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4년 전 행운의 여신이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때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행운에도, 불운에도 결코 눈 멀지 않기로. 두 눈을 부릅뜨고 위험을 지켜보는 힘을 기른 덕에 그는 지금 누구보다 빛나게 웃고 있다. /뉴욕=제프리 젤르밴스키 프리랜서 사진기자
세계 1위 자산운용사 '블랙록' 래리 핑크 회장 인터뷰
"리스크 관리, 모두가 행복한 시절에 더 절실하게 해야"
한국 GDP의 3.5배가 넘는 3800조원 움직이는 남자…
24년 전 1억달러 손실 경험이 리스크 관리의 엄중함 가르쳐
'블랙록(BlackRock)'을 아는가? 그럼 '래리 핑크(Larry Fink)'라는 이름은?록그룹의 리더 싱어 이름이 아니다. 미국의 자산운용회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은 한국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월가를 벗어난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금융인이었다.
위키피디아에서 '래리 핑크'를 치면, 풀네임 'Laurence D. Fink'가 화면에 뜨면서 블랙록 회장 겸 CEO라는 소개가 나온다. 그 밑에 학력이 달랑 두 줄, 경력도 고작 여섯 줄, 가족 관계 딱 한 줄, 다 합쳐서 그에 대한 인물 소개는 10줄을 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사나이를 두고, 지금 미국 언론들은 '커튼 뒤의 금융 제왕(帝王)' '가장 영향력 있는 금융맨'이라고 추켜세운다. 심지어 CNN은 래리 핑크 회장에 대한 기사에서 "이 사나이가 월스트리트를 구할 수 있을까"라고 제목을 붙였다.
미국발 금융위기는 월가의 금융 지도를 완전히 바꿔 버렸다. 베어스턴스, 리먼 브러더스 등 전통을 자랑하던 금융회사들이 간판을 내렸고, 유수한 금융회사들이 줄줄이 정부의 구제금융에 손을 내밀었다. 그 소용돌이의 와중에 1988년 뉴욕 맨해튼의 작은 사무실에서 출발한 블랙록은 엄청난 진가(眞價)를 발휘하며 세계 1위의 자산운용사로 등극했다.
- ▲ 뉴욕에 있는 블랙록 본사 건물. /뉴욕=제프리 젤르밴스키 프리랜서 사진기자
2009년 말 현재 세계 금융시장에서 블랙록이 굴리는 운용자산(asset under management)은 무려 3조3460억달러(3800조원·2009년말 현재). 대한민국 전체 경제규모(2008년 GDP 9291억달러)의 3.5배도 넘는 어마어마한 돈이다.
어떤 '형님 금융회사'도 등에 업지 않은 독립 자산운용사가 불과 20여년 만에 세계 3위(2008년 기준)까지 발돋움한 것만 해도 놀라운 성공 스토리였는데, 지난해 그 역사를 다시 고쳐 썼다. 자신보다 덩치가 큰 업계 1위의 '바클레이즈 글로벌 인베스터스(BGI·영국계 금융회사 바클레이즈의 자산운용부문)'를 인수, 운용자산이 3조달러도 넘는 초대형 자산운용사가 되면서 2위와의 간격을 엄청나게 벌려놓은 것이다.
그런데 블랙록이 직접 굴리는 돈 말고도, 이 회사와 인연 있는 돈이 세계 금융시장에 더 있다. 전 세계 100개도 넘는 기업, 보험사, 연금 등 기관투자가들이 이 회사가 개발한 이른바 '블랙록 솔루션'이라는 투자·위험관리 시스템을 구입해 이 방식대로 돈을 굴리는데, 그것까지 따지면 9조달러(1경(京)원)에 달한다.
게다가 미국발 금융위기는 핑크 회장을 월가에서 핵심 중의 핵심 인물로 만들어 놓았다. 전임 헨리 폴슨 재무부 장관, 현재의 티머시 가이트너 미국 재무부 장관은 말할 것도 없고 유수의 금융회사 CEO들까지 수시로 핑크 회장에 전화를 걸어 조언을 구하고 도움을 청한 것이다. 블룸버그는 "만약 값을 매기기 어려운 부실 자산이 있으면 핑크 회장한테 전화를 걸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 ▲ 1988년 작은 사무실에서 출 발해 작년 말로 세계 1위의 자산운용사가 된 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은“33년 사회생활을 했고 그중 22년은 블랙록과 더불어 살아왔다”면서“블랙록이 곧 나의 삶”이라고 말했다. /뉴욕=제프리 젤르밴스키 프리랜서 사진기자
블랙록은 구제금융을 받은 미국의 양대 모기지기관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의 모기지 관련 분석에도 관여했고, 미국 연준과 재무부가 사들인 1300억달러 상당의 베어스턴스와 AIG 부실 자산도 관리하고 있다. IMF 외환위기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공기업인 자산관리공사가 부실 자산을 처리했는데, 지금 미국에서는 민간 기업인 블랙록이 그 역할을 대신하는 셈이다.
