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한국사회를 위한 학술아젠다1: 공교육 정상화
삶의 균형 기획하는 '교육자' 확보 제안한다
홍윤기
우리의 교육은 불균형의 연속이다. 공교육 붕괴, 학원 폭력, 학벌주의 등의 문제들은 죄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져있다. 경제적 불평등이 교육적 불평등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회적 통념은 경제 침체와 맞물려 사회적 상실감까지 낳고 있다. 더 이상 대안을 교육 안에서만 찾을 수 없다. 시선을 밖으로 돌려 사회적 가치와 제도, 합의 속에서 그 대안을 설정해야 한다. 한국사회에서 경쟁을 줄여나가는 방법을 모색하고, 그에 걸맞은 인재상을 설정해 본 것도 相生의 가치에 기반한 사회·교육 개혁을 구상해 보는 하나의 실험 과정이다. <편집자주>
1995년 5.31 교육개혁안이 제기된 이래 9년이 넘어가고 있다. 개혁의 긍정적 효력이 서서히 나타날 쯤도 됐는데 그동안 초중고등을 막론한 우리나라 교육 현장은 오히려 악화일로를 걸었다고 되어 있다. 사교육이 특목고 열풍을 매개로 드디어 중학교 창문을 깨트리더니 초등학교 교실을 지나 유아교육까지 확대되었다. 하지만 교육 최종점인 대학의 담장 밖으로는 유례없는 청년 실업이 기다린다.
경제 성장율이나 가계 소득 증가율은 한자리 걸음인데, 2000년을 기점으로 사교육비는 연간 40~50%씩 가파르게 수직상승하는 이변을 연출한다. 그리고 이 현상 바로 뒤에는 그것이 아무리 위기라 해도 학부모나 학생들에게는 결코 자기 일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폐허화된 공교육이 있다. 학생들에게 다가갈 의욕을 잃은 교사, 교사를 믿지 못하고 내 자식 졸업만 시키면 다시는 교문 들여다볼 일 없는 학부모, 교사에게 물어볼 것 없는 학생 등이 공교육 위기를 보여주는 징표들로 꼽힌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는가? 교육에 필요한 ‘객관적’ 여건들이 우리나라만큼 잘 구비된 나라도 드물다. 직장이 없으면 몸을 팔아서라도 아이만큼은 학원 공부 시켜 대학에 보내겠다는 부모들의 광적인 교육열, 사회복지예산을 4배나 능가하는 20조원의 공교육 예산과 14조원의 사교육 시장, 고등학교 졸업자 전원을 입학시켜도 남아도는 대학 등, 총량 측면에서 교육 수요는 넘쳐나고, 교육재화는 그 이상으로 공급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 특히 공교육에 대한 불만,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공교육에 대한 ‘불안’이 팽배해 있다. 극히 경제학적으로 그 불안의 핵심을 표현하면, 공교육으로는 각자가 기대하는 성과를 거둘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국가적으로 마련된 교육에 임하는 대부분의 피교육자나 그 보호자들이 현재 이 시점에서 교육으로 무엇을 이루고 싶어 하는지 모르는 이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학벌 사회라는 것을 전제로 더 좋은 학벌을 보장한다고 믿어지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의 몇 개 ‘상류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다. 최근 이 목표는 경제 여건의 급속한 악화로 대학교를 불문하고 즉각적 취업이나 고소득 취득에 유리한 법대, 경영대, 의대, 약대, 특히 한의대 등 ‘상류 학과’로 이동하는 국부적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나’의 인생을 위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사회적으로 남보다 더 유리한 상위의 조건을 교육 받는 중에 일찌감치 선점하겠다는 기본 동기는 전혀 변함이 없다. 즉 현재의 대학 서열은 미래의 인간 계급이다. 교육에 대한 이런 기대야말로 광복 이래 국가가 60년 동안 정권마다 제시해온 각종 이상적인 교육목표를 모두 무산시키고 휘드라처럼 뻗어가 범계층적으로 ‘합의를 모은’(?) 대한민국 교육 유일의 국민적 목표이다.
