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7일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부활 체험이 없으면 용서의 능력도 없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용서의 능력’입니다.
용서는 내가 죽는 일입니다.
자발적으로 죽을 수 있는 경우는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농부가 열매의 기쁨을 상상하지 않으며 농사의 고통을 이겨나갈 수 있을까요?
마리아 고레띠 성녀는 자기를 무자비하게 찌른 사람에 대해 “저는 그 사람을 용서할 뿐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천국에서 살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천국에 대한 희망 없이 나의 생명을 앗아가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녀의 어머니도 그 사람을 용서했는데
“내 딸이 용서했으니, 나도 자네를 용서하네.”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에게 딸은 천국에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고정원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일가족을 살해한 유영철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었을까요?
부활에 대한 희망 때문입니다.
그분은 자기 아내가 천국에 있는데 자신이 용서하지 못해 지옥 가면 아내를 영영 만나지 못할까 봐 용서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부활에 대한 희망 때문에 용서가 가능한 것이지, 유영철이 사랑스러워서 용서하는 게 아닙니다.
이런 면에서 부활에 대한 믿음은 용서의 능력과 하나입니다.
어떤 형이 나라에 큰 공을 세워서 임금으로부터 사면장을 들고 사형 선고를 받아 갇혀 있는 동생을 찾아왔습니다.
혹시 풀려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형의 말에 동생은 먼저 판사를 죽이고 그다음엔 자신을 신고한 이를 찾아가 죽일 것이라 말합니다.
형은 동생을 사면할 수 없어 나오면서 사면장을 찢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용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 결정적인 시기가 부활하신 당신을 만나고 믿게 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하는 권한이 인간에게 주어졌음을 보이시기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중풍 병자를 치유하고 용서하실 때 사람들은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태 2,7)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실 수 없다고 믿고 개신교도 그래서 가톨릭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왜냐하면 용서한다는 것은 나를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는 것이기에 죽어야 마땅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요한 5,18 참조).
용서를 위해 목숨을 걸려면 부활에 대한 확신이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당신을 보여주시며 동시에,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는 성령의 힘을 주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라고 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파견하실 때 당신이 보내셨다는 증거로 ‘지팡이’ 안에 힘을 넣어주셨던 것과 같습니다.
조선 시대 임금이 암행어사를 파견할 때 마패를 주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이때 빠진 사도가 한 명 있었습니다. 바로 ‘토마스’ 사도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사도들에게는 성령과 함께 성령을 통한 죄를 용서할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때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만약 토마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않고 다른 제자들처럼 죄사함의 권한이 주어졌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요?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죄사함을 위해 목숨을 걸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도 이미 용서하는 권한이 주어졌음을 부활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토마스 사도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 각자도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죄를 용서하는 예식을 통해 이 많은 사람이 오직 하느님에게만 있는 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보고 교회가 그리스도 부활의 믿음을 간직하고 있다고 여겨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보지 않고 믿는 법입니다.
사제들이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개혁 사명을 믿지 않자 성녀도 혼란에 빠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나는 이 은혜가 하느님에게서 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온 세상과 맞서 싸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자서전』, 25,19)라고 말합니다.
교회도 온 세상이 아무리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교회는 죄를 사해주는 권한에 조금도 물러섬이 없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지금도 바라보고 있는 가장 완전한 증거가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4월7일 [부활 제2주일]
복음: 요한 20,19-31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부족하고 비참한 오늘 우리의 일상 안에 현존하십니다!
오랜만에 손맛도 보고 꽃구경도 할 겸 남도 쪽으로 공동체 엠마오 소풍을 갔습니다.
뭐가 그렇게 먼지? 몇 시간을 달려도 목적지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숙소에 여장을 풀고 여기저기 나들이를 다녔지만, 봄비에, 황사에 제대로 된 꽃구경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닌가 보다 하는 마음에 꽃구경을 포기하고 그럴싸한 포인트를 찾아 낚싯대를 드리웠습니다.
남쪽으로 많이 내려왔으니, 수온도 괜찮고, 물때도 좋아, 폭풍 입질을 기대했습니다.
결과는? 꽝이었습니다.
하루 온종일 여기도 가보고 저기도 가보고, 쉼 없이 자리를 옮겨 다녔지만, 그 어떤 생명체를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삼박사일 간의 고된 여정을 마무리 짓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에 딱 도착했더니, 목련꽃이며 수선화며, 산수유며, 여기저기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해서 천국이 따로 없었습니다.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에 혹시나 해서 자주 가는 집 근처 단골 포인트로 밤낚시를 갔었는데, 결과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간의 아쉬움을 달래주는 폭풍 입질이 계속되었습니다.
