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방(東方) 조선(朝鮮), 중국(中國)은 없다 [제1편]
요해(遼海), 동회[東淮=淮左], 금릉[金陵]
2024년 05월 22일
○ 전회(前回)에 예고(豫告)한 대로,
오늘의 주제(主題)는 〈“16세기(世紀) ∼ 17세기(世紀)”를 살다 가신 한민족(韓民族) 조선인(朝鮮人) 사대부(士大夫) “낙전당(樂全堂) 신익성(申翊聖)【1,588(宣祖 21)∼1,644(仁祖 22年)】”의 문집(文集)인 낙전당집(樂全堂集) 속에 기록(記錄)된 당시(當時)의 「조선(朝鮮) 영토(領土) 및 그 지형지세(地形地勢), 지명(地名), 주변(周邊) 형세(形勢)」 등(等)에 대해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낙전당(樂全堂) 신익성(申翊聖)」은 자(字)가 군석(君奭), 호가 낙전당(樂全堂)ㆍ동회거사(東淮居士), 본관은 평산(平山)으로, 상촌(象村) 신흠(申欽)과 이제신(李濟臣)의 딸 사이에서 장남(長男)으로 태어났다. 박동열(朴東說)ㆍ박동량(朴東亮) 형제에게 수학하였고, 다시 정엽(鄭曄)에게 수학하였다. 12세 때인 1,599년(선조 32)에 선조(宣祖)의 제3녀 정숙옹주(貞淑翁主)와 혼인하여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졌다【出處 引用 / 고전번역원 DB】」라고 전(傳)해지는 인물(人物)인데… …신익성(申翊聖)의 글을 이해(理解)하려고 한다면 : “고전번역원 DB 낙전당집(樂全堂集) 해제(解題)”를 참고(參考)하시면 많은 도움이 될 듯하다.
---------------------------------------------------------------------
(1) 「요양(遼陽)은, 서(西)쪽 땅에 있다.」
► 낙전당집(樂全堂集) 4권 詩 七言絶句 ‘出塞曲’ : 〈督府征奴擁六師 : 오랑캐 정벌(征奴)하는 도독부 육군(六軍)을 거느리니, 收兵屬國羽書馳 : 속국의 병사 징발하는 조서가 날아왔네. 東民會是酬恩日 : 우리나라 백성들 은혜 갚을 날 만났으니, 西去遼陽死不辭 : 서쪽 요양에 가서 죽는 것도 마다 않으리.【出塞曲 : 督府征奴擁六師。收兵屬國羽書馳。東民會是酬恩日。西去遼陽死不辭】〉라 하였다.
➊ ‘속국(屬國)’이란 : 다른 나라의 지배(支配)를 받는 국가(國家)를 말하는 것인데, 예속국(隸屬國), 종속국(從屬國), 속방(屬邦), 속국(屬國)과 같은 뜻인데,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은, 바로 조선(朝鮮)이 명(明)나라의 지배(支配)를 받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解釋)한다. 문제(問題)는,
「동민(東民)」이란 뜻이 무엇일까? 「동(東)쪽 땅에 사는 민초(民草), 백성(百姓), 인민(人民)」을 말하는 것이다. 이 말대로라면 : 「명(明)나라의 동(東)쪽 땅에 사는 백성(百姓)들을 말하는 것이고, 명(明)나라는 “조선(朝鮮)의 별칭(別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설(解說), 해석(解釋)할 수밖에 없는 이유(理由)는 아래의 ‘➋’의 구절(句節)이 있기 때문이다.
➋ 「西 去 遼 陽 死 不 辭 : 서(西)쪽 요양(遼陽)에 가서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라는 뜻이다.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 논자(論者)들의 주장(主張)”대로라면 : 「요양(遼陽)」은 오늘날의 요녕성(遼寧省)에 있다. 요녕성(遼寧省)의 “요(遼)” 자(字)가 바로 “요수(遼水)와 요양(遼陽)”지방을 중심(中心)으로 하기 때문인데, 이곳은 “반도(半島)의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있다.
〈나침판(羅針板)을 거꾸로 돌려도 북방지대(北方地帶)일 뿐이지, 서방지대(西方地帶)에 있을 수 없는 땅이다〉 반도(半島)의 서방(西方) 땅은 산동성(山東省)으로 바로 중국(中國)의 요충지(要衝地) 땅이다.
➨➨➨ 위 “신익성(申翊聖)”이 노래한 대로라면 : 「요수(遼水)도, 요양(遼陽)도, 적인(狄人)도, 후금(後金)도, 여진족(女眞族)도 ‘조선(朝鮮)의 서(西)쪽 땅’에 있다.」라는 것이다.
조선(朝鮮)의 서(西)쪽 땅, 그곳이 어딘가? 당시(當時)의 후금(後金)과의 구도(構圖)로 보면 : 바로 「합밀(哈密)의 서(西)쪽 땅」을 말하는 것이다.