창업 22년 만에 회사를 세계 1위로 키우고, 미국발 금융위기의 수습 과정에도 깊숙이 개입해온 이 '커튼 뒤의 월가 제왕'을, 이달 초 블랙록 뉴욕 본사에서 Weekly BIZ가 인터뷰했다. 블랙록의 본사 회장실은 뉴욕 맨해튼의 이스트 52번가 40번지에 있었다. 길 건너편 55번지에도 '블랙록'이라고 회사 로고가 붙은 검은 고층 건물이 있었다. 예전 본사 건물인데 그 공간이 비좁아 더 넓은 곳을 찾아 직원들이 두 건물에 나뉘어 일하고 있었다.
인터뷰는 7층 회장실 옆에 붙은 회의실에서 진행됐다. 벽에는 삼성전자의 대형 벽걸이 TV가 걸려 있고, 커다란 회의용 탁자가 놓여있는 단출한 방이었다. 1m 88㎝의 큰 키에 무테 안경을 낀, 조금은 차가워보이는 인상의 핑크 회장이 들어섰다.
―누구든 가장 궁금해할 것이 블랙록의 초고속 성장 비결일 것입니다. 우선 다른 금융회사들이 휘청대는 와중에도 블랙록은 타격을 덜 입고, 오히려 커진 비결이 한마디로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우리의 비즈니스 모델 덕분입니다. 우리는 다른 금융회사들처럼 자기 돈에 차입금까지 끌어들여 자기 계정으로 투자하는 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히 고객 돈만 굴려주고 그 대가를 받는 업무(client business)만 해왔기 때문에 고객 입장에 서서 시장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와 인터뷰하는 동안 수십번도 넘게 등장한 단어가 있다. 그건 바로 '리스크 관리(risk management)'였다. 블랙록은 월가의 다른 금융회사들과는 태생부터가 달랐다. 원래 핑크 회장은 채권 트레이더 출신이었다. 오늘의 블랙록은 그가 젊은 시절 겪었던 '뼈아픈 실패'에서 탄생했다. 위기 속에 빛나는 오늘의 성공은 바로 그 '과거의 실패'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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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은 30년 전에 MBS(mortgage-backed security·주택담보부증권) 시장을 개척한 선구자다. 30년 후 금융위기가 불거지고 패자가 속출한 이 시장에서, 그가 또 다른 승자의 스토리를 쓰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24년 전, 호되게 매를 먼저 맞은 덕분이다.
그는 첫 직장으로 입사한 퍼스트 보스턴에서 채권 트레이더로 일할 당시 솔로먼 브러더스의 루이스 레이니어리와 열띤 경쟁을 벌이며 MBS 시장을 키워나갔다. 만 28세에 최연소 임원이 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1986년 2분기에 그가 이끌던 팀이 1억달러의 손실을 냈다. 금리가 오를 것으로 예상했는데, 금리가 내리는 바람에 막대한 손실을 낸 것이다.
■큰 손해를 보니 사람들의 눈매가 달라졌다
―그 실패를 통해 얻은 교훈이 무엇이었나요?
"돈을 잃고 나서 생각해보니, 왜 돈을 잃었는지는 말할 것도 없고, 내가 그 전해에, 그리고 전 분기에 왜 그렇게 큰돈을 벌었는지 역시 모르고 있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좋은 시절에도 늘 '리스크'를 알고 이해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지요.
큰 손실을 보고 나니 갑자기 사람들이 나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우리가 돈을 벌 때는 모두가 행복해했는데, 실패하고 나니 더이상 존중해 주지 않았어요. 회사를 떠나야겠다고 결심했지만, 무얼 해야 할지 몰랐어요. 내 인생의 다음 장(章)을 어떻게 넘길까를 결정하는 데 18개월이 걸렸어요. 결국 투자업을 하기로 결정했지만, 무엇보다 '리스크 관리'에 역점을 두어야겠다고 그때 결심한 것입니다."
