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것은 들음 하나로서도 무한한 감동을 선사한다. 우리가 잘 아는 G 선상의 아리아. 음악평론가 박용구 선생은 ‘음악과 인생’이라는 수필을 통해 한 젊은이에게 들은 이야기를 소재로 음악의 위대함을 널리 알렸다. 6.25전란중인 1.4후퇴 때 남쪽으로 가는 피난열차는 초조와 불안, 인간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생과 지옥의 갈림길이었다. 조금 가다가 덜커덩하고 멈추기를 반복하는 암흑의 화물차간은 고성과 폭력이 오가는 무법천지로 총은 없으나 살벌하기가 전쟁터 못지않았다. 그 때 한 젊은이가 말없이 가방에서 축음기를 꺼내 레코드판을 올리고 바늘을 얹는다.
고아(高雅)하고 잔잔한 바이올린의 선율이 극한의 대립으로 아수라장이 된 화차의 공간에 울려 퍼지자 하늘도 땅도 사람도 숨을 죽인다. 그 고요를 타고 잔잔하게 흐르는 축음기의 가냘픈 선율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선명해지면서 살벌해진 인간의 야성에, 이성의 진정제를 투여한다. 오직 신만이 울릴 줄 알았던 영혼의 소리가 음악이라는 도구를 통해 모든 이들을 절망으로부터 구하고 경건하게 만든다. 서양음악이라곤 생전 처음 접해보는 시골 노인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 곡을 한번만 더 듣게 해 달라고 애원을 하였다. 그 곡이 바로 ‘G 선상의 아리아’였다.
이렇듯 영혼의 소리가 내 가슴에 닿아 충실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나는 음악을 들으며 곧잘 글을 쓰곤 한다. 음악은 가히 영혼이 교감하는 숨소리를 자아낸다. 이에 전혀 이의가 없다. 하지만 깜뭇 찰나의 순간 감성을 자극하는 엷은 미색의 것도 있다 여긴다. 박완서의 수필 제목 ‘노을이 아름다운 까닭’ 이라든지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 이라는 소설집 제목은 단 몇 글자로 못지않은 사생의 느낌과 세월 상상을 사색에 곁들여 역력히 제공해준다.
그러기에 나는 노을이 아름다운 까닭은 작가 말에 그대로 순응하여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까닭은 그 집착 없음 때문이다. 인간사의 덧없음과, 사람이 죽을 때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알 것 같다. 아아, 그러나 너무도 지엄한 분부, 그리하여 알아듣고 싶어하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다>라고 읊조리곤 한다. 단지 몇 단어일 뿐인데 그가 파생한 파문들에 사로잡힐 때가 종종 있다. 나에게 '마당 깊은 집'이 또한 꼭 그러했다. 친구 집은 왜정시대 때 지은 붉은 색 벽돌의 금성방직 (안양 소재)건물의 안 쪽 깊숙이 자리한 적산가옥이었다. 길고 긴 울타리를 따라 소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대문을 지나서도 그 길을 한참을 따라 들어가야 친구 집이 나타났다. 친구 집은 마당도 깊었지만 집안 내부도 미로처럼 굽이굽이 돌아야 친구의 방을 찾을 수 있는 특별한 가옥구조를 지녔었다. 친구의 아지트였던 창고에 가는데도 또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어쩌다 저녁 늦은 시간까지 있다 나오면 친구네 마당 깊은 집에는 밤하늘이 가득 차 있었다. 별들도 눈부시게 반짝이던 나의 소중한 유년시절. 나는 그 집을 생각하면 지금도 박경리 장편소설“김 약국의 딸들”이 겹쳐 떠오르곤 한다. 친구 집은 누나들이 많았었다. 6.25전후를 그린 자전적 소설.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 읽기도 전 그 시대가 주는 어느 의미를 나는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다. 친구네 적산가옥의 이끼 낀 뜨락의 그 느낌처럼.
어느 좋은 시대를 만나선 부를 상징하고 푸르름이 깊은 고요한 정원을 그렸을 테지만 광풍의 시대엔 말로 내 뱉을 수조차 없는 깊은 슬픔이 간직된 침묵의 언어로 자리할 것 같은 불길함이 엄습하고 만다. 굳이 부귀영화에 흥망성쇠를 말하지 않더라도 가난으로서도 마당이 깊었던 유년시절이 절로 떠오르는 자우룩한 골안개에 갇힌 '마당 깊은 집'. 시각적인 이 한마디는 깊은 마당만큼이나 감추어진 많은 내력과 곡절이 담겨 을 것 같은 어둑한 생각을 깊이 낳는다.. 아마도 이에는 황당무계한 세월 속에서 어느 부귀영화도 갖은 풍상을 견디며 겨우 살 수 밖에는 없었다는 잦은 경험으로부터 얻은 소산이 꽤 많아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나 역시도 안타까움에 그런 삶이 어디 그 친구 집 뿐이랴 하곤 했었다. 맞다. 그 어느 것도 세월은 온전히 놔두지 않았다. 이 나이쯤은 그 누구라도 자기만의 '마당 깊은 집' 하나는 가슴에 간직하고 있지 않을까. 나에게도 역시 '마당 깊은 집'이 따로 있다 싶고 판자담의 틈새로 들여다본 또 다른 마당 깊은 이유도 이제는 제법 알 것도 같다. 노을이 아름다운 까닭과도 같이 세상을 평정한 세월이 그렇게 저마다의 깊은 마당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지 모르겠는데 90년대에 TV드라마로도 선을 보였던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은 6.25 직후 대구의 약전 골목에 위치한 어느 마당 깊은 집에 올망졸망 모여 살게 된 여섯 가구 스물 두 명의 인물들에 얽힌 사연을 어린 소년 길남이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그들이 살던 대구 중구 장관동의 마당깊은 집, 그 오죽잖은 실 모습은 이러했다.
