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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관산성,관산성전투 원문보기 글쓴이: 아람
아. 탄현
탄현에 대한 언급은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언급된 것이 동성왕 23년 501년입니다, 그리고 의자왕 16년 656년 성충이 ‘만일 다른 나라 군사가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의 언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방어하여야만 방어할 수 있습니다.(若異國兵來 陸路不使過 沈峴(一云 炭峴) 水軍不使入 伎伐浦(一云 白江)之岸 擧其險隘以禦之 然後可也)’ 이라는 진언과 660년에 백제 귀양간 좌평 흥수에 의한 탄현 혹은 침현에 대한 언급입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탄현과 침현이 같은 곳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탄현과 침현은 같은 곳이 아니고, 하나의 전투 작전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존재하는 다른 고개입니다. 관산성전투 중 가짜 위덕왕의 철수과정에서 용목리, 용이 목욕한 마을 뒤쪽의 가르뱅이재를 침현으로 보았습니다. (백제가 관산성지역을 재점령 못했기 때문에 왕이 습지에 빠져 생긴 침현이라는 지명은 백제와 관련된 자료에 존재하는 지명으로 옥천(관산성) 지역에는 침현이라는 지명을 찾을 수 없음)
501년 동성왕 때 탄현은 신라를 대비하기 위해 탄현에 목책을 세웠으니 탄현은 백제와 신라의 국경이었습니다. 또한 660년 흥수가 탄현(침현)을 한 명의 군사가 한 자루의 창을 가지고도 만 명을 당할 수 있는 요충지로 언급하였는데, 백제 대신들이 흥수를 비판하는 것은 탄현(침현) ‘한 명의 군사와 한 자루의 창을 가지고도 만 명을 당할 수 있는 요충지’ 라는 믿기 어려운 말을 해서 비판한 것이 아니라 흥수가 탄현에서 신라군을 막아야하는 전략에 대해 비판한 것으로 대신들도 탄현(침현)이 일 당 만의 요충지라는 것은 인정을 하였습니다. 이는 관산성 전투라는 실제 전투에서 전적에 대한 과장은 되었겠지만 상당한 전과가 있었고, 요충지로써 지형적인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백제와 신라의 관계 속에서 탄현이 국경지역으로 볼 때 국경 지역이라고 생각되는 보은, 옥천은 앞의 ‘보은, 청산 및 옥천의 전략적 가치(교통로)’에서 알아보았고 영동에서의 백제와 신라의 관계 설정 시기를 파악해 보면,
삼국사기에 영동의 처음 지명은 길동입니다. 삼국사기 본기 본문에는 영동관련 기록이 없습니다. 그래서 영동의 전설등에서 백제나 신라가 등장한 시기를 보니 각계2리 핏골과 어서실 전설이 가장 오래된 전설로 보이고, 관산성 전투 시 옥천의 대골 전설을 감안 김무력장군이 상주, 백화산(금돌산성), 영동, 옥천 대골로 진격한 것을 감안 시 영동 쪽은 554년 관산성 전투 이후 백제와 신라가 대립된 곳으로 보입니다.
경희대학교 중앙박물관 제132회 정기문화답사기에, ‘삼국시대가 되면서 영동지역은 어떤 국가에 편입되고 발전하였는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동부지역에서 신라의 고분으로 추정되는 다수의 고분군이 확인된 것을 보아 영동의 동부지역은 6세기 중엽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영동의 서부와 남서부 일대는 삼국통일 전후인 7세기 중엽에 이르러 완전히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주127) 로 기록되어 있어 고분등 유적면에서도 554년 이후 신라가 영동에서 진출한 것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501년 탄현에 목책을 세워 신라에 대비하였다고 하였을 때, 국경이라는 개념에서 탄현의 위치는 영동쪽은 제외되고 보은이나 옥천쪽으로 국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은 쪽에 탄현이 있다는 논문은 없고, 단지, 탄현이 보은∼옥천 방면일 것이라는 연구만 있는 점을 감안하여 국경의 개념으로 탄현을 옥천군쪽으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성주탁교수는 ‘백제 탄현소고’ 논문에서 ‘지내굉(池內宏)은 지금의 옥천-증약-세천-대전으로 통하는 길목에 있는 ‘마도령’(마달령(머들령)인데 지도12 1919년 오만분의일 지도에는 마도령이라 되어 있어, 지내굉이 마달령을 마도령이라 하여, 계속 마도령으로 언급 됨) 이라고 좀더 구체적인 지점을 제시하였고, 해방 이후 이병도, 지헌영, 이기백이 이 학설을 근거하여 모두 대전 동쪽의 식장산으로 탄현의 위치를 비정하고 있다.‘고 언급하였습니다.
