주의를 악용하여 검증을 덜 받는 '부당이익'을 지키고 있다는 주장이다. 학문적 논리상으로 그러한 표현을 지키고서도 학문이랄 수 없는 것이다. 순수문학지키는 할아버지들의 무사려함이 방패막이로 자주 작용되어왔는데, 그러한 방패막이는 별개로 생각해보자. 학문이 되고 문학연구가 있는 것이다.
첫댓글 '유비쿼터스'란 말이 가능할 정도로 어디에나 있을 컴퓨터나 영상시대라 불리어질 어디에나 있을 부분이, 어떻게 이익이 되는 상품이 될 것인가? 어디에서나 쓰임새가 있는 내용이면, 사실 취업부분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내용일 것이다. 소설과 시만 읽고서 학문적 건축술인 철학과 사회과학을 안 본 사람만 가능
한 착각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이러한 말도 안되는 내용이, 정치적 논리로 많이 허락된다. 나를 찬 여자(국어국문학)에 대한 충성감도 이만하면 '병'의 수준으로, 내가 답답하다. 내 앞에 주어진 길을 바로 걸어가야 겠다. 제발! 제발!!!
님의 글은 너무 어려워....
꼭, '급'단위의 소감문으로 발자국을 남기고 싶으십니까? 좌파 국문학 출판사인 소명출판에서 나온 최혜실교수의 저작에 대해서, 촌평으로 비평했음을 모르면 모를 수 밖에 없게 썼습니다. 님이 모른다고 이 곳에 님 이하수준만 있다는 전제는 부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