1988년 그는 투자회사 블랙스톤 그룹(Blackstone Group) 안에 작은 금융회사를 차렸다. 블랙스톤은 이 회사 지분을 갖는 조건으로, 사무실과 전화를 마련해주고 500만달러의 신용 라인을 열어줬다. 창업 연도는 1988년으로 되어 있지만, 당시엔 '블랙록'이라는 회사 이름도 없었다.
―이름도 무척 중요한 것 같습니다. 블랙스톤 그룹 안에서 출발했는데, 정말로 돌(블랙스톤)보다 바위(블랙록)가 훨씬 더 커져 버렸어요. (블랙스톤 그룹은 현재 세계 최대의 사모펀드 회사로 꼽힌다.) 누가 그 이름을 지었습니까?
"내가 지었어요. 1992년의 일이죠. 그런데 블랙록이라는 이름이 블랙스톤과 너무 비슷하다고 해서 블랙스톤측에서 쓰지 말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내가 블랙스톤의 피터 피터슨 회장을 설득했습니다. JP모건과 모건스탠리처럼, 블랙록이 블랙스톤에서 왔다는 걸 보여주는 이름이라고 설득해 허락을 받아낸 겁니다."
―블랙록이 '리스크 관리'를 강점으로 내세우지만, 사실 모든 금융회사가 '리스크 관리' 시스템을 갖고 있지 않나요. 그렇다면 블랙록의 차별화된 강점이 무엇인가요?
"우리는 22년 전 회사문을 열 때부터 직원의 25%가 '리스크 관리'와 관련된 일을 했습니다. 이런 회사가 없어요. 그리고 우리는 '리스크 관리'와 관련해 전 세계에 하나로 통합된 시스템을 구축했어요. 그 시스템이 우리로 하여금 리스크가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방향타 역할을 해주었고, 덕분에 문제를 최소화할 수 있었지요. 이번 위기 중에도 고객의 돈을 꽤 성공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던 것이 그 덕분입니다."
■리스크 관리가 위험을 피하라는 것은 아니다
―물론 위기 때 리스크 관리가 중요하다는 건 알겠지만, 지나치게 리스크 걱정만 하다가는 호(好)시절에 고객들이 기대하는 높은 수익을 내지 못하는 것 아닌가요?
"(이때 그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사람들이 종종 혼돈하는데, '리스크 관리'가 곧 위험을 회피하거나(risk avoidance) '무(無) 위험(risk-free)'을 추구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리스크 관리'란 어디까지나 내가 안고 있는 위험을 제대로 이해하고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적절히 비용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다면 위험은 그에 상응하는 수익을 올려줍니다. 전 세계 증시가 상승세를 탄 작년 3월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당시 리스크를 감수했다면 상당한 수익률을 올렸을 것입니다."
핑크 회장 앞에서 '리스크'라는 단어를 꺼내면 얘기가 끝도 없을 듯싶었다. "위기 때 리스크 관리가 위력을 발휘한다는 데 동의한다"고 하자 그는 대번에 "위기가 아닐 때, 모두가 행복한 시절에 리스크 관리는 더더욱 중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또 "금융회사뿐 아니라 일반 회사에도 전부 해당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리스크 관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좋은 시절이든, 나쁜 시절이든 항상 지속적이고, 일관되게 리스크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툴(tool·수단)'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필요조건은 그 수단을 사용하는 '문화'가 갖춰져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설사 리스크 관리의 툴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이 툴을 사용하는 문화를 갖고 있지 않다면, 리스크 관리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많은 기업이 이 중요한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놓치고 있지요."
■10년 만에 주가 16배 상승
회사는 '블랙록'이란 이름을 단 뒤 블랙스톤 그룹에서 분리되어 나왔다. 순조롭게 성장했지만,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기존에 시장을 지배하던 대형 투자회사에 비하면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핑크 회장은 2000년대 후반 들어 과감한 M&A 전략을 구사하면서 회사를 급성장시키는 경영 수완을 발휘했다. 2006년엔 자신보다 덩치가 더 큰 메릴린치 자산운용 부문 MLIM(Merrill Lynch Investment Managers)을 인수, 순식간에 운용자산이 1조달러를 넘으면서 세계 자산운용업계에서 10위권에 발을 들였다.