서정석 교수도 ‘탄현에 대한 소고’ 논문에서 ‘다섯 째는 대전의 동쪽이라는 설이다. 먼저 지내굉(池內宏)은 충청남·북도의 도계에 해당되는 마도령(대동여지도의 원치)을 탄현으로 비정하였다. 그 후 이 주장은 이병도, 지헌영, 이기백, 이기동등에 받아들여지면서 학계의 통설로 자리 잡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의문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지만 당시의 교통로나 황산벌의 위치등을 고려해 볼 때 가장 타당성이 있는 견해가 아닌가 생각된다.’ 라 언급 하였습니다. 대체로 마달령을 탄현으로 보고 있습니다.
옥천쪽 향토사학자들은 옥천군 군북면 자모리에서 대전으로 향하는 고개 중 자무실 고개, 또는 장고개가 숯고개였을 가능성이 제기 되고 있는데 이 고개만 올라서면 대전 판암동으로 가는 길이 넓고 완만하게 형성되어 많은 군사들이 움직이기에도 알맞다는 것이다. 또 마을 뒤 식장산 줄기에서 발견된 쇠정골산성은 자모리에서 대전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감시하는 성터 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숯고개(탄현)의 한 후보지는 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주128)
또한 군서면 오동리와 군북면 자모리(갯골) 사이 식장산 중허리에 숯고개(탄현)가 있다. 이곳은 옛날에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로서, 군사상 요충지였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의자왕 때의 이야기로 삼국사기의 내용으로 채워짐> 이 곳이 바로 군북면에서 보면 숯고개(탄현이요, 군서면에서 보면 침현(沈峴: 지금의 잼길실)이다. 오랜 옛날의 통로는 어떠했는지 지금의 도로사정으로는 짐작하기 어려우나, 삼국시대의 숯고개는 백제와 신라의 국경을 마주보는 유일한 통로였던 싶다. 문헌에도 우마조차 다니기 힘든 험로라고 적혀 있고, 지금도 오동리와 자모리 사이는 오솔길이다. 주129)
지도 11, 12을 참고하여 정리하여 보면 탄현으로 언급되는 곳은 마달령, 장고개, 그리고 숯고개 3곳으로 정리가 됩니다. 이 3곳 모두가 가르뱅이재 즉, 침현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 하나의 전쟁 작전이 이루어 질 수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탄현이 일 당 만의 요충지라는 측면에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도 12를 보게 되면 마달령은 고도는 약 180m이고, 지도에도 나타난 바와 같이 증약쪽의 옛길이 급경사입니다. 고개를 넘을 때 말이 지쳐 땀을 흘린다고하여 마달령(머들령)이라 한다고 합니다.
지도 13 대동여지도 지도를 보면서 마달령이 증약을 경유하는 것을 고려하면 원치는 환산 앞에서 분리되어 증약을 경유하지 않으므로 원치가 마달령이 될 수 없고, 식장산의 장고개(자무실고개)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증약의 역참을 지나면서 감로산쪽의 길로 형강, 청주쪽으로 빠지는 길임을 고려하면 이 길은 독골재로 넘어가는 길로 보입니다.
지도 13 옥천-대전쪽의 대동여지도
대동여지도에는 마달령 고개쪽으로 길 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한 대전과 옥천지역의 산성과 고개를 볼 때 주요 고개 옆에는 반드시 산성이 있었습니다. 독골재 양쪽으로 사현성과 백골산성이 있고, 숯고개 옆에는 할미산성과 할아비산성이 있고, 장고개 옆에는 쇠정골산성과 국사봉 보루가 있으며, 닭재 옆에는 계현성, 성치산성, 망덕봉 보루와 국사봉 보루가 있으며, 질현 옆에는 고봉산성과 질현성이 있고, 갈현 옆에는 갈현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금산쪽 마달령 옆에서 마달산성과 보루가 있는데, 옥천쪽 마달령에는 산성이 없고 좀 떨어져 마달령망루지(옥천군)이 있는데, 이는 옛날 마달령이라는 고개길은 있었으나 옆에 산성을 두어야 할 만큼 주요 고갯길은 아니였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마달령에 국경 개념의 탄현으로 책을 설치하고, 병력이 주둔할 만큼의 공간이 없고 주변 지형을 볼 때 일 당 만의 요충지로 보기 어렵습니다.