【「흥복합밀국왕기(興復哈密國王記), 馬文升(1426年∼1510年)」의 기록(記錄)에 의하면 당시(當時) 합밀(哈密)의 동(東)쪽에 “조선(朝鮮)이 있었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 낙전당집(樂全堂集) 4권 詩 七言絶句 ‘塞下曲’ : 〈磧裏陰雲慘不舒 : 사막의 먹구름 짙게 끼어 개이지 않는데, 將軍解甲拜穹廬 : 장군은 갑옷 벗고 오랑캐에게 절하네. 可憐一介謀身地 : 가련타, 제 한 몸 살기를 도모하는 곳에, 三萬精兵盡化魚 : 삼만 정병이 모두 어육이 되었구나【塞下曲 : 磧裏陰雲慘不舒。將軍解甲拜穹廬。可憐一介謀身地。三萬精兵盡化魚】〉라고 하였다.
➌ 「磧 裏 陰 雲 慘 不 舒 : 사막의 먹구름 짙게 끼어 개이지 않는다」
「요동(遼東)의 중심(中心) “심양(瀋陽)이든 요양(遼陽)”이든 그 땅은, 사막[沙漠 : 磧]의 땅이었다」라는 것이다. 「신익성(申翊聖)은 직접(直接) “심양(瀋陽)” 땅을 밟았던 인물(人物)이다」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 오늘날의 요녕성(遼寧省) 심양(瀋陽)은, 서방(西方) 땅으로부터 이동(移動)되어 정착(定着)된 “왜곡(歪曲), 조작(造作)된 지명(地名)”이란 것을 100% 확신(確信)할 수 있다.
【AD 1,642년 12월, 척화오신(斥和五臣)이라는 지목을 받아, 신익전(申翊全)ㆍ허계(許啓)ㆍ이명한(李明漢)ㆍ이경여(李敬輿)와 함께 심양(瀋陽)에 붙잡혀가 억류당하였다.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왕실의 인친(姻親)이라고 적극적으로 변호해 주어 신익성(申翊聖) 형제만이 풀려날 수 있었다. [出處 : 고전번역원 DB 인용(引用)】
조선사(朝鮮史) 해설(解說) 때마다 등장(登場)하는 ‘사막지대(沙漠地帶)’에 대해서는 우리 카페(Cafe)에 많은 설명(說明)이 있다.
중원대륙(中原大陸) 땅의 19세기(世紀) 이전(以前)의 「사막(沙漠)=적(磧)」땅은 : 「하란산(賀蘭山)의 서(西)쪽으로부터 지중해(地中海) 동안(東岸)까지에 이른다.」
➨➨➨ 한반도(韓半島) 및 그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사막(沙漠)=적(磧) 지대(地帶)는 없다.」 자연환경적(自然環境的) 요소(要所)인 지형지세(地形地勢)는, 인간(人間)의 뜻대로 바꿀 수 없는 천지간(天地間)의 일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즉(卽),
따라서 사막지대[沙漠地帶 : 磧地帶]에 있는 요동(遼東) 땅의 중심(中心) “심양(瀋陽)”은, “서방(西方) 땅”에 있었으며, “동방(東方) 땅에는 조선(朝鮮)이 걸터앉아 있었다”라는 것이다.
---------------------------------------------------------------------
(2) 「동회거사(東淮居士)」 : 「동회(東淮)」는?
► 낙전당집(樂全堂集) 4권 / 詩 七言絶句, 贈宋寫官 昌言 赴京[연경으로 가는 宋寫官 창언(昌言)에게 주다] : 〈槎浮遼海轂馳燕 : 배 타고 수레 타고 요해(遼海) 건너 연경으로 가니【배 타고 요해(遼海)를 건너 수레 타고 연경(燕京)으로 가니】, 萬里長程足下懸 : 만 리 먼 길이 발아래 달려있다네. 堪笑東淮老居士 : 동회의 늙은 거사 못내 우습나니 一窓吟病井蛙然 : 한 창가에서 신음하는 우물 안 개구리 신세 【贈宋寫官 昌言 赴京 : 槎浮遼海轂馳燕。萬里長程足下懸。堪笑東淮老居士。一窓吟病井蛙然】〉라고 하였다.
