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산에 관한 시모음 14)
겨울산 /조재훈
날은 저물고
이름 모를
어린 새 한 마리
겨울산을 넘는다.
가파른 벼랑
쉬지도 못하고
꺼이꺼이 울며
장군처럼 버티고 선
겨울산을 넘는다.
집집마다
꽁꽁 문은 잠기고
대추나무 끝에
찢겨져 연이 울 뿐.
어깻죽지로
간신히 어둠을 밀어내며
빚더미처럼 쌓인
겨울산을 넘는다.
이고 지고 빈손
사십 한평생
울다 간 울 엄니
해 다 진 겨울 저녁
뒤돌아보며, 뒤돌아보며
빈 겨울산을 홀로 넘는다.
겨울 산 /엄영란
숲을 따라 올라갑니다.
나뭇잎 흔들리던 소리가 나무 아래 쉬고 있습니다.
새가 앉았던 자리를 안고 나무는 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집을 버린 새들의 집이 텅 비어 있습니다.
허공을 맴돌던 새 한 마리가 허공 속으로 날아갑니다.
발아래 흙들이 스멀거리고 마른 풀잎이 수런거립니다.
바람이 붑니다.
산허리를 감고 문득 길이 꺾어집니다.
그 너머의 나무가 눈을 벗어납니다.
보이지 않는 길을 더듬어 가는 나의 밑바닥부터 숨이 차 오릅니다.
흐르는 물에 목을 축입니다.
가시가 무디어지지 않은 망개 넝쿨이
나무와 나무를 얼기설기 감고는 물기가 빠져나간 몸을 버티고 있습니다.
비탈길에서는 몸이 기우뚱거립니다.
썩지 못한 낙엽이 제멋대로 뒹굴다 멈추어 섭니다.
내 안에서 썩다 남은 것들이 소리를 냅니다.
다 내려놓은 것들은 제 자리에서 검어집니다.
나무들을 품고 겨울 산이 어두워집니다.
산 중턱에 걸린 하늘이 허물어집니다.
먼 곳으로부터 환하게 길이 돌아듭니다.
겨울 산에서 /류인순
날을 세운 칼바람에
야윈 몸 휘청이는
애처로운 잎새 하나
거센 눈보라에
어깨 마구 짓눌려
때때로 속울음 울지만
꿈꾸는 내일이 있어
칼바람 속에서도
묵묵히 버티고 있네
능선 때리던 매운바람
울다 지치는 날
명주바람 앞세우고
새벽이슬 밟으며
다시 올
연둣빛 봄 기다리며.
겨울산을 오르며 /김주안
눈이 내린 산길을 오른다
아직도 붉은 언어로 남아 있는 팥배나무
벼랑에 서서 가을을 채우던 다람쥐들
엄숙하던 삶들이 때때로
눈속에 갇혀있다
제대로 꼭대기까지 오른 적이 없는 산
오르다 힘들면 바위에 마음을 널어놓고
내가 걸어 온 길의 끝을 생각하며
흰눈을 누더기로 걸친 겨울나무의 삶과
숲을 따라 발자국을 남긴 새들을 궁금해 한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랑
겨울 숲을 따라 간 것은 아닐까
저 산모퉁이 돌면
보이지 않는 시간 찾아 갈 수 있을까
바람이 가는 길 물을 수 있을까
오를 수록 깊어지는 산길
질퍽거리는 발자국소리
너에게로 가는 길은 아직도 숨이 차다
겨울 雪山 /鞍山백원기
기나긴 밤 동짓날은
12월도 다 간다는 이야기
사람 사는 동네는 눈이 없는데
북한산 계곡엔 눈도 많구나
양지바른 곳엔 얼다 녹다
얼음 박인 산길이 미끄러워
스릴 있던 돌길도 싫증 나고
부드러운 흙길 부럽구나
방랑자도 아니면서
길가는 나그네도 아니면서
삼삼오오 떼 지어 걸어가는
오색 찬란한 무늬대열
거칠 것 없는 황야의 무법자
산객들은 줄지어 오르내리는데
오르다 멈춘 자리 지붕 바위 밑
자리 펴고 등 따습게 기댔더니
내 또래 꼬마들과
햇볕 쬐던 담벼락 생각나
햇볕에 바람에 녹다 얼다
하얗게 이불 덮고 잠든 산야