이어 글로벌 금융위기로 대형 투자은행들이 줄줄이 비틀대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지난해엔 영국계 금융회사 바클레이즈의 자산운용 부문이면서 글로벌 1위이던 BGI(Barclays Global In vestors)를 인수했다. 그래서 '운용자산 3조달러'가 넘는 세계 1위의 초대형 자산운용사로 순식간에 탈바꿈했다.
―합병을 통해 블랙록은 어떤 시너지 효과를 얻었나요?.
"메릴린치 자산운용 부문을 인수해 좀 더 균형잡힌 포트폴리오를 갖추게 됐습니다. 예전엔 주로 기관투자가가 고객이었는데, 그 뒤로 소매영업 부문이 보강됐고, 채권 중심의 투자 자산에 주식 비중이 좀 더 늘어나 균형을 이루었어요."
―그렇다면 지난해 바클레이즈의 자산운용 부문을 인수한 것은?
"BGI는 우리 회사 역사상 가장 큰 거래였습니다. 우리는 액티브 투자(벤치마킹 지수보다 높은 수익률을 올리는 것)에 강한 반면, BGI는 패시브 투자(벤치마킹 지수만큼의 수익률을 올리면서 거래 비용을 최소화하는 것)에서 강점을 지닌 회사입니다. 또 BGI 인수로 ETF(상장지수펀드) 시장을 주도하던 자회사 아이쉐어즈(iShares)까지 인수하게 돼 날로 커지는 ETF 시장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됐지요."
블랙록의 성장사를 쉽게 표현하면, '전문점'으로 실력을 쌓은 뒤 모자란 부분을 보완할 배필을 잘 골라 결혼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은 금융상품의 구색을 골고루 갖춘 '대형 백화점'이 됐다. 1999년 상장 당시 주당 14달러이던 주가는 25일 현재 225달러가 됐다. 11년 만에 주가가 16배가 된 것이다.
이런 활약으로 블랙록은 2008년 투자전문지 배런스가 선정한 '세계 500대 기업' 가운데 1위를 차지했고, 핑크 회장은 2007년과 2008년 배런스가 선정한 '세계 최고 CEO 30인'에 꼽혔다.
그와의 인터뷰는 몇 달을 기다린 끝에 성사됐다. 일정이 워낙 바빴다. 그는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고, 일주일에 사흘은 오전 6시에서 6시15분 사이에, 나머지 이틀은 7시에 출근한다"고 했다. "잠이 부족하지 않으냐"고 했더니 테이블에 놓인 스타벅스 커피를 가리키면서 "그래서 내겐 이게 필요하다"고 껄껄 웃었다.
그의 블랙베리폰은 쉴새 없이 울려대기로 유명하다.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때 재무부 장관 등 고위 관료들과 다른 금융회사 CEO들이 그의 조언을 받기 위해 계속 전화를 걸었다.
"요즘도 그렇게 전화를 많이 받는가"라고 물었더니 그는 "그렇다. 아, 근데 오늘은 아직까지 한 통도 안 왔네" 하고 웃으며 받아넘겼다.
인터뷰에 배석한 블랙록 직원의 말에 따르면, 차를 타고 이동할 때도 끊임없이 전화가 걸려오고, 또 그가 전화를 건다고 한다.
해외 출장을 자주 다니는 핑크 회장은 여러 나라 지폐를 뒤섞은 돈뭉치를 평소에도 늘 갖고 다닌다. 양복 바지주머니에서 꺼내 보였는데, "행운을 가져다준다"면서 지갑에도 넣지 않은 상태로 지니고 다녀 돈이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그 '행운의 돈'을 보면서, 단 한 번의 실패를 딛고 22년간 로켓처럼 솟아오른 그의 성공이 어디까지 뻗어나갈지 궁금해졌다.
◆래리 핑크 회장은 누구인가
2009년 12월로 세계 1위 자산운용사가 된 블랙록의 창업자이자 최고 경영자. 1952년생. LA 외곽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구두 가게를 운영하는 평범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공립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UCLA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뒤 UCLA의 앤더슨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첫 직장인 퍼스트 보스턴에서 채권 트레이더로 승승장구했지만, 큰 투자 실패를 경험한다. 그리고 회사를 떠나 1988년에 블랙록을 창업했다.
음악과 와인을 좋아한다. 미국의 유명 록밴드 마룬파이브(Maroon 5)를 낳은 옥톤 레코드(현재는 A&M/옥톤)사 설립 당시 공동 투자하기도 했다. "음악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고교 시절부터 사귄 두 살 연하의 아내와 결혼해 세 자녀를 두었다. 장남 조슈아는 헤지펀드를 운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