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을 보기 위하여 높이 지은 누 다락집. 망대(望臺)와 같은 말.
장대는 전투시 지휘가 용이한 지점에 축조한 장수의 지휘처소를 말한다. 장대는 성내의 지형 중 가장 높고 지휘와 관측이 용이 한 곳에 설치하였으며, 성이 넓어 한 곳의 장대에서 지휘할 수 없는 경우 각 방면에다 장대를 마련하였다. 장대는 전투시에는 지휘소인 반면 평상시에는 성의 관리와 행정기능도 수행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성의 장대는 규모가 크지 않은 단층 형식이 대부분이나 남한산성이나 수원 화성의 경우처럼 중층누각 형태의 장대도 있다.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 각 방면에 각각 하나씩 4개의 장대와 봉암성에 외동장대를 설치하여 5개의 장대가 있었다. 그런데 17세기 말경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영남대박물관 소장의「남한산성도」를 보면 당시에 동장대, 북장대, 서장대, 남장대에 각각 단층누각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외동장대는 누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8세기 중엽에 제작된 「해동지도」에는 각 장대의 위치만 표기되어 있을 뿐 누각은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5장대의 누각이 모두 붕괴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영조 27년(1751) 부윤 이기진이 서장대에 무망루(無忘樓)를 건립하고, 정조 12년(1788) 부윤 이태영이 남장대에 타운루(唾雲樓)를 건립하였다는『남한지』의 기록내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9세기 초.중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소장의 「남한산성도」에는 서장대와 남장대만이 이층누각 형태의 건물이 있을 뿐, 북장대와 동장대 그리고 외동장대는 터만 남아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은 1872년에 제작된 규장각 소장의 「광주부도」에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남한산성에 구축된 5장대 중 외동장대를 제외한 4장대는 17세기 말엽까지는 단층누각 건물이 있었으나,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5장대 모두 건물은 무너지고 터만 남아 있게 되었다. 18세기 중.후반에는 서장대와 남장대가 2층누각 형태로 건립되어 19세기 후반까지 남아 있었으며, 그중 서장대인 수어장대만이 지금까지 남아 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동장대는 남한산성의 동북쪽 모서리 부분의 해발 501m 지점에 위치한다. 이곳은 서쪽에서 뻗어나온 줄기가 망월봉을 이루며 갈라져 한줄기는 남쪽으로 내려가고 다른 한줄기는 동북쪽으로 이어져 법화봉을 이루고 있다. 동장대 부근은 여주목사(좌부별장)가, 그리고 외동장대는 죽산부사(후영장)가 각각 군사 1,991인, 2,608인을 지휘하여 방어책임을 맡았던 곳이다. 동장대는 원성의 동북쪽 모서리 부분이며, 해발 501m 망월봉 정상에 위치한다. 이곳은 현재 터만 남아 있으며 축대를 쌓아 동-서 21m, 남북 17m에 동쪽 변의 축대 높이는 350cm이고 장대의 면적은 357㎡이다. 이곳에는 전돌과 와편이 산재되어 있으며 지상에는 4개의 초석이 남북방향으로 노출되어 있다.