➊ 「요해(遼海)」란 곧 「요하(遼河)의 상원(上源)이다.」라고 하였다. 이곳이 어디냐? “요해(遼海)”는 성경강역고(盛京疆域考) 삼만위(三萬衛) 편에 등장(登場)하는데, 「섬서(陝西) 평량(平涼) 서북(西北)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즉(卽),
〈原注洪武二十四年建韓王府永樂二十二年遷於陝西平涼西北有金山東有分水東嶺北有分水西嶺西有大清河東有小清河流合焉. : 원주(原注)에, 홍무(洪武) 24년【筆者 注 : 洪武 24年 : AD 1,391년 高麗 恭讓王 3年】에 한왕부(韓王府)를 두었는데, 영락 22년【筆者 注 : 永樂 22年 : AD1,424년 世宗 6年】에 섬서(陝西) 평량(平涼) 서북(西北)으로 옮겼는데, 금산(金山)이 있어, 동(東)쪽 물은 동(東)쪽으로 나누어 흘러가고, 영북(嶺北)에서 나오는 물은 서(西)쪽으로 나누어지는데, 영서(嶺西)에 대청하(大淸河)가 있고 동(東)쪽에는 소청하(小淸河)가 흘러 합류(合流)한다. 下流入於遼河又北有土河東北有艾河流合焉. : 하류(下流)가 요하(遼河)로 들어오는데, 또 북(北)쪽에 토하(土河), 동북(東北)에 애하(艾河)가 흘러 합류(合流)한다. 謂之遼海即遼河上源也 : 말하기를 요해(遼海)로 곧 요하(遼河)의 상류(上流) 근원(根源)이다〉라고 하였다.
➠➠➠ 그렇다면 본래(本來)부터 「“요해(遼海)”는, 평량(平涼) 서북(西北) 땅, 내륙(內陸)의 호수(湖水)를 말하는 것이고, 이곳으로부터 나오는 물이 곧 “요하(遼河)”다」라는 뜻이다.
「요해(遼海), 요수(遼水)」에 대한 설명(說明)은 꼭꼭 숨겨놓아 이보다 더 상세(詳細)한 기록(記錄)은 없다. 오늘의 주제(主題)가 아니므로 이 정도(程度)에서 마무리한다.
► 낙전당집(樂全堂集) 2권 詩, 五言律 : 임감사 ‘담(墰)’에게 사례하다〔謝林監司 墰〕: 〈病 滯 淮 東 臥 : 병들어 동회(東淮)에 누웠는데〉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회동(淮東) 곧 회수(淮水)의 동(東)쪽”이라고 하였다.
► 낙전당집(樂全堂集) 제12권 / 갈명(碣銘) 이신계묘갈명 병서〔李新溪墓碣銘 幷序〕 : 〈觀察方按畿輔。屛干旄從下里。訪余於淮上曰 : 관찰사가 기보(畿輔)를 순시할 때 의장을 물리치고 하리(下里)로 와서, 「회(淮)」로 나를 방문하여 말하기를」 … …[주-D002] 회(淮) : 지금의 양수리 일대인 이수(二水)를 말한다. 저자가 이곳에 새로 선영을 조성하고 이 일대를 계획적으로 정비하고 확장하였는데, 특히 이수 유역을 동회(東淮)라 명명하고 자호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회(淮)”란 “회수(淮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양수리 일대의 “이수(二水)”를 말하는 것이다」라고 보이는데,
► 〈낙전당집(樂全堂集) 4권 / 詩 七言絶句, 영오의 시축에 차운하다〔次靈悟軸韻〕 : 亂後無心辦勝遊, 白頭蕭瑟又新秋, 東淮一曲茅茨小, 兩峽中間二水流 : 난리 후에 무심하게 좋은 경치 노니는데, 센 머리 쓸쓸하게 또 새로이 가을이 왔네. 동회(東淮) 한 구비에 초가집 자그마한데, 양 골짜기 가운데로 두 물이 흐르는구나〉라고 하였다.
이수(二水)란 강(江) 이름이 아니고, 두 하천(河川)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 … 동강유집(東江遺集)【동강(東江) 신익전(申翊全, 1605~1660), 신익성(申翊聖)의 제(弟)다】 제4권 / 오언율시(五言律詩) : 〈舟下淮中。次晸兒韻 二首。時做松都留後 : 배 타고 회수(淮水)의 중류로 내려가며. 아들 정의 시에 화운하다. 2수. 이때는 송도 유수가 된 다음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 :
「회수(淮水)」는 조그만 하천(河川)이 아니라 배(舟)를 탈 수 있는 큰 강(江)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갈매기들 날아오니 앉은 채 가까이하네 : 坐 狎 白 鷗 來」라고 한 것을 보면, “바닷가 가까운 강(江)의 하구(河口), 내륙(內陸)의 호수(湖水), 늪지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鷗 : 갈매기 [네이버, 두산백과 / 갈매기(common gull) : 「서식지는 해안과 조수가 밀려드는 강 하구, 내륙의 호수, 축축한 늪지 등으로 육지로부터 그리 멀리 벗어나지 않는다.】
동강유집 제14권 / 잡저(雜著) 《필의》의 발문〔筆意跋〕: 〈얼마 뒤 형님이 과연 동회(東淮)에서 배를 타고 평구(平丘)에 유배 중이던 나를 찾아와 소매에 넣어 온 글을 보여주었다. : 伯氏果自淮中。舟過余平丘謫。袖此幅以示。余拜受謹粧爲帖。勒之曰伯氏筆意。時以自警省焉。〉
➨「伯氏果自淮中。舟過余平丘謫。: 동회(東淮)에서 배를 타고 평구(平丘)에 왔다」라고 하였는데, ‘평구(平丘)’는? 평구(平丘) : 양주(楊州)의 속역(屬驛)이다. : 조선시대 경기도 지역의 역도 중 하나인 평구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에 위치해 있었다고 하였으니, 결국 “회수(淮水)”란 “한강(漢江) 상류(上流)”를 말하는 것이 된다.