장고개(자무실고개, 원치) 고도가 약 300m이고, 지도 12를 보면 주변에 쇠정골산성과 국사봉 보루가 고개 양쪽의 봉우리에 있어 고개를 감시 및 통제하는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특히 지도에서 대전 삼정동 산성에서 관산성까지 직선을 그으면 장고개와 숯고개가 직선 범위 내에 있습니다. 이는 장고개가 자모리쪽에서 올라오는 고개 역할도 하지만 숯고개와 관련 옥천과 대전을 연결하는 고개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 고개를 감시하고 지킬 수 있는 쇠정골 산성과 국사봉 보루는 그 경사가 힘은 들어도 사람이 접근이 가능한 경사이며, 따라서 고개로써 중요한 역할은 하나 숯고개 만큼 요충지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숯고개(탄현)는 고도가 약 340m입니다. 고개 양쪽으로 할아비산성과 할미산성이 있습니다. 옥천군 군서면 망덕봉 보루에서 할미산성까지의 식장산의 산세가 옥천쪽에서는 상당히 급경사입니다 특히, 사진06과 같이 식장산 독수리봉에서 할미산성까지는 그 경사도가 더욱 심하고, 옥천 상중리쪽에서 접근이 어려워 자모리쪽에서 돌아올라갑니다.
사진 06 옥천상중리쪽에서 본 식장산 독수리봉에서 할미산성까지의 능성
사진 07 502고지 능선에서 본 할아비산성
사진08 숯고개(탄현)에서 본 할미산성
사진07과 08은 숯고개 양쪽의 할아비산성과 할미산성의 측면 사진으로 옥천쪽의 경사가 급하여 능선길과 숯고개길을 제외하고 사람들의 접근이 매우 어렵습니다. 삼국시대의 장비로 군대가 진군을 하여 산성에 접근하기는 거의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숯고개(탄현)는 고개길도 경사가 급해서 자모리, 갯골쪽은 고개의 폭이 넓어 갈지자로 흙길이 있었을 것 같은데 지금은 무너져 그 흔적만을 볼 수 있고, 오동리 무중골 쪽은 일반고개와 다르게 아래 사진과 같이 인공적으로 돌로 석축을 쌓아 길을 만든 고개이고, 군사들의 숙영을 했을 것 같은 숙영지의 흔적이 있습니다.
사진 09 석축으로 갈지자 고갯길을 만든 숯고개(탄현)
사진 10 석축으로 갈지자 고갯길을 만든 숯고개(탄현)
사진11 숙영지로 추정되는 곳
사진 09, 10, 11에서 볼 수 있듯이 숯고개(탄현)는 옛날 일반인들이 다니는 오솔길만이 아닌 식장산 능선으로 연결된 산성과 특히 할아비성 옆 석축을 고려할 때 백제가 필요해서 경사가 급한 고개를 인공적으로 보완한 고개입니다.
위덕왕이 처음 관산성 재점령을 위해 할아비산성까지 와서 작전을 지휘했을 때, 대전쪽의 백제군이 장고개를 넘어 이백리등에 배치되어겠지만, 이 곳 숯고개를 다시 넘어 무중골, 군전, 구진벼루등 관산성 공격을 위한 병력배치가 이루어진 중요한 고개로 보여집니다.
이 곳이 숯고개로 이름도 숯고개, 탄현이고, 501년부터 관산성(옥천)이 신라로 넘어갈 시 국경의 기준으로도 위치가 맞고, 관산성 전투 시 관산성 재점령을 위한 위덕왕의 작전의 중심지이고, 식장산의 능선 중 독수리봉에서 할미산성까지의 능성이 급경사임을 감안하면 현대적인 장비가 아닌 삼국시대의 장비로 산성 접근할 때, 일 당 만까지는 약간의 과장이 있다하더라도 이에 버금 갈 수 있고, 관산성 전투 시 항곡리, 황골쪽에서의 백제군의 승리가 후세 백제인에게 일 당 만이라고까지 충분히 언급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이 곳이 다시 660년 삼국사기에 신라군을 막는 곳으로 백제 조정에서 언급이 된 것은 관산성 전투 시 대승 한 경험이 있는 곳에서 다시 승리할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언급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4. 맺는말
관산성의 축성은 고구려 남진을 방어하고 신라와 교통을 유지하기 위해 486년 전후로 축성한 것으로 보았고, 대전지역의 많은 산성 축성의 기원을 고구려 남진에 따른 고구려와 백제간의 대립에서 산성 연구가 더 심도있게 연구가 진행길 바랍니다.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의 신라공격을 금강을 이용하여 공격한 것으로 보았고, 고립된 관산성에 상주로 탈출한 신라군의 경로를 볼 때 신라는 관산성 전투를 개기로 영동으로 진출한 것으로 보이고, 특히 백화산의 금돌산성이 부각이 됩니다.