후두둑 하는 입질과 함께 선상 낚시급 우럭들이 올라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저는 마음속으로 다짐했습니다.
앞으로 엠마오 소풍 절대 멀리 가지 않겠다.
우리 집이 천국이고, 우리 집에 포인트고, 우리 집이 꽃길인데, 가기는 어딜 간단 말인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하느님 나라는 너무나 가까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천국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공동체가 엠마오 길의 제자들처럼 부활 예수님을 만나뵙기 위해 멀리 엠마오 소풍을 갔었지만, 제대도 된 꽃구경도, 제대로 된 손맛도 못보고, 제대로 주님도 만나뵙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우리가 갈구하던 주님은 바로 우리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우리 마을 안에 계셨습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어느 다른 하늘에 존재하시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때로 부족하고 비참한 오늘 우리의 일상 안에 현존하십니다.
티격태격하는 우리들의 인간관계 안에 현존하십니다.
이번 주말도 많은 피정객들이 저희 집을 찾아주셨습니다.
한팀이 나가고 나니, 바로 또 한팀이 들어왔습니다.
형제들이 다들 바빴습니다.
청소하고 빨래하고, 침실 셋팅하고, 회떠오고, 치킨 사오고, 강의하고, 불지피고...정신없이 하루가 또 지났습니다.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찾기 힘들었던 부활 예수님께서 저희를 찾아오신 형제 자매들 안에 떡하니 현존해 계셨습니다.
오늘 우리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굳건히 현존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발견하고, 선포하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2주일 강론>
(2024. 4. 7.)(요한 20,19-31)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 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4-29)”
1) 토마스 사도의 이야기는, ‘보지 않고도 믿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록한 이야기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현대인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인물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1)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을 만났다는 동료 사도들의 말 자체는 믿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정말로 살아 계시는 예수님을 만난 것인지, 아니면 단체로 어떤 환시 같은 것을 체험한 것은 아닌지, 그것을 의심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다는 사도들의 증언을 믿지 못하고, ‘집단 환시 체험’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 토마스 사도는 동료 사도들이 만났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그 예수님인지, 아니면 어떤 영적인 존재를 만난 것은 아닌지, 그것을 의심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해서 사도들이 무서워했던 일이
루카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루카 24,37).
그렇기 때문에 토마스 사도의 의심은 근거가 있는 의심이고, 토마스 사도만 탓할 것은 아닙니다.>
2) 예수님의 상처 자국을 직접 확인하고 싶다는 토마스 사도의 말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예수님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다는 뜻이고, 또 정말로 살아 계신 분인지를 확인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결코 믿지 못하겠소.” 라는 말의 표현만 보면, 토마스 사도가 믿기를 강하게 거부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을, “나도 당신들처럼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
나도 예수님께서 정말로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다는 것을 믿고 싶다.” 라고 자신의 희망을 강하게 표현한 말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라는 토마스 사도의 말이 있습니다(요한 11,16).
토마스 사도는 열정적인(뜨거운) 사람이었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충성심도 대단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토마스 사도를 위해서 직접 나타나신 것은, 그의 강한 희망에 대한 응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신 것은 토마스 사도를 꾸짖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도들의 증언은 진실이다.” 라고 보증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토마스 사도 한 사람만을 위한 보증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보증입니다.>
4)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토마스 사도의 신앙고백입니다.
이 신앙고백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신앙은 그리스도교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복음서 저자가 토마스 사도의 이야기를 기록한 첫 번째 목적은, 바로 이 신앙고백을 기록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은 하느님”이라고 믿는 종교입니다.
이 신앙이 없다면, 우리는 그 종파를 이단이라고 부릅니다.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을 하느님이라고 최초로 고백한 인물로서, 우리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5) 당시에 사도들은 토마스라는 동료 하나를 믿게 만들지도 못할 정도로 증언에 힘이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랬는데 오순절 날에는 한 번의 설교로, 무려 삼천 명에게 세례를 줄 정도로(사도 2,41)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그 변화는 ‘성령의 은사’를 받았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신앙을 증언하는 일은, 나의 지식만으로는,
또 나의 경험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개인의 지식과 경험만으로는 아무런 힘도 없다는 뜻입니다.)
신앙의 증언은 성령께서 도와주셔야만 하는 일입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20).”
신앙인은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을 받고, 견진을 받을 때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받은 그만큼 변화되었는가?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영적인 힘을 가진 신앙인으로 변화되어 있는가?
그것은 각자 스스로 판단해야 할 문제입니다.
‘변화’는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스스로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첫 번째로 해야 하는 노력은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고서 저절로 변화되는 일은 없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