➋ 「동회거사(東淮居士)」란, 말 그대로 “동회(東淮)는 회좌(淮左)”와 같은 말로, “회수(淮水)의 동(東)쪽 땅”의 다른 이름(別稱)이다. 곧 “회수(淮水)의 동(東)쪽 땅에 사는 늙은이”란 뜻이다.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로 보면 : 「회수(淮水)란 곧 양평지방을 흐르는 한강(漢江) 상류(上流)를 칭한다」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근거(根據)나 유래(由來), 구전(口傳), 고증(考證)이 전혀 없다는 것이 문제(問題)다.
「동회(東淮)」 : 동회(東淮)란 바로 「낙전당집(樂全堂集)의 저자(著者)인 「낙전당(樂全堂) 신익성(申翊聖)」의 호(號)다. 곧 자(字)가 군석(君奭), 호(號)가 낙전당(樂全堂)ㆍ동회거사(東淮居士), 본관(本貫)은 평산(平山)이다.」라고 알려져 있다. 또 하나는,
회양(淮陽) : [Naver, 한자사전]을 찾아보면 : 「강원도(江原道) 회양군(淮陽郡)의 군청(郡廳) 소재지(所在地). 군의 북서부(北西部), 북한강(北韓江) 상류(上流) 좌안에 있으며 경원가도(京元街道)의 요지(要地)임. 옛날부터 관북(關北) 지방(地方)에 대(對)한 군사상(軍事上) 요지(要地)로 발달(發達)하였으며, 잡곡(雜穀)ㆍ수산물(水產物)ㆍ목재(木材)ㆍ인삼(人蔘)ㆍ약재(藥材)ㆍ꿀 등(等)의 집산지(集散地)임」이라고 하였는데,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의 해설(解說)대로라면 : 「북한강(北漢江) 상류(上流)의 좌안(左岸)【동안(東岸)】에 있다」라는 말이 곧 “동회(東淮)”와 같은 말인 것을 알 수 있다. 문제(問題)는 「북한강(北漢江)이나 그 상류(上流)가 “회수(淮水)”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이요, 어불성설(語不成說)임이 확실(確實)한 것이다. 곧 “동회(東淮)”란 무슨 뜻일까? 의미(意味)가 뭐냐? 하는 것이다.
「동녁 동(東)자에, 강(江) 이름 회(淮)자」를 쓰고 있으니, 회좌(淮左)를 뜻하는 말이자, 회수(淮水)의 동(東)쪽 땅을 말한다」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淮」자(字) 자체(自體)가 “ 강(江) 이름 회(淮)”이니 더 말할 필요(必要)도 없는 일이다.
홍자옥편(弘字玉篇) [淮 : 揚州 水名 淮 / 淮水 淮 / 水名 淮]라고 하여 모조리 “회수(淮水)”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➌ 「동회(東淮)」땅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여기서 “동회(東淮)”란 “회수(淮水) 동(東)쪽 땅”을 말하는 것으로, 회우(淮右)란 사천(泗川) 땅을, 회좌(淮左) 곧 동회(東淮)와 같은 곳으로, 곧 강소성(江蘇省) 땅을 말하는 것으로, 중국(中國)의 동부(東部)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說明)을 더 전개(展開)한다면 : 바로 「회수(淮水)의 동(東)쪽 땅에 사는 신익성(申翊聖)」이라는 뜻과 같은 것이고, 신익성(申翊聖)은 이러한 회수(淮水)의 동(東)쪽에 사는 백성(百姓)이라고 하여 “동회거사(東淮居士)”로 자칭(自稱)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땅이 어떻게 ‘한반도(韓半島) 땅’이 될 수 있겠는가? 곧 “신익성(申翊聖)은 스스로 회수(淮水)의 동(東) 즉 동회(東淮)의 백성(百姓)이라고 자칭(自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고, 이곳이 바로 옛 “조선(朝鮮)의 땅이었다”라는 것이다.
➨ 회수(淮水) : 淮河,古稱淮水,是一條位於中國東部,發源於河南省的河流。它與長江、黃河和濟水並稱四瀆.[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3) 「금릉(金陵), 금릉군수(金陵郡守)」
► 낙전당집(樂全堂集) 4권 / 詩 七言絶句, 贈金陵使君[금릉 군수에게 주다] : 〈潮急風生一葉浮 : 조수(潮水)급하고 바람 일어 일엽편주 떠 있는데, 海門初日霽煙收 : 바다 어귀는 떠오른 아침 해에 안개 걷힌다 人生合在安流地 : 인생은 편안한 물결 위에 있어야 하는 법 : 莫上金陵十月舟 : 금릉(金陵) 시월의 배에는 오르지 마시기를【贈金陵使君 / 潮急風生一葉浮。海門初日霽煙收。人生合在安流地。莫上金陵十月舟】〉
⒜ 「조수(潮水)」는 ‘해조(海潮)’를 말하는 것으로 「조수(潮水)란 해와 달 특히 달(月)의 인력(引力)에 의하여 주기적(週期的)으로 바닷물이 들어왔다가 또 나가는 것을 반복(反復)하는 것」을 말한다.