<마당 깊은 집 안채 사람들은 늘 닫혀 있는 솟을 대문을 이용하지 않고 김천 댁 가게를 통해 간이부엌을 거치는 쪽문으로 바깥출입을 했다. 오직 주인아저씨와 주인아주머니만이 그 육중한 솟을대문 빗장을 열고 돌쩌귀 삐걱이는 대문을 활짝 밀어붙이며 당당하게 외출했다. 그 솟을 대문 문단속 책임은 김천댁이 맡았기에 그네를 대갓집 청지기라 불러 마땅했다. 바깥마당과 안마당 사이에는 하늘색 페인트칠이 허물을 벗어 얼룩이 진 중문이 있었다. 미닫이로 여닫는 지붕 없는 그 문은 안채 사람들 중 가장 늦게 귀가하는 주인아저씨나 야간 상업학교에 다니는 경기댁 딸 미선이 누나가 닫을 때까지 늘 열어두고 있었다.
고색창연한 솟을대문에 비해 격에 맞지 않는 그 중문으로 들어서면 다섯 층계의 돌계단 아래 땅이 우묵하게 꺼진 쉰 평 정도 너른 안마당이 나섰다. 선례누나 뒤를 따라 잔뜩 주눅이 든 채 내가 그 집 안마당으로 옷보퉁이를 끼고 처음 들어섰을 때 옆집과 경계를 이룬 흙담 가장자리 수채를 겸한 개골창에는 벌써 잡초가 수북이 자라 있었다. 그 개골창은 중문 층계 아래 판자때기로 지은 변소에서 시작되어 언제나 퀴퀴한 냄새를 풍겼다. 마당 한 가운데는 작은 연못이 있었고 연못 주위로 청석을 얹어 ?치를 낸 화단이 꾸며져 있었다. 봉극하게 솟은 화단이 갖가지 나무와 화초가 위채와 아래채를 웬만큼 가려주었다. >
아삼아삼 눈에 떠오를 것만 같은 더부살이 셋방, 이에 익숙한 것은 당시 도회지라면 어디든 이런 진풍경을 연출하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게 무슨 가난의 전령 내지 전통이나 되는 것인지 훗날 아니 지금까지도 어느 동네에서는 깨복쟁이 마냥 헐벗은 채 산 등성이까지도 다닥다닥 거북등마냥 치어올라 펼쳐져 있다. 하지만 대개는 신식으로 변모한 것 또한 사실이다. 언젠가 대구 장관동을 다녀 온 적이 있다. 그 마당 깊은 집은 지금은 한옥국시라는 식당이 영업을 하고 있으며약전골목과 대구 종로거리 곳곳에 등장인물 동상과 그림들이 자리잡고 있어 애틋함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뿐이랴, 장관동은 아파트 집성촌이 통째로 형성되어 세월의 무상함을 방불하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장관동을 찾게 된 것은 마당 깊은 집의 옛 형상이 아니라 그 마당 깊은 아픈 내력 속에 펼쳐진 6가구의 인간애 적 연줄이 여전히 그립고 내처 달콤하다 여겨서 일 것이다.
'마당 깊은 집'에 온존하는 것은 상실감이다. 전쟁이 야기하는, 불가피한 삶의 모습으로서, 문화적 가치가 끼어들 수 없는 어두운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어두운 공간이라고 말했지만, '마당깊은 집'이 노상 어두운 것만은 아니었다. 밝지는 않았지만 그 집에는 따뜻한 온기가 숨어있었다. 갈등을 일으키면서도 도와가는 피난민들의 훈기, 폐쇄된 공기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몸부림이 있었으며, 작은 에로티시즘을 바라보는 애정어린 시선도 있었다. 결코 마멸되거나 쇠퇴하지 않는 인간성의 깊이, 길남을 신문팔이에서 신문배달 소년으로 끌어주고, 그에게 따뜻한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소년 한주의 존재는 이 소설에서 보석처럼 빛났다.
<“보장하구 말구요. 제 말만 듣고 길남이를 한번 믿어 보세요.”한주가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는 우리 집에 와본 적도 없었고, 사실 나에 대해 아는 것이 별 없었다. 그런데 무엇을 믿고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으나 그 말은 마치 따뜻한 물처럼 내 마음을 덥혀주었다.>
불현듯 오늘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이 다시 보고 싶어지는 것은 왜일까. 자금 세상에선 자의식은 출중하되 동화됨 없는 위기로 무성의하며 무력하기 그지없다. 이들 의식은 언제나 소외된 궁핍한 초라함이었지만 무의식적으로 동화되며 상실을 채우는 한 식구 한마음을 형성하였다. 아직도 달동네에선 이런 선심이 삶의 근본처럼 여생하고 있다. 혼집 혼밥 혼술이 아무렇지 않게 성행하는 이 사회, 이 세상은 각기 독립적이지만 누구든 외따로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