대한민국 국민의 뇌리에 철저하게 박혀진 ‘시험성적 → 상류대학(학과) → 학벌 → 상층 계급’이라는 이 단선적 입신 코스를 승자로서 이어가려는 경쟁이야말로 1년에 한번 있는 수능 시험일을 설과 추석에 버금가는 전국민적 행사로 만드는 저력이다. 그런데 이렇게 대학 문까지는 온 국가를 들썩이던 국민적 관심이 자기 자녀가 대학 가서 무엇을 배우는지에 관해서는 일체 알려고 들지 않는 것이 대학 차원에서 나타나는 한국 공교육의 최종 파행상이다. 2004년 2월 대한민국 교육부가 내놓은 이른바 사교육비 경감 대책들이란 것은 바로 이 단선적 입신 코스를 교육부가 사실상 승인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운데 사교육에 대해 공교육이 본격적인 경쟁을 선언했다는 점에서 공교육의 완패를 최종적으로 확증시켜 주었다.
대학 문턱을 넘어서면서 당연히 승자보다는 패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미래의 사회상이 미리 드러난다. 교육에서의 경쟁력을 새삼 내세울 것 없이 우리 교육은 이미 경쟁 과잉 상태이다. 그리고 이런 경쟁의 결과는 참으로 섬직한 인간적 황폐함으로 나타난다. 패자는 좌절감에 그 다음의 인생을 반쯤 포기하고, 승자는 이미 보장된 기대감에 도취하여 더 이상 공부를 하지 않는다. 대학에서 공부하라는 교수의 말은 남학생이 군에서 제대해 복학하거나 여학생이 취업에 눈뜨는 3학년까지는 절대 먹히지 않는 말 중에 하나이다. 대학의 경쟁력을 구현할 대학생의 학습의욕은 이미 입시준비 과정에서 대부분 소진되고, 대학은 중고등학교 시절에 응당 거쳤어야 했을 청소년기의 방황을 뒤늦게 만회하려는 혼돈의 연출장이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자문해야 한다.
첫째, 우리는 과연 우리 자식들에게 의미 있는 경쟁, 즉 그것을 이겨낸 다음 ‘각자에게 인간적 성장의 바탕이 마련’되는 그런 경쟁을 시키고 있는가?
둘째, 이 경쟁을 통해 우리가 획득하는 능력이 과연 이 사회와 국가의 발전, 나아가 지구 차원의 공존과 경쟁 국면에 지속적으로 도움이 되는 성격의 것인가?
순전히 물리적으로 파악하면 사교육의 확장이란 학습자 1인당 교육 시간이 엄청나게 늘어났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엄청나게 퍼부은 그 교육 시간 동안 우리의 자녀는 무엇을 하며 보내는가? 그 시간동안 우리 자녀의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이 지나가야 하는가? 참으로 애석하게도 우리는 현재 그 늘어난 교육 시간 동안 우리 자녀가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이 앞으로 어떤 인간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깊이 생각했다고 믿기 어렵다. 우리는 돈을 엄청나게 퍼부으면서도 정작 우리 자녀들에게 자신이 되고 싶어 하는 그 무엇인가를 철저하게 탐색할 시간을 주지 않고 선생, 그것도 사교육 강사의 첨단적 시험 기교에 중독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주변을 잘 둘러보라. 자기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자신이 없고, 그것을 중심으로 남과 주도적으로 연대하지 못하고, 다른 이의 인생과 존엄성을 존중하려고 해도 그럴 방법을 훈련받지 못한 우리 자녀들이 국제기관에서의 협상이나 세계시장에서의 흥정에 얼마나 능통하기를 바랄 수 있는가? 현재 이런 자기탐색, 인간탐색, 조직결성법, 그리고 자기 행위에 대한 기획력, 요약하자면 상생공존의 인성교육에 해당되는 것들은 모두 대학 나가 직장에서 단기간 연수를 통해 훈련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 이런 능력은 이미 대학 들어오기 전에 익혀져 있어야 한다.
지금 대학에 다양화와 특성화를 요구하는 소리가 높다. 그러나 이 세상에 다양한 자기 특징을 갖춘 여러 분야가 있다는 것을 사전에 모르는 우리 자녀들이 다양화하고 특성화된 대학들의 다양성과 특성을 인지할 리가 없다. 우리 자식들은 그저 각기 다른 서열의 다채로운 대학 이름만 볼 줄 안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 제발 우리 자녀들로 하여금 방황하고 타락해 보고 실패해 볼 시간을 갖게 하자. 그리고 얻어진 그 방황의 긴 자기 기록과 그들을 관심 깊게 지켜본 선생과 부모의 관찰기를 모두 묶은 자기 자서전을 들고 자신이 대학 가고 싶을 때 대학문을 들어오게 하자. 다시 말해 대학은 자기가 대학 갈 필요성이 있으며, 그 필요성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자각한 청년이 오게 해야 한다.