⒝ 위의 시문(詩文)에서 말하는 곳은, 바다 어귀(海門)의 조수(潮水)가 급하게 변화(變化)하는 모습과 가득 찬 안개가 떠오르는 태양(太陽)과 함께 걷히는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인데, “특히 10월의 금릉(金陵)은 이러한 현상(現狀)이 심해 배(舟) 타기가 힘들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으니, “금릉(金陵)”은, 바다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던 ‘마을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의 조선사(朝鮮史) 해설(解說)로 보면 :
➊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금릉(金陵) : 금릉(金陵) : 경상북도 김천시
[나무위키] / 금릉군(金陵郡) : 1,914년 ‘김천군’이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어 1949년 8월 14일 ‘금릉군’으로 개칭하고 1995년 1월 1일부로 ‘김천시’와 통합된 경상북도의 폐지된 행정구역이다. [출처 : 나무위키]
[김천시(金泉市) 행정구역 변천사] : 「김산군(金山郡, 1895) ∼ 지례군(知禮郡, 1895) ∼ 개령군(開寧郡, 1895) ∼ 김천군(金泉郡, 1914) ∼ 김천부/시(1949)∼금릉군(金陵郡, 1949) ∼ 김천시(1995)」 [출처(出處) : 나무위키]
여기서 이것보다 더 중요한 요소(要所)는, “김천시(金泉市)”가 아니라 “금천시(金泉市)”래야 맞는 말이고, “금릉군(金陵郡)”이란 말은, 「1,949년도에 일시적(一時的)으로 이곳 지명(地名)으로 했다」라는 이야기다. 정말 황당(荒唐)한 이야기다. 그런데,
➋ 新增東國輿地勝覽 29권 / 〈경상도(慶尙道) 김산군(金山郡) : 郡名 : 金陵。〉라고 하였다.
➨➨➨ 「한반도(韓半島)의 금릉군(金陵郡)은 곧 김산군(金山郡)으로, 오늘날의 김천시(金泉市)를 말하고 있다.」 이게 과연(果然) 올바른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일까?
➌ 위의 시(詩) 구절(句節)에서 말하는 바는 : 〈潮急風生一葉浮 : 조수는 급하고 바람 일어 일엽편주 떠 있는데, 海門初日霽煙收 : 바다 어귀는 떠오른 아침 해에 안개 걷힌다 人生合在安流地 : 인생은 편안한 물결 위에 있어야 하는 법, 莫上金陵十月舟 : 금릉(金陵) 시월의 배에는 오르지를 마시라〉를 어떻게 이해(理解)할 수 있겠는가?
당시(當時)의 「조선(朝鮮) 땅 금릉군(金陵郡)」은, 위의 시문(詩文) 따르면 : ① 바닷가의 조수(潮水)가 있는 곳 ② 큰 강 또는 호수(湖水)의 물이 바다로 들어가는 가까운 곳의 양안(兩岸)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의 헛소리로 보면 : 「경상도(慶尙道) 내륙(內陸) 한가운데에 있는 “김천시(金泉市)” 땅이, 바닷가(海門) 또는 큰 강(江)의 연안(沿岸) 포구(浦口)에 있어 조수(潮水)가 밀려오고 나가는 땅이다」라는 이야기가 된다.
얼마나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역사해설(歷史解說)인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헛소리”라고 하는 것이고, “허구한 날 헛빨짓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금릉(金陵)은 남경(南京)」
➍ 「금릉(金陵)」은, 〈「南京」「建業」「建康」「秣陵」「金陵」和「昇州」를 말하는 것으로, 南京市,簡稱「寧」이요, 別稱은 金陵、建業、建康、江寧이다〉라고 하였으니 유서(由緖) 깊은 「남경(南京)」을 말하는 것이다.
그럼 낙전당집(樂全堂集)의 저자(著者)인 “신익성(申翊聖)”은, 반도(半島) 땅에서 친우(親友)인 “명(明)”나라의 금릉군(金陵郡) 군수(郡守)에게 칠언절구(七言絶句)의 시(詩)를 보냈다는 이야긴가?
그러나 신익성(申翊聖)은 말하기를 “莫 上 金 陵 十 月 舟 : 금릉(金陵) 시월의 배에는 오르지를 마시라(배를 타지 마시라)”하였으니, 저자(著者)도 이러한 점을 잘 알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는, 「당시(當時)의 조선(朝鮮)은 한반도(韓半島)가 아닌 “중원대륙(中原大陸)의 땅”에 자리 잡고 있었다」라는 것이다.