정월 입춘 돌아오면 졸린눈 비비고
새봄이 왔네 새봄이 왔다 소리치며
움 트고 꽃 피어 폴카 춤을 추겠지
겨울산 /가영심
존재를 이끄는 생각의 줄기를 따라
오솔길을 걸어올라 가면
산정 위 거기
홀로 계신 그 분을 바라봅니다
그 분의 은빛 어깨너머로
빛살은 눈부시고
눈부신 황홀함에
잠시 눈을 감아봅니다
빈 마음으로 나를 놓아두고
시간도 놓아둡니다
삶의 기쁨과 슬픔이
모두 산아래 있지만
품어주시는 인자하신 그 분의 사랑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심을 깨닫습니다
겨울산을 우러러 바라보면
따뜻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계신
언제나 그 분의 무한하신 사랑을 깨닫습니다
겨울, 설산에 들다 /박해성
잠든 척 모로 누운 근육질의 강골 사내
한 때 잉걸불이던 제 속내 다스리는지
하얗게 길을 지운다, 세속으로 이어지는
낮달 한 잎 물고 간 새 숨어든 구름 이고
시리게 언 뼈마디 짐승처럼 우는 나목裸木
살아 온 시간만큼이나 가지 친 시름에 겨워
왜 산을 오르는가, 허허실실 되묻는다
숫눈이 환할수록 눈 뜨고도 허방 짚어
느낌표 혹은 쉼표로 세상 다시 가늠할 때
함박눈이 2막 3장 합창처럼 쏟아진다
환청의 골이 깊은 이 황홀한 아수라도
정녕코 길을 잃었나, 아님 나를 잃은 걸까?
걸음 멈춰 돌아보면 움푹 팬 눈의 생살
놀뛰는 정맥인 듯 꿈틀, 길 하나 낳고
누군가 그 통점 따라 생을 반쯤 오른다
겨울 북한산 /허태기
파아란 하늘
알싸한 햇빛 쏟아져 내릴 때면
북한산의 웅크린 등줄기가
흰 구름 허리에 감고 기지개를 켠다
허공을 못질하듯
뾰족한 산꼭대기 바윗돌엔
힘찬 기운 뻗쳐오르고
듬성듬성 자리 잡은
소나무 숲이 봄풀처럼 싱싱하다
누가 황량한 겨울이라 했는가?
번다한 계절이 한바탕 휘젓고 간
텅 빈 자리에
비로소 산은 제 모습 드러내고
맑은 바람 함께 나목들의 군무가 시작된다.
겨울 산에서 /이해인
추억의 껍질 흩어진 겨울 산길에
촘촘히 들어앉은 은빛 바람이
피리 불고 있었네
새 소리 묻은 솔잎 향기 사이로
수없이 듣고 싶은 그대의 음성
얼굴은 아직 보이지 않았네
시린 두 손으로 햇볕을 끌어내려
새 봄의 속옷을 짜는
겨울의 지혜
찢어진 裸木(나목)의 가슴 한켠을
살짝 엿보다
무심코 잃어버린
오래 전의 나를 찾았네
겨울 산길 /윤무중
눈이 또 온다,
겨울이 성큼오더니
겨울답게 눈발이 날려
여기저기 눈이서린 낙엽만 나딍굴고
설경에 빠져 겨울 산길을 걷는다
나무들이 허기져 메마르고
발가벗은 속살을 에이는고통에 신음하고
음침한 산길을 추스리는데
석양이 떠나면 기력이 쇄진하겠지
아직도 파란 잎이 남은
소나무 가지에 소복히 쌓인 눈
주변과 조화롭게 마지막 빛갈로 내밀고
겨울의 텅빈 기슭에서
두팔 벌려 기지개를 켠다
낙엽위에 떨어진 고독을 떨치고
힘차게 들판으로 달려나갈 채비를 한다
나가기 전 쇠진한 기력을 채워
쌓인 눈의 순수함을 챙겨볼까,
한겨울 산행. /황우 목사 백낙은(원)
삼한은 있는데 사온은 어디 가고
앙상한 나뭇가지에 칼바람이 스쳐
삭막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운 산야
낙엽들은 몸 둘 곳조차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인기척에 소스라친다.