대학은 일년 내내 이 자기기록을 보고, 자기 청소년기의 마지막에 이제는 대학 가겠다고 찾아온 이 성숙할 인간에게, 마치 최후의 심판관처럼 굴 것이 아니라, 그의 다음 인생에 어디 있는 누구를 찾아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조언해 주는 상담자가 되게 하자. 이럴 때 필요하다면 그의 적성을 찾기 위해 적성검사형 텍스트는 실시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 결과는 한 번 매겨지면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주홍글씨 같은 ‘성적’(成績)이 아니라 그 자신도 수긍할 자신의 ‘적성’(敵性)이다. 따라서 공교육은 바로 교육 받는 자 자신에 대한 책임 있는 관심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점에서, 나는 현행 수능시험이나 그 대안으로 거론되는 자격시험 등의 모든 시험을 대학입학 희망자에 대한 적성검사와 희망성취도검사로 대체하자고 제안한다. 장래 너가 뭐가 될 수 있다고 말해 줄 수 없는 교육은 공교육이 아니다. 그렇게 너는 뭐다 라고 얘기할 수 있다면 ‘시험성적 → 상류대학(학과)’의 고리는 가장 근본적으로 끊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바로 이렇게 자신의 적성과 희망에 상응하는 자기실현의 장을 바로 대학에서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난맥상의 극을 보이는 대한민국 현행 대학 편제를 전면적으로 개편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우리나라 대학들은 크게 상류대와 중하류대, 수도권 대학과 지방대, 국공립대와 사립대 등의 3분 척도로 갈갈이 나뉘어진 상태에서 대학 교육의 온갖 낙후성을 각기 집중적으로 그 좁은 울타리 안에서 받아낸다. 그런데 단위 대학별로 나타나는 한국 대학 교육의 문제점들은 대부분 개별 대학 수준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열악한 사학 재정, 의사결정과 운영구조(governance)의 난맥상, 학과 단위 운영의 봉건성과 폐쇄성, 교수 자율성의 현격한 침체, 교육이나 연구에 집중되지 못하는 학사 운영의 산만성, 발전하는 외부 요구와의 불합치성 등등 그 어느 것 하나 우리나라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마련하는 데 도움 되는 것이 없다.
일차적으로 대학은 공부하는 곳이다. 무엇보다 이 시대 지구상에서 생성된 최고 수준의 지식들이 생산되고 전수되는 곳이 대학이다. 따라서 대학에 와서야 인성 교육을 하겠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대학은 최고의 전문성이 보장되는 지식 교육을 수행해야 한다. 따라서 대학에서 집중적인 교육과 연구가 이루어지려면 그것들 이외에는 할 일이 없게끔 우선 주변 환경부터 정돈되어야 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 나는 수도권의 모든 대학 학부과정을 지방으로 이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지방대 문제 해결) 동시에 대학들이 제공할 수 있는 전공 영역들 간의 네트워크를 통해 그것을 선택한 학생들이 최고의 교육을 실시간대로 공유할 수 있도록 하면서, 바로 이 전공을 중심으로 대학간 이동을 활성화시켜야 할 것이다.(전공 교육 중심 대학서열 타파) 그리고 이렇게 누구에게나 제공된 기회를 통해 획득한 자기 성취도에 대해 고등교육통일인증서를 발급해야 한다.(학벌인지구조 타파) 이렇게 되면 ‘상류대학→학벌’의 고리가 자연 봉쇄되면서 개인능력 제고를 중심으로 하는 대학간 경쟁이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학벌→상류계층’의 고리는 결코 교육으로 극복되지 않는다. 그것은 이 사회의 계급적 분열에 대한 정치적 대응과 경제적 개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교육에 너무 많은 짐을 지우면 안된다. 결국 우리 공교육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유아는 자기 생명 지키기, 초등교육은 다른 자기와 더불어 사는 법 익히기, 중등 교육은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기, 그리고 고등교육은 그런 자기를 발전시켜야 하는 것이다. 교육은 이런 학습자의 발전 단계에 따라 적기에 최선의 질의 교육을 베풀면서 피교육자의 다음 삶을 전체적으로 기획하는 데 책임을 지는 교육자를 확보해야 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 교육은 교육하는 자의 질과 책임감에서 그 성패가 좌우된다. 공교육은 교육자에 대한 교육을 포괄하는 개념이라야 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 진짜 국민의 인생 초기에서부터 가장 중요한 책임을 지는 것이 공교육이라면 거기에는 ‘더 많은 교육자’와 ‘교육자에 대한 더 많은 교육’이 확보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