---------------------------------------------------------------------
(5) 「조선(朝鮮)은, 동방(東方)에 있다.」
► 낙전당집(樂全堂集) 5권 / 서(序) / 출병하는 都元帥 張公 ‘晩’ 을 전송하는 서[送都元帥張公 晩 出師序] 【부친을 대신하여 지음】 : 〈吾東方北接靺羯。西連女直。南通倭。古稱四面受敵。: 우리나라는【필자(筆者) 주(注) : 우리나라는 동방(東方)에 있어】북(北)쪽으로 말갈(靺鞨)과 접(接)해 있고, 서(西)쪽으로는 여진(女眞)과 잇닿아 있으며, 남(南)쪽은 왜(倭)와 통해 있어서, 옛날부터 사면(四面)에서 적국(敵國)의 침입을 받는다고 일컬어졌다〉라고 하였다.
➊ 「우리나라는 동방(東方)에 있다.」 :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의 주장(主張)대로라면 : 「우리나라(朝鮮)는 동방(東方)에 있다. 중국(中國)은 서방(西方)에 있고, 서이(西夷)요, 서호(西胡)요, 서융(西戎)이다.」동의(同意) 하시나?
➋ 「북(北)쪽으로는 말갈(靺鞨)과 접(接)해 있고」 : 말갈(靺鞨)은 숙신(肅愼)의 후예(後裔)로, 여진족(女眞族)의 선대(先代)다. “이들 숙신(肅愼)은 북방(北方)과 서방(西方) 사이에 있었다”라는 기록(記錄)은,
산해경(山海經)으로부터 회남자전(淮南子傳)으로 이어졌는데… …산해경(山海經)의 저술(著述) 시기(時期)인 기원전(紀元前 BC) 2,100年 경의 우(禹)임금이나, 전한(前漢)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기원전(紀元前) B.C179∼122年】또는 서진(西晉)과 동진(東晉) 간의 곽박(郭璞)【서진(西晉) AD276~324年)】보다 더 해박(該博)한 학자(學者)가 있는가?
➨ 「사학자(史學者)라는 가면(假面)을 쓴 매국노(賣國奴)들과 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들만이 존재(存在)하고 있을 뿐이잖은가!」 일만(一萬) 년 조선사(朝鮮史)를 신화화(神話化)하고, 전설화(傳說化)해 버리고,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을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하여 조선사(朝鮮史)를 반도(半島) 땅에 가둬놓은 장본인(張本人)들이 어떤 놈들인가?」
➌ 「서(西)쪽으로는 여진(女眞)과 잇닿아 있어」 : 〈“서(西)쪽으로 여진(女眞)과 잇닿아 있다【西 連 女 直】”라는 말은 곧 “조선(朝鮮)의 땅”은 한반도(韓半島)가 아닌 “중원대륙(中原大陸)에 있었다”라는 결정적(決定的) 증거(證據)다.〉
위의 글 “➊”과 연결(戀結)되는 것으로, “조선의 서(西)쪽에 여진(女眞)이 있다.”라는 말은, 한반도(韓半島) 땅과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것이 천지간(天地間)의 이치(理致)다.
한반도(韓半島) 서(西)쪽에 중국(中國)이 있지, 여진(女眞)이 있느냐? 위의 글 “➋”의 설명(說明)은, 「조선(朝鮮)은 곧 중국(中國)이며, 그 서(西)쪽 땅에는 여진(女眞)과 경계(境界)하고 있다」라는 뜻이다. 그렇치 않다면 이걸 어떻게 설명(說明)할 수 있겠는가!
➍ 「남(南)쪽으로는 왜(倭)와 통해 있어」 : 남(南)쪽은 왜(倭)와 통(通)한다? 그럼 동(東)쪽은 누구와 통(通)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➎ 「옛날부터 사면(四面)에서 적국(敵國)의 침입을 받는다」: 사면(四面)은 사방(四方)과 같은 뜻이다. 위의 설명(說明)대로 「북(北)쪽은 말갈(靺鞨)이 있고, 서(西)쪽에는 여진(女眞)이 있고, 남(南)쪽에는 왜(倭)가 있고, 동(東)쪽은? 누가 있어 사면(四面)으로 곧 사방(四方)으로 적국(敵國)의 침입(侵入)을 받는다.」라고 걱정하고 있는 건가?
한반도(韓半島)라는 “반도(半島)의 지세(地勢)”를 가진 땅에서는 불가능(不可能)한 구조(構造)다. 역사통설(歷史通說)의 한계(限界)이기도 하다.