660년 신라가 백제 공격한 길에 대하여 성주탁교수의 백제탄현고-김유신장군의 백제공격로 중심으로-에서 신라가 영동- 금산 -연산으로 백제 공격 경로를 심도있게 연구가 필요한데, 일단 김유신장군이 백제 공격 시 신라 무열왕이 금돌산성이 머물렀다는 기록과 관산성 전투시 김무력장군이 이미 상주에서 관산성(옥천 댓골)까지 큰길이 없는 곳으로 신라군을 성공적으로 침투시킨 바 있어, 그 손자인 김유신장군 역시 영동과 금산 그리고 연산(황상벌)까지 큰길이 없고, 성도 별로 없는 곳으로 침투해가는 것이 주변에 성으로 많고, 높이도 높은 탄현을 넘는 것보다 쉬웠을 것입니다.
탄현의 기록을 볼 때 백제는 관산성 재점령은 못했으나 탄현에서 신라를 이겼던 곳으로 생각을 하고 탄현에서 막자고 하였을 것이고, 반면 신라는 관산성 방어는 하였으나 전쟁의 상처가 큰 곳으로 생각을 하여 굳이 탄현을 넘으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관산성 전투를 개기로 백제와 신라 모두는 영동으로 진출을 한 것 같으며, 신라는 상주, 금돌산성, 영동, 관산성으로 연결되는 새로운 길이 만들어 영동과 옥천 통치를 한 것으로 보이고, 삼국관계에서 완전히 백제와 동등한 위치의 국가 위상을 확보하여 군사면에서 백제보다 더욱 진취적으로 나간 것 같습니다.
백제인들은 관산성 전투를 패배로 보지않았기 때문에 660년 탄현에서 신라를 막고자 하였고, 668년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편에 문무왕이 당나라 이적과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돌아오면서 한산주에 이르러 “옛날 백제의 명농왕이 고리산에서 우리 나라를 침략하려 했을 때, 유신의 조부 무력 각간이 장수가 되어 그들을 맞아 싸워 이겼으며, 승세를 타고 그 왕과 재상 네 명과 사졸들을 사로잡아 그들의 세력을 꺾었다.” 말한 이후 어느 누가 관산성 전투에 대해 탄현에서 신라가 패해(희생)가 컸다든가, 고구려가 도와주지 않았으며 관산성을 지키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을 못하고 문무왕이 언급한 내용으로 역사 기록을 유지했을 것이나 옥천과 대전 그리고 영동에서의 백성들의 구전으로 전해지는 전설과 지명 그리고 부분적인 역사적 기록에 의해 관산성 전투가 신라의 일방적인 승리가 아님을 확인하고 이후 백제사 연구에 반영이 되길 바랍니다.
주127) 구름도 자고 가고 바람도 쉬어 가는 추풍령 충북 영동, 경희대학교 중앙박물관 제132회 정기문화답사, 2017. 4. 22. 경희대학교 중앙박물관 3-4쪽
주128) 옥천의 마을 유래, 2008년, 옥천문화원, 166쪽
주129) 신라·백제격전지(관산성) 지표조사보고서, 2003, 옥천군, 충북대학교중원문화연구소, 68쪽
첫댓글 그간 올린 것을 하나의 파일로 정리했습니다. 왜곡된 백제사 중 관산성 전투가 바르게 인식이되고, 탄현 역시 탄현이라고 주장하는 논문이 국경의 개념이 아닌 660년 신라군이 백제 공격로로 추정하여 쓰인 논문이 많아 탄현이라고 주장하는 곳이 너무 많습니다. 국경의 개념으로 정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간에 글에 대한 댓글이 거의 없으니 관산성 전투에 대한 관심이 없는지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