동장대에는 인조 2년(1624) 산성수축시 동장대가 설치되고 누각이 함께 건축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1750년대에 제작된 「海東地圖」이후의 지도에 보면 장대의 누각이 나타나지 않고 터만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18세기 초에 누각이 무너지고 난 이후 다시 누각을 건립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북장대는 북문에서 서북쪽으로 245m 거리의 해발 405m 지점에 위치한다. 이곳은 연주봉 쪽에서 내려온 능선이 봉우리를 이룬 곳으로서 정상부에는 비교적 넓은 평탄지가 조성되어 있고, 석축단이나 담장 시설로 보이는 축대가 일부 노출되어 있으나 전체적인 규모나 구조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상태이다. 이곳은 남한산성의 수어청 중 중영장인 양주목사의 信地로서 병사 2,608명이 배치되었다. 북장대는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수축시에 단층의 누각이 함께 지어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영남대학교소장 「남한지도」를 보면 17세기 후반까지도 남아있던 이 장대는 그후 18세기 초에 붕괴되어 18세기 중엽의 「해동지도」이후부터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것으로 보아 1700년대 초에 붕괴된 이후 다시 수축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비교적 후기까지 남아있었던 남장대의 경우에는 초석까지 원위치에 잘 남아 있으나 북장대는 그 터조차 찾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상태가 심한 것도 이러한 상황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서장대는 남한산성의 대표적인 장대로 서쪽 주봉인 청량산 지상에 세워져 있는 이 건물은 지휘 및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어진 누각이다. 성내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게 지어진 누각과 건물의 왼쪽에 사당인 청량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어장대 뒤편에는 우물이 나란히 2개가 있어 장대에 근무하는 장졸에게 음료수를 공급하였다. 이 건물은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축성 때 단층누각으로 지어 서장대라 불리던 것을 영조 27년(1751) 유수 이기진이 왕명으로 이층누각으로 증축하였다. 남한산성의 수어는 처음에 총융청이 맡았으나 성이 준공되자 수어청을 따로 열어 전담하게 하였다. 수어청에는 전/후/좌/우/중의 5영이 소속되는데 전영장은 남장대에 , 중영장은 북장대에, 후영장과 좌영장은 동장대에, 우영장은 서장대에 배치되어 소속된 군인을 지휘하였다. 인조 14년(1636) 1월 18일에는 산성에 들어온 인조가 성을 순찰하다가 서장대에 이르러 장사들을 격려하고 행궁으로 돌아 갔다는 기록이 보인다.
『南漢誌』에는 광주유수 이기진이 쓴 다음과 같은 「수어장대기문」이 기록되어 있다. "그 서쪽으로는 평야가 연결되어 바로 한강으로 닿으니 오랑캐가 일찍이 진을 치고 대장기를 세웠던 곳이다. 비록 한강의 흐름을 기울여도 당일의 비린내는 씻지 못할 것이다. 동으로 하나의 봉우리가 있어 可汗이라고 이름한다.......슬프다. 터와 묘가 슬픔을 일으키고 종묘가 공경을 일으킴은 천리의 양심이라 그 환경을 따라 말없이 느끼며 유연히 생기나니 진실로 그 서연(黎然)과 유연(油然)의 발단을 인하여 확대한다면 인과 예의 실을 못다 쓸 것이다. 이 대에 오르고도 그 감개하고 탄식하지 않을 자가 있을까. 누구나 이것을 말미암아 더욱 충성의 의를 힘쓴다면 이 장대에서 웃는 것이 어찌 홀로 부하나 사열하고 형세나 찾고 말리오.만약에 혹시라도 풍경이나 구경하고 유람이나 탐하면서 다시는 감개하고 탄식하는 마음이 없다고 하면 이는 이른바 그 양심을 잃은 자 일 것이다. 후인에게 경계하며 또 고하노라."
수어장대는 하층 정면5칸, 측면3칸, 상층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양식 2층 누각이다 . 지붕은 상하층 모두 겹처마를 둘렀으며 사래 끝에는 토수를 달고 추녀마루에는 용두를 올렸으며 용마루에는 취두를 올렸다. 건물의 기둥은 높이 60cm의 팔각장주초석 위에 올려져있고, 포는 주심포 양식의 이출목익공식이다. 1층의 사방 1칸은 복도로 비워두고 정면3칸, 측면2칸만을 장마루를 깔고 사방에 높이 45cm의 난간을 둘렀다. 이층은 1층 우측 뒷켠에 있는 사다리를 통하여 올라갈 수 있도록 하였다. 2층은 무망루라 하는데 1836년 유수 박기룡이 증축한 것이다. 2층은 정면3칸, 측면2칸의 사방에 판문을 달았으며, 판문에는 태극무늬를 그렸다. 천정양식은 연등천정을 하였다. 남장대는 남한산성의 남쪽 2남옹성 바로 안쪽에 있는 장대이다.
장대란 성을 지키기 위하여 장수가 군사를 지휘하는 곳으로서 남한산성에는 동장대(내,외), 서장대, 남장대, 북장대의 5개소가 있었으나 현재까지 남아있는 장대는 서장대 하나 뿐이다. 남한산성을 축조한 후 성안에 수어청을 두었는데, 수어청에는 前.中.後.左.右의 5營이 있었고, 남장대는 후영장(혹은 전영장인 광주판관)이 배치되어 이곳에서 군사들 2,608인을 지휘하였다. 각 장대(5개)와 성안의 각 사찰은「신지(信地)」라 하여 성을 책임지고 지키는 관할구역을 정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