---------------------------------------------------------------------
(6) 「固 西 門 之 重 也 耶 : 중대한 서문(西門)을 견고히 할지 모르겠다.」
► 낙전당집(樂全堂集) 5권 序 送閔監司 聖徵 出按關西序[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하는 민 감사 성징(聖徵)을 전송하는 서(序)]
〈士祥受委於西門。徵余言爲贐。西門重地也。: 사상이 서문(西門)을 다스리게 되자 나에게 전별의 글을 청하였다. 서문(西門)은 중요한 지역이다. 昔以鴨綠爲限。今以淸川爲限。所蹙者幾百里也。淸川不支則浿江爲關防。: 옛날에는 압록강이 경계를 짓고 있었는데 지금은 청천강이 경계를 짓고 있으니 줄어든 것이 몇백 리이다. 청천강을 지키지 못하면 패강(浿江)이 관방(關防)이 된다. 浿江抱山負江。地澶漫。俗尙末利。丈夫迷嗇不通。婦女鳴琴跕屣。冶遊偸淫。非用武之地也。: 패강(浿江)은 산을 안고 강을 등지고 있어, 지세는 광활하며, 풍속은 상업을 숭상하여, 사내들은 미혹되고 꽉 막혀 있고, 아낙들은 금을 연주하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밖에 노닐며 음란하니, 전쟁을 치룰 만한 지역이 아니다. 遠有強金。近有猾劉。不知士祥何以敵遠近之敵。固西門之重也耶。: 멀리에는 강한 금(金)나라가 있고 가까이에는 교활한 유흥치(劉興治)가 있으니, 사상이 어떻게 원근의 적을 상대하여 중대한 서문(西門)을 견고히 할지 모르겠다. 중략(中略)〉
➊ 「西 門 重 地 也 : 서문(西門)은 중요한 지역이다」
「서문(西門)」이란 : “서(西)쪽의 문(門)”을 말하는 것으로, 번역본(飜譯本)에는 “관서(關西)”라고 하였는데, 서(西)쪽 문(門)이 어떻게 “관서(關西)” 땅이 된다는 것일까?
➋ 「昔以鴨綠爲限。今以淸川爲限。所蹙者幾百里也。淸川不支則浿江爲關防。: 옛날에는 압록강(鴨綠江)이 경계를 짓고 있었는데 지금은 청천강(淸川江)이 경계를 짓고 있으니 줄어든 것이 몇백 리이다. 청천강(淸川江)을 지키지 못하면 패강(浿江)이 관방(關防)이 된다.」라고 하였는데,
압록강(鴨綠江)을 한계(限界)로 화이(華夷)를 나눈 것은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의 말 대로라면 반만년(半萬年)에 이른다. 그런데 16 ∼ 17세기(世紀)에 이르러서는 후금(後金)으로 인하여 한계(限界)가 청천강(淸川江)으로 바뀌어버렸다는 것인데,
후금(後金)의 침략(侵略)으로 인(因)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청천강(淸川江)”으로 “화이(華夷)”를 나눈 적은 없다.
---------------------------------------------------------------------
(6) 「國家數十年。而南西替受兵禍。域內殆無完土。: 나라가 수십 년 동안 남쪽과 서쪽 지방이 번갈아 병화를 입어 역내에 온전한 땅이 거의 없다.」
► 낙전당집(樂全堂集) 5권 序 送洪監司 命耇 出按嶺南序 : 영남(嶺南)관찰사로 부임하는 홍감사 명구(命耇) 를 전송하는 서 : 〈國家數十年。而南西替受兵禍。域內殆無完土。: 나라가 수십 년 동안 남쪽과 서쪽 지방이 번갈아 병화를 입어 역내에 온전한 땅이 거의 없다.〉라고 하였는데,
남(南)쪽은 왜(倭)를 말하는 것이고, 서(西)쪽은 후금(後金)을 말하는 것이다.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은 말하기를 : “후금(後金)”은 북방(北方)에 있었다고 했잖은가!
후금(後金)이든 누루하치【愛親覺羅 奴爾哈赤 : AD 1,559~1,626年】든 백두산(白頭山) 동남(東南)에서 시원하며, 이곳이 만주(滿洲) 땅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첫머리에서 말하기를 :
➊「金史世紀云金始祖居完顔部其地有白山黒水 : 금사세기(金史世紀)에서 말하기를 : 금(金) 시조(始祖)가 살던 완안부(完顔部) 땅에 백산(白山), 흑수(黑水)가 있다」라고 하였으니,
곧 백산(白山)은 백두산(白頭山)을 말하고, 흑수(黑水)는 흑룡강(黑龍江)을 말한다고 하는데, 이곳에 금(金)나라 시조(始祖)의 완안부(完顔部) 땅이었다는 것이고,
【역사서(歷史書)에 의하면 : 백산(白山)은 천산(天山)이며 기련산(祁連山)이며, 흑수(黑水)는 흑수(黑水)일 뿐이다】
➋ 부족(部族) 편에서는 : 「發祥世紀長白山之東有布庫哩山其下有池曰布勒瑚里 : 발상세기(發祥世紀)에서 말하기를, 장백산(長白山)의 동(東)쪽 포고리산(布庫哩山) 그 아래에 못이 있는데 “포늑호리(布勒瑚里)”이다.」라고 하였다.