그래도 아카시아 장수버섯,
느타리버섯, 목이버섯
조금씩 따가지고 내려오는데
딱따구리 나무 쪼는 소리가
한겨울 적막강산에 생기를 준다.
싸느랗기만 한 이 강산에도
언젠가 봄기운이 돌면
햇병아리 같은 새싹이 돋을 테고
동면하던 개구리 눈 비비고 일어나
화려한 꽃동산 만들어 주겠지···
겨울산 /신달자
문이라는 문은 다 닫고 드는 길도 모두 지워
희고 큰 보자기로 산을 한 뭉치 싸맨 것같이 보인다
설산의 위엄으로 빛나는 오대산의 신전 같은 백덕산
저 하얀 보자기를 산이 달랑 들고 갈 것인가
신비는 근접하기 어렵지만 문 없는 저 안에 누가 있을까
눈이 쌓여 벌써 며칠째 길이 단절된
너무 하얘 공포스러운 은빛 보자기 속을 기어오른다
반쯤 몸을 산에 내어 주다가 내친김에 온몸을
산속으로 밀어 넣는데 거기 날 받은 손이 있을 것인데
무슨 일로 의기투합해 한 덩어리가 된
억세게 끌어당겨 더욱 하나가 될 수밖에 없는
겨울 산 혹한 속엔 서로 앙칼진 포옹이라도 해야 하는 것인가
다 얼어붙어 너도 나도 없는
내 발자국 소리까지 끌어들여 얼음은 더 두꺼워지는데
시퍼렇게 날 선 바람이
베인 귀를 다시 베어 가고 납작 엎드렸는데
어느 곳이나 살아 있는 것은 정지되지 않아
더 깊은 결빙의 지역으로 올라가고 있는데
산이 더 꽉 조이며 땅속까지 울리고 과도한 침묵도 터져 폭죽소리를
내는 겨울산.
겨울 산 /이성복
1
그 뿔과 갑주의 등허리에 흰 눈 뒤집어쓰고
산은 쓰러져 있다 아무도 달랠 수 없고
위로할 수 없는 산, 제 굶주림과 성(性)과 광기를
못 이겨 헐떡거리는 산, 홀연히 눈보라 일면
꼭대기 레이더 기지 첨탑은 경련하는
짐승의 목덜미를 더 깊이 후벼팠다
2
지금 바라보는 먼 산에 눈이 쌓여 있다는 것
지금 바라보는 먼 산에 가지 못하리라는 것
굳이 못 갈 것도 없지만 끝내 못 가리라는 것
나 없이 눈은 녹고 나 없이 봄은 오리라는 것
슬퍼할 수 없는 것, 슬퍼할 수조차 없는 것
겨울 산에 가면 /나희덕
겨울 산에 가면 밑둥만 남은 채 눈을 맞는 나무들이 있다.
쌓인 눈을 손으로 헤쳐 내면
드러난 나이테가 나를 보고 있다.
들여다볼수록
비범하게 생긴 넓은 이마와
도타운 귀, 그 위로 오르는 외길이 보인다.
그새 쌓인 눈을 다시 쓸어내리면
거무스레 습기에 지친 손등이 있고 신열에 들뜬 입술 위로
물처럼 맑아진 눈물이 흐른다.
잘릴 때 쏟은 톱밥 가루는 지금도
마른 껍질 속에 흩어져
해산한 여인의 땀으로 맺혀 빛나고,
그 옆으로는 아직 나이테도 생기지 않은
꺾으면 문드러질 만큼 어린것들이
뿌리박힌 곳에서 자라고 있다.
도끼로 찍히고베이고 눈 속에 묻히더라도
고요히 남아서 기다리고 계신 어머니,
눈을 맞으며 산에 들면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바라보는
나이테가 있다.