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길 朴昇吉(1893~ 1960)】 "왕칭현 신민단군 사령관 겸 참모장, 봉오동전투 "
1893년 2월 2일 함경북도 온성군(穩城郡) 영와면(永瓦面) 송북리(松北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호는 철마(鐵馬)이다. 이명으로 박덕수(朴德洙)·박재근(朴才根) 등이 있다. 왕칭현(汪淸縣) 대한신민단군 사령관으로 국내진공작전과 봉오동전투에 참여하였다.
1919년 만주 왕칭현으로 망명하였다. 국내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호응하여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만세운동 이후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된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에 참여하였다. 김규면(金圭冕)을 단장으로 하는 대한신민단은 왕칭현과 훈춘현(琿春縣)에 지부를 설치하였다. 본부와 지부 이외에도 만주·러시아·국내에 40여 개 지구 조직을 만들고 2만여 명의 단원이 참여하고 있었다. 신민단은 조선인의 생활 양상, 독립사상의 고취, 독립 전쟁 등의 독립운동을 진행하였다.
독립 전쟁 준비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왕칭현 신민단 지부는 왕칭현 춘화향(春華鄕) 초모정자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김준근(金準根)을 중심으로 2개 대대로 구성된 왕칭현 신민단군의 사령관 겸 참모장을 담당하였다. 대한신민단의 병력은 500명 정도이며, 왕칭현 신민단군은 약 2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1919년 5월 27일 간도와 함경북도 지방에서 모은 군자금 2,500원을 가지고 러시아에 들어가 김규면과 함께 무기를 구입하고 병력을 모집하여 왕칭현 신민단 지부군을 강화했으며, 모연대(募捐隊)도 조직하여 함경북도 지역과 간도 지역에서 군자금을 수집하여 300여 명의 군인을 모집하였다. 1919년 (음)12월 2차로 다시 러시아에 들어가 무기를 구입하여 왕칭현 신민단 지부군을 완전 무장시켰다. 일본군 정보에 따르면 1920년 8월 10일 현재 소총 약 160정, 권총 약 50정, 폭탄 3상자, 망원경 3개, 소총탄은 1정에 약 200발씩으로 무장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920년 명월구(明月溝) 이청림李(靑林)에 사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 양성에도 노력하였다.
1920년 대한신민단군 국내진공작전을 지휘하였다. 1920년 5월 부하들을 데리고 함경북도 온성 지역으로 진입하였다. 이때 두만강 반대편에서 일본군 제19사단 병력이 강을 건너는 신민단군을 발견하고 사격을 실시하였다. 퇴각하여 일본군을 유인해 강을 건너는 일본군을 집중 사격하여 섬멸하였다. 같은 해 6월 4일 새벽 30명 가량의 부하들을 데리고 함북 종성군(鍾城郡) 강양동(江陽洞)으로 진입하였다. 일본군 헌병 순찰소대를 격파하고 두만강을 건너서 귀환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일본군 남양수비대(南陽守備隊)는 두만강을 넘어서 1개 중대 병력과 헌병 경찰 중대를 파견해 독립군을 추격하였다. 독립군은 삼둔자(三屯子)에서 기습 공격으로 일본군을 물리쳤다. 삼둔자 전투는 중국 영토로 진입한 일본군을 오히려 독립군이 물리친 사건으로 일본군은 큰 충격에 빠지게 되었다.
일본군은 간도의 독립군을 공격하기 위해서 대규모 부대를 편성하여 두만강을 건너 봉오동(鳳梧洞)으로 이동하였다. 일본군의 이동 소식을 듣고 홍범도(洪範圖) 등과 전략을 협의하고, 1920년 6월 7일 봉오동 동쪽 체코봉 고지에 진을 치고 기다리다가 일본군을 습격하여 승리하였다. 이 전투에서 신민단군 소속 문회길(文會吉) 등 5명이 전사하였다. 같은 해 대전자(大甸子) 무관학교를 정비하여 독립군 육성에 노력하였다.
1920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안정근(安定根)의 제안으로 북간도 일대 독립군 단체들이 연합하여 북로사령부(北路司令部)를 설립하였다. 이때 김창순(金昌順)과 함께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대표로 참석하였다. 1928년 11월 동녕현(東寧縣)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군에 붙잡혔지만 탈출에 성공하였다.
광복 이후 부산에서 여생을 보내면서 『간도 독립군 약사』를 저술하였지만 출간하지는 못하였으며, 기억에 의존하여 그린 ‘봉오동전투도’가 부록으로 첨부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