「貝勒居長白山東鄂多理城建號滿洲是為國家開基之始以國書考之滿洲本作滿珠二字 : ‘패륵(貝勒)’이 산 곳은 장백산(長白山) 동(東)쪽의 악다리성(鄂多理城)인데, 나라를 세워 부르기를 "만주(滿洲)"라 하였는데. 국가(國家)를 처음으로 여는데 초석(礎石)이 되었다. 국서(國書)를 상고해 보면, 만주(滿洲)는 본시 "만주(滿珠)"의 두 글자이다.」라고 하였다.
➠ 위 말대로라면 「“만주(滿洲)”란 본시(本是) “만주(滿珠)”였다는 말이며, “만주(滿洲)”는 장백산(長白山) 곧 백두산(白頭山) 동(東)쪽 땅을 말하는 것이니, 오늘날의 “만주(滿洲) 지방(地方)”이 아니다」라는 것을 명확(明確)하게 설명(說明)하고 있다.
「백두산(白頭山) 곧 장백산(長白山)」 동(東)쪽을 보자. 이곳은 『조선(朝鮮)의 함경북도(咸鏡北道) 일부(一部)와 만하(滿河)라고 불렸던 두만강(頭滿江) 북(北)쪽의 일부(一部)가 “만주(滿洲)=만주(滿珠)”지방이다.』라는 이야기가 된다.
➌ 「西藏獻丹書皆稱曼珠師利大皇帝翻譯名義曰曼珠華言妙吉祥也又作曼殊室利大教王經云釋迦牟尼師毘盧遮那如來而大聖曼殊室利為毘盧遮那本師殊珠音同 : "서장【西藏 : 티베트(Tibet) 땅을 말한다.】에서 헌상한 단서(丹書)에서 말하기를, 모두 "만주사리대황제(曼珠師利大皇帝)“라 불렀는데, 번역(飜譯)으로 이름의 뜻은, ‘만주(曼珠)’는 화언(華言)으로 ‘묘길상(妙吉祥)【석가모니여래(釋迦牟尼如來)의 왼쪽에 있는 보살(菩薩)】이다. 또 ‘만주실리대교왕경(曼珠室利大教王經)‘에 따르면, "석가모니(釋迦牟尼) 스승(師) 사비노차나여래(毘盧遮那如來)"이며, "대성만주실리(大聖曼殊室利)"는 "비노차나(毘盧遮那)"는 본래 스승의 ’수(殊)‘와 ’주(珠)‘의 음(音)이 같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설명(說明)은 「만주(滿洲)는 만주(滿珠)요, 만주(曼珠)였다」라는 뜻이고, 「후금(後金)과 만주(滿洲)」는, 서장(西藏)과 밀접(密接)한 관계(關係)에 있었다는 것이요, 본시(本是) 후금(後金)의 여진족(女眞族)은 서(西)쪽 땅에 있었다고 했잖은가!
➠➠➠ 「오늘날의 ”한반도(韓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와는 전혀 관계없는 서역(西域)과 서방(西方) 땅의 이야기“다.」 반도(半島) 땅은 너무 좁고 좁아 조선(朝鮮)을 담을 수 없다.
○ AD 16∼17세기(世紀) 조선(朝鮮)의 사대부(士大夫)로, 학자(學者)로, 부마도위(駙馬都尉)로 누구보다도 큰 명성(名聲)을 떨쳤던 ”신익성(申翊聖)“이 기록(記錄)한 많은 내용(內容)들은, 한반도(韓半島) 땅과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중원대륙(中原大陸)의 땅을 노래하며, 그곳에서 벌어졌던 많은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史實)을 믿느냐? 믿지 못하냐? 하는 문제(問題)는 독자(讀者)들의 몫이다.
➠➠➠ 〈이 모든 역사왜곡(歷史歪曲)의 원흉(元兇)은 서구세력(西歐勢力)과 그 하수인(下手人) 일본(日本)과 남이(南夷) 출신(出身)인 광동(廣東)의 손문(孫文)【일제(日帝)에 의해 포섭(包攝)되어 협력(協力)하였다】이 앞장서 벌인 일이다.〉
다시는 ”윤석열“과 같은 ”민족의식(民族意識), 역사인식(歷史認識)“이 없는, 친일(親日) 사대주의 정권(事大主義 政權)이 들어설 수 없도록 하는 것은, 이 나라 국민(國民)들 몫이다. 이건 의무(義務)요, 책임(責任)이다.
한 번의 실수(失手)는 용납(容納)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에서 교훈(敎訓)을 얻지 못한 두 번의 실수(失手)는, 결코 용납(容納)될 수 없는 중차대(重且大)한 문제다. 국민(國民)들 스스로 이런 정권(政權)을 감시(監視)하는 것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2024년 05월 22일 [글쓴이 